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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지나간 일이지만, 한창 뭔가 끄적이고 싶어하던 시절, 한 자폐적인 성향의 남자에 대한 단편 미스터리소설을 쓰려고 한 적이 있었다. 기이한 체험에서 비롯한 그 소설적 아이디어는 머리속에서만 빙빙 돌뿐 끝내 문자로 실현되지 않았지만, 한 남자의 자폐성인 성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추적하는 미스터리를 쓰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꽤 오래전 한 이십년 전쯤, 친하게 지내던 선배의 결혼식에 갔었다. 그 때그 결혼식장에서 평범한 내 인생에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아주 기이하면서도 민망한 체험을 했다. 식이 끝나가족 친지 친구들과 함께 찍는 포토 타임때, 신부측 친구나 선후배 하객들이 우르르 단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사진을 찍으려고 자리를 잡는데, 신랑측 친구들이 올라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 순간 단 위에는 모두 여자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랑측 친구들이 단 한명도, 정말 단 한명도 없었다. 신부측 친구들이 신랑측 친구들 자리까지 차지할 정도로 많이 온 것에 반해, 신랑측은 단 한명의 친구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 순간, 놀라움과 민망함이 교차했다. 여자들만 있어 단 위로 못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싶어 주변을 둘러봐도 신랑측 하객중 친구로 보이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휴, 그 때의 그 민망함이란, 빨리 사진을 찍고 밥을 먹으로 가던 어찌하던지 간에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이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적인 장면이 스냅사진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단 한명의 친구도 가지고 있지 않는 남자에 대한 글을 쓰고 싶을 만큼 강렬한 충격이었다. 어떻게 살았길래 친구 한명 없을 수 있지! 개차반같은 인생을 살아도 적어도 절친이라고 부를 수 있는 친구 한명 정도는 있지 않나. 결혼 전에 신혼집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책이나 다른 물적 대상이 친구를 대신할 만큼의 취미생활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해서 많은 친구들과 교류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문득 그 때의 그 일을 떠올리면 그 선배가 여전히 남편이랑 잘 사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단 한명의 친구도 오지 않은 사람과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분명 장애라고 할 정도의 자폐는 아니지만, 타고난 천성으로 혹은 살아오면서 어떤 계기로 인해 사회적 폐쇄성이 강한 자존심 강한 사람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선배 결혼식 이후 누군가에게 그 선배가 아들 낳았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더 이상 그 선배랑 연락하지 않아 선배가 여전히 그 남자와 사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결혼 생활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아니 어쩌면 이런 모든 의미없는 추측은 억측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기에,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중년의 고독을 이야기했다는, 하루키의 이번 신작 소설을 읽으면서 문득 생각난 상황이 바로 저 결혼식날 아무도 오지 않았던 한 남자의 에피소드였다. 결혼식에 단 한명의 친구도 오지 않을 만큼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선배의 남편. 하루키의소설 캐릭터와 와 뭔가 닮은 듯한 느낌, 그게 뭘까? 곰곰히 생각하다가, <기노>라는 짧은 단편에서 어렴풋이 알아챘다. 하루키의 캐릭터들의 폐쇄성 그리고 외로움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 단 하루키의 소설 캐릭터들은 자발적인 자폐성향이 뜻하지 않게 모험속으로 빠져들며 그 모험의 과정에서 캐릭터의 내면이 외로움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닌 더 단단해지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말이다.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될 때부터 하루키 전작주의자는 아니지만 그의 대부분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를 확실하게 좋하하게 된 작품이 <렉싱턴의 유령>에 나왔던 고독 이라는 짧은 단편이었다. 고독이라는 설정이 그의 전체적인 작품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한 것도 모른 체, 그 짧은 단편은 나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남겼고 아마 그 작품 이후 그의 소설은 다 읽으려고 했던 것 같다(소설은 다 읽었지만, 에세이는 읽기를 미적거리는 작품도 많다).
작가(소설로 독자의 애정을 갈망하는)와 독자(팬으로서 작가의 글을 갈망하는)로서, 나는 왜 그를 좋아하는지 몰랐다. 그의 소설이 지난 과거의 제국주의 역사를 다루는 것도, 그렇다고 진지하게 사회 문제를 다루는 것도 아닌데, 왜 나는 그의 소설에 끌리고 끌렸을까? 모르고 읽었다. 개인적인 취향이 맞아서 일 수 도 있고 그의 세련된 글이 좋아서 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가 만들어내는 분위기와 느낌이 좋아서일 수도 있겠다. 그의 소설들을 읽으면 텅빈 공간의 뭔가 꽉 찬 정적인 느낌이 나는데, 나는 그 느낌, 태양이 내리쬐는 한 낮의 정적인 오후 느낌같은, 그 텅빈듯하면서도 꽉 찬 정적인 느낌을 좋아하고 그 텅빔의 혼자라는 강렬한 느낌이 좋았던 것이다.
그러다 이 단편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건 그가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고독한 캐릭터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오즈처럼 흥미진진한 모험과 어떻게 엮이고 주인공의 자아든 세계관이든 간에 그 모험이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가는 길의 지도를 읽으며 가는 과정에서 더 단단해지는 그 과정의 여정을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후쿠는 아내가 죽은 후 다른 사람과의 관계 맺기를 거부한다.
<예스터데이>의 기타루는 훌쩍 외국으로 떠나 여기저기 떠도는 듯하며
<독립기관>은 비록 사랑에 눈뜬 독신주의자인 도카이의 이야기이지만, 캐릭터에 대한 상상력이 가장 빈약했으며,
<세에라자드>는 자신이 짝사랑했던 한 남자의 비어 있는 집에 머무는 작은 모험을 강행하며,
이 단편집에서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던 <기노>는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살면서 모험을 떠나는 하루키 소설의 전형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다.
<기노>에 대한 기시감은 그의 소설이 대부분이 이런 이야기 구조(고독한 캐릭터가 모험의 여정을 떠나는 것)는 흔히 소설 구조의 전형(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이기도 하다. 사실 이런 오래된 이야기 구조는 식상할만도 한데(그래서 포스트모던을 지향하는 소설들이 나왔겠지만), 여전히 독자를 사로 잡는 이야기는 관습적인이고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거, 단지 하루키같은 소설가는 익숙한 이야기 구조를 완전히 자기내면화함으로써, 자신만의 캐릭터(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를 만들어 내고 자신만의 이야기(모험으로 뛰어드는)를 만들어 냈기에 새롭게 다가온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단편집에서 놀라웠던 건,이 노장 소설가가 여전히 젊은 감각의 소설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젊음이 샘물을 마시는 것처럼, 무엇이 그의 글쓰기를 이토록 젋게 만드는 것일까?
덧: 하루키의 <여자없는 남자들>의 제목은 1927년에 헤밍웨이가 발표한 <여자 없는 남자>라는 소설 제목에서 따온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