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님이 소개한 밀양송전탑 반대 관련기사를 읽으려 프레시안에 들어갔다가 프레시안 지면이 쏴그리 몽땅 다 바뀐 것을 보았다. 언제부터 바뀌었지는 모르겠지만, 전보다 더 복잡해졌다는 느낌이 화악~

 

프레시안에 들어가 제일 반가웠던 것은 북카테고리에 장대익 교수의 글이 메인화면에 떡하니 올려져 있다는 것. 오홋, 반가워라. 장대익교수 서울대로 가고부터 프레시안에 글 안 올려 신분상승했다고 쌩까구나 싶었는데, 간만에 글 올린 것 보니 반갑기는 하더라. 덥석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글 읽어보니 요즘 과학계의 이슈가 신경쪽과 진화라고 하던데, 나는 뇌쪽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몇 권 사서 읽어보다가 몇 장 넘기고 무슨 말인지 몰라 다 실패하고 나선 절대 안 읽는다) 그 쪽은 잘 모르겠고,

 

 

진화쪽 책은 도킨스나 윌슨 때문이라도 언제나 예의 주시한다. 이 책 또한 신간 서적 화면에 떳을 때 도킨스와 번역가가 김명주라 한 순간, 살까로  맘이 많이 흔들렸는데(정말 도킨스도 도킨스지만 김명주란 번역가 하나 믿고 사고 싶었을 정도니깐), 그 때 <블랙홀전쟁>과 저울질 하다가 <블랙홀 전쟁>을 먼저 샀다.

 

<블랙홀 전쟁>을 먼저 산 이유는 내가 알고 우주이론이 기껏해야 우주론 초반이나 중반여서 그러니깐 70년대 이전의 이론들이어서 2000년대 이후의 우주론은 어떤 이론이 주류를 이루고 움직이고 있는지 알고 싶었던 요인이 가장 컸다. 책표지에는 정말 쉽게 씌여진 우주론이라고 씌여있지만, 그건 뻥이고 아주 아주 띄엄띄엄 머리에 쥐가 안 날 정도로 읽고 있다.

 

 

여하튼,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고 하는가>의 장대익 교수의 리뷰를 읽어보니, 지금 당장 사고 싶어 안달난 것은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진화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무려 30%나 된다는 사실에 놀라서 뒤로 나자빠질 것 같은 ==;;  하긴 거긴 댓글 보니 아주 과간도 아님. 우리 조상을 원숭이로 모셔...이런 덧글 읽으려니깐, 속에서부터 깝깝. 인간은 원숭이에게 진화한 것이 아니라 한 종에서 원숭이와 인간으로 분화한 것이라고 말하면 알아 들을려나 싶은게. 하긴 나도 육칠년전에는 그런 종교적 프레임을 그대로 믿었으니깐. 뭐라 뭐라 할 말은 없다.

 

다윈의 자서전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 왔다>는 읽었지만, 좀 더 다윈을 그리고 진화를 알기 위해서는 언젠가 김명주가 번역한  다윈의 이천페이지가 넘는 저 평전을 꼭 읽어보리라. 제프 버클리의 <할레루야>의 기타소리와 함께.

 




 

 

 

 

 

집안 살림은 어질러진 꼴을 못 보는데

이상하게 책만은 저렇게 쌓아놓고 산다.

읽고 나서 한권 한권 제자리에 집어 넣으면

책산이 되지 않을텐데

집안 곳곳에 저런 책산이 몇 군데 된다.

 

처음엔 무턱대고 쌓여있는 책들이 보기 흉해보여

치웠더니

치운 그 자리가 허전지라

다시 책을 쌓아

책산이 내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래서 이제는 운치 좀 있으라고

책산에 저렇게 고양이를 두거나

인조화분을 올려 놓기도 한다.

 

한번 읽고 쌓아 놓고 있는 종이책이

버겁고 가여워 많은 책을 내다 팔기도 하고,

더 이상 종이책은 안 사려고 노력도 했지만,

 

누군가 이런 말을 했더라.

책 읽은 속도가 책 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이제 책은 내 팔자려니 하고 살기로 했다.

내 인생에서 돈은 안 따라줘도 책이 안 따라주었던 적은 없었던 듯.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쭈욱 꺼졌다 폈다하는 불씨처럼.

책은 내 인생의 은근한 열정같은 거였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솔직히 책보다 돈이 더 많이 따라주었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책보다 돈이 더 좋긴 하다. 하핫.

 

이런저런 리뷰나 페이퍼 보다가 고른 책들이 몇 권 눈에

띈다. 

 

 세이초옹에 무한 애정이라기보다는, 북스피어 출판사와 미미여사에 대한 애정이 더 커서 사는 ... 내가 워낙 알라딘보다 북스피어 홈피를 자주 들어가고 좋아해서, 거기 들어가서 댓글을 열심히 다는 사람은 아니지만, 북스피어 마포김사장의 우스개스러운 글빨에 북스피어에 대한 무한애정~ 

 

그렇다고 세이초옹의 작품이 별로라는 것은 아니고, 북스피어홈피 들어갔더니 제목부터 거창한 <르 찌라시>라는 쟝르문학소식지도 준다고 해서, 두 권의 값이 만만치 않지만 사야지 어쩌겠나. 모비딕의 책도 더불어. 빨리 읽고 리뷰나 페이페도 올려야지. 내 돈 내고 사고 홍보도 열심히 해 주어야 돈 좀 벌어 세이초옹의 다음작도 미야베 미유키 다음 작도 나오지. 출판사들 책로또나 맞았으면 좋겠다.

 

수십년된 세로줄책으로 있긴 한데,

다락방님 때문에 완전 사고 싶어졌다. 게다가 영문판도 준다고 하질않나.

진새삼촌님의 강력한 페이퍼의 유혹에도 안 넘어갔는데. 이럴 수가 ==;;

 

나비님 말씀대로 <노인과 바다>는 안소니 퀸 주연의 영화가 있다. 흑백영화였는데, 그 때 흑백TV로 봐서 칼라인지 아닌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난 흑백의 장면으로 드문드문 몇 장면이 기억이 남는다. 게다가 안소니 퀸만 전문으로 하는 성우의 굵은 목소리랑 오버랩 되어서. 누구더라. 양지운은 아닌데.

 

알라디너 된장님이 이번에 새로 낸 <뿌리 깊은 글쓰기>

처음엔 글쓰기 요령을 알려주는 책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검색해서 들어가 보니,

우리가 자주 쓰는 영어를 한글로 다시 쓸 수 있도록 쓰임새를 알려주는 책이다.

나는 되도록이면 영어를 쓰지 않긴 하지만, 나도 모르게 영어 쓸 때마다 된장님의 눈치를 좀 보게 될지도.

아이에게 한글의 뿌리나 쓰임새를 알려줄 수 있겠다 싶어 고른 책.

 

미국스릴러나 미스터리는 나랑 딱히 맞는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응 진짜 맞지 않는다. 마이클 코넬리 소설도 별로고, 딘 쿤츠도 그렇고, 할런 코벤도 별로고, 제프리 디버도 별로고 다들 작품 재밌다고 하는 스릴러 작가들 모두 읽어봐도 딱히 이 작가다 싶은 작가가 없는데, 제프 린제이는 그런대로 끌리는 작가다.  이 작가의 덱스터 라는 캐릭터가 워낙 괴상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

 

도킨스나 윌슨의 인간은 단지 DNA의 전달자일 뿐이라는, 인간 모두를 개개별로 보는 관점에서 보면 덱스터라는 캐릭터는 설득력을 가진다. 흔히 많은 자식들의 성격을 표현할 때 열 손가락 모두 다르다는 말들을 하는데, 사람을 집단적인 성향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고 개별적으로 봤을 때 악마적인 DNA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성선설, 성악설이라는 집단적인 성격이 아닌). 이 책은 괴상한 캐릭터뿐만 아니라 미드로 봤을 때도 덱스터의 독백부분이 상당히 매력적.

 

이 정도면 알라딘에서 주는 2월의 선물 카누 받을 수 있을려나~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는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사를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보았다. 과학사의 발전이 누적, 승계, 발전의 단계를 거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과학이론이 그 전에 과학판을 지배하던 이론들을 다 밀어버리고 새로 건설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기존의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건물을 깡그리 헐어버리고 새롭게 건물을 짓는다고 것.

 

예를 들어 케플러나 갈릴레오의 지구중심모델(지동설이 아니다. 아직도 설이라고 해야하나!)은 태양중심모델을 뒤엎었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뉴튼의 고전물리학 법칙을 뒤집었다. 한 때 천년 이상혹은 수백년 동인 세상을 지배했던 과학이념(패러다임)들이 실험이나 관찰에 의해 새로운 과학이론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쿤을 그것을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보았고, 패러다임이 변하면 그 패러다임에 맞는 과학 이론들이 속속히 등장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당시 많은 과학철학자들의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비판 또한 만만치 않았지만, 쿤의 전체적인 과학사를 꿰뚫어 보는 시각이, 남들이 눈치채지 못한 것을 캐치했다는 점에서 예리한 것만은 분명하다.

 

문득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를 읽고, 나꼼수를 들으면서 떠 오른 것이 바로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이 변하면 세상도 변한다,라는 말이었다. 그 말과 함께, 현재 한국의 기존 정치지형이 꿈틀대기 시작했고, 그 꿈틀거림은 한국 (정치)사회에 새로운 변화를 서서히 몰고 와 기존 정치를 완전히 뒤엎어 밀어버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리고 현재 움직이고 있는 패러다임의 중심에 김어준, 그가 있다고 말이다.

 

거대 정당, 지지 세력의 결집, 눈에 띄는 정치적 위상,  그 어느 제대로 된 정치성을 그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젊은 시절 딴지 일보를 들고 나와  조중동을 거침없이 찌라시화한 것뿐. 무엇 하나 그가 정치적이었다고 딱 부러지게 말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던 그가,

 

나꼼수를 하면서 정치적으로 변했다. 아니 나꼼수를 기획한 것부터가 그의 정치성은 결정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단지 그가 기존의 정치프로와는 다른 프레임을 가지고 나왔다는 것이다. 정재승교수가 한겨레에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저잣거리 서민들의 눈높이로 말이다. 그리고 그게 운이든 필연이든 그런 기획은 먹혀 들었다. 프레임이 잘 짜여졌다고 해야하나.

 

기존의 정치판이나 언론판에서 보여주는 있어 보이는 뭔가가 나꼼수나 김어준에겐 없다. 까불고 깔깔거리고 정신 없지만, 스튜디오의 골방에서는 현 정권의 권력의 부패와 비리를 이야기하고 부패 권력의 진실의 진상을 논리적으로 이야기한다. 대중은 분명 이 정권에 엄청난 더러운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아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머리 속에 정리되지 않고, 안다고 해도 속시원이 통쾌하게 까발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나꼼수는 시원한 부분을 끍어주면서, 대중의 호응도를 이끌어 내고 대중 정치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프레임속으로 제일야당의 대표위원이 나오고, 민주당 서울 시장 경선 때 젊은이들을 장충체육관으로 끌어들이고 민주통합당 대표 경선을 위해 후보들이 스튜디오에 출연해 자기의 출마변을 이야기했다. 할 정도이니, 실제 나꼼수의 대중정치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정치는 나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믿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대중정치의 힘이 무엇인지, 그리고 대중 정치의 정의가 최대권력을 어떻게 굴복시킬 수 있는지, 정치란 몇 몇의 권력자가 이끄는 것이 아닌 대중의 힘으로 세상(정치)을 움직여야 한다고 말이다.  

 

대중을 정치로 이끌어 내고 있고 서서히 대중정치로 이행하려는 패러다임을 그가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고 보는 것이 나만의 착각이고 오버일까. 물론 그럴 수 있겠다.

 

그러나, 그의 딴지 일보 창간이나 나꼼수의 팟캐스트 랭킹을 보면서, 그가 인터넷 혹은 모바일 매체의 속성을 잘 알거나 이용을 잘한다, 정도에서 평가할 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성공이 우연이든 운이 좋아서 그런 것이든, 가벼운 웃음 속에 가려진 권력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그의 불굴의 의지만은 높게 사고 싶다.

 

개인적으로 딴지 일보 창간되기 전까지만 해도 조중동의 해악에 대해 몰랐었다. 딴지나 오마이뉴스를 읽으면서 그들이 한국을 어떻게 움직이고 조정하는지, 권력의 분배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알 게 되었다.

 

사실 딴지나 오마이뉴스같은 매체가 등장하면서, 사람들의 의식 또한 많이 변화을 가져 왔다고 장담한다. 절대성에서 상대적으로 말이다. 패러다임의 등장은 결국 기존의 절대성이 무너지고 상대성이 자리 잡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조중동의 절대성을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김어준의 딴지 일보의 등장은 중요한 언론역사의 한부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진보라는 것도, 보수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가 그리고 나꼼수 멤버들이 해야할 일은 대중를 정치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그리고 참여할 수 있게금 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패러다임이 변하면 우리 정치도 그리고 우리의 세계도 변한다.

 

 




작년에 읽다가 포기했는데, 올해 천천히 다시 읽어보고 있다. 호킹의 글이 의외로 관념적이서 읽은데 여간 애를 먹는 게 아니다. 본인은 철학은 죽었다라고 썼지만, 그가 이 책에서 전달하는 물리학 역사에 대한 설명이 명확하고 명쾌하지 않다. 오히려 철학적이고 사유적 글쓰기라고 해야하나.

 

대대적으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광고한 것치고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조목조목 따지지는 않는다. 물리 자체가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이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전제가 깔려있을 뿐. 그러고보니, 칼 세이건의 <다양한 과학적 경험>도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광고했지만, 내가 읽어본 봐로는 핵무기에 대한 경고와 공포에 더 비중을 두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과학책을 읽은 방법중 무작위로 한 챕터씩 읽다가 나중에 다시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책의 내용을 통합하는 것인데, 이 책은 물리의 역사이므로 사실 한 챕터씩 읽기엔 무리가 있어 처음부터 순차적으로 읽고 있다. 문제는 제3장 양자역학에 가면 언제나 막힌다는 것. 거의 돌아버리겠다. 이해가 될듯 말듯 하면서도 무슨 말인지 통합적으로 정리하면 갈피를 본 잡겠다.

 

그래서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위대한 물리학자 4>라는 책을 들었는데, 이 책 첫챕터가 사고의 탐험가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양자역학이든 뭐든지 간에 현대 물리학은 아인슈타인에서 출발하니깐. 이제 상대성이론도 뉴튼처럼 고전물리학이 되었다하더라도.

 

이 책에서 아인슈타인을 사고의 탐험가라고 명명한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데, 물리학사를 통들어서 아인슈타인의 사고는 관념적이거나 추상에 그치는 사고가 아닌 상당히 실제적이고 실험적으로 접근 가능한 사유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아인슈타인에 관한 책을 읽은 것중에서 잊혀지지 않는 대목이 있는데, 그건 사이먼 싱이 16살의 아인슈타인을 묘사하는 한 대목이었다.

아인슈타인은 1896년 열여섯 살 때 거을을 앞에 들고 빛의 속도로 날아갈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사고실험을 했다. 그는 이 경우에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생각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이론으로는 우주는 움직이지 않는 에테르로 가득차 있다. 빛은 이 에테르의 으해 전달된다고 생각되었으므로 빛은 에테르이 대해서 빛의 속도(초속 30만 킬로미터)로 달리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사고 실험에서 그의 얼국과 그가 들고 있는 거울은 에테르이 대해서 빛의 속도로 달리고 있다.  빛은 아인슈타인의 얼굴을 떠나 손에 들고 있는 거울을 향해 달리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빛의 속도로 달리고 있기 때문에 이 빛은 얼굴을 떠날 수 없고 따라서 거울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빛이 거울에 도달할 없다면 거울에 반사될 수 없고 결국 아인슈타인도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서 볼 수 없을 것이다

 

한 천재 소년이 세상을 다 바꿀 사고 실험을 하는, 이 장면을 읽고 나서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겨우 16살에, 친구에 대한 고민, 학업성적에 대한 고민, 무엇보다도 한창 사춘기의 나이에 이런 사유를 하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전율을 느낄만큼 무섭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디까지가 인간 사유의 정점이고 끝일까,하고 말이다.

 

아인슈타인의 이 사유는 후에 그의 특수 상대서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을 낳는 원천이 되었고, 특수 상대성과 일반 상대성은 다른 실험과학자들에 의해 실험을 통해 증명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머리속에서 상상했던 것들이 실험으로 증명이 되고 세상을 과학적으로 진보시킬 수 있다는 것에, 한 인간의 능력에 전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오랜 동안 빨리 나오길 기대했던 신작이지만, 그렇게 인상적으로 읽지 않았다. 딱 그녀의 평균치 정도. 왠만큼 글을 쓰는 사람이라 후진 글을 쓴 것도 그렇다고 <모방범>이나 <이유>와 나란히 놓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라고 말하긴 어렵다(개인적인 관점에서 말한 것이다. 미미여사의 한국출판된 작품은 다 읽었기에 그녀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서 말한 것이다).

 

소설을 구성하는 큰 흐름의 임팩트한 사건은 없지만, 미야베 미유키가 말하는 결혼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해 볼 만 하다. 시부모와의 종교갈등으로 이혼한 첫번째 에피소드 고구레 사진관, 아버지와 친가에서 무시당하는 엄마의 자신감을 되찾아 주기 위해 5학년에 초등학교를 자퇴하고 대안학교에 다니는 세번째 에피소드 갈매기의 이름, 그리고 시어머니에게 손녀의 죽음으로 온갖 폭언을 들어야했던 하나짱의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는 철로의 봄 에피소드에서 공통점은 고부간의 갈등이다.

 

우리나라도 아닌 일본에서 소설의 소재로 고부갈등이라니. 의아했지만 사람사는 곳(혹은 문화)은 어디든 비슷한지, 서양인들도 장모와 사위의 우리 고부 갈등 못지 않게 서로 으르렁 댄다고  하지 않던가. 사람들 관계에서 갈등은 언제나 어디서든지 존재하게 마련인가 보다.

 

그렇담, 고부간의 갈등의 원인은 무엇일까?  겉보기엔 고부간의 二人 갈등처럼 보이지만 실상 남편이자 아들이 낀 삼각관계의 갈등이라고 보며, 고부간의 갈등의 주된 원인은 독립된 결혼생활을 꾸려내지 못하는 남자(혹은 남편)에게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혼 당시, 부모의 사종교문제에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가 시부모가 며느리에게 자신들의 종교를 믿을 것을 강요하면서 시부모와  아내가 종교로 갈등을 일으키자 자신의 부모와 합심해서 부인을 가족내 따 시키는 첫번째 에피소든의 남편과,  엄마가 조부모에게 여러모로 못마땅한 며느리라며 무시당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어머니 대신 반기를 드는 아들보다 못한 남편의 예에서처럼, 남편이 자신의 부모에게 정신적, 심리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하지 못한다면 그 가정은 흔들리게 되어 있다.

 

반면에 소설의 주인공 하나짱의 경우 아버지경우, 본가 어머니가 자신의 아내를 흔들자 가차 없이 본가와 인연을 끊고 자신이 독립된 가정을 이끌어 간다. 혹 어떻게 아들로써 본가의 인연을 끊을 수 있을까, 자식된 도리로 못 할 짓이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다 큰 아들 가정에 무모한 간섭을 일삼는 부모 또한 합리적인 사람들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부모라 할지라도.

 

동물은 새끼를 낳고 양육 기간을 거치면서 새끼가 독립할 수 있겠다 싶으면 새끼를 가차없이 내친다. 반면에 인간은 부모와 자식간에 평생동안 분리할 수 없는 자기장을 형성한다. 그 과정에서 결혼을 할 경우 부모와 자식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각각 부모가정과 자식 가정간의 독립을 원칙(경제적으로 심리적이든)으로, 자신의 가정을 제일순위로 정해야 하는 것이 가정을 지키는 길이다. 세월을 더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자식의 결정에 네가 뭘 아냐 식으로 자식은 부모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따라야한다는 사고 방식은 자식을 한 명의 다 큰 성인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

 

성인이란 자신이 하는 일에 책임과 의무를 다 할 수 있는 인격체이며 어떤 경우 혹은 상황에 이성적으로 사리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다하는 사람을 말한다. 자신의 자식을 성인으로, 독립적으로 대할 때 비로소 그 자식들은 자신의 가정을 꾸려나가고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가 묘사하는 가정은 부모와 자식간의 정에 연연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부모와 자식간의 애틋한 정은 아이가 어릴 때 그 순간에만 가능한 것이다. 아이가 청소년으로 그리고 성인으로 갈수록 그들의 삶을 독립적으로 이끌어 주어야하는 것이 부모로써의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