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서진 지음 / 엔트리(메가스터디북스)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세대 간 갈등은 그 어느 시절보다 심화되어 있는 것 같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진 않았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구세대와 많은 스펙을 갖췄음에도 기회 조차 얻기 힘든 현실을 살아가는 신세대의 입장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본인들의 경험담을 늘어놓으며 신세대들의 능력 부족으로 단정짓는 것도, 현 세태를 만든 구세대에 대한 비난을 서슴지 않는 것도 다 각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논리이다. 하지만 안정된 직장과 가정을 가지는 것을 한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만드는 기성 세대의 입장은 현 새대의 반감을 극대화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삶의 양식을 결정하는 개개인의 선택의 문제일 뿐 그것이 개인의 성실성과 책임감을 판단하는 잣대로 작용한다는 것이 매우 불합리적으로 보인다. 게다가 직장을 얻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인데 어느 세월에 결혼하고 아기까지 낳아서 잘 키워볼 생각을 하겠는가.

안정으로 가는 정해진 단계와 길을 따라 걸으며 본인의 나이에 걸맞는 사회적 위치에 도달할 것을 강요하는 요새 같은 풍토에서 보자면 이 책은 실패자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박사과정을 마치지 못 하고 중퇴, 토익 점수를 위해 떠난 어학연수도 아닌 도피성- 단순히 2년간 캘리포니아로 쉬러 갔다고- 미국행, 돌아와서 얻은 직장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디잡지 편집장, 최종적인 직업은 빈둥대는 글쟁이이자 소설가. 이것만 봐도 이 시대의 아웃사이더이자 루저 같아 보인다.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 한 채 매일 글을 끄적거리며 인생을 소요하는 것이 한심해 보일 수도 있다. 책을 읽기 전부터 예술가의 탈을 쓴 베짱이라고 색안경을 끼고 그를 바라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을 다 읽어본 결과 성공적인 위치에 도달해 있는 그 어떤 사람보다- 적어도 내가 만나본- 행복해 보이고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감이 묻어난다. 그럴싸 해보이게 가식적으로 쓰여진 느낌도 전혀 없다. 뽐내기 위함이 아닌 아주 담담하고 진솔하게 자신의 일상을 이야기 한다. 누군가의 소중한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는 것 같다. 소설가의 길을 걸으면서 굶어 죽지도 않고, 원할 때 몇 달씩 여행도 다니고, 피아노도 치면서. 비록 남들이 원치 않는 옥탑방에서 살고 있을지라도,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음악도 만들고 글도 쓰면서 지내면 남부러울 게 있을까. 나와는 다른 그의 삶이 부럽고 내가 하고 싶었던 그 일은 무엇이었는지 떠올려 보게 된다. 비록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일을 때려 치우고 자유인이 될만큼 나는 용기가 충만하진 않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배워 보고 그것을 일상의 낙이자 재미로 만든다면 평범한 내 삶에도 행복이 깃들 것 같다. 누군가 그러지 않았나,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게 되면 그 순간 재미가 반감된다고. 나도 글을 써보고 싶고 음악을 해보고 싶지만 그것은 취미 생활로 남겨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불안과 초조가 팽배해 있는 답답한 현실에서 이 책은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느낌이다. 조금은 마음 먹은대로, 하고 싶은대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자라난다. 어쨋든 최소한 굶어죽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문득 안정과 맞바꾸어 버린 자유의 달콤함이 그리워진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남들이 말하는 평평한 길이 아닌 울퉁불퉁한 길이 될지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걷는다면 나에게만 보이는 그런 보물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렇게 살면 보통의 워너비처럼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집과 차를 소유한 채 살기란 어렵지만 말이다. 자유의 대가로 그 쯤은 감수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을 하는 분들에겐 분명 힘이 되어줄 것이다.

단, 이 분의 글쓰기 실력을 과소평가 해서는 안 된다. 그에게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 왔기에 지금의 삶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뿅 하고 소설가가 된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게 오랜 시간 꾸준히 노력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일기 쓰던 시절에도 일기의 말미에 소설을 연재했고, 대학 시절 아침마다 글을 썼다고 한다. 공모전이나 작가로서의 삶을 기대하며 쓴 것이 아니었다. 그냥 소설이 좋고, 글 쓰는 일이 좋아 습관적으로 해왔던 것이다. 그 와중에 단편소설이 입상도 하고, 본인이 읽고 싶은 소설을 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온 것 같다. 역시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은 없다는 것, 그리고 꾸준함과 노력 없이 되는 일도 없다는 것! 그것을 간과하진 말아야 겠다.

소원을 이루는 나만의 비밀이 있다. 핵심은 비밀 유지와 반복이다. 남에게 소원을 이야기해버리면 그 바람은 공기 중에 희석되어버린다. 어떤 사람은 내 소원을 비웃기도 하고 헛된 것이라고 쉽게 말하기도 한다. 기가 꺾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남에게 말하지 않는다. (......) 다만 매일 밤 그것을 이루는 상상을 해야 한다. 한 달이고, 두 달이고, 1년이고...... 이룰 때까지 반복해야 한다. 그러면 나도 모르는 사이 바람이 이루어진다. -p. 17~18


우리는 실패를 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실패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실패의 조각들은 녹지 않고 몸에 차곡차곡 쌓이고 결국 그것들이 나를 만든다. 실패한 일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고, 무용담처럼 떠벌릴 필요도 없다. 다만 실패든 성공이든 또 다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 그러니 실패의 기억은 그냥 쓴 웃음으로 넘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것. -p. 26

누구는 취직해서 돈을 벌고 있고 누구는 벌써 결혼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학생인 채로 방바닥에 누워있다. 여기서 휴학이라고 해버리면 학생도 뭣도 아니게 되는데,그러면 딱히 갈 곳도 없다. 불러주는 곳은 더더욱 없다. 누구는 계속 자기 소속,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나는 계속 벗어나려고만 한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바퀴에서 툭, 혼자 떨어져 나왔다. 어른이 되었다기보다는 혼자가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홀가분하고 하고 어쩐지 쓸쓸하기도 했다. -p. 31~33

어떤 장래희망이든 자기가 진정 좋아해서 시작한다면, 꾸준히 한다면, 우리가 걱정하는 일들은 대부분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것이다. 어차피 세상의 기준에서 안전하다는 길도 따지고 보면 전혀 안전하지 않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일은 재능도 없고, 하기도 싫은 일을 안전하다는 이유로 하는 것이다. -p. 46

늘 하고 싶던 것은, 어느 순간 마법처럼 그걸 해볼 기회가 생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건 삶의 구멍이다. 조금만 손을 대도 뿅 하고 뚫어지는 구멍. 그게 많아야 숨을 쉴 수 있다. 그러면 마법은 그 구멍들 사이로 슬며시 들어오기 마련이다. -p. 80~81

오늘 고른 숙소가 매번 최고의 숙소가 될 수 없듯이 내가 쓰는 글이 매번 명작이 될 수는 없을 테니까. 숙소를 찾은 것도 찾을수록 노하우가 생기듯 글쓰기에도 실제 노하우가 더 중요한 것이다. 살아가는 방식도 비슷한 것 같다. 미리 내일을 걱정하기보다는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자. 고로 쓸데없는 걱정은 오늘부터 반품하고 싶다. 그것도 착불로. -p. 108

`소설을 어떻게 쓸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은 소설을 쓰기 싫다고 하는 말과 똑같다.` 소설가 모리 히로시가 한 말을 칠판에 적었다. (......) 소설을 쓰고 싶으면 어떻게든 쓰면 된다. 한글만 알면 누구나 소설을 쓸 수 있다. 작곡하고 싶으면 그냥하면 된다. 악보를 읽을 수 없어도 화성학을 몰라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인생을 살고 싶으면 그냥 살면 된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시도하고, 실패하고, 그걸 토대로 배우고 다시 시도하면 되는 것이다. -p. 144

사람들이 미친 짓이라고 혀를 찰 때, 묵묵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끝까지 하는 사람이 결국엔 성공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부럽다. -p.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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