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 중에서 유일하게 해피엔딩인 작품이다. 지금의 백화점과 크게 다르지 않은 130년 전 파리의 화려한 백화점 모습을 디테일하게 펼쳐놓았다. 백화점은 여성들을 위한 소비무대다. 대부분의 그 안을 채우는 물건들이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을 타깃으로 하고 있으며 판매 상품 뿐 아니라 그 외의 눈부신 내부 장식들도 여성들의 허영심을 자극한다. 여성학을 공부하기 전에는 이런 현상의 이유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저 의문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특히 맥시멀리스트인 어머니 덕분에 미니멀리스트가 된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현상을 경계하는 편이다. (올해 책 구매 기록 때문에 좀 많이 찔리지만..) 남성과 달리 주로 가정에 속한 여성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꾸미는 것과 가정을 가꾸는 방향으로 쏠릴 수 밖에 없었다. 지금보다 더욱 사회적 진출이 막힌 상황에 놓였던 여성들은 그런식으로 자신의 미적인 감각을 뽐내며 존재를 드러내고 때때로 억눌린 욕망과 슬픔을 일시적으로 해소할 수 있었다.
터키, 아라비아,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가 그곳에 모두 모여 있었다. 궁전을 모두 비워내고, 모스크와 바자르를 약탈이라도 해온 듯했다. 낡은 옛날 카펫들속에는 황갈색을 띤 금빛이 주된 색조를 이루고 있었고, 퇴색한 빛깔들은 불 꺼진 화덕의 잔해처럼 어두운 열기를 간직하고있었다. 나이 든 대가의 그림 속에서처럼 그윽하면서도 섬세한 느낌을 전해주는 색조들이었다. 태양과 해충의 나라에서 온 오래된 양털이 간직한 강렬한 내음이 너른 공간을 가득 메운 가운데, 야성적인 예술이 과시하는 화려함 뒤로 동양의 꿈들이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P153
부모님이 연이어 돌아가시고 어린 동생 둘을 떠안은 주인공 드니즈는 생존을 위해 파리에 상경한다. 하지만 그녀를 돌봐주기로 했던 큰아버지는 운영하는 실크매장 건너편에 생긴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때문에 사업이 위기를 맞은 상태로 이제 그녀를 도울 형편이 아니라고 말한다. 드니즈는 눈치가 보였지만 결국 큰아버지를 몰락시키고 있는 백화점에서 일을 하게 되고 판매원들간의 극심한 경쟁과 시기로 꾸준히 괴롭힘을 받게 된다. 프랑스의 제2제정기 철로의 확장과 함께 급속한 산업화를 상징한 백화점은 이 작품에서 사장 무레의 끝없는 욕구로 거대한 몸집을 더욱 키워나가며 주변 상권들을 거침없이 삼킨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고집과 거대 자본의 횡포로 경쟁에 밀린 소상공인들은 힘없이 짓밟히며 피를 흘린다. 이 괴물의 힘은 여인들의 끝없는 사치였고 무레는 이런 여성들의 심리를 꽤뚫어보고 있었다.
여성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무레의 우아한 몸짓 뒤에는 여성의 살을 파운드로 떼어 팔고자 하는 유대인 상인의잔인함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여성을 위해 신전을 세우고, 수많은 직원들로 하여금 여성을 위한 향을 피우게 함으로써 새로운 숭배 의식을 만들어냈다. 또한 자나 깨나 오직 여성만을 생각했으며, 끊임없이 더 효과적이고 강렬한 유혹의 방식을 생각해내기에 바빴다. P134 .
백화점의 연이은 공격적 마케팅으로 남의 가정이 파탄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 상인들을 오히려 백화점 확장의 걸림돌로만 여기던 무자비한 무레는 여성들과 방탕한 관계를 즐기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호감을 느끼게 된 드니즈가 그를 계속해서 거부하자 재능과 열정으로 부를 쓸어모으던 삶에 점차 회의를 느끼며 그녀를 향한 욕망만이 상대적으로 부풀어 오른다. 탐욕적인 백화점의 생리를 이어받아 서로를 물고 뜯는 백화점 내부의 판매 직원들간의 심화된 경쟁구도,외부의 쓰러져 가는 소상공인들의 모습을 통해 급속한 산업화와 자본주의에 휩쓸리는 나약한 인간들의 면면을 오늘날과 비교하며 생각해볼 수 있었다. 실제로 세계 최초의 백화점이었던 파리의 '봉 마르셰'를 모델로 쓰여진 이 소설에서 사람을 살리고 또 죽이는 사랑과 욕망의 상징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의 드니즈는 결국 선하고 순수한 마음을 굳건하게 지켜나가 최후의 승자가 된다. 단 한번 바람피우는 인간은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무레의 급변이 어색했고 동생의 거짓말에 한없이 돈을 뜯기던 순진한 그녀의 갑작스러운 이런 승리도 조금 난감했지만 졸라의 완벽한 심리묘사를 따라 가느라 그런대로 재밌게 신데렐라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 여전히 사는 게 즐겁나?" 무레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즉시 이해하지 못했다.그러다 예전에 삶의 공허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무의미한 고통에 대해 서로 얘기를 주고받았던 것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물론이지, 난 여태 지금처럼 삶을 충실하게 살았던 적이 없었네. "오! 이보게 친구, 날 비웃지 말게나. 고통스러워 죽을 것 같은 순간조차 더없이 소중한 거니까 말일세!" 그는 눈물이 덜 닦인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면서 애써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중략) 어차피 언젠가 한 번은 죽어야 하는 거라면, 지루해서 죽는 것보다는 무언가에 미쳐서 죽는 게 더 낫지 않겠나."그들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 P537
지금까지 에밀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 중에서 '목로주점','제르미날','인간짐승'그리고 이번에 읽은 '여인들의 행복백화점'으로 총 4권을 읽었는데 완성도에 있어서는 '제르미날'과 '인간짐승'이 가장 좋았다. 그래서 궁금해 찾아보니 시기적으로도 이 순서로 이어지며 작품이 나날이 발전해 나갔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이번작품의 주요 인물인 사장 '무레'의 이전 이야기가 '살림'에 나온다는데 최근에 '집구석들'이란 새 이름으로 재출간 되어 사두었는데 무척 기대된다. 문학동네에서 '대지'도 번역되어 예약구매를 해두었는데 이번주에 집으로 올 예정이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루공 마카르 총서의 일부가 하루 빨리 발행되기를 바란다.
*앞으로 읽을 에밀졸라의 작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