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발견의 저자 지바 마사야
일본에서 주목받고 있는 젋은 철학자의 신간!

이항대립을 탈구축하는 현대사상
하지만 어떤 주장이든 모두 ok는 아니다. 단지 타자와 마주하고 그 타자성=고유성을 존중한다는 윤리가 있고, 또한 함께 살기 위한 질서를 임시로 유지한다는 것이 이면의 테마.
뿔뿔히 흩어져서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철저하게 기성 질서를의심해야 근본=급진적으로 함께의 가능성을 다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현대 사상의 자세(stance)

질서로부터의 일탈
자신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타자를 환영하며 맞아들이는 것

프로세스는 항상 도중이다중요한 전제는 세계는 시간적이며 모든 것은 운동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물을 개념적으로, 추상적으로, 마치 영원히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할까, 리얼하지않습니다. 리얼하게 사물을 생각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운동 속에,
그리고 변화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또 키워드가 나옵니다. ‘생성변화‘와 ‘사건‘입니다.
생성변화는 영어로는 비커밍becoming, 프랑스어로는 드브니르

devenir입니다. 이 동사는 뭔가가 되다‘라는 뜻이에요. 들뢰즈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상이한 상태로 ‘되는‘ 도중입니다. 사물은 다방향의 차이‘화‘의 프로세스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물은 시간적이고, 그래서 변화해 가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한 사람도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사건‘인 것입니다. 프로세스는 항상 도중(중간)이며, 결정적인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세계를 이렇게 파악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어 우리는 일을시작하는 것이 힘겹다, 일을 끝내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매일매일생각하는데, 모든 것은 도중이고, 진정한 시작이나 진정한 끝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뭔가 비즈니스의 자기 계발에 응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사실 저는 어떤 시기부터 이 사고방식을 응용하고 있습니다. 원고를 써야 할 때 ‘영차‘ 하고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기합을 넣어 작업하는 것은 힘들기 때문에 일단 컴퓨터를 열고 트위터를 보고 그런 흐름으로 메일을 보고 한 가지 답신이라도 해 볼까 하는 식으로장벽이 낮은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뭔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고 할까, 프로세스가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내친김에 잠깐 생각난 것을 메모하기도 하는데요, 그 메모를 이제 원고의 일부로 삼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즉,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라는 시작을 잘 설정해야 한다는 규범의식을 버리고 왠지 모르게내친김에 착수해서 써 버린 것을, 이제 그것을 정식 작업으로 파악해서 OK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왠지 모르게 생각나는 것들을 그냥 쓰다 보면 글이 되는 거죠.

그 결과, 마지막 마무리도, 궁극적인 완성형을 목표로 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디까지 갔어도 프로세스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느 정도의 지점에서 "뭐 됐어"라고 하며 끝을 냅니다. 이런 것들을 글쓰기의 철학: 쓸 수 없는 고민을 위한 집필론』이라는 책에서 설명했습니다.
이런 것도 사실 들뢰즈의 사상과 연결되어 있는 거죠. 모든 것은생성변화하는 도중에 있다고 생각했을 때, 모든 것을 ‘내친김에‘
해 나가는 꿀팁이 됩니다. 모든 작업을 내친김에 한다 - 이것이 들뢰즈적 작업이죠.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은 밖에서부터 반강제로 주어지는 모델에자신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 속에서 여러 가지 도전을해서 스스로 준안정상태를 만들어 나가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꽤 엄격한 요구입니다.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들뢰즈+가타리가 생각하는 것은 모종의 예술적, 예술적 실천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활 속에서 독자적인 거처가 되는, 자신의 독자적인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여러 가지 만들어 나가자고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고, 관엽식물을 기르는 것도 좋고, 사회활동에 몰입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한 새로운 활동을 다양하게조직화함으로써 인생을 준안정화해 나가면 되는 것이지, ‘진정한나의 본모습‘을 탐구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를 하자,
여러 가지를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은 그렇게 낙관적이고, 행동으로 사람들의 등을 떠밀어 주는 사상이거든요.

들뢰즈+가타리는 가족의 수수께끼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든 사회 활동이든 뭐든 구체적으로 행동을 해 보라고 격려하는 사상이라고 설명했는데, 거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한한X를 향해 가는, 항상 욕구불만의 활동으로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다양한 활동들이 제각각 유한하게, 나름대로 만족을 주는 나름대로 완결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무한한 부채를 지고, 갚을 수 없는것들을 위해 비극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항을
"그것은 그것"이라며 절단하고 나름대로 과제 task를 완료해 나갑니다. 들뢰즈+가타리는 그런 홀가분한 인생을 권장하고 있다고 저는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유한한 희극입니다.
하나의 X를 둘러싼 인생이란 이른바 단수적인 비극이지만, 그렇지 않고 인생의 모습을 좀 더 복수적으로 만들어, 각자 자율적인기쁨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아즈마는 단수의 X에서 "복수적인 초월론성으로"라는 전환을 데리다에게서 강조했습니다.

사변적 실재론이란 크게 말하면, 인간에 의한 의미 부여와는 관계없이, 그저 단적으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사물 쪽으로 향한다는 방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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