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는 우연한 개인들의 사회를 위한 철학이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우연한 존재다. 우리의 언어도 자아도 양심도공동체도 발견되어야 할 본질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철저히 역사적인 산물이며 스스로를 만들어가야 할 아이러니한 존재다. 독특하고 특이한 개인들의 사회에서 전통 철학이 추구해 왔던 보편적인진리는 더 이상 연대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오늘날인간의 연대는 공통의 진리보다는 오히려 각자의세계가 파괴되지 않을 거라는 이기적인 희망을 공유하는 데 달려 있다.

분명 오늘의 교양은 더 이상 지식의 나열에만 머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이라면 지식 콘텐츠가 더 잘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과학자 이정모는 오늘의 과학적 교양이 지식이 아니라 태도,
즉 "함부로 믿지 않고 질문하는 것 그리고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언제든 실수할 수 있고 틀릴 수있다고 인정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태도를 ‘과학적인‘ 태도라고 부르는데,
흥미롭게도 물리학자 김상욱 역시 이구동성으로
"과학이란 논리라기보다 경험이며, 이론이라기보다 실험이며, 확신하기보가 의심하는 것이며 과학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라고 말한다.

철학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라면 혹은 고대철학자들이 말하듯 삶을 살아가는 삶의 양식 그 자체라면, 오늘날 철학자들이 직면해야 할 현실은 삶을 살아가는 좋은 방법이 단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다원주의적 사실이다. 그러한 사실에 늘 강한 관심을 기울였던 철학자 니체는 1881년 가을에 쓴 유고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학파들과19그들의 경험은 우리의 정당한 소유물이다. 우리가전에 에피쿠로스학파의 철학적 해결책을 통해 유익을 구했다고 해서 스토아학파의 해결책을 차용하지못하란 법은 없다." " 좋은 삶의 방식이 다양하고 무수히 많다면, 철학은 유일무이한 삶의 진리를 전달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을 수 없다. 오히려 그다양하고 무수한 삶의 방식들을 포괄적으로 긍정할수 있는 매몰되지 않는 시야가 필요하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말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말했고 말하지 않았는지를 되묻고, 다시 그 물음에 관해 묻다가 다른 관점을 가지고 그리로 되돌아가고, 그것을 규정짓다가 다시 규정짓지 않고 기타 등등………… 무한에 이르도록 미주에 각주를 달고 각주에 미주를 단다."(52쪽)이 점에서 월리스는 현대적 삶에서 발생하는문제는 의미 있게 사는 법을 모른다는 데 있지 않다고 말한다. 진짜 문제는 의미 있게 산다는 과제에 대해 충분히 오래도록 초점을 맞출 수 없는 데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월리스는 의미 있는 삶을영위하기 위해서는 현대적 실존에 부가되는 다양한 형태의 유혹들, 즉 정신 이탈증, 주의 산만함,
TV, 고독, 마약, 섹스, 인터넷과 맞서 싸울 뿐 아니라 그것들과 멀어져서 자신의 권태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그 권태의 바다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일을 해내는 영웅적인 투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처럼 개인의 자아가 선택의 부담을 많이 가지게 될수록 선택의 자유는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저주가 된다. 그런 까닭에 개인주의의 시대가 부상할수록 그 이면에는 각종 심리적 문제들 또한 부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오늘날 그 많고 많은 심리학서와 에세이 문학이 번성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신과 공동체가 부담했던 것들이 모조리자율적 개인에게 떠맡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 모든 의미 추구는 실상 그것이 순전히개인적이라는 점에서 자의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내가 왜 이것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어떤확실하고 절대적인 근거도 개인으로부터는 나올수 없기 때문이다.

"제가 대단한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았을 뿐입니다."(17쪽)T
드레이퍼스와 켈리는 이 지하철 영웅의 말과행동에서 철학적 의미를 찾아낸다. 중요한 점은 오트리가 스스로를 행동의 원천으로 여기지 않았고,
어떤 자율적 의지에 따라 행위를 하려고 했던 것이아니라 상황 자체에 부응해 행동했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일말의 불확실함이나 주저함도 없이 말이다. 여기에서 저자들은 현대인의 허무주의적 불안함과 대조되는 확실성의 느낌을 발견한다. 웨슬리오트리는 선택의 무자비한 파도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았고 곧바로 행동했다.

상황이 주는 의미와 기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미 주어져 있는 세계와 공명하고 그로부터 행복과 의미를 재발견하는 삶의 방식이다.

저자의 주장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이다."(26쪽) 다시 말해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회에 받아들여진 것이아니라, 오히려 이 사회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이 된다는 것이 기본 생각이다. 환대 없이는 사람이 될 수도 없고 사회가 성립될 수도 없는 셈이다.

결국 모든 우정과 환대가 언제나 선이라고 말할 수 없다.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제공할 수없는 이상 우정과 환대는 늘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모든 곳에 아무런 성찰 없이적용될 수 있는 순수한 도덕 이념만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누가 포함되고 누가 배제되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 데 있다. 모든 환대의 문제는 나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절대적 환대보다 오히려 작은 연대가 우리에게 더 필요한 동시대적 환대의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작은 연대의 시작은 철학자 리처드 로티가 말했듯 이미 기다리고 있는 어떤 것을 철학적 반성으로 재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들로 여기는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우리를 재창조하는 일이다. 그 점에서 모든 환대의순간, 쉬운 환대를 넘어서는 어려운 환대의 순간은그것이 아무리 규모가 작다고 하더라도 사회가 재창조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사회학자 가브리엘 타르드가 말했듯 "우리가 무한소라고 말하는 이 작은 존재들이야말로 진정한 동인일 것이며, 우리가 무한히 작다고 말하는 이 작은 변화야말로 진정한 행위일 것"이다.

사이보그는 단번에 통합될 수 없는 상이한 관점들을 품고 있는 인류학자를 위한 가장 적절한 이미지다. 정확한 인류학적 재현이 항상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인류학자들이 서로 이질적인 문화들을 연결하고 소통시키려는 노력을 지속하는 것이 무의미하지는 않다. 비록 그 연결과 소통이 부분적이더라도 인류학자-사이보그는 통합하지도파편화하지도 않은 채 서로 다른 두 문화들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학자-사이보그는 여행하지 않고 이동한다. 인류학자는 귀환하기 위해 여행하는 관광객이아니라 서로 다른 관점들과 서로 다른 사회들 사이를 이동하면서 "사라지지도 않으며 자기 속에 융합되지도 않을 구체적이고 특정한 타자들과" 구체적관계를 맺는 사람이다.(스트래선, 112쪽) 이 구체적관계 속에서 인류학자는 익숙한 자리로 되돌아오는 귀환의 경험을 성취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적어도 연결과 확장의 경험은 남는다.
인류학자의 연구 작업은 타자를 재현하는 것도 타자를 환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타자와 연결되는 것, 반쯤은 이해할 수 있지만 여전히 반쯤은 이해할 수 없는 타자들과 마주해 그들과 부분적으로 연결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타자와의 어색한 관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어색한 관계를 통해 우리자신을 낯설게 만드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이런 어색한관계가 주는 교훈이 우리를 성장시키고 우리의 사고를 도약시키며 우리의 경험을 확장하게 만들 것이다. 이때의 우리는 이미 하나도 둘도 아닌 기묘한 관계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스트래선은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를인상적으로 차용해서 인류학적 글쓰기를 바라보는 전혀 다른 시각을 내놓는다.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에서 스트래선의 『부분적인 연결들』로이어지는 이동과 확장의 궤적은 서로 어색한 관점들, 서로 어색한 학문들 사이에서도 어떻게 창조적인 관계가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여러 힌트를 던진다. 분명항 것은 타자에 대한 완전하고 객관적인 재현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서로에게 배울 점이 없는 것은 아니며, 우리끼리 소통하고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진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비인간 존재들과 기호적 성향을 공유한다거나 숲이 생각한다는 이야기는 대체 어떤 함의가 있을까?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줄까? 우리는 재규어나 양털원숭이의 생각을 정말로 알 수 있는 것일까?
회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그들의생각을 결코 알지 못할 거라고 말할 수도 있다.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은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것일까?"를 물으면서 우리와 박쥐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결코 그 내밀한 경험을 완전히 이해할수 없다고 단언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그들의 생각과 느낌을 확실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확고한 앞에서 출발하지 못하고 또 그러한 삶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알지 못한 채 알아가기‘라는 실용적인 방법을 통해서 서로를 서서히 알아갈 수 있다.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절대적 타자성, 환원불가능한 차이, 통약 불가능성 같은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론적 차이가 있는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기호를 공유하는 존재라는 공통점이 밑바탕에 자리하고 있다.
콘은 간단한 예시를 통해 이 점을 입증한다.
루나족은 옥수수밭에 출몰하는 흰눈잉꼬를 겁주기위해 매년 허수아비를 만든다. 그런데 루나족이 만드는 허수아비는 인간의 관점에서 맹금류를 사실에 가깝게 표상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잉꼬의 관점에서 맹금류가 어떻게 보이는지를나름대로 추측하고, 잉꼬가 보기에 맹금류와 닮아보일 법한 허수아비를 만들려는 시도다. 그래서 루나족의 허수아비는 우리 눈에는 어딘가 기묘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이 기묘한 모양의 허수아비는 곧잘 잉꼬를 멀리 쫓아내고 있으며, 그래서 아빌라 마을에서는 매년 이 허수아비를 만들고 있다.
이렇듯 루나족은 잉꼬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허수아비라는 기호를 통해서 ‘알지 못한 채‘ 알아간다. 잉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자신들의 추측이 잉꼬에 미칠 수 있는 기호적 효과를 통해서 잉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게 되는 셈이다.(156~158쪽)

이때 앎이란 고립된 자아가 나와 전혀 다른 외부 세계를 단번에 인식하는 식의 관조적 경험이 아니다. 인간 특유의 사고와 숲의 사고는 기호작용의산물이라는 점에서 서로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으며, 우리는 기호적 상호작용을 통한 시행착오의 과정 속에서 서로를 서서히 알아간다.

『숲은 생각한다』에서도 성장은 중요한 인류학적의미를 지닌다. 콘에 따르면 "세계의 습관과 우리의 예측이 충돌할 때에만 비로소 세계의 다른 모습이, 현재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세계의 실존적 현실성이 드러난다. 이 붕괴 다음에 이어지는 시련이성장이다."(116쪽) 살아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은어떤 정태적이고 고정적인 상태가 아니다. 하나의습관이 붕괴되고, 낯선 사건을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습관을 배우는 과정속에서 우리는 산다는 것과 안다는 것 혹은 산다는 것과 일한다는 것이 별개의 과정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실제로 『숲은 생각한다』는 내게 책을 만드는일과 그를 통한 삶과 앎의 과정이 "아무리 순간적이라 해도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함께하도록 우리자신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116쪽)임을 깨닫게해 주었다. 책의 번역 과정, 편집 과정, 출간 후 독서 모임의 과정들까지 내가 참여했기에, 그리고 그속에서 매번 새로운 시련과 만나며 성장을 거듭했기에 얻을 수 있었던 깨달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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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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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이후의 현대철학에서는 인식이 존재와 따로 분리되어 설명되지는 않는다. 세계는 그것을 바라보는 각자의 해석대로 존재한다. 하나의풍경으로부터 일어나는 서로 다른 감흥은, 풍경 자체가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또한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마다의 각자 다른 소유이기도 하다. 그것 자체로야 뭐 특별할게 있겠나. 의미를 담고서 바라보는, 그 시선 끝에 맺히는모든 것들이 특별할 뿐이다. 그런 개개의 관점을 소유하게끔 하는 저마다의 조건은, 어떤 시간의 결을 살고 있는가의문제이기도 하다. 하여 무엇을 보고 있는가는 당신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는 자기정체성의 단서이기도 하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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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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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왕이 정치가 뜻대로 풀리지 않자 문득 이런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때가 내게가장 중요한 때인가? 어떤 일이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인가?
어떤 사람이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인가?‘ 왕은 신하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어느 신하도 뾰족한 답을 내놓지 못했고, 왕은 "내가주는 녹을 먹으며 살아온 자들 중에 내가 정말 문제에 봉착해서 묻는 것에 답을 줄 놈이 하나도 없단 말이냐" 하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 그때 한 신하가 시골 어딘가에 훌륭한 성인이 은둔하고 있다고말했다. 왕은 당장 신하들을 데리고 그 은자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가는 길에 왕은 자객의 습격을 받았고 그 자객은 신하의 칼을 맞고도망쳤다. 왕은 가던 길을 재촉해서 은자를 만났다. 왕은 그에게도

신하들한테 물었던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은자는 아무 대꾸 없이 자기 일만 할 뿐이었다.
그때 어떤 남자가 피를 흘리며 뛰어와 ‘살려 달라‘고 외쳤다. 왕은 얼른 수건으로 그의 상처를 싸매서 피를 멎게 해주었다. 부상자는 고개를 들어 왕의 얼굴을 흘깃 보더니 납작 엎드리며 말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아까 길에서 당신을 습격한 사람이 접니다.
왕께서 제 아버지를 죽였기에 복수를 하려 했던 겁니다. 그런데도나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치료까지 해주시니, 용서해주신다면 앞으로 충성스러운 백성이 되겠습니다."
어느덧 날이 저물고 있었다. 왕은 은자에게 다시 앞의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은자가 답했다. "대답은 이미 다 했소.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이 순간이고, 당신이 할 일이란 바로 저 사람을 보살피는것이고,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저 사람이요."
이 이야기는 톨스토이가 쓴 단편 <세 가지 질문>의 줄거리다. 나는 이 이야기를 함석헌의 글 <이제 여기서 이대로>에서 읽었다. 함석헌은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우리가 힘써 할 일, 다시 말해 참된일이란 멀리서 구할 것도 없고 ‘각별한 때‘에 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부족하나마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모든 때는 똑같이 소중하다. 우리 삶에 각별한 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각별한 때‘는 우리가 모든 순간을 소중히 생각할 때 찾아온다. 함석헌이 다른 글에서 쓴 역설적 표현을 빌

리자면, ‘각별한 때‘를 따로 두지 않고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할 때
‘각별한 때‘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정말 믿는사람에게는 ‘때가 장차 오지만, 지금도 그때‘라는 말이 옳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장차의 그때‘란 ‘지금의 이때‘이기도 하다는 것,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말이다.
‘장차의 그때‘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나는 아직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 그런 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사람은 미래를 준비하는 무척 겸손한 사람일 수 있고, 제 허물을 돌아볼 줄 아는 양심의 인간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겸손과 양심이종종 행동을 늦추는 핑계, 어떤 소심함을 감추는 위장막이 될 수도있다.
매번 그렇게 많이 반성하건만, 그리고 그토록 많은 회개를 하건만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왜인가. 누군가는 그의반성과 회개가 철저하지 못해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함석헌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에 따르면 오히려 ‘양심에 과민한‘
사람들은 제 잘못을 지나치게 오래 붙잡고 있는 나머지 어떤 암시에 빠져들고 만다. 내 잘못을 자꾸 지적하다 보면 점점 그 잘못에서빠져나올 힘을 잃어버리고 ‘나는 안 돼‘라고 믿게 된다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은 사람을 창백하게 만든다. 양심이란 죄를 감시하는내 안의 공안 경찰과 같아서, 공안경찰이 지나치게 나서면 사회의활력이 떨어져 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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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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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신‘을 떠받들면서 정작 중요한 것들을소홀히 한다는 뜻이다(여기서 말하는 ‘신‘은 종교적인 신일 수도 있지만, 돈일 수도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어떤 성공의 이미지일 수도 있다. 우리가 믿고 떠받드는 그 어떤 것도 ‘신‘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먹고 있는지,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슨 책을 읽고 무슨 음악을 듣는지, 어디가 아픈지, 위생은 어떤지, 기후는 어떤지. 이것들은 우리 삶에 정말 중요한 것들이다. 내 일상을 돌아볼 때 그 일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내 삶에 큰 중요성을 갖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떠받드는 어떤 것 때문에 그것들을 소홀히 한다. 추상적인 인류 평화보다 내가 요즘 듣는 음악이 내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철학이란, 그것들을 다루고 가꾸는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은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근거하고 있던 절대가치의 붕괴로 받아들여지면서 서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주었다. 철학자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묻기 전에 진리를 추구하는자신의 의지와 태도를 문제 삼게 되었고, 심리학자들은 무의식과충동에 대한 니체의 분석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화가들은 화면에서 소실점이 갖는 패권성을 제거하고 원근법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했으며, 음악가들은 화성 체계를 깨는 실험을 시작했다. 정말로니체의 사상이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하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런 엄청난 스펙터클 속에 니체의 위대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일, 즉 연기를 피우고 소리 내는 일을 니체는 ‘거짓 불개‘나 하는 짓이라고 했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니체의 위대함은 소박함에 있다.
니체는 ‘모든 것의 가치전환‘이라는 표현을 종종 썼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이 반대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는 지혜로운 자는 저렴한 비용으로도 잘살 수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비싸게 치는 것을 그는 별로

높이 보지 않고, 그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소홀히 하니,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도 귀중한 것들을 쉽게 모을 수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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