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원 삼대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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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우리는, 끊임없이 싸워온 우리의 결과다.
어쨌든 세상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져간다.

는 작가의 말이 진득하게 내 귀에 남아있다

진오는 국민학교 시절에 할머니 신금이에게 되물은 적이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그랬다 치고, 왜 우리 식구들은 힘센 쪽에 붙지못하고 맨날 지는 쪽에만 편들었어요?"
"왜, 약한쪽 편드는 게 싫으냐?"
"물론이지요. 너무 손해잖아요?"
그러면 할머니는 감실감실 주름살 잡힌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웃으면서 말했다.
"그때에는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약한 이들이 이기게 되어있다. 너무 느려서 답답하긴 했지만."
그리고 신금이는 덧붙였다.
"오래 살다보면 알 수 있단다. 서로 겉으로 내색을 안 할 뿐이지속으론 다들 알구 있거든."

"같이 좀 살자, 못된 것들아. 같이 좀 살아."
이진오는 그녀가 말하려던 충분한 한마디가 바로 이 말이라는걸 알아들었다.
"노동자가 높은 데로 올라와 사람들에게 자기 처지와 입장을 알아달라고 농성하게 된 것만 해두 엄청난 사회적 변화라구. 우리 할머니는 늘 그렇게 말했어. 어쨌든 세상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져간다고."

나는 우리 근현대문학을 섭렵하면서 몇몇 빠진 부분이 있음을발견했다. 단편소설에 비해 훨씬 질과 양이 떨어지는 장편소설 부분과 그중에서도 근대 산업노동자들의 삶을 반영한 소설이 드물다는 점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잠깐 있었던 카프의 흔적에서도 대부분이 단편소설이거나 도시빈민 일용노동자 또는 룸펜 계층을 다룬것들이며 산업노동자가 전면에 등장하는 본격적인 장편소설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까지 쓰인 장편소설의 경우에도 대부분이 농민을 위주로 한 작품들이었다.
나는 이 시기의 노동운동 자료들을 살피면서 식민지 시대 이후조선의 항일노동운동은 너무도 당연하게 사회주의가 기본 이념의출발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방 이후 분단되면서 생존권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빨갱이‘로 매도당했고, 한국전쟁이 터지고 세계적인 냉전체제가 되면서 수십년 동안의 개발독재시대에 모든 노동운동은 ‘빨갱이운동‘으로 불온하게 여겨졌다. 우리가 기나긴 분단시대를 거쳐오면서 애초의 출발점부터 북한에 대하여 민족적 정통성을 주장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지만, 남한 민중이 근대화의 주체가 되어 산업화를 이루고 민주주의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피와 땀으로 이룩한 정통성을 갖추게 되었다.

에 돌 하나를 끼워넣는 작업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지금 혼란에 접어든 신자유주의적 세계의 모습을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몰락해가면서 무엇인가 다른 질서로 향하여 가는 이행기의그것이라고 말한다. 이 고통의 기간을 줄이거나 늘리는 것은 오로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방대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살던 시대와 삶의 흔적은 몇점 먼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상은 느리게 아주 천천히 변화해갈 것이지만 좀더 나아지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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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무엇인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나에게 나아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인 것 같다고 어렴풋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대체 무엇일까?
그러던 차에 발견한 책. 이름이 익숙하다. 알고보니 내가 지나가다 본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철학을 쉽게 설명해주는 유튜버 중 한 명이다.(어쩌면 가장 젋은?)
여러 철학자들의 생각과 작가의 생각들을 읽고 나니 나는 아직 갈길이 멀었다
내가 사랑할만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한계를 더 확장시킬 수 있을까?! 아니, 이건 나한테 너무 어려운데 꼭 확장 시켜야만 할까??

지금은 고민스럽고 어렵지만 하루 하루 쌓이다보면 나만의 결론이 나져있을 것이라는 걸 이젠 안다. 마음이 조급하진 않다. 이게 책을 읽고 난 뒤 내가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일 것이다.


이 책 날개를 살펴보며 알게 건 이 책이 작가의 세번째 책이라는 것!
이전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

오늘날에는 종종 이런 관점을 잊고, 누군가를 현재의 일부모습만 가지고 쉽게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경우가 있다. 한 사람의 시간을 전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을 대할 때 이러한 연속적인 시간의 관점을 적극 받아들여 좀 더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

만약 정말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와 나의 인연을 보다넓은 시간적 관점에서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랑은 상대에 대한 이해와 앎을 포함한다. 오랜 시간 누군가를 사랑한다말하면서도 그 사람이 누군지를 잘 모른다면, 그 사랑은 커다란 한계를 가진 셈이다.
우리는 현재라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상대방의 다양한시간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서지기 쉬운/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까지 돌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한때 어린아이였고, 소년 혹은 소녀였고, 다양한 추억과 상처를 간직한 채 성장해왔다. 그리고 언젠가 백발노인이 될 것이며, 죽음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이모든 시간적 층위가 그의 존재를 총체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우리는 그 넓은 시간 속에 펼쳐진 다양한 빛깔의 면모들을조금씩 시간을 들여 세심히 들여다봄으로써, 우리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할 길은 어른의 마음으로 살아가되, 아이의 마음의 한 조각을 가슴 한편에 품는 것이다. 복잡한 이 세상을 살아가며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선 대상의 속성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어른의 관점이 꼭 필요하다. 아이의관점으로만 세상을 산다면, 결코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없을것이다. 앞서 아이들의 마음이 의미로 가득 차 있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아이가 행복한 건 아니다. 세계 곳곳에는여러 환경적 · 선천적 조건으로 상처받고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아이가 많다. 그런데 아이는 자력으로 그 불행을 극복할 수 없다. 자신이 처한 조건을 바꾸기엔 능력이 부족하다.
아이를 도울 수 있는 건 어른뿐이다.

기억의 현재성
철학자 피터 골디는 기억은 구성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따르면 기억은 객관적인 과거 정보의 나열이 아니다. 과거에받아들인 정보를 기본 재료로 해서, 그 이후에 추가된 다양한 요소를 바탕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이렇듯 기억은 객관적인 과거 정보와 거리가 멀다. 언제나정보의 축소, 삭제, 확대 등을 포함하며, 현재 내 기분이나 생각의 영향을 받아 변형된다. 이런 맥락에서 기억과 합리성의관계는 역설적이다. 대상에 대한 판단은 분명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에 대한 기억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막상 기억은 조작과 왜곡이 더해진다. 따라서 기억에 기초해 누군가에 대한 주요한 판단을 내릴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실존자의 삶은 상황에 영향을 받을지언정 상황에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지는 않는다. 실존자는 주체적인 결정의 순간들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순간에 무엇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율법학자는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보다 사랑의 대상인 이웃이 누구인지 규정하는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누가 진정한 이웃인지 모른다면 누구에게 사랑을 베풀지 알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반대로 생각했다. 이웃을 규정하는 것보다 사랑을 베푸는 게 우선이라고 이웃이기에 사랑의 대상인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웃이 된다고.

사랑은 죽음을 방해합니다. 사랑은 곧 생명입니다.
내가 이해하는 모든 것은 그걸 사랑하기에 이해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것 역시 그걸 사랑하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_레프 톨스토이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대상에 대한 고유한 앎이 많아질수록 사랑은 더 위대해진다.
_파라켈수스

삶이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주어진 얼마간의 자유시간이다.
_아베 피에르

나는 단 하나의 책임만 아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것이다.
_알베르 카뮈

실존적 고민을 해결하고 싶다면, 이성을 통해 정답을 찾는것보다 사랑을 발견하고 회복하는 일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사랑은 삶의 의미에 대해 강력한 대답을 제시한다. 지적으로는 삶의 의미를 ‘모른다‘고 판단하더라도, 사랑 안에서는 이미 무언가가 밝혀져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바로 거기에 귀 기울이면서, 우리는 삶의 의미나 가치에관한 나름의 대답을 찾고자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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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들어보았던… 좋아하는 작가가 언급했던 책의 이름들..
그리고 의미도 모른채 읽었던 책들이 박연준 작가의 글말로 소개된 책.
“그랬구나. 이 분은 이 책을 읽고 이런 생각을 했구나.”
“내가 듣도 보도 못한 좋은 책들이 세상에는 참 많구나.”

작가가 한 작가의 책만 보게 된다면 “존 버거”의 책만을 읽을 것이라고 한 문장이 기억나 도서관에서 뽑아 온 “다른 방식으로 보기”
아직은 내가 그의 글을 이해하기엔 모자란 것 같다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그의 소설에 조만간 다시 한 번 도전해야겠다.
그리고 만나보고 싶은 책은
로맹 가리의 “흰 개”

언젠간 이 책의 목록들에 적힌 책들을 다 만날 수 있길
그보다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나의 글말로 정리해볼 수 있길

글쓰기는 공들여 말하기
읽기는 공들여 듣기

책 표시에 등장하는 히잡을 쓴 여인처럼 꽁꽁 얼어 붙은 세상 한가운데 앉아 기어코 책을 읽는 사람, 타인의 말을 공들여 듣는 사람이 존재하리라 믿어요.

01 무서록, 이태준 고수의 맛 - 19
02 호밀밭의 파수꾼, J.D. 샐린저 정말, 굉장히, 엄청난 25
03 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 사랑의 바이블 - 31
04 박용래 시전집, 박용래 우는사람-37
05 봉별기, 이상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45
06 다른 방식으로 보기, 존 버거 다르게 보면 다른사람이 된다- 51
07 내 방 여행하는 법,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누구도 못 말리는 여행-57
08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 헬렌 니어링 이것은 요리책이 아니다-63
09 사양, 다자이 오사무이 세상의 공기와 햇빛 속에서 살기 힘듭니다- 69
10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안톤 슈낙 슬픔은 영혼의 운동이다-75
11 장자, 장자
12 연인, 마르크리트 뒤라스
13 진달래꽃, 김소월
14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15 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16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17 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
18 화사집, 서정주
19 동백꽃, 김유정
20 변신, 카프카
21 삼십세, 잉에보르크 바흐만
22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23 수상록, 미셀 드 몽테뮤
25 여름의 책, 토베 얀손
26 빌뱅이 언덕, 권정생
27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페르난두 페소아
28 로미오와 줄리엣, 윌리엄 셰익스피어
30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31 젋은 베르테르의 슬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32 모자, 토마스 베른하르트
33 슬픈 인간, 나쓰메 소세키 외
34 섬, 장 그르니에
35 흰 개, 로맹 가리
36 스토너, 존 윌리엄스
37 은유로서의 질병, 수전 손택
38 밤엔 더 용감하지, 앤 섹스턴
39 어린 왕자, 앙트안 드 생텍쥐페리

고전이란 해석으로 탕진되지 않은 채 온전하게 살아남은 책입니다. 읽고 또 읽어도 닳지 않는 책입니다. 오랫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도 소문을 등지고 커다래지는 책입니다. 우리 곁에 유령(교차로의 유령!)처럼 남아 일상에 스며드는 책입니다. 작가는 죽고 없는데 이야기는 살아남아 여전히 세상을 여행하는 책입니다. 시간의 상투성과 세월의 무자비함을 견디고 목소리의 생생함을 간직한 책입니다.

고전에는 올바른 길이나 훌륭한 선택법이 나오지 않습니다. 어쩌면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계속 길을 잘못 가는 방법’이 나와 있을지 모르지요. 시행착오가 없는 삶. 그런게 있을까요?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한다면 ‘잘못된 길을 열심히 걸을 때 우리가 얻는 가치’를 위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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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빛난다 -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 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
휴버트 드레이퍼스 외 지음, 김동규 옮김 / 사월의책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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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하고 무기력한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 빛날 수 있는 방법을 고전에서 찾아보려 시도한 책!

에필로그
빛나는 모든 것들
늙고 지혜로운 스승에게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아온 두 제자가있었다. 어느 날 스승이 말했다. "제자들아, 너희들은 이제 세상에나갈 때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빛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너희들의 인생은 복될 것이다."
제자들은 아쉬움과 흥분이 뒤섞인 채 스승을 떠나 각자의 길로 갔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들은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다시 만난 것에 행복해했고, 상대방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들으려는 기대감으로 들떴다.

첫 번째 제자가 두 번째 제자에게 시무룩하게 말했다.
"나는 세상에 있는 많은 빛나는 것들을 보는 법을 배웠지. 하지만 여전히 불행하네. 슬프고 실망스러운 것들 역시 많이 보았기에스승님의 충고를 따를 수 없다고 느낀다네. 아마 나는 결코 행복과 즐거움으로 충만해질 수가 없을 것 같으이. 솔직히 말해서 모든 것들이 빛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야."
두 번째 제자는 행복감에 반짝이며 첫 번째 제자에게 말했다.
"모든 것들이 빛나는 건 아니라네. 하지만 빛나고 있는 것들은 모두가 그러하지."

기능만을 생각한다면 어떤 컵, 어떤 커피여도 상관없다. 즉잠을 깨우는 기능만 있다면, 커피 대신 각성제나 담배 또는 마약을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언제든 대체 가능한 것은 극소량의 의미와 가치밖에 갖지 않는다. 또한 이렇게 인간 주위의 모든사물이 대체 가능한 것이 되면, 그런 상황은 그것들을 이용하는인간마저도 대체 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어느덧 사물도 사람도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커피가 잠을 깨우는 기능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 시작된 아침에 감사하며 하루를 준비하고 타인과함께 여유를 즐기는 것이라면, 그래서 커피 마시기가 분별력이 요구되는 일종의 빛나는 의례다도道가 그렇듯이와 같은 것이된다면, 커피 마시는 모든 단계와 절차는 중요한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커피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커피와 커피마시는 행위를 얼마만큼이나 설명해줄 수 있을까? 어느 과학자가특정 기분을 만들어내는 커피의 효능을 해명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커피에 함유된 특정 화학물질-예컨대 카페인-을 투여하는것으로 커피마시기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도 커피와커피 마시는 제반 행위들은 사라지고 카페인만 남는다. 같은 방식으로 과학적 설명에만 의존한다면, 바흐의 칸타타는 사라지고 주•파수만 남으며, 고흐의 자화상은 사라지고 화소만 남는다. 결국

인간마저 사라지고 신경 뉴런간의 화학물질이나 유전자 배열의메커니즘이라 밝혀진 과학 법칙만이 남게 된다.
근대 이후의 허무주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신을 인간으로, 인간을 지식으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무의미만을 양산한 셈이다. 신을 추방하면서 성스러움마저 쓸어버린 것이 근대인의 실수였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성스러움은 상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속화 시대에도 성스러운 자리는 남아있다. 우리가 아직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허무의 높은 깊어만 가지만, 아직 탈출할 희망은 남아있다. 성스러움의 흔적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변형된 상태지만, 여전히 이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은 성스러움을 다시 밝히는 길이라 말할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들이 의미로 빛나기 위해서는 성스러움을다시금 불러와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스러움을 다시 불러올 수 있을까?

저자들이 제출한 답은 다신주의polytheism라는 것이다. 다신주의라는 말에는 다시 두 가지 강조점이 있다. 첫째, ‘다多‘신주의라는 말에는 전체주의, 환원주의에 대한 경계의 의미가 담겨 있다.
서양 전통철학과 유대-기독교적 전통은 일신주의monotheism 편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일신주의는 의미의 다양성을 하나로 축소시킬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예컨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헬레네는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젊은 남자랑 도망간 행위를자랑스럽게 말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도덕의 관점 내지 가정을수호하는 헤라 여신의 관점에서 보면 지탄받을 일이지만 미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 가능한 행위로 정당화된다. 이것은 헤라 여신만있는 것이 아니라 아프로디테 여신도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점에서 다신주의는 서로 충돌하고 경쟁하는 복수적인 믿음체계를 인정하고, 각각을 충분히 고려하는 가운데 사태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현명한 일임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다신주의는 일단 성스러운 신의 자리에 지금껏 앉아있었던 것들과 앞으로 앉게될 모든 신들을 허용한다는 말이다.
둘째, 다신 ‘주의라는 말에는 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여기에서 신은 앎으로 해소되지 않는 믿음체계를 뜻한다. 동시에 인간이 주도할 수 없는 타자적 영역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행위를 하고 목적한 바를 이루는과정에는 행위주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숨어있다. 예컨대 가요 경연에 출전한 사람은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완벽히 예상할수 없으며, 또 노래를 목적의식적으로 부르기보다는 망아忘我의몰입상태로 부르는 편이 더 나을 수 있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해낸 영웅들이나 창작 활동을 하는 예술가, 현란하고 초인적인 기술을 선보이는 운동선수들은 모두 자신이 어떤 의도나 목적으로행했는지를 정확히 모른다. 그들은 전승된 문화, 오랜 시간 동안의 연습, 또 미지의 힘에 이끌려 즉각적으로 행한다. 행위 주체의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무엇이든 주체의 통제 바깥에서 벌어진일이다. 우리의 행위와 사건에는 이처럼 타자적인 계기가 언제나동반한다. 이 모든 것을 아울렀던 말이 ‘신‘이다. 그리고 이런 신에대한 믿음 속에서 경이와 감사의 마음도 생겨날 수 있다. 그런 마음에서만 의미도 증폭될 수 있다.
다신주의라는 말의 두 의미는 모두 인간 중심주의, 주체 중심주의를 경계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신주의는 타자성을 소중히 살

리려고 한다. 의미는 인간 혼자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또한 의미는 한 개별 주체의 힘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신으로 표현되는 인간 이외의 타자 내지 자연과 함께 다수의 주체가 어우러지는 과정에서 의미는 발생한다. 다신주의에서 공동체가,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문화가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속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목소리들이 커다란 파문을 이루며 확성된다. 과거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이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서 상연되어 빛을 발하듯이, 현대에는 ‘붉은악마‘의 응원과 촛불 집회가 빛을 발한다. 그 속에서 개개 구성원들은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다신주의에도 여전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공동체 중심주의가 열광주의로, 종국에는 파시즘 비슷한 것으로 빗나갈 위험이 있기때문이다. 여전히 그것도 일종의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다신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메타 포이에시스에 대한 논의로 넘어간다.
저자들은 의미를 밝히는 성스러움이 세 차원에서 일어난다고본다. 그들은 그것을 퓌시스physis, 포이에시스poiesis, 메타 포이에시스meta-poiesis 라고 말한다. 역사상 지금까지 앞의 두 가지 차원이 일어났고, 이제 마지막 메타 포이에시스 차원이 열려야 한다고보고 있다. 저자들이 보기에, 테크놀로지는 포이에시스의 일종이지만 성스러움을 파괴한다. 그러나 어쨌든 테크놀로지도 포이에시스이다. 또한 어느 누구도 전적으로 테크놀로지를 부정할 수 없

다면, 테크놀로지가 성스러움을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은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그 가능성이 무엇인지는 저자들도 언급하고 있지않다. 여하간 퓌시스, 포이에시스, 테크놀로지, 메타포이에시스에관해서 간략히 정리해 보기로 하자.
첫째, 퓌시스는 그리스어로 ‘자연‘을 뜻하는 말이다. 번역을 해서 그렇지,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자연 개념과는 조금 다르다.
퓌시스의 근원적인 의미는 생성과 소멸, 드러남과 사라짐의 강렬한 교차에 있다. 밤하늘에 순식간에 반짝였다 사라지는 별똥별이나 봄에 신기하게 움텄다가 늦가을 어느 날 갑자기 시드는 풀잎처럼, 퓌시스는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조 속에서 사유되어야 할개념이다. 스피노자가 신이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스적 자연은 신적인 것이다. 나타났다 사라지고이내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신들이 세상이라는 연극무대에 번갈아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다신주의는 일차적으로 퓌시스의 다양한 모습임이 판명된다. 이 퓌시스의 차원이 성스러움의 근간이다.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것을 살려야 한다. 하지만 시스만으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퓌시스를 참칭하는 인간중심주의가 존재할 수 있고, 퓌시스만으로는 세상에 의미가 충만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둘째, 포이에시스는 그리스어로 ‘창작‘을 뜻하는 말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그것은 없던 것을 있게 만드는 기술을 뜻한다. 일반적

으로 그것은 인간의 제작술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그런데 저자들은 하이데거에게서 영감을 받아 포이에시스를 퓌시스에 가깝게 해석한다. 즉 퓌시스가 감춰진 모습을 드러내는 힘이듯이,
포이에시스는 이전까지 감춰진 것을 인간의 손으로 현상하도록만드는 기술이다. 시스의 위용을 더욱 잘 드러내는 인간의 능력이 포이에시스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창작은 기독교적 신과 연관된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라, 퓌시스의 바탕 위에서 시스를 더 잘 드러내는 창작이라 말할 수 있다. 가령 운동선수처럼 인간에게 감추어진 몸의 재능을 극대화한다거나, 예술가처럼 작품을 통해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것을 보여준다거나, 아니면 장인처럼 재료가 지닌 특성을 최대한 드러내는 기술이 포이에시스다. 이런 창작적 활동을 통해서 인간은 자연을 잘 이해하고, 그것의 의미를 더 풍요롭게 드러낸다.
셋째, 테크놀로지는 원래 포이에시스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개념이다. 그 말의 어원인 ‘테크네techne‘는 포이에시스와 거의 같은뜻을 지니고 있었다. 둘 모두 퓌시스를 드러내는 인간의 활동을뜻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하지만 근대 이후 테크놀로지 개념은변화한다. 이제 ‘자연의 결‘에 ‘따라‘ 창작하는 포이에시스와는 달리, 테크놀로지는 인간을 중심으로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기술로 탈바꿈한다. 테크놀로지 시대로 진입하면서 포이에시스인 목수가 대패질하면서 살폈던 나뭇결과 옹이, 그 지역 나무들의 특성, 나무를 키운 토양과 기후 등등에 관한 앎은 사라져가고

있다. 거침없이 자를 수 있는 전기톱을 가진 사람에게 이전의 도수가 가졌던 앎 따위는 더 이상 익힐 필요가 없다. 더 좋은 녹치를 만들기 위해서 다양한 맛으로 구별되던 물은 사라지고 물을구성하는 화학물질만 남게 된다. 근대 이후 테크놀로지는 시스의 극히 작은 일면만을 극대화했다. 왜 그랬을까? 인간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곧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님이 밝혀진다. 왜냐하면 인간마저 복잡한 수식과 법칙, 유전자 지도로 분석되어 결국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과학기술에 매혹된 과학맹신주의자들은 또 다른 차원의 일신주의자이며 종국에는 허무주의자가 되지않을 수 없다. 결국 테크놀로지는 인간의 편의를 위해 퓌시스의일면만을 배타적이고 강압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도리어 퓌시스를철저히 은폐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마지막으로 드레이퍼스와 켈리는 메타 포이에시스를 제안한다.
메타 포이에시스란 포이에시스처럼 퓌시스를 최선의 상태로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남아있는 인간 중심주의의 흔적을 경계하는 태도를 뜻한다. 다시 말해서 메타 포이에시스는 앞서 언급한퓌시스, 포이에시스, 테크놀로지 가운데 어느 하나에 얽매이는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는 기술이고, 다른것으로 부단히 옮겨meta 다닐 수 있는 기술을 뜻한다. 그것은 예컨대 군중과 하나가 되어 일체감을 형성했다가도 어느 순간 냉철하게 빠져나올 수 있는 능력이자, 군계일학의 한 인물에 열광했다가도 파시스트와 훌륭한 정치가를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이다. 스마트폰과 GPS를 애용하다가도 때로는 그것들을 과감하게 끄고서 손으로 편지를 쓰고 창밖의 경치를 주의 깊게 살피는 지혜다. 그래야만 허무의 암흑이 걷히고, 모든 것들이 빛날 수 있다.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이 성스러움의 개념은 퓌시스의 혐오스런 출현을 막는 동시에 그것을 최고의 상태로 유지해줄것이다. 퓌시스의 위험성을 막는 방안을 알아보기 전에, 우리는먼저 우리 문화의 언저리에 여전히 이용 가능한 성스러움의 관례들이 있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퓌시스를 적절한 위치에 두기 위한 기초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육성 활동은 예로부터 포이에시스poiesis*라는 말로 불려왔다. 약 1백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를 육성하고 함양하는 포이에시스적 실천은 사물들을 다루는 방식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포이에시스적 실천 즉 창작적poietic 활동은 특히 사물을 최선의상태로 만드는 장인의 기술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고대때부터 문화에 간직되어온 실천으로서, 호메로스의 세계에서는대장장이 신인 헤파이스토스가 사물들을 빛나게 만들었고, 당시

그리스인들은 그것들에 대한 경이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헤파이스토스는 호메로스의 만신전에서 주변 인물이었다. 아이스킬로스에 이르러서야 아테나 여신의 창작 스타일이 등장하여문화를 세련되게 만들었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이해를조직했다. 이처럼 주어진 의미들을 최선의 것으로 연마하는 장인적인 창작 활동에 대한 이해는 19세기 말까지 살아 있었고,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우리 테크놀로지 시대에 그것은 여러모로공격을 받고 있는 중이다.
우리 시대의 일반적 경향이 창작적 기술의 발전과는 동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창작 능력이 여전히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영역들이 있다. 예를 들어 야구나 테니스 기술 또는 피아노 연주기술은 지금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전수된다. 연습은 운동선수나 음악가로 하여금 특정 상황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방법-왼쪽 땅볼, 3옥타브 주법 등을 익히게 해준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연습을 바탕으로 초심자가 그 분야에서 기술적으로 숙달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학습법은 매우 단조롭고 고된 것이어서,
그 과정을 통해 얻는 반사적 기술은 고생의 대가치고는 너무 사소해 보인다.
사실 기술은 이런 과정이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풍부한 현상이다. 우리는 기술적 성취가 물리적 능력의 단순한 습득 이상을 내포한다는 것을 지적해볼 수 있다. 하나의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세계를 다르게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런 기술 개념, 즉 장인적 숙련의 개념은 오늘날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우리는 기술을 주로 기술적 숙련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수레바퀴 장인은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이런 생각을넘어선다. 빼어난 수레바퀴 장인으로서 거의 마지막 인물인 조지스트는 100년 전쯤 전통적인 기예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바 있다"

나는 무늬만 목재인 것들은 절대로 쓰지 않는 구식 일꾼들을 안다.
그런 목재는 일에 전혀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안다. 숙련된 일꾼은 결심 판사와도 같다는 것을. 왜냐하면 나무는 대패(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나 도끼(역시 폐물이 된)아래에서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성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손으로 느꼈기에 나의 눈으로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문외한에게 가르칠 수는 없다. "채찍처럼 질긴"
톱밥과 "당근처럼 쐐기꼴을 한 톱밥의 차이를 어떻게 가르칠수 있으며, "썩은" 느낌과 "푸석푸석한 느낌의 차이를 어떻게설명할 수 있겠는가? 참나무건 너도밤나무건 이런 차이들은다 고르게 있다. 하지만 실제 작업을 해본 사람들만이 그것을안다20첫째로, 수레바퀴 장인은 목재 자체에 대한 숙련된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부터가 다르다. 스터트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숙련된 운동선수에게서 우리가 보는 부분과 같은 것이다. 순간적으로 골대를 감지하는 러닝백이 그렇듯이, 다년간의 경험을쌓은 장인은 숙련된 기술 없이는 볼 수 없는 차이들을 분간해낸다. 그런데 스터트는 더 나아가 우리가 이제껏 주목하지 못한 부분, 즉 작업자의 능력과 그가 분간해내는 사물의 속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스터트에 따르면, 목재는 도끼나 대패를거치면서 이전에는 보여주지 않은 성질들을 드러낸다. 우리가 시각적으로 이런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손으로 그

것들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처럼 쓸모 있는 나무를 분간해내는이 능력은 문외한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그것은 나무의 빛깔이나 결 등 외양상의 특징을 분간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나무가 도끼나 대패에 어떤 적성을 보이는지를 즉시 알아챌 수 있는가의 문제이며, 바퀴로 쓰일나무가 마차 무게를 견뎌낼지 견뎌내지 못할지를 즉각 알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당시 환경에서 이런 차이를 분간하기 위해서는나무를 쪼개고 톱질하고 대패질하는 기술이 우선 필요하다. 그리고 바퀴 형태로 짜서 농부의 필요에 맞게 마차에 끼우는 솜씨또한 필요하다. 이런 기술적 통찰력은 본질적으로 실천 속에서만발현된다.
수레바퀴 장인의 이런 통찰 속에는 어떤 신비스런 점도 없고 마법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요소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현상은 뭔가 우리에게 계시해주는 점이 있다. 왜냐하면 이 현상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전혀 새롭게 이해하도록 하는 실마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수레바퀴 장인은 나무의 쓰임새라든지 성질 등의미 있는 차이를 나무 속에서 발견하지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하지 않는다. 숙련된 장인은 톱밥이 "당근처럼 쐐기꼴"을 했는지를결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가 계산대 줄에서 짜증내는 여인을 보고 가족 중 누군가 병원에 입원했을 거라고 단정하는 방식과 아주 다른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세상 속으로 나가는 것이다. 장인의 과제는 의미를 만드는 데 있는 게 아니

라 기술을 자기 내부에서 육성하는 데 있으며, 이미 주어져 있는 의미를 분간하는 데 있다.
이런 현상에는 또 다른 측면도 있다. 수레바퀴 장인이 차이를구분하는 능력만을 가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스터트는 이 점을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잘 숙련된 장인은 작업하는 모든 나무덩어리를 구별할 수 있을뿐더러 그것들이 제각기 다른 특성과 개성을 가진다는 것을 이해한다. 각각의 나무덩어리는 늘 앞서 만진 것과는 다른 어려움을 가져다주며, 이전 것과 다른 취급을 요한다. 나무의 진짜 장인이 되려면 그것을 다루는 데 어떤 작업이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옛날 장인에게 나무가 지닌 저항성을 매정하고도 몰상식하게다루는 전기톱 따위란 없었다. 나무는 기계의 먹잇감이 아니요, 무력한 희생물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무는 그것을 잘 달랠줄 아는 사람에게 자신의 미묘한 덕을 허락하곤 했다. 마치이해심 많은 친구와 함께 일하듯이 그런 장인과 협력해서 일했다. 21스터트의 설명은 기술에 대한 두 번째 개념을 보여준다. 장인이다루는 각각의 나무덩어리는 그에게 유일무이한 것이다. 더 나아가 각각의 나무를 다루는 작업 상황들도 그에게는 언제나 유일무이하다. 이 말은 장인이 자기 행위를 미리 계획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즉 나무를 다루는 장인의 기술은 기계적이고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활동이 아니라, 지성과 유연성을 지닌 활동이라는 얘기다. 그의 재능은 실천을 통해서 구현되며, 순간순간마다달라진다. 아마도 똑같은 방식으로 작업을 반복하는 일은 장인에게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기술의 개념은, 각 상황들의 유일성이장인에게 성스러운 차원을 열어준다는 점이다. 스터트의 설명에따르면, 각각의 나무덩어리들은 서로 구별되는 자기만의 특성을가지기 때문에 장인은 작업하는 나무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나무의 덕성은 이처럼 보호받고 육성되는 가운데 드러난다. 나무에 대한 이런 친밀한 감각은 장인에게 나무에 대한 배려와 존경의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런 느낌은 작업장에서 절단되고 건조되는 나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무는 그것을 키운장소가 있으므로, 장인은 그곳의 토양, 지형, 수원에 대해서도 친숙해진다. 그는 또한 날씨와 계절에 대해서도 자세히 안다. 왜냐하면 이런 요소들로 인해 나무들은 제각기 장인의 톱에 달리 반응하게 되기 때문이다. 장인은 겨울에 벌목한 나무와 늦봄이나여름에 벌목한 나무의 건조 속도가 제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잘안다.
결국 이렇듯 다양한 실천적 지식을 통해서 장인은 나무에 대한단순한 책임감을 넘어서, 자신이 사는 고장과 땅에 대한 유대감을 가슴 깊이 간직하게 된다. 실제로 스터트는 자기가 사는 땅과

고장에 대한 장인의 존경심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특정 장소에 대한 이런 존경심은 기술적 숙련이나 반사적 반응과 같은 우리의 기술 개념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사는 곳에 대해 성스러움의 감각을 갖게 해주며,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최고의 상태로 고양시켜준다. 스터트가 현대의 기술 발전과비교하면서 수레바퀴 장인이 자기 고장에 대해 갖는 존경심을 설명하는 부분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 땅과 더불어 일하는 장인의기술과 지성이 "매정하고도 몰상식한 기계로 대체됨에 따라, 땅에 대한 존경심도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무가 즐비한 지역과 거기 거주하던 영국인들은 서로 밀접한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관계를 통해 양육된 애정과존경-진짜 토박이가 토종 나무에 대해 느끼는 마음은 거의존경심에 가까운 것이다-은 이제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게걸스런 탐욕들이 이 오래된 숲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물들이 경박한 마음으로 다뤄지는 것을 주변의 모든 것에서 보고 들었다. 나는 그런 경박함을 늘 혐오스럽게 여겼다. 나는 무거운 짐마차에 매인 말들이나 성당을 짓는 데 쓰이는 큰 돌을볼 때 그렇듯이, 그런 취급을 당하는 사물들에 고통스런 동정심을 느낀다.22즉 수레바퀴 장인에게 재료로 제공되는 나무는 단순한 물리적

속성들의 집합 이상의 것이다. 나무는 성당의 돌처럼 성스러운 것이며, 관심과 존경으로 다뤄야만 한다. 그렇게 대하지 않는 것은모독이다.
스터의 설명은 기술에 관한 설득력 있는 관념을 갖게 해준다.
스터트가 말하는 장인적 기술은 개인의 고립적이고 자동반사적인 기술 숙달과 달리, 전적으로 자기 지역과의 연대감 속에서 이루어진다. 훌륭한 관계들이 다 그렇듯이 한쪽은 다른 쪽을 최선의 상태로 만들어준다. 장인은 매정하고 몰상식한 기계가 아니라나무에 대한 지적 관찰자이기 때문에, 나무는 그에게 자신의 미묘한 덕을 드러낸다. 그러나 장인이 나무를 분간하는 능력을 함양하고 나무와 그 땅에 대한 존경심과 책임감을 갖는 것은, 나무가 이미 이런 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인과 기술 사이에는 일종의 피드백 관계가 만들어진다. 양자는 상호 이해와 존경을 통해 서로를 함양해준다.23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장인과기술의 상호 육성에 대해 포이에시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장인적 기술이 지닌 육성의 힘만으로는 퓌시스의 위험을 없앨 수 없다. 아무리 자신의 땅을 존경하는 수레바퀴 장인이라 해도 히틀러의 현란한 수사에 휩쓸리지 않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술이 사물의 의미심장한 차이를 드러낸다는 관념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삶속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지만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또 다른 종류의 창작적 기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퓌시스의 위험스런 출현과300

자비로운 출현 사이의 의미 깊은 차이를 분별하는 더 높은 차원의 기술 말이다. 이런 기술을 습득한 사람은 군중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언제나 능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정조에 휩싸여 2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킹 목사에게 환호하는 현장에 있어본 사람에게는, 그곳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이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날 국립기념공원에 있던 모든 사람이 거기에서 벗어나 냉정한 숙고와 합리적 판단으로 반응하려고 했다면, 그 사건은 원래만큼의 영향력을 가지지못했을 것이고, 우리가 사는 세계는 더 가난해졌을 것이다.
그런 정조에 휩싸여야 할 때가 언제이고 빠져나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깨닫는 것은 오늘의 세계를 사는 우리에게 결정적으로중요한 기술이다. 다른 기술이 다 그렇듯이 이런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위험이 무엇인지는 뒤에서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그런 기술이 오늘의 문화에 유용한성스러움의 형태를 길러준다는 데 주목하기로 하자.
‘메타포이에시스‘, 우리는 그것을 이런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세속 시대가 낳은 쌍둥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키를잡아준다. 즉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퓌시스의 성스러운 현상들을되찾게 함으로써 허무주의에 맞설 수 있게 해주는 한편, 퓌시스가 지닌 광적이고 혐오스런 측면에 맞설 수 있는 기술을 배양시켜 준다. 그러므로 이 세속적 허무주의 시대에서 잘 살아가려면,
열광하는 군중과 하나가 되어 일어나야 할 때가 언제이고, 발걸음을 돌려 그곳에서 재빨리 빠져나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아차리는 차원 높은 기술이 필요하다.

다. 더 나아가 이런 경험은 우리 자신을 GPS가 시키는 대로 일하는 자동화 장치로 변모시킨다. 이것 역시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가운데 하나이며, 때로는 최선의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을삶의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를 최고로 만들어주는 기예와 관심,
그리고 존경심과 경외감을 가질 기회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가치 있는 분야의 일들에 관심을 갖고, 그 안에서 의미심장한차이를 드러내는 기예를 육성하는 것이야말로 테크놀로지적인삶의 방식에 저항하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를 사랑할지결정하는 일만큼이나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 결정하기가 어렵다. 무엇이 관심가질 만한 가치를 지닌 일인지 어떻게 알수 있는가?
우리가 알든 모르든, 이미 우리는 주변의 모든 일들에 관심을가지고 있는게 분명하다. 의미가 밝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세계처럼 인간은 자신 속에 수많은 관시믜 양태들을 숨겨두고 있는 존재이기 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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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 죽음을 앞둔 철학자가 의료인류학자와 나눈 말들
미야노 마키코.이소노 마호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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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쓴 철학서를 믿고 보는 편이다.
관점들이 새롭고 난해한 이론을 쉽게 서술해놓아 “아..” 하고 짧은 탄성을 속으로 내지를 때가 많다.
우연히 읽게된 이 책은 여태까지의 관점과는 다르게 좋다.
죽음과 삶에 실재하는 내밀한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중간 중간 삶을 통찰하는 철학자의 문장들은 나에게 수많은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보게 될 풍경이 그 인연 너머에 있는
‘시작‘으로 가득한 세계로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ㅡ미야노 마키코

그렇지만 요즘 고쿠보 씨는 승률 5할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연패 후 3연승을 거두었는데 바로 직전 시합은 TKO로 시원하게 승리했고, 6월에는 드디어 일본 랭커에 도전할 예정입니다.
고쿠보 씨를 아는 이들은 이런 과정에서 당연히 어떤 스토리를읽어냅니다. 은퇴를 2년 앞둔 (프로복서는 원칙상 37세에 의무적으로 은퇴해야 합니다.) 고쿠보 아키라, 승리에 버림받은 시기가 있었지만 시련을 뛰어넘고 강해져서 마침내 일본 랭커에도전하다. 이런 감동적인 스토리를 말이지요.
그런데요, 정작 고쿠보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4연패를 하는 동안에는 분명히 여러 번 그만둘까 고민했지만, 그 슬럼프를 극복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많이 노력했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 사실 그렇게 많이 노력했는지도 모르겠다. 감동적인 이야기라고 해주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정도로감동적인 것 같지는 않다. "왜 복싱을 시작했어?"라고 누가 물어보면 그럴듯하게 답하지만, 그게 진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이렇게 되리라고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것 같을 때도 있다. 잘 모르겠지만, 그때그때 나에게 온 만남과말, 기회 등에 몸을 싣다 보니 어느새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어느 특정한 시점에 달라진 것이냐, 대화 중에 커다란 전환점이 있었느냐, 아니면 좀더 잘하려고 한 단계 뛰어넘은 것이냐,
하고 물어본다면 그런 대단한 일은 없었습니다. 느긋하게 수다를 떨다 보니 자연스레 ‘어중간한 환자‘로 자리를 잡았지요. 사소한 화제 전환과 변화가 거듭되는 과정에서 미처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저‘라는 존재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지 않았을까요. 저는 지금껏 이소노 씨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우연을 붙잡으며, 지금에몸을 맡기고, 의연하게 결단하려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착실한 미야노 마키코가 극적인 변화에 뛰어드는 이미지를 그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변화란 그렇게 극적으로 벌어지지 않고, 훨씬 뭉근하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는지도 모릅니다.
저라는 사람 역시 매사에 분명하지 않고 상대방과 관계 속에서시시때때로 변하며 그때마다 뒤늦게 깨닫는, 훨씬 애매한 존재가 아닐까요.
본래 일상생활이란 다양한 상태가 얼룩덜룩하게 섞인 것과비슷합니다. 우리가 그 얼룩무늬의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하는사이에 일상은 느릿느릿 나아가지요.

사람은 진짜로 시간을 뛰어넘을 수는 없기에 현재 시점에서 상대를 믿고 미래의 약속을 맺는다는 건 ‘모험‘이자 ‘도박‘입니다.
일상과 신뢰, 그리고 약속을 둘러싼 와쓰지 데쓰로의 분석은언제 봐도 감탄이 나옵니다. 다만 대체 어떤 사람이라야 ‘약속할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떠오르기도 하지요. 언젠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여 미완결인 채 끝날 수밖에 없는인간이 과연 미래에 대해 미리 결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요? 죽음의 가능성을 일단 생각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미래에 대해 결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약속을 맺습니다.
약속으로 죽음의 가능성을 은폐하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약속이란 죽음의 가능성과 무책임함을 모두 끌어안고 본래는 할 수 없는 ‘결정적 태도‘를 ‘그럼에도‘ 취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무모한 모험, 또는 도박을 눈앞의 상대에게 ‘지금‘
표명하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당신이 있기에 비로소 약속이라

는 도박을 감행하고, 될지 안 될지 모를 일을 실현해내기 위해모험에 나선다. 당신이 있기에 마음먹는 ‘지금‘의 결단이야말로
‘약속‘의 요점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신뢰란 미래를 향하는 것이라기보다 지금 눈앞에있는 당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와쓰지 데쓰로가 인간의 진실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던 모양입니다.

저는 왜 그렇게까지 ‘우연‘에 의문을 품고 설명하려 했을까요?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우연에야말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살아가려 하는 힘‘의 시초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제가 20년 넘게 읽어왔던 『우연성의 문제를 펼쳤습니다. 서두에서 구키 슈조는 우연성이란 ‘없는 것을 있게 하는존재‘라고 간략하게 정의했습니다. 다시 말해 ‘있는 것‘도 ‘없는것‘도 가능한 것입니다. 제 유방암은 분명히 유전성이 아니기때문에 (유전성이라 해도 100퍼센트 암에 걸리지는 않습니다만) 저는 암에 걸리지 않고 오늘도 건강하게 술을 마셨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암에 걸렸을 가능성도 당연히 있었지요.
여기까지 살펴보면 제가 암에 걸린 우연은 주사위를 던졌더니 6이 나왔더라 하는 확률의 문제로 읽힐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키 슈조는 한 발 나아가 우리의 현실에 있는 우연성을 "유有

와 무의 접촉면에 개재하는 극한적 존재"라든가 "유가 무에뿌리내리고 있는 상태"라고 고쳐 말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암에 걸릴 수도‘ 혹은 ‘암에 걸리지 않을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제가 암에 걸려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불구하고’로 표현하는 반전, 이 역접이야말로 제가 유방암에 걸려버린 사실을 우연으로서 받아들인 사정의 실체입니다. 구키 슈조는 계속해서 인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지 질문했습니다. 저 역시 그 문제를고민해왔지요.
글이라면 다음처럼 답할 수 있습니다. 현실이란 없을 수 있던 것이 있게 되는‘ 반전의 힘이 나타난 결과여서, 구키 슈조는우연성을 ‘실재의 생산 원리‘ 또는 ‘생산점‘이라 불렀다고요.
저는 ‘있기 어려운 것이 있는 경우‘를 보고 놀라워하면서 우연을 아름답게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야구를 보다감동했을 때, 저는 선수들이 일어날지 모르는 가능성을 바라보고 현재에서 손을 떼어냄으로써 현실이 태어난다고 적었습니다. 그럴 때 현실의 발밑에 자리한 무는 간단히 뿌리칠 수 있는 것이며, 다가오는 미래는 손을 뻗으면 바로 잡을 수 있는 것같습니다. 가볍게 무를 뿌리치고 존재를 향해 나아가는 순간.
그런데 제가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생산점만 우연으로 이야

기하려 했을까요.
아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우연에 의문을 품고 ‘없을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것‘을 계속 설명하려 한 뿌리에는무에 사로잡혀도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애쓰는 삶에 대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없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는 것‘을 설명함으로써 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 하는 집착이 있었지요. 지금 저는 제 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불쾌하기까지 한 힘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삶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살기 위해서 글을 쓰려고 합니다.

앞서 소개한 기사를 다시 예로 들면 받아주기, 이해, 귀 기울이기 같은 표현들이 상징하듯 다양성 사회는 사람들이 악수하면서 연결되거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주는, 정지 화면같은 모습으로 그려지곤 합니다. (받아주려면 정지해야 하니까요.) 연결, 유대 같은 말들도 마찬가지라 점과 점이 이어진 모습(연결선)으로 강조되곤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점과 점이 연결되는 도식을 위에서 내려다본 사람들이 네가 연결하는법은 잘못됐어, 이렇게 해야 해, 하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양성 사회와 그것을 지탱하는 관계란 정지 화면이나 평면도로는 전혀 포착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아닐까요?
멈춰 서서 악수하거나 상대를 받아준다고 관계성이 만들어지지는않습니다. 함께 운동하여 계속 선을 그리면서 세계를 통과하는 것, 그러는 와중에 서로를 기분 좋게 하는 언동을 발견하고 그 발견을 발자취로 남긴 다음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것, 관계성을 만드는 것이란바로 이렇게 앎과 깨달음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움직임(운동)이아닐까요.

저는 운동이 관계성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차례차례 뻗으며 세계를 통과하는 선들이 때로는 교차하고 한데 엮여 장소를만들기도 하지만 결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 그런 모습이야말로 다양성이 아닐까요.
지금 제가 말한 대로 관계성을, 그리고 관계성들의 집합체인다양성을 이해하면 ‘바람직한 연결법‘도 다르게 보입니다. 당신 방법은 잘못됐어, 올바른 연결법이란 이런 거야, 하며 도보여행의 움직임에 제한을 두고 점과 점을 연결하듯이 ‘바람직한연결법‘을 말하기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도식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이것이야말로 바람직한 방법이다."라는 자신만만한 주장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그 주장들은 앞으로 뻗어나갈 예정이었던 선들도 점과 점 사이에서 적절한 말만 수송할 뿐인 경직된 연결선으로 바꿔버립니다. 그리고 스스로 연결점이 되길 바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지된 연결점이라면 고통도 생겨나지 않으니까요.

반대로 이런 생각도 듭니다. 미야노 씨보다 훨씬 건강하면서도 선을 그리지 않고 점에 머무르려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내부의 고통에 정신이 쏠려서 자신이 이제껏 선을 그렸다는 사실도, 자신에게 선을 계속 이어갈 여력이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중에는 스스로 점이 되는 걸로 모자라 괴로움 때문에 타인도 자신과 같은자리에 묶어두고 점으로 바꾸려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언젠가 어디에선가 반드시 마지막을 맞아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순간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기에 저는 바람직하게 연결될 뿐인 점으로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에게 여력이 있는 한 세계를 지각하고 그 세계와 친밀한관계를 맺으며 계속 선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러다 만나는 다른 선과 새로운 선을 엮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미야노 씨가 그려온 선과 만나 지금껏 함께하면서 저는 그런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물론 일련의 일들에 관계된 사람들이 저의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저 지금까지 제가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 조금씩 모두에게 해왔던 것들이 서로 연결되기 시작해서 어쩌다 이 타이밍에 분출된 것입니다. 조금 자랑스럽게 말하면제가 이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과 진실하게 마주하고 함께 발자취를 남기며 살아가는 행위‘를 해온 끝에 받은 사소한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저는 ‘시작‘ ‘움직임‘ ‘기획‘ ‘활동‘ 등을 적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계는 이처럼 언제나 새로운 시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흐르는 시간에서 점이 되어 위험성을 계산하고합리적으로 인생을 계획하여 타자와 일정한 형식대로 관계를맺으려 할 때, 혹은 자기만의 이야기에 틀어박히거나 타인에게모든 걸 내맡길 때,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눈치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란, 본래 시작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그런 세계에 나와서 타인과 만나 운동을 일으키는 와중에
‘나‘라는 존재가 성립됩니다. 그 만남을 받아들이는 동안에 비로소 ‘나‘가 존재합니다.

사람은 어떤 때에 인생에서 의미를 찾고 운명을 발견해내는가.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말이 그저 멍하니 사는 걸 뜻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운명 속에서 어떻게 결단을 내리며 살아가는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만남과 죽음, 상실의 우연이 운명 속에 존재하게 될 때 사람은어떻게 살아갈까.
이에 대해서 이소노 씨는 다음처럼 답하고 저에게 공을 던져주었습니다.
만약 운명이 정말로 있다면 무엇일까요. 인생에서 닥치는 영문 모를 현상을 받아들이고 (・・・) 함께 발자취를 남기며 살아가겠노라 각오하는 용기가 바로 운명인 것 같습니다. (…) (그것을) 머나먼 미래로 이어지는 선 위에 짜 넣으면, 비로소 그 의미는 ‘webs ofsignificance‘라고 부르기에 걸맞지 않을까요.
자, 구키 슈조는 두말할 필요 없이 『우연성의 문제』를 쓴 철학자이지만, 그가 최후에 다다른 것은 ‘운명‘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우연이 가득합니다. 아니, 애초에 우연밖에 없지요. 다만 우리는 사소한 우연 하나하나에서 의미를 찾

지 않고 가볍게 넘기며 살아갑니다. (오늘 먹은 빵이 단팥빵이든 크림빵이든, 어쩌다 보니 내 눈에 띄었을 뿐 전혀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무언가 중대한 문제를 정해야 할 때, 혹은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큰 사건(병, 자연재해, 연애, 임신등)과 직면했을 때, 우리는 인생에 등장한 우연의 터무니없음에 망연자실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우연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결정‘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몇 가지 선택지 중에하나를 골라서 스스로 납득하는 것일까요? ‘당신이 결정한 일‘
이고 당신 자신의 책임이니 혼자서 짊어지세요. 이 말은 책임소재가 ‘나‘에게 있다고 하는 것이겠지요. 일반적으로는 그렇게여길 것입니다. ‘당신이 결정한 일이니까‘라고 말할 때, 그 배경에는 ‘당신이 결정한 일‘은 당신 자신이 책임져야 하고 혼자 짊어져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꽤나 잘완성된 강한 존재일 것입니다. 처음부터 ‘나‘는 우연을 받아들이는 확고한 존재로 상정되어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과연 처음부터 강한 존재가 되어 있을까요.
다시금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결정‘이란, 혹은 그와 가까운
‘선택‘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매우 당연한 말이겠습니다만, 선택하기 위해서는 선택지가필요하고 그중 하나로 결정되지 않은 불확정한 상태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선택이란 불확정성, 우연성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고 결정하라는 것일까요. 필사적으로 위험성을 계산하려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공을 보장할 듯한 길을 계산으로 도출해 선택할까요? 아니면 실패가 무서우니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는 선택지는 피할까요? 하지만 무엇을 선택하든 잘될지 어떨지는 모릅니다. ‘선택‘에는 늘 불확정한 것이 따라붙는 법이니까요.
결국 우리는 때마침 나타났을 뿐인 우연을 마치 만들어진
‘일‘인 양 선택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불확실한 인생이 어떻게 변해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어떤 나를 허용할 수 있겠는가, 이런 질문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질문하며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택하는 순간 ‘나‘라는 존재는 확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선택함으로써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건 당신이 정했으니까‘ 같은 말로는 선택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선택이란 ‘고르고 결정한‘ 끝에 ‘나‘라는 존재가 태어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쓴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선택이란 우

연을 허용하는 행위다. 그때 우리는 선택에 해당하는 일만 결단하는 것이 아니다. 불확실성과 우연성까지 포함한 일 전체에 대응하는 삶의 방식을 결단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니까 스스를 고르는 것이 아니다. 스스를 골랐기에 ㅇㅇ 한 사람이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우연을 받아들일 때야말로 ‘나‘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성립된다.

그래서 구키 슈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뚜렷이 나타난 상황의 우연성과 직면하여 정열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무력한 초력이 운명의 자리"라고요. 풀어서 써보면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우연에 휘말리면서(무력) 그 우연에 대응하는 와중에 자신이란 무엇인지 발견해내고 우연 속을 살아가는 것(초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무력‘이라는 단어에 현혹되지는 마세요. 단순히 두 손들고 항복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구키 슈조는 동시에 우연 속을 살아가는 강한 힘(초력)을 강조했고, 초력은
‘정열적 자각‘이라고 할 만큼 강해야 한다고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정열, 강한 힘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소노 씨가적었던 "연결점이 되지 않으려 저항하면서 사람들과 진실하게마주하고 함께 발자취를 남기며 살아가겠노라 각오하는 용기"

구키 슈조는 『우연성의 문제』의 결말에서 우연을 살아가는 것이란 ‘만나는 것‘이며, 그 만남이 "도처에 상호주체성intersubjectivity을 드러냄으로써 근원적 사회성을 구성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만남‘은 또 무엇일까요. 무엇과 만나는 것일까요. 당연하지만, 만남이 있으려면 나와 당신이라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만남을 하는 나도 당신도 우연한 만남에 의해 변해버린 사람일 것입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우연을받아들일 때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발견하니까요. ‘나‘라는 존재는 그 순간 태어나니까요. 다시 말해 사람은 우연히 만난 타인을 통해서 ‘나‘를 낳는 셈입니다. 보통 자신이라 하면 이미 만들어진 존재를 떠올리지요. 하지만 지금 제가 얘기한 선택되고발견되고 태어난 ‘나‘는 홀로 성립된 것이 아닙니다. 만나는 시점에서 나와 당신은 모두 완성된 ‘나‘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타이밍이라고 적었습니다. 우연이 필연이 되고 운명으로 변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타이밍입니다. 이따금씩 지적하는 분들도 있는데, ‘타이밍timing‘이라는 단어는 사실 번역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단순한 ‘타임time‘이라면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라 해도 충분하지만, 거기에
‘ing‘를 붙여 동명사가 되는 것이지요. 시간이 태어나는, 발생의 움직임이 ‘ing‘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발생하는 시간과 자신이 똑바로 만났을 때, 우리는 시기를 맞췄다거나 시기가 맞아떨어졌다거나 정확한 타이밍이었다고 합니다. 정신의학자 기무라빈은 우연성의 정신병리』라는 책에서 다음처럼 설명했습니다.
시간이라는 현상을 ‘타임‘이라는 객관화할 수 있는(현실적인) ‘대상‘
으로서 이해하는 것 이외에 (...) 시간이란 대상적으로 고정될 수 있는 타임일 뿐 아니라 그때마다 항상 새로운 타임이 생겨나는 것,
(...) ‘대상‘으로서의 시간, 사건으로서의 시간, 실재하고 활동하는actuality 시간을 표현하기 위해 ‘타이밍‘이라는 동명사를 애용하게 된것이 아닐까.

태어나는 시간, 즉 시간의 발생점을 느끼는 미세한 감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타이밍 속에서 시간의 발생을 감지합니다. 시기를 맞췄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시간의 발생을붙잡는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단 여기서 시간의 발생이란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발생하려는 시간을 감지한 우리가 시간을 잡아서 끌어낸 것이라고 하는 게적절하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이소노 마호와 미야노 마키코가 우연하게 만나 타이밍이라감지하고 서로가 그것을 붙잡은 순간, 터무니없는 일들이 차례차례 반전되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우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우연이 일어날 타이밍을 꿰뚫어 보고 그에 맞춰발생하는 시간을 움켜잡았기 때문에 우연이 일어난 것입니다.
시간의 발생점을 움켜잡는 것, 우여곡절 끝에 붙잡아 끌어내는것이야말로 얄팍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가까이에 있는 시간의두께의 정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야 구키 슈조가 『우연성의 문제』의 결론에 적은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구키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 자신의 깊은 곳으로 빠져들도록 우연이 때맞춰 해후

하게 해야만 한다." 우연은 알아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 발생만으로는 우연이 일어날 수 없으며, 우리가 그곳에 있기에 우연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각자 끌어낼 용기를 품고,
우연을 필연으로서 받아들일 각오를 지닌 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덕에 불가능했을지 모르는 우연이 일어났습니다. 우연과
‘해후하게 한 것/마주치게 한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용기와각오가우연이 일어나는 상황은 우리 중 누군가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는 새로운 ‘나‘를 발견합니다. 바로 그때문에 구키 슈조는 우연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수한 부분과부분의 관계를 자각하는 것이며, 구체적인 형태를 갖춘 사회이전에, 그야말로 영혼을 나누어 가지는 것부터 시작하는 ‘근원적‘ 만남이 이뤄지는 상호적인 상황‘근원적 사회성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는 이와 같은 근원적 만남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 만남을 위해서는 선을 그리겠다는 각오, "연결점이 되지 않으려 저항하면서 사람들과 진실하게 마주하고 함께 발자취를 남기며 살아가겠노라 각오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 용기를 지니고 우연을 붙잡아 끌어낸다면, 근원적 만

남이 가득한 세계에 자신이 만들어낸 의미의 그물을 짜 넣을수 있습니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운명을 살아간다는 것은 세계를 향해뛰어드는 것입니다. 뛰어드는 순간 우리는 이 세계가 온갖 우연이라는 만남에서 ‘나‘를 발견해내어 새로운 ‘시작‘이 태어나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쩜 이 세계란 이토록 경이로울까, 저는 ‘시작‘을 앞에 두고사랑스러움을 느낍니다. 우연과 운명을 통해서 타자와 함께하는 시작으로 가득한 세계를 사랑합니다. 이것이 지금 제가 도달한 결론입니다.
이소노 마호 씨, 당신이 말하는 이야기는 결코 당신만의 것이 아닙니다. 발자취를 새길 각오가 있고 새로운 만남을 향해열려 있는, 사랑이 가득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저의 사색에 함께해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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