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빛난다 -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 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
휴버트 드레이퍼스 외 지음, 김동규 옮김 / 사월의책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안하고 무기력한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 빛날 수 있는 방법을 고전에서 찾아보려 시도한 책!

에필로그
빛나는 모든 것들
늙고 지혜로운 스승에게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아온 두 제자가있었다. 어느 날 스승이 말했다. "제자들아, 너희들은 이제 세상에나갈 때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빛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너희들의 인생은 복될 것이다."
제자들은 아쉬움과 흥분이 뒤섞인 채 스승을 떠나 각자의 길로 갔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들은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다시 만난 것에 행복해했고, 상대방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들으려는 기대감으로 들떴다.

첫 번째 제자가 두 번째 제자에게 시무룩하게 말했다.
"나는 세상에 있는 많은 빛나는 것들을 보는 법을 배웠지. 하지만 여전히 불행하네. 슬프고 실망스러운 것들 역시 많이 보았기에스승님의 충고를 따를 수 없다고 느낀다네. 아마 나는 결코 행복과 즐거움으로 충만해질 수가 없을 것 같으이. 솔직히 말해서 모든 것들이 빛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야."
두 번째 제자는 행복감에 반짝이며 첫 번째 제자에게 말했다.
"모든 것들이 빛나는 건 아니라네. 하지만 빛나고 있는 것들은 모두가 그러하지."

기능만을 생각한다면 어떤 컵, 어떤 커피여도 상관없다. 즉잠을 깨우는 기능만 있다면, 커피 대신 각성제나 담배 또는 마약을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언제든 대체 가능한 것은 극소량의 의미와 가치밖에 갖지 않는다. 또한 이렇게 인간 주위의 모든사물이 대체 가능한 것이 되면, 그런 상황은 그것들을 이용하는인간마저도 대체 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어느덧 사물도 사람도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커피가 잠을 깨우는 기능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 시작된 아침에 감사하며 하루를 준비하고 타인과함께 여유를 즐기는 것이라면, 그래서 커피 마시기가 분별력이 요구되는 일종의 빛나는 의례다도道가 그렇듯이와 같은 것이된다면, 커피 마시는 모든 단계와 절차는 중요한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커피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커피와 커피마시는 행위를 얼마만큼이나 설명해줄 수 있을까? 어느 과학자가특정 기분을 만들어내는 커피의 효능을 해명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커피에 함유된 특정 화학물질-예컨대 카페인-을 투여하는것으로 커피마시기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도 커피와커피 마시는 제반 행위들은 사라지고 카페인만 남는다. 같은 방식으로 과학적 설명에만 의존한다면, 바흐의 칸타타는 사라지고 주•파수만 남으며, 고흐의 자화상은 사라지고 화소만 남는다. 결국

인간마저 사라지고 신경 뉴런간의 화학물질이나 유전자 배열의메커니즘이라 밝혀진 과학 법칙만이 남게 된다.
근대 이후의 허무주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신을 인간으로, 인간을 지식으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무의미만을 양산한 셈이다. 신을 추방하면서 성스러움마저 쓸어버린 것이 근대인의 실수였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성스러움은 상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속화 시대에도 성스러운 자리는 남아있다. 우리가 아직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허무의 높은 깊어만 가지만, 아직 탈출할 희망은 남아있다. 성스러움의 흔적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변형된 상태지만, 여전히 이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은 성스러움을 다시 밝히는 길이라 말할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들이 의미로 빛나기 위해서는 성스러움을다시금 불러와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스러움을 다시 불러올 수 있을까?

저자들이 제출한 답은 다신주의polytheism라는 것이다. 다신주의라는 말에는 다시 두 가지 강조점이 있다. 첫째, ‘다多‘신주의라는 말에는 전체주의, 환원주의에 대한 경계의 의미가 담겨 있다.
서양 전통철학과 유대-기독교적 전통은 일신주의monotheism 편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일신주의는 의미의 다양성을 하나로 축소시킬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예컨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헬레네는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젊은 남자랑 도망간 행위를자랑스럽게 말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도덕의 관점 내지 가정을수호하는 헤라 여신의 관점에서 보면 지탄받을 일이지만 미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 가능한 행위로 정당화된다. 이것은 헤라 여신만있는 것이 아니라 아프로디테 여신도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점에서 다신주의는 서로 충돌하고 경쟁하는 복수적인 믿음체계를 인정하고, 각각을 충분히 고려하는 가운데 사태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현명한 일임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다신주의는 일단 성스러운 신의 자리에 지금껏 앉아있었던 것들과 앞으로 앉게될 모든 신들을 허용한다는 말이다.
둘째, 다신 ‘주의라는 말에는 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여기에서 신은 앎으로 해소되지 않는 믿음체계를 뜻한다. 동시에 인간이 주도할 수 없는 타자적 영역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행위를 하고 목적한 바를 이루는과정에는 행위주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숨어있다. 예컨대 가요 경연에 출전한 사람은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완벽히 예상할수 없으며, 또 노래를 목적의식적으로 부르기보다는 망아忘我의몰입상태로 부르는 편이 더 나을 수 있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해낸 영웅들이나 창작 활동을 하는 예술가, 현란하고 초인적인 기술을 선보이는 운동선수들은 모두 자신이 어떤 의도나 목적으로행했는지를 정확히 모른다. 그들은 전승된 문화, 오랜 시간 동안의 연습, 또 미지의 힘에 이끌려 즉각적으로 행한다. 행위 주체의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무엇이든 주체의 통제 바깥에서 벌어진일이다. 우리의 행위와 사건에는 이처럼 타자적인 계기가 언제나동반한다. 이 모든 것을 아울렀던 말이 ‘신‘이다. 그리고 이런 신에대한 믿음 속에서 경이와 감사의 마음도 생겨날 수 있다. 그런 마음에서만 의미도 증폭될 수 있다.
다신주의라는 말의 두 의미는 모두 인간 중심주의, 주체 중심주의를 경계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신주의는 타자성을 소중히 살

리려고 한다. 의미는 인간 혼자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또한 의미는 한 개별 주체의 힘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신으로 표현되는 인간 이외의 타자 내지 자연과 함께 다수의 주체가 어우러지는 과정에서 의미는 발생한다. 다신주의에서 공동체가,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문화가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속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목소리들이 커다란 파문을 이루며 확성된다. 과거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이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서 상연되어 빛을 발하듯이, 현대에는 ‘붉은악마‘의 응원과 촛불 집회가 빛을 발한다. 그 속에서 개개 구성원들은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다신주의에도 여전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공동체 중심주의가 열광주의로, 종국에는 파시즘 비슷한 것으로 빗나갈 위험이 있기때문이다. 여전히 그것도 일종의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다신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메타 포이에시스에 대한 논의로 넘어간다.
저자들은 의미를 밝히는 성스러움이 세 차원에서 일어난다고본다. 그들은 그것을 퓌시스physis, 포이에시스poiesis, 메타 포이에시스meta-poiesis 라고 말한다. 역사상 지금까지 앞의 두 가지 차원이 일어났고, 이제 마지막 메타 포이에시스 차원이 열려야 한다고보고 있다. 저자들이 보기에, 테크놀로지는 포이에시스의 일종이지만 성스러움을 파괴한다. 그러나 어쨌든 테크놀로지도 포이에시스이다. 또한 어느 누구도 전적으로 테크놀로지를 부정할 수 없

다면, 테크놀로지가 성스러움을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은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그 가능성이 무엇인지는 저자들도 언급하고 있지않다. 여하간 퓌시스, 포이에시스, 테크놀로지, 메타포이에시스에관해서 간략히 정리해 보기로 하자.
첫째, 퓌시스는 그리스어로 ‘자연‘을 뜻하는 말이다. 번역을 해서 그렇지,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자연 개념과는 조금 다르다.
퓌시스의 근원적인 의미는 생성과 소멸, 드러남과 사라짐의 강렬한 교차에 있다. 밤하늘에 순식간에 반짝였다 사라지는 별똥별이나 봄에 신기하게 움텄다가 늦가을 어느 날 갑자기 시드는 풀잎처럼, 퓌시스는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조 속에서 사유되어야 할개념이다. 스피노자가 신이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스적 자연은 신적인 것이다. 나타났다 사라지고이내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신들이 세상이라는 연극무대에 번갈아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다신주의는 일차적으로 퓌시스의 다양한 모습임이 판명된다. 이 퓌시스의 차원이 성스러움의 근간이다.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것을 살려야 한다. 하지만 시스만으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퓌시스를 참칭하는 인간중심주의가 존재할 수 있고, 퓌시스만으로는 세상에 의미가 충만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둘째, 포이에시스는 그리스어로 ‘창작‘을 뜻하는 말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그것은 없던 것을 있게 만드는 기술을 뜻한다. 일반적

으로 그것은 인간의 제작술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그런데 저자들은 하이데거에게서 영감을 받아 포이에시스를 퓌시스에 가깝게 해석한다. 즉 퓌시스가 감춰진 모습을 드러내는 힘이듯이,
포이에시스는 이전까지 감춰진 것을 인간의 손으로 현상하도록만드는 기술이다. 시스의 위용을 더욱 잘 드러내는 인간의 능력이 포이에시스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창작은 기독교적 신과 연관된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라, 퓌시스의 바탕 위에서 시스를 더 잘 드러내는 창작이라 말할 수 있다. 가령 운동선수처럼 인간에게 감추어진 몸의 재능을 극대화한다거나, 예술가처럼 작품을 통해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것을 보여준다거나, 아니면 장인처럼 재료가 지닌 특성을 최대한 드러내는 기술이 포이에시스다. 이런 창작적 활동을 통해서 인간은 자연을 잘 이해하고, 그것의 의미를 더 풍요롭게 드러낸다.
셋째, 테크놀로지는 원래 포이에시스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개념이다. 그 말의 어원인 ‘테크네techne‘는 포이에시스와 거의 같은뜻을 지니고 있었다. 둘 모두 퓌시스를 드러내는 인간의 활동을뜻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하지만 근대 이후 테크놀로지 개념은변화한다. 이제 ‘자연의 결‘에 ‘따라‘ 창작하는 포이에시스와는 달리, 테크놀로지는 인간을 중심으로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기술로 탈바꿈한다. 테크놀로지 시대로 진입하면서 포이에시스인 목수가 대패질하면서 살폈던 나뭇결과 옹이, 그 지역 나무들의 특성, 나무를 키운 토양과 기후 등등에 관한 앎은 사라져가고

있다. 거침없이 자를 수 있는 전기톱을 가진 사람에게 이전의 도수가 가졌던 앎 따위는 더 이상 익힐 필요가 없다. 더 좋은 녹치를 만들기 위해서 다양한 맛으로 구별되던 물은 사라지고 물을구성하는 화학물질만 남게 된다. 근대 이후 테크놀로지는 시스의 극히 작은 일면만을 극대화했다. 왜 그랬을까? 인간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곧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님이 밝혀진다. 왜냐하면 인간마저 복잡한 수식과 법칙, 유전자 지도로 분석되어 결국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과학기술에 매혹된 과학맹신주의자들은 또 다른 차원의 일신주의자이며 종국에는 허무주의자가 되지않을 수 없다. 결국 테크놀로지는 인간의 편의를 위해 퓌시스의일면만을 배타적이고 강압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도리어 퓌시스를철저히 은폐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마지막으로 드레이퍼스와 켈리는 메타 포이에시스를 제안한다.
메타 포이에시스란 포이에시스처럼 퓌시스를 최선의 상태로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남아있는 인간 중심주의의 흔적을 경계하는 태도를 뜻한다. 다시 말해서 메타 포이에시스는 앞서 언급한퓌시스, 포이에시스, 테크놀로지 가운데 어느 하나에 얽매이는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는 기술이고, 다른것으로 부단히 옮겨meta 다닐 수 있는 기술을 뜻한다. 그것은 예컨대 군중과 하나가 되어 일체감을 형성했다가도 어느 순간 냉철하게 빠져나올 수 있는 능력이자, 군계일학의 한 인물에 열광했다가도 파시스트와 훌륭한 정치가를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이다. 스마트폰과 GPS를 애용하다가도 때로는 그것들을 과감하게 끄고서 손으로 편지를 쓰고 창밖의 경치를 주의 깊게 살피는 지혜다. 그래야만 허무의 암흑이 걷히고, 모든 것들이 빛날 수 있다.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이 성스러움의 개념은 퓌시스의 혐오스런 출현을 막는 동시에 그것을 최고의 상태로 유지해줄것이다. 퓌시스의 위험성을 막는 방안을 알아보기 전에, 우리는먼저 우리 문화의 언저리에 여전히 이용 가능한 성스러움의 관례들이 있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퓌시스를 적절한 위치에 두기 위한 기초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육성 활동은 예로부터 포이에시스poiesis*라는 말로 불려왔다. 약 1백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를 육성하고 함양하는 포이에시스적 실천은 사물들을 다루는 방식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포이에시스적 실천 즉 창작적poietic 활동은 특히 사물을 최선의상태로 만드는 장인의 기술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고대때부터 문화에 간직되어온 실천으로서, 호메로스의 세계에서는대장장이 신인 헤파이스토스가 사물들을 빛나게 만들었고, 당시

그리스인들은 그것들에 대한 경이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헤파이스토스는 호메로스의 만신전에서 주변 인물이었다. 아이스킬로스에 이르러서야 아테나 여신의 창작 스타일이 등장하여문화를 세련되게 만들었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이해를조직했다. 이처럼 주어진 의미들을 최선의 것으로 연마하는 장인적인 창작 활동에 대한 이해는 19세기 말까지 살아 있었고,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우리 테크놀로지 시대에 그것은 여러모로공격을 받고 있는 중이다.
우리 시대의 일반적 경향이 창작적 기술의 발전과는 동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창작 능력이 여전히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영역들이 있다. 예를 들어 야구나 테니스 기술 또는 피아노 연주기술은 지금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전수된다. 연습은 운동선수나 음악가로 하여금 특정 상황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방법-왼쪽 땅볼, 3옥타브 주법 등을 익히게 해준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연습을 바탕으로 초심자가 그 분야에서 기술적으로 숙달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학습법은 매우 단조롭고 고된 것이어서,
그 과정을 통해 얻는 반사적 기술은 고생의 대가치고는 너무 사소해 보인다.
사실 기술은 이런 과정이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풍부한 현상이다. 우리는 기술적 성취가 물리적 능력의 단순한 습득 이상을 내포한다는 것을 지적해볼 수 있다. 하나의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세계를 다르게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런 기술 개념, 즉 장인적 숙련의 개념은 오늘날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우리는 기술을 주로 기술적 숙련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수레바퀴 장인은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이런 생각을넘어선다. 빼어난 수레바퀴 장인으로서 거의 마지막 인물인 조지스트는 100년 전쯤 전통적인 기예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바 있다"

나는 무늬만 목재인 것들은 절대로 쓰지 않는 구식 일꾼들을 안다.
그런 목재는 일에 전혀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안다. 숙련된 일꾼은 결심 판사와도 같다는 것을. 왜냐하면 나무는 대패(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나 도끼(역시 폐물이 된)아래에서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성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손으로 느꼈기에 나의 눈으로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문외한에게 가르칠 수는 없다. "채찍처럼 질긴"
톱밥과 "당근처럼 쐐기꼴을 한 톱밥의 차이를 어떻게 가르칠수 있으며, "썩은" 느낌과 "푸석푸석한 느낌의 차이를 어떻게설명할 수 있겠는가? 참나무건 너도밤나무건 이런 차이들은다 고르게 있다. 하지만 실제 작업을 해본 사람들만이 그것을안다20첫째로, 수레바퀴 장인은 목재 자체에 대한 숙련된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부터가 다르다. 스터트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숙련된 운동선수에게서 우리가 보는 부분과 같은 것이다. 순간적으로 골대를 감지하는 러닝백이 그렇듯이, 다년간의 경험을쌓은 장인은 숙련된 기술 없이는 볼 수 없는 차이들을 분간해낸다. 그런데 스터트는 더 나아가 우리가 이제껏 주목하지 못한 부분, 즉 작업자의 능력과 그가 분간해내는 사물의 속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스터트에 따르면, 목재는 도끼나 대패를거치면서 이전에는 보여주지 않은 성질들을 드러낸다. 우리가 시각적으로 이런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손으로 그

것들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처럼 쓸모 있는 나무를 분간해내는이 능력은 문외한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그것은 나무의 빛깔이나 결 등 외양상의 특징을 분간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나무가 도끼나 대패에 어떤 적성을 보이는지를 즉시 알아챌 수 있는가의 문제이며, 바퀴로 쓰일나무가 마차 무게를 견뎌낼지 견뎌내지 못할지를 즉각 알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당시 환경에서 이런 차이를 분간하기 위해서는나무를 쪼개고 톱질하고 대패질하는 기술이 우선 필요하다. 그리고 바퀴 형태로 짜서 농부의 필요에 맞게 마차에 끼우는 솜씨또한 필요하다. 이런 기술적 통찰력은 본질적으로 실천 속에서만발현된다.
수레바퀴 장인의 이런 통찰 속에는 어떤 신비스런 점도 없고 마법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요소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현상은 뭔가 우리에게 계시해주는 점이 있다. 왜냐하면 이 현상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전혀 새롭게 이해하도록 하는 실마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수레바퀴 장인은 나무의 쓰임새라든지 성질 등의미 있는 차이를 나무 속에서 발견하지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하지 않는다. 숙련된 장인은 톱밥이 "당근처럼 쐐기꼴"을 했는지를결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가 계산대 줄에서 짜증내는 여인을 보고 가족 중 누군가 병원에 입원했을 거라고 단정하는 방식과 아주 다른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세상 속으로 나가는 것이다. 장인의 과제는 의미를 만드는 데 있는 게 아니

라 기술을 자기 내부에서 육성하는 데 있으며, 이미 주어져 있는 의미를 분간하는 데 있다.
이런 현상에는 또 다른 측면도 있다. 수레바퀴 장인이 차이를구분하는 능력만을 가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스터트는 이 점을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잘 숙련된 장인은 작업하는 모든 나무덩어리를 구별할 수 있을뿐더러 그것들이 제각기 다른 특성과 개성을 가진다는 것을 이해한다. 각각의 나무덩어리는 늘 앞서 만진 것과는 다른 어려움을 가져다주며, 이전 것과 다른 취급을 요한다. 나무의 진짜 장인이 되려면 그것을 다루는 데 어떤 작업이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옛날 장인에게 나무가 지닌 저항성을 매정하고도 몰상식하게다루는 전기톱 따위란 없었다. 나무는 기계의 먹잇감이 아니요, 무력한 희생물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무는 그것을 잘 달랠줄 아는 사람에게 자신의 미묘한 덕을 허락하곤 했다. 마치이해심 많은 친구와 함께 일하듯이 그런 장인과 협력해서 일했다. 21스터트의 설명은 기술에 대한 두 번째 개념을 보여준다. 장인이다루는 각각의 나무덩어리는 그에게 유일무이한 것이다. 더 나아가 각각의 나무를 다루는 작업 상황들도 그에게는 언제나 유일무이하다. 이 말은 장인이 자기 행위를 미리 계획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즉 나무를 다루는 장인의 기술은 기계적이고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활동이 아니라, 지성과 유연성을 지닌 활동이라는 얘기다. 그의 재능은 실천을 통해서 구현되며, 순간순간마다달라진다. 아마도 똑같은 방식으로 작업을 반복하는 일은 장인에게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기술의 개념은, 각 상황들의 유일성이장인에게 성스러운 차원을 열어준다는 점이다. 스터트의 설명에따르면, 각각의 나무덩어리들은 서로 구별되는 자기만의 특성을가지기 때문에 장인은 작업하는 나무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나무의 덕성은 이처럼 보호받고 육성되는 가운데 드러난다. 나무에 대한 이런 친밀한 감각은 장인에게 나무에 대한 배려와 존경의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런 느낌은 작업장에서 절단되고 건조되는 나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무는 그것을 키운장소가 있으므로, 장인은 그곳의 토양, 지형, 수원에 대해서도 친숙해진다. 그는 또한 날씨와 계절에 대해서도 자세히 안다. 왜냐하면 이런 요소들로 인해 나무들은 제각기 장인의 톱에 달리 반응하게 되기 때문이다. 장인은 겨울에 벌목한 나무와 늦봄이나여름에 벌목한 나무의 건조 속도가 제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잘안다.
결국 이렇듯 다양한 실천적 지식을 통해서 장인은 나무에 대한단순한 책임감을 넘어서, 자신이 사는 고장과 땅에 대한 유대감을 가슴 깊이 간직하게 된다. 실제로 스터트는 자기가 사는 땅과

고장에 대한 장인의 존경심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특정 장소에 대한 이런 존경심은 기술적 숙련이나 반사적 반응과 같은 우리의 기술 개념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사는 곳에 대해 성스러움의 감각을 갖게 해주며,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최고의 상태로 고양시켜준다. 스터트가 현대의 기술 발전과비교하면서 수레바퀴 장인이 자기 고장에 대해 갖는 존경심을 설명하는 부분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 땅과 더불어 일하는 장인의기술과 지성이 "매정하고도 몰상식한 기계로 대체됨에 따라, 땅에 대한 존경심도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무가 즐비한 지역과 거기 거주하던 영국인들은 서로 밀접한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관계를 통해 양육된 애정과존경-진짜 토박이가 토종 나무에 대해 느끼는 마음은 거의존경심에 가까운 것이다-은 이제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게걸스런 탐욕들이 이 오래된 숲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물들이 경박한 마음으로 다뤄지는 것을 주변의 모든 것에서 보고 들었다. 나는 그런 경박함을 늘 혐오스럽게 여겼다. 나는 무거운 짐마차에 매인 말들이나 성당을 짓는 데 쓰이는 큰 돌을볼 때 그렇듯이, 그런 취급을 당하는 사물들에 고통스런 동정심을 느낀다.22즉 수레바퀴 장인에게 재료로 제공되는 나무는 단순한 물리적

속성들의 집합 이상의 것이다. 나무는 성당의 돌처럼 성스러운 것이며, 관심과 존경으로 다뤄야만 한다. 그렇게 대하지 않는 것은모독이다.
스터의 설명은 기술에 관한 설득력 있는 관념을 갖게 해준다.
스터트가 말하는 장인적 기술은 개인의 고립적이고 자동반사적인 기술 숙달과 달리, 전적으로 자기 지역과의 연대감 속에서 이루어진다. 훌륭한 관계들이 다 그렇듯이 한쪽은 다른 쪽을 최선의 상태로 만들어준다. 장인은 매정하고 몰상식한 기계가 아니라나무에 대한 지적 관찰자이기 때문에, 나무는 그에게 자신의 미묘한 덕을 드러낸다. 그러나 장인이 나무를 분간하는 능력을 함양하고 나무와 그 땅에 대한 존경심과 책임감을 갖는 것은, 나무가 이미 이런 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인과 기술 사이에는 일종의 피드백 관계가 만들어진다. 양자는 상호 이해와 존경을 통해 서로를 함양해준다.23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장인과기술의 상호 육성에 대해 포이에시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장인적 기술이 지닌 육성의 힘만으로는 퓌시스의 위험을 없앨 수 없다. 아무리 자신의 땅을 존경하는 수레바퀴 장인이라 해도 히틀러의 현란한 수사에 휩쓸리지 않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술이 사물의 의미심장한 차이를 드러낸다는 관념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삶속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지만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또 다른 종류의 창작적 기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퓌시스의 위험스런 출현과300

자비로운 출현 사이의 의미 깊은 차이를 분별하는 더 높은 차원의 기술 말이다. 이런 기술을 습득한 사람은 군중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언제나 능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정조에 휩싸여 2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킹 목사에게 환호하는 현장에 있어본 사람에게는, 그곳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이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날 국립기념공원에 있던 모든 사람이 거기에서 벗어나 냉정한 숙고와 합리적 판단으로 반응하려고 했다면, 그 사건은 원래만큼의 영향력을 가지지못했을 것이고, 우리가 사는 세계는 더 가난해졌을 것이다.
그런 정조에 휩싸여야 할 때가 언제이고 빠져나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깨닫는 것은 오늘의 세계를 사는 우리에게 결정적으로중요한 기술이다. 다른 기술이 다 그렇듯이 이런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위험이 무엇인지는 뒤에서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그런 기술이 오늘의 문화에 유용한성스러움의 형태를 길러준다는 데 주목하기로 하자.
‘메타포이에시스‘, 우리는 그것을 이런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세속 시대가 낳은 쌍둥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키를잡아준다. 즉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퓌시스의 성스러운 현상들을되찾게 함으로써 허무주의에 맞설 수 있게 해주는 한편, 퓌시스가 지닌 광적이고 혐오스런 측면에 맞설 수 있는 기술을 배양시켜 준다. 그러므로 이 세속적 허무주의 시대에서 잘 살아가려면,
열광하는 군중과 하나가 되어 일어나야 할 때가 언제이고, 발걸음을 돌려 그곳에서 재빨리 빠져나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아차리는 차원 높은 기술이 필요하다.

다. 더 나아가 이런 경험은 우리 자신을 GPS가 시키는 대로 일하는 자동화 장치로 변모시킨다. 이것 역시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가운데 하나이며, 때로는 최선의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을삶의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를 최고로 만들어주는 기예와 관심,
그리고 존경심과 경외감을 가질 기회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가치 있는 분야의 일들에 관심을 갖고, 그 안에서 의미심장한차이를 드러내는 기예를 육성하는 것이야말로 테크놀로지적인삶의 방식에 저항하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를 사랑할지결정하는 일만큼이나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 결정하기가 어렵다. 무엇이 관심가질 만한 가치를 지닌 일인지 어떻게 알수 있는가?
우리가 알든 모르든, 이미 우리는 주변의 모든 일들에 관심을가지고 있는게 분명하다. 의미가 밝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세계처럼 인간은 자신 속에 수많은 관시믜 양태들을 숨겨두고 있는 존재이기 떄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