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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그 첫 5,000년 - 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인류학자가 쓴 경제사다. 주류 경제학이 풀지 못한 아니 질문하지 못했고, 등한시했던 담론을 다룬다. 그동안 경제학에서는 공식경제를 다루어왔던 만큼 사회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인간의 삶)를 속속들이 설명하지 못했다. 인류학이 큰 덩치의 경제학을 걸고 넘어진 것은 덩치만 컸지 정작 다양한 인간의 삶을 설명하지도 못한 채, 수치화하고 사회로부터 경제를 분리화해서 자본주의의 잣대로만 활용해온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원래는 경제와 사회는 그냥 한 몸이었고 사회적 통화로 굴러가던 것을 저자는 인간경제라 부르며 아담 스미스의 물물교환이라는 허구의 신화와 대척점에 있는 원초적 부채의 신화를 옹호하면서 부채의 역사를, 그 부채가 의미한 바를 추적해간다. 화폐의 기원에 대한 견해조차도 눈여겨 볼 만하다. 국가와 시장, 정부와 상인들 사이의 투쟁은 인간조건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빚을 반드시 갚아야 하는 건 이적지 도덕적 진술이었다는 것을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다. 서구의 유별난 발명품인 자본주의, 그 시장경제 안에서 작동하는 빚이라는 건 분명 도덕적 진술이기 전에 사회체계를 잠식한 경제체계의 진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채라는 건 뭘까? 시장이 있기 전 부채라는 건 인류의 역사와 이적지 함께 해왔다는 것이다. 부채는 돈이 있기전부터 있었고 지금에도 있지만 시장논리에 의해, 혹은 국가주의 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자본주의 부채가 작동하는 방식과는 예전의 부채는 분명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비자 부채가 경제의 피가 되기 전, 원래 모습을 가진 부채는 참으로 일관성이 부족한, 도덕적 의무가 부채로 남는, 유연한 진술이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쓰이고 있는 도덕적, 종교적 언어들의 어원은 혁명운동의 단 하나의 목적인 '빚을 탕감하고 토지를 재분배하라'는 요구와 고대의 금융언어인 구원이니 응보니 하는 것의 부채에 관한 논쟁 중 생겨난 것이라 밝히고 있다. 채무자는 그야말로 범죄인 취급을 받던 유럽의 언어로 부채는 죄의식, 잘못, 죄와 동의어라는 사실이다.
부채는 두 당사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두 당사자가 아직 평등한 관계가 아니어서 서로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때 부채가 일어난다. 그러나 부채는 결국엔 평등을 되찾는데서 이뤄진다. 그러나 그 평등을 이루는 것이 관계를 맺을 이유를 파괴하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온갖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진다. P.218
고대에서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던 고리대금업자는 그야말로 사악한 인간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경제의 심장 역할을 하고 있는 은행의(특히IMF) 입지와는 분명 다르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채무자의 도덕적 진술은 이제는 반드시! 라는 강제조항이(법적부채)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정복자와 정복당한 사람들간의 채무관계 속에서 누가 누구에게 빚을 지고 있는가?
사실 인류학이 경제학과 손을 잡은 건 20세기 들어서면서다. 1915년 말리노프스키가 트로브리안드 섬 주민들의 삶을 연구하면서 유럽과 다른 삶의 방식과 경제체계는 그야말로 유럽 밖의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단초를 제공해준다. 그가 연구한 것은 진화주의 인류학과 구별되는 현대인류학을 탄생시켰고, 시장체계가 사회체계를 잠식하고 경제인이라는 완벽한 인간상을 구현해나갈 즈음 인간의 삶을 다시 인간답게 바로 잡으려 시장경제의 오류를 지적한 사람은 바로 칼 폴라니였다. 폴라니의 등장은 그야말로 인류의 축복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아담스미스나 맑스에 비해 조명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오늘날 경제인류학이 있게 만든 장본인이자 근대를 넘어서고자 하는 데 초석이 된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책에선 칼 폴라니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인류학자로서 '부채'라는 키워드로 5,000년 역사속에서 부채가 지닌 의미와 모습, 형태 등의 변용을 추적해 보여주는데 충실하다. 세상이 돈이 있기 전에 거기에 부채가 있었다. 이 책의 명제는 바로 이 문구에 있다. 경제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할 판이다.
인류학과 손을 맞잡은 학문들이 매력있는 건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출발한다는 데 있다. 인류학은 전근대를 다루면서도 인류 전체의 흐름을 통찰하는 학문이므로 인간(본성)이 무엇이냐,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로 시작하는 물음과 동시에 출발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핵심적인 문제들 대부분이 경제인류학자들에 의해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경제학이 가진 한계점과 오류들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보인다.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을 설명하지 못한 채 허깨비에게 끌려다닌 지 백년이 넘어섰다. 우리의 진정한 잃어버린 인류의 역사를 되찾는 일은 인간의 본성과 삶과 도덕적 가치들을 찾는 일일 것이다. 그 일련의 성과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이 책도 그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때 얼마나 중요한 교차점에 있는 지 알 수 있다. 인간의 이기적 본성과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슬픈 신화에서 벗어나 본디 우리가 가졌던 본모습을 찾는데 목소리를 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인간관계는 부채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 부채가 없다면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지지 않을 것이다. 부채 없는 세상은 원시의 카오스로 돌아갈 수 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질 것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P.225
그렇다면 자본주의, 근대를 넘어설 수 있을까?
저자는 마지막으로 시장의 혁명을 넘어서 사고의 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비인간적인 상업시장은 절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 그 신화를 감추기 위해 물물교환으로 차단하고 있음을 간파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일상을 채우는 드라마를 바꿀 수가 있을까? '신용경제가 이자의 경제로 바뀌고 도덕적 네트워크가 국가의 비인간적인 힘의 침투로 인해 변질되어가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는 자본주의의 기원이다. 무에서 돈을 만들어낸 금융제도는 지금까지 발명된 요술 중에서 최고다' 라고 영국은행 이사를 지낸 조시아 찰스 스팸프의 말은 자주 인용된다. 종이화폐는 부채화폐였으며 부채화폐는 전쟁화폐라는 진실 앞에 섰다. 경제학자들이 내놓은 자본주의 대안들을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정말 그 비전이 정확한 것일까? 자본주의 도박은 여기서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반세계화운동이 갖는 의미를 새겨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통해 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 세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식으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미래를 보는 시야를 넓히고, 실현에 대한 자신감을 키우고, 시대에 맞춰 넓게 보고 장대하게 사고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묻고 있다. P.672
지금 이 순간 진정으로 던져야 할 물음은 사람들이 더 적게 일하면서 어 알차게 살 수 있는 사회를 향해 나아가도록 어떻게 방향을 돌려놓느냐 하는 것이다. P.683
마지막으로 떠도는 말 말 말,,
부채와 도덕적 기준과 의무와의 관계, 종교적, 도덕적 언어의 어원은 부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 연대와 상호부조의 삶의 모습, 돈의 수단으로는 해결될 수없는 부채가 존재한다는 사실, 생명의 대체물로, 피의 부채, 인육 부채, 노예무역, 가장 오래된 화폐일부는 명예와 추락의 척도로 이용되었다는 사실, 경제학에서 내세운 잘못된 가설들, 부채가 없는 세상은 사회적관계가 사라진다는 사실, 불교에서의 업보의 의미와 신과 인간관계에서의 부채,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의 부채, 도덕적 측면이 무시된 자본주의 맨얼굴, 금융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정치적인 돈, 돈이 어떤 시대를 만나는 가에 따라 변한 모습,근대의 돈은 정부부채에서 비롯되었고, 미국의 부채는 전쟁부채이고, 대출을 권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문제의 일부인가, 해법의 일부인가, 문제의 발견없이 문제해결이 가능한가? 라는 어느 글에서 읽은 글귀가 이 책의 마지막장을 잡고 오래도록 머물러 있다.
조금 아쉬웠던 점:
책의 겉표지가 야들야들(?)해서 금방 벗겨짐. 700쪽 가까운 책을 감싸기에는 너무 연약함!
그리고 속지가 붉은 색이어서 낙서하며 책을 읽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