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

이제 그것은 천지 사방에서 위력을 떨치고 있어.

이제 은신처란 없어. 모든 것은 언제나 시선 속에 있어. 

하지만 내 가장 중요한 화두는 폭력이야. 이런저런 이름으로 불리지만 결국엔 이름도 없는 그것. 어떤 소리도 그것을 끈질기게 경고하지는 않아. 폭력은 과대평가된 어리석음을 먹고살지. 한때 종교적인 장식을 달았던 편재함이 이제 무덤덤하게 다가와 문명사회의 증명서 행세를 해. 하지만 절대로 아니야! 그것은 모든 것을 
빤하게 만들어 버리고 기억을 말소시켜. 책임감을 없애 버려. 의심을 지워 버려. 자유를 참칭해. 우리는 금치산 선고를 받은 채 버둥거리며 네트워크 속에서 살고 있는 거야. - P17

긴 호흡으로

시간이라는 파쇄기조차 두 번 세 번 평생 곁에 두고거듭 읽은 라블레의 책들로부터,그가 주조한 언어나 신랄한 조롱으로부터 아무것도 앗아 가지는 못했어. 그리하여 나는 라블레를 실컷 읽은 적이 한 번도 없었지.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변함없이 간질간질한 욕구일 따름. 실꾸리로부터 ‘계속‘이라는 실을 풀어 내는 자는 모두 긴 호흡을 갖추어야 해. 특히 책이 그대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는 확실한 자부심을 가져야 해. 보잘 것 없는 사기꾼과 고문 기술자들, 위선자와 유급 합창단원들, 떼를 지을 때만 용감한 불평가들, 얍삽하게 공부한 문맹들과-그대들도 짐작하다시피-결정적 한마디를 결코 하지 못할, 화면발 잘 받는 사형 집행인보다 책은 오래 살아남을 테니까. - P28

내겐 힘이 없어

거친 나무를 거친 도끼로 쪼개려 해.

그리하여 나는 여러 밤 동안 내 생기를 돋워 주었던그 책을 옆으로 치우고, 가르강튀아와 그의 아들, 그리고 신성 모독이 버릇인 달변의 패거리에게, 그래, 트림을 하면서, 배불리 먹게 해 주어 고맙다고 말했어. 거친 통나무를 거친 도끼로 쪼갤 힘이 이젠 내게 없어. - P29

너무 늦기 전에

너무 자주 그래 왔던 것처럼 우리는 몰랐다, 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기를.

침묵을 지키기만 했던 정의로운 자들 중 단 한 명도 나중에 흠결 없는 자가 되는 일이 없기를.

주중에 내내 침묵하다가 일요일에 스스로를 무죄 방면하는 자가 없기를.

이전에는 무심했다가 뒤늦게야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비를 세우려고 하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죄책감 없이 거울 앞에 서는 이가 아무도 없기를.

나중에 드러나는 수치심은 이미 이전부터 화분들 속에 뿌리박고 있었던 것. - P111

가르칠 수 없는 것

그 밖에 가르칠 수 없는 다른 모든 것에서 나는 왼쪽으로 멀리 서 있어, 나 자신에게서조차. - P134

유한함에 관하여

이제는 다 지난 일.
이제 너무 많은 일을 겪었지.
이제 다 스러지고 다 지나갔어.
이제 모든 것이 느릿느릿.
이제 방귀도 나오지 않으려고 해.
이제 더 이상 불쾌할 일도 없어.
곧 더 나아지겠지.
느릿느릿 남은 생을 사는 거야.
온 세상 모든 것은 끝이 있으니까..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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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달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빗소리를 계속 듣고 있었더니 불현듯 
방이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쏟아지는 빗속에 있었다. 
비를 듣는 동안 어느새 
내가 비 그 자체가 되어 
선생님 댁의 정원수에 쏟아지고 있었다.

‘살아 있다는 건 이런 것이었구나!‘
소름이 돋았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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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공포는무시무시한 거예요.

철저한 사유의 고통보다
순종의 편안함을 바라는사람은 
누구나 그런 결과에 도달할 수 있죠.

평범성은 ‘의미 없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사유하지 않는 걸 뜻해요.

이번 재판에서 드러난 행위들이
그걸 말해주죠.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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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신십훈 _ 이황


1. 입지

먼저, 뜻을 높이 세워야 한다. 
성현을 목표로 하고, 
털끝만큼도 자신이 못났다는 생각을 하지 마라.

2. 경신

언제나 몸을 경건히 하라. 
바른 모습을 지키고 
잠깐이라도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불손한 태도를 보이지 마라.

3. 치심

마음을 바로 다스려야 한다. 
마음을 깨끗하고 고요하게 유지하고,
흐릿하고 어지럽게 놓아두지 마라.

4. 독서

책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 
읽기만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읽으면서 뜻을 이해해야 하며 
말과 문자에만 매달리지 마라.

5. 발언

말을 정확하고 간결하게 하며, 
자제하고 이치에 맞게 함으로써 
자신과 남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게 좋다.

6. 제행

행동을 자제하는 게 중요하다. 
행동을 반드시 바르고 곧게 해야 하고
도리를 잘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7. 거가
가정생활에 충실하라, 
가정에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 자매와 우애를 다하며 
윤리를 지킴으로써 
서로의 은혜와 사랑을 굳게 하는게
인간의 도리다.

8. 접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만나는 사람들을 성실과 신의로 대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어진 사람들을 더욱 가까이 두라.

9. 처사

매사를 옳게 처리하라. 
업무에 임해서는 
옳고 그름을 철저히 분석하고
쉽게 분노하지 말며 욕심을 줄여 나가라.

10. 응거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에 응시하라. 
시험에 관해서는 득실을 따지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평안하게 치른 다음 천명을 기다리라.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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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 롤 로 그]

혼돈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라는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일어나는가‘ 하는 시기의 문제다.

이 세계에서 확실한 단 하나이며,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주인이다.

과학자인 나의 아버지는 일찍이 내게
‘열역학 제2법칙‘은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쳤다.

엔트로피는 증가하기만 할 뿐,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줄어드는 일이 없다고 말이다.

똑똑한 인간은 
이 진리를 받아들인다.

똑똑한 인간은 
이 진리에 맞서 싸우려 하지 않는다.

신이 없는 막간극


‘우리 모두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아버지는 이렇게 단언했다.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어떤 식으로든 
너를 지켜보거나 보살펴주는 
신적인 존재는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낸 것일 뿐이니까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란다."
그런 다음 아버지는 내 머리를 
톡톡 토닥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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