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시 50분, 밀라노의 리나테 공항 출발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트리에스테로 혼자 떠나는 여행치고는 비상식적일 만큼 늦은 시간의 비행 편이었다. 하지만 그 도시에서의 하루를 온전히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 P-1
나는 유대인의 피를 이어받은 이탈리아의 시인 움베르토 사바(Umberto Saba, 1883~1957)가 평생 견디지 않으면 안 되었던 무거운 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사바에 이끌려 여행을 떠나려고 밤이 이슥한 공항에 있는 내가 꼭 계절에 맞지 않은 까맣고 작은 곤충 같았다. - P-1
베네치아로 향하는 열차의 창을 통해 바다 저편으로 멀어져가는 트리에스테를 바라보며 나는 이탈리아에 속하면서도 계속 이국을 살아가고 있는 이 도시의 모습에, 밀라노에서 살던 무렵 너무나도 굳건한 문화에 견딜 수 없어지면 리나테 공항의 북새통으로 이국의 소리를 찾아가곤 했던 나 자신의 모습을 겹쳐보았다. - P-1
어느 해 가을, 나는 용돈을 모아 시부야의 큰 꽃집에서 히아신스 알뿌리 두 개를 샀다. 뜰의 양지바른 곳을 골라 묻었더니 한겨울에 작은 싹이 나왔다. 이런 추위 속에서 하고 걱정되어 나는 학교에 가서도 공부에 집중이 안 됐다. 낮에도 밤에도 옆에 있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헛간에서 찾아낸 몇 장의 유리판으로 그것을 둘러싸고 밤에는 거적으로 덮어주었으며 매일 아침 그 위에 뜨거운 물을 부어주었다. 히아신스의 싹은 서리에도 지지 않고, 고양이에게도 밟히지 않고 무사히 꽃을 피우기에 이르렀다. - P-1
몇 년 만에 다시 읽어본 글은 역시나 새롭다. 문장을 여러 번 읽어보기도 하다가 알 수 없이 눈물이 솟았는데, 대체로 알지 못하는 마음의 어디에서인가 작고 단단한 매듭이 풀어져, 놓여나 홀가분해진 듯한 느낌이다. 어떻게 이런 글이 가능한지...
내가 엄청난 실수를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 내가 시간을 그나마 잘 타고난 또 한 명의 ‘야만적인 정신과 의사‘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피해망상. 거기에 더해 오늘 걱정거리가 새로 하나 더 늘었다. 정신의학은 일상생활을 의학화하는 죄를 짓고 있지는 않은가? - P-1
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정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장애‘라고 부르는 것을 가르는 선을 어디에 그어야 하는 걸까? 우리가 규정한 정상이라는 개념의 범주 밖으로 벗어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치료해야 할까? 누군가 자신이 예수라고 믿고 동네 수영장 물 위를 걸으려고 할 때 그런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할 여유가 있을까? - P-1
... 가끔은 우리 마음에 존재하는 어두운 면모들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타이레놀을 100개 샀지만 그중 한 개를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오염된 약을 먹고 배탈이 날까 봐 99개만 먹고 자살시도를 한 일화처럼 말이다. - P-1
하지만 현실에서 그토록 극적으로 반응할 이유는 전혀 없다. 어느새 나는 극도의 충격, 공포, 슬픔 같은 감정도 전문가답게 로봇처럼 흡수한다. 감정에 너무 많이 동요되지 않는 편이 더 견디기 쉬우니까. - 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