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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지음, 변광배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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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품을 쓸 수 없을 것 같고, 더 이상 써야 할 작품이 없으며, 내가 써야 할 유일하게 남은 것은 써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르트는 이런 식의 작품에 대한 작품의 담론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작품은 내가 그것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메타담론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지만, 나도 그렇다. 리뷰를 쓸 수 없을 것 같고, 내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쓸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 작가들은 왜 쓸 수 없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읽고도 이해한 것이 별로 없어서 그렇다. 그래도 내가 이 책에 대해 말해야 한다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롤랑 바르트? 몇 번 들어본 이름이지만, 그다지 호기심도 없었고 아는 것도 없었다. 다만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 노트>라기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푸코의 강의는 매우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라고 할까. 재미는 둘째 치더라도 어려웠다. 특히 1부는 더 그랬다.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는 2부로 되었다. 1부는 “소설의 준비: 삶에서 작품으로”란 제목으로 1978년 12월부터 1979년 3월까지 진행된 강의이고, 2부는 “소설의 준비: 의지로서의 작품”으로 1979년 12월에서 1980년 2월까지의 강의다. 바르트는 “소설의 준비” 강의를 마치고 이틀 후인 1980년 2월 25일에 교통사고를 당해 한 달 후에 세상을 떠났다.

 

“소설의 준비”는 말 그대로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 작업이다. 작가들이나 작가지망생들에게는 매우 실용적인 강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일반적 의미의 “실용”을 생각하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작법에 관한 강의도 책도 접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그런 것들과는 다를 것 같다. 작가의 기본적 태도?, 가치관? 이라고 해야 할까?

 

1부의 대부분은 ‘하이쿠’에 대한 칭송(?)이다. 하이쿠, 하이쿠, 하이쿠!

“5, 7, 5의 3구(句) 17자(字)로 구성되는, 일본 고유의 단시(短詩). 극소수의 단어로 많은 것을 표현하고 암시하는 예술이다.” 하이쿠의 사전적 의미다. 바르트가 인용하는 많은 하이쿠는 내가 보기에 참 평범하다. “겨울바람이 불어오자 / 고양이들의 눈이 / 깜박댄다.”

 

바르트는 하이쿠를 일종의 ‘메모하기’ 로 본다. 메모 하기는 소설의 전 단계, 글쓰기의 최소 행위다. 여하튼 하이쿠에 대한 과도한 찬사를 보며 드는 느낌은 이런 것이다. 이사람 저사람 술꾼의 손에 돌고 돌던 술병을 두고 수억이 넘는 조선 최고의 백자라 감정하는 <TV쇼 진품명품>을 지켜보는 15세기 주모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하이쿠 때문에 1부는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도 참 웃기다. 이해를 못하니 흠집을 낸다.

 

1부가 하이쿠라면 2부는 프루스트다. 발자크, 플로베르, 말라르메, 카프카도 있지만 단연 프루스트다. 마침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2권은 읽은 터라, 하이쿠보다는 훨씬 낫다. 그런데 펭귄클래식 코리아는 1,2권이 나온 지가 언젠데, 아직 3권을 내놓지 않는다. 7권까지 읽으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다. 프루스트가 전권을 쓴 기간보다 전권 번역이 더 오래 걸리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다. 여하튼 2부에는 조금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도 있고 심히 공감되는 부분도 있다. 가령 글쓰기 욕망.

 

바르트는 글쓰기의 편집증적 욕망에 대해 말한다. 카프카는 밤의 ‘낙서’를 자신의 욕망으로 여겼고, 플로베르는 ‘글쓰기라는 길들일 수 없는 환상’에 대해 말했다. 작가는 “궁둥이에 욕망을 달고” 산다. 편집증적 욕망은 우스꽝스럽지만, 우스꽝스러움이란 그 자체가 배제와 고독인 만큼 대단한 면이 있다. 특히 원고는 순수한 욕망의 덩어리다. 모든 원고가 지루한 것은 이 때문이다. 타인의 욕망과 소통하고 타인의 욕망에 흥미를 갖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출간된 작품과 원고는 다를 수밖에 없다. “작가의 욕망을 매개한 작품은 그에게서 그의 욕망을 조금 빼앗습니다. 내가 독자로서 그 욕망을 견딜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p241”

 

어쩌면 우리가 밤에 쓴 편지처럼 순수한 원고는 다음날 아침 우리를 질식시킬 지도 모르는 걸까? 타인의 순수한 욕망만큼 감당하기 힘든 것도 없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쓰기와 읽기의 관계다. 바르트는 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즉 글쓰기가 읽기에서 기인한다면, 이 두 행위 사이에 강제가 있다면, 어떻게 쓰도록 강제당하지 않은 채 읽을 수 있을까요? 달리 말하자면, 이 질문은 괴물과도 같은 다음 질문입니다. 어떻게 작가들보다 독자들이 더 많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읽으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요? 글쓰기 행위로 이행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위대한 독서 애호가가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억압일까요? 나는 이 질문에 답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단지 이 질문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만을 잘 알 뿐입니다. 결국 나는 항상 독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다시 말해 글을 쓰지 않는 많은 독자들이 있다는 것에 놀랍니다. 여전히 같은 질문입니다. 소통 불능의 본질인 질문입니다.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어떻게 타인의 욕망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어떻게 이 욕망 -이 쾌락- 에 동일화될까요?) 관대한 태도 (이해하지 못하는 욕망을 이해하려는 척하는 태도)에 의해 묻혀 버린 전형적인 질문입니다. p242」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읽기 위해 읽는가, 쓰기 위해 읽는가? 작가도 아니고 작가가 될 의지(능력)도 없지만, 내 안에 글쓰기의 욕망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서둘러 책을 읽으며, 머릿속에 리뷰를 먼저 쓸 때가 있다. 어떤 문장이 내 기억을 강제할 때 (프루스트 식으로), 나는 책 내용보다 기억을 따라 가기를 즐긴다. 바르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글쓰기를 하고자 하는 한 주체의 이야기’ 라고 한다. 스크립투레 (글쓰기-의지)의 소설이다.

 

 

 

나는 이 리뷰에서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의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 하지 말았어야 했지만, 책을 제공받은 대가로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르면서 말하고 있다. 이 글은,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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