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소파 - 세상에 말을 건네다
호르스트 바커바르트 지음, 민병일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조금은 떠들썩했던 분위기의 사진수업시간. 갑자기 선생님께서 화통하게 웃으셨다. 아이들은 일제히 선생님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선생님은 들고 있던 사진 한 장을 우리들을 향해 내보여 주셨다. 그건 그 선생님 앞에 앉아 있던 학생의 작품이었는데, 우리들은 그 작품을 보자마자 박장대소하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 사진에는 엄청난 용기와 불굴의 의지와, 그리고 성인이 된 청춘이라면 환호할만한 '섹시(sexy)'가 한 자리에 있었으므로.

 

설명을 더 해보자면 이렇다. 사진은 시청 앞 잔디밭에 덩치 커다란 3인용 소파를 옮겨다 놓고, 섹시하게 차린 요염한 자세의 여인을 찍은 것이었다. 감히 시청이라는 정부기관 앞뜰에 소파를 가져다 놓은 용기도 용기지만, 그것을 그곳까지 실어 나른 불굴의 의지, 그리고 정치인에게 X먹으라는 의도로 비춰질 수 있는 과감한 이미지가 모두의 쾌재를 불러낸 것이었다. 그 사진을 찍은 학생은 소파를 옮겨가며 세상의 여러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은 어떤 사진작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신은 비록 소파를 들고 여러 곳을 다니지는 못하지만 정부를 향해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과 그 사람들의 다양성을 담아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때 그 학생이 언급한 사진작가가 바로 호르스트 바커바르트이다. 물론 9자나 되는 긴 이름을 내가 기억할 리 없지만 <붉은 소파>라는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땐 매우 뚜렷하게, 그 때 그 학생이 말했던 작가임을 알 수 있었다.

 

추억 반, 호기심 반으로 펼쳐 본 이 책은 정말 독특했다. 그동안 봐왔던 인물사진('초상'이라 불리는)은 크게 두 부류였는데, 하나는 인물의 얼굴을 위주로 그 사람의 내면세계와 숨겨진 모습, 혹은 그 인물이 가진 고유성을 잘 포착해 찍은 사진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한 사람을 말해줄 수 있는 다른 것들을 곁들여 그 사람이 살아온 삶과 관심사, 업적 등에 대해 묘사하는 사진들이다. 대체적으로 이런 사진들은 그 사람이 주로 거하는 장소를 택하기 마련이고(장소마저 그 사람을 설명해 주므로) 야외풍경이 될 경우 십중팔구 그저 배경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또한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인물사진의 경우에서도 아방가르드나 개념예술 등을 표방하면서 그로테스크하거나 암울하거나 난해한 것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붉은 소파>의 인물사진들은 확연히 달랐다. 한 사람의 특성과 삶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사적인 장소가 아닌 공적 장소로 나선 것이 대부분이고, 때로는 대자연이 그 사람을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더불어 파격적이고 실험적이긴 하지만 어둡고 난해한 느낌은 없고 따스하고 정겨우며 보는 사람의 마음을 밝게 한다. 책 설명에 따르면 호르스트 바커바르트는 인물 사진에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작가라는데, 가히 그 명칭에 동의할만하다.

 

그런데 왜 하필 붉은 소파일까? 사진마다 늘 등장하는 소파에 대해 한번쯤은 답을 내려고 애써보지 않을 수 없다. 언뜻 떠오르는 것은 귀한 손님에 대한 예우이다. 누굴 만나든 붉은 소파로 초대되는 순간 아주 특별하고 귀한 사람으로 대우받는 것이다. 그리고 붉은 색은 다양하고 난잡한 색깔들 틈에서도 눈에 잘 띄며 특히 자연의 푸른빛과도 매우 잘 어울린다. 어쩌면 인터뷰의 대상이 모두 서구인이라 그들의 피부색깔에도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붉은 색에는 뜨거운 피나 태양과 같은 생명력이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는 자리라면 이 색깔이 가장 적합한 것이 아닐까?

 

사진 속에서 인터뷰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정말 다양하다. 제인 구달, 고르바쵸프 같은 유명인도 있는가 하면 예술인, 기자, 과학자, 군인도 있고, 서점 주인이나 항구 노동자, 농부, 미용사, 심지어는 연금생활자와 죽은 자(누군가의 묘지), 그리고 그저 쌍둥이 자매, 대학생, 초등학생도 있다. 이런 구성을 보면 사진 인터뷰를 통해 유명한 사람들의 명언과 같은 답변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답변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며,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소박한 바램 내지는 항변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터뷰의 질문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지며 예술가나 철학자나 과학자나 그리고 노동자나 농부나 아이들이나 답변들은 하나같이 사려 깊고 순수하며 삶에 대한 성찰과 애정을 담고 있다.

 

<붉은 소파>는 사적인 공간에 있어야 할 물건을 외부로 내놓음으로써 세상을 더욱 아늑한 어떤 곳으로 변모시킨다. 우연히 마주친 사람과 친구처럼 대화하는 듯한 느낌이 이 소파로 인해 생성되는 것이다. 또한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붉은 소파 하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친절한 평등의 마음씨 같다. 아무런 조건도 내세우지 않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같은 자리에 초대해 똑같은 발언권을 주었으니 모두 다 소중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생각을 펼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양한 사람들의 개성을 살리는데 있어서 만큼은 소파 역시 무궁무진하게 변모한다. 기본적으로 놓여지는 각도가 변화하는 것도 그렇고, 때론 소파의 붉은 천만 사용하기도 하고, 때론 소파의 방석부분만 사용되거나 멀찌감치 밀어놓기도 한다. 그러므로 같은 소파가 다른 사람을 만남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는 것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세상에 말을 건네는 이 소파는 여기에 누구라도 앉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기 위해 사진가가 건네 올 질문들에 답변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게도 한다. 만일 호르스트 바커바르트가 "여기 앉으실래요?"라고 물어올 때 흔쾌히 응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삶을 잘 알고 나의 얘기를 세상에 들려줄 만큼 단단한 내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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