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여름이다.
여름이 왔다.

 

드디어 이 책을 읽을 때가 되었나 보다.

 

 

 

 

 

김유진의 단편소설집 『여름』을 한 달 전쯤부터 사놓고 기다렸었다. 단편 <여름>은 이미『2011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집』에서 읽었는데, 표지를 보는 순간 그만 ‘아!’하고 반해버린 것이다. 표지에 반해버린 것은 단순히 그림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났을 때 불쑥 떠올랐던 꿈의 색채(내 생애 최초로 멜라토닌을 먹고 자던 날 꿨던 꿈과 같은), 그 강렬했던 꿈의 색채들이 고스란히 책 표지로 환원돼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순간 섬찟했다. 짜릿한 공감이란 이런 것일까? 그래서 그녀의 색채만으로 엮어진 한 권의 단편집을 읽고 싶어졌다. 지금으로선 작가가 특별히 사랑하는 작품, <바다 아래서, Tenuto>를 약간 맛본 정도인데, 매우 만족스럽다. 무슨 큰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심리묘사가 두드러지거나 긴박감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저 지독한 담담함과 미세함 속으로 끊임없이 빠져드는 느낌이 좋다. 이런 느낌, 이상하게 아늑하다.

 

Tenuto. 지그시 눌러 그 음(音)을 충분하게 내주는 기법이라고 알고 있다. 음악이라곤 아주 어릴 적 피아노를 조금 친 것 밖에 없는데, 내가 어째서 Tenuto를 기억하고 있을까? 어쩐지 김유진의 작품 곳곳에 배어있는 (그녀의) 유년에 관한 기억이 침묵하고 있던 나의 유년의 음(音)을 회동시킬 것 같은 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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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에는 정말 너무 오랜만에 요리책들을 샀다. 재작년인가 채소요리가 급! 필요한 바람에 서평단 도서를 덜컥 신청한 걸 제외하면 내가 관심있는 책으로 직접 골라 사보기는 어언 10년쯤 된 것 같다.

 

이렇게 간만에 요리책을 사게 된 것은 내가 '주말 요리당번'이 되었기 때문이다. 엄마께서 조카를 돌보시느라 너무 지치셔서 나의 서포트가 필요하게 된 것. 그래서 내게 쌓인 객지생활 8년의 연륜을 고스란히 갈고 닦은(?) 요리실력으로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요리는 거의 속도전인 바, 결국 콩나물에는 꼬리가 나타나고, 부엌바닥에선 생쌀이 종종 출몰하며, 세간살이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정산해 보니 깨진 접시가 1개, 종지 2개, 컵은…무려 4개다..ㅠ.ㅠ). 하지만 거기서 거기인 반찬거리에 새 바람을 불어넣고자 하는 노력만큼은 가상하다. 그러다 보니 평소 별로 관심없던 웰빙푸드에 드디어 입문한다.^^;

 

 

 

 

 

 

 

 

 

 

 

 

 

 

 

 

이 중 『친정엄마네 레시피』는 웰빙과는 상관 없지만 선물해 주려고 산 책이다. 사실 이 책은 내가 관심있던 다른 책을 보다가 엄청나게 기발하고 재미있는 100자평을 타고 서재를 방문했다 알게 되었는데, 정말 요리초보를 위해 기초부터 비법까지 차근차근 잘 알려주는 좋은 책이라 행운이었고, 더불어 감사하다(나중에 보니, 알라딘에서 제일 유쾌하신 분 같다^^).

 

『마크로비오틱 밥상』과 『저염식단』은 식재료의 조합이 창의적이거나 건강 위주로 되어있어 도움이 된다(물론, 일상적인 요리들도 있다). 하지만 일단! 오타가 좀 있다는 점이 아쉬웠고(급히 출간된 느낌), 조리순서를 건너 뛰거나 번역(『마크로비오틱 밥상』은 저자가 일본인이다)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어 신뢰도가 떨어진다. 그래도 나름대로의 짠밥이 있으니, 뭐..그런대로 극복할 만 하다. 강추하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요리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레시피들을 나름대로 소화시켜 보다 유용한 요리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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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책들과 함께 주문한 책 때문에 ‘풋~!’하고 웃어 버렸다. 살 때는 몰랐는데, 박스를 열어보고야 깨달은 것이다. 하필 요리책들 틈에 섞여있는 책이 르 클레지오의 『허기의 간주곡』이라니…포만과 허기, 떨어질 수 없는 한 쌍이라, 이거지.^^

 

 

 

그런데 중고샵에서 구입한 이 책의 표지에서 뭔가가 툭 떨어진다. 주어보니 어느 여자아이의 사진 2장. 하나의 사진에 또렷이 적힌 날짜를 보니 누군가의 어릴 적 사진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조금은 얼떨떨해진 마음(이 사진을 어떻게 해야하나…)으로 책장을 넘기는데 빨간 줄 하나가 선명하게 눈에 띈다.

 

행복하다는 것, 그것은 기억할 것이 없음을 말한다.

 

 

이해는 가지만 흔쾌히 동의할 수 없는 문장.
그러나 소설에겐 진리를 정의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며 이내 의문에 빠져든다.

누굴까? 설마 행복을 위해 이런 방법으로 기억을 떠나 보내려는 것은 아니겠지. 내 추측이맞을 확률은 거의 없겠지만 헌 책 속에 버려진(?) 사진과 밑줄 친 문장은 이리도 오묘하게 엮인다. 암튼, 중고샵에서는 이 사진의 주인을 찾아 줄 방법이 없다고 하는데, 내 생각엔 주인장이 사진을 찾는 게 더 행복할 것 같아, 혹시나 이 글을 볼까..싶어 함께 올려본다(주인은 얼굴 부분을 가렸어도 알아보시겠지?). 언제까지고 보관할 수는 없지만 8월 말까지는 기다려 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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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구입’을 드디어 끝냈다. ‘읽기’를 끝냈다고 말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아직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했다.ㅡ.ㅡ; 이 책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총 6권으로 나눠진 분량 때문에 구입할 엄두조차 못냈다가 최근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라는 책이 출간되면서 다시 돌아보게 됐는데, 의외의 횡재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가이드 성격의 책이 아니라 페르낭 브로델이 직접 강연에 사용했던 원고를 소책자로 묶은 것에 해제를 더한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직접 큰 줄기만 간추린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를 맛볼 수 있고, 핵심 용어와 이론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브로델이 중요시 여겼던 ‘장기지속longue durée’이라는 개념도 표와 자세한 설명을 통해 이해 쉽게 풀어 놓았고, 삼층집 모델 또한 간결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눈에 띄는 것은 “이 교환 영역을 경제생활이라고 칭하여 물질생활과 ‘대조’하고 또 자본주의와도 ‘구분’하고자 한다”(p.170)는 대목인데, ‘경제생활≒물질생활≒자본주의’라고 막연히 인식하고 있던 나로서는 브로델의 이러한 시각이 놀랍기만 하다. 여기에 대한 반론도 있다지만 장기지속의 역사를 통해 자본주의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임에는 틀림이 없다.

 

 

 

주말 동안 지금까지 읽고 리뷰를 쓰지 못했던 책들을 모아 한꺼번에 페이퍼로 정리하려 했다가 책장정리를 하는 바람에 계획을 바꿔 특별한 기억이 담긴 구매기를 쓰게 되었다. 몰아쓰기 리뷰 페이퍼는 이달 말에 상반기를 정리하며 완성해야지. 올해는 봄을 심히 타느라 책 읽기에 집중을 못했는데, 이제 내가 좋아하는 여름이 왔으니 발랄한 리듬으로 열심히 읽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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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2-06-12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삼매경에 빠질 분홍신님이시로군요, 에헴.
ㅎㅎ 저는 <채소가 맛있다>가 땡기는데요, 어째..요리하신 것들도 좀 올려 주시와요. 군침 흘릴 준비는 진작부터 해놓겠습니닷. >.<

탄하 2012-06-12 23:45   좋아요 0 | URL
실은, 앞치마를 두르지 못해요.
요리만하면 배부분이 다 젖어서 앞치마를 하면 옷을 두 벌 적시는거라.ㅎㅎ
(그래서 집안 일 중 설거지를 제일 안 좋아해요. 싱크대 물이 다 튀어서...)

<채소가 맛있다>는 소개한 책들보다 조금 낫긴 한데, 구하기 힘들거나 제철 아니면 비싼 재료도 있고, 조금 난이도 있는 서양요리가 섞여있어요. 실용적인 일상의 요리, 초간단 요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면 꽤 괜찮구요. 이 책에서 마+오징어 부침개, 방울토마토 마리네이드, 우엉고추잡채 등등을 해봤네요.

원래 제가 지난 주 만들었던 '흑미마늘죽'(요건 <저염 밥상>의 레시피)을 올리려다가 이게 갓 지어 담았을 때 윤기있는 사진이 아니고 마지막에 남은 거 덜어놓은 사진이라 식욕 떨어질까봐 안 올렸어요. 가뜩이나 까만색인데 껄쭉하니 뭉테기로 보이니 아무래도 자제하는 편이 나을듯 하더군요. 맛은 좋았지만..^^ 나중에 보기에도 괜찮은 일품요리를 만들면 올려볼께요. 아직은 그저 국과 반찬만 만들거든요. 저장용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