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개념어총서 WHAT 6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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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운전 좀 하나?"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질문을 받아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운전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흔히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면허는 예전에 따 놓았는데, 실제 운전한지는 꽤 오래 됐어요. 장농면허죠, 뭐."

 

운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한 때 운전하고픈 욕구와 의지가 있었으며, 이미 시험에 통과해 '쯩'까지 다 받아 놓았는데 어째서 과감하게 도로에 나아가 차를 몰지 않는 것일까? 물론 비용과 환경을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혹은 큰 교통사고를 당해 운전이라면 치가 떨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분명한 사실은 운전대를 놓은 시간 동안 운전에 대한 감각은 뒤떨어지고 애써 마련해 놓은 면허증은 효용성을 잃게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위의 대화를 그대로 민주주의에 대입해보자. 그리고 묻는다. 민주주의가 세상에 필요한 것이라 인지하고 혹자는 한때 민주화의 의지로 불탓음에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민주국가의 국민임을 증명하는 사진과 13자리 숫자가 또렷이 박힌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어째서 과감하게 세상에 나아가 민주주의를 실행하지 않는 것인가? 이것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보고 내 스스로에게 던져 본 질문이었다. 장농속에 묵혀놓고 오랫동안 돌아보지 않았던 운전면허증과 대학교 교양강의를 마지막으로 단 한번도 꺼내보지 않았던 내 마음 속의 민주주의가 너무도 흡사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둘 다, 청춘이 꽃필 무렵 내게로 왔다가, 둘 다, 현실에 부대끼는 가운데 멀어졌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책의 제목을 따라 이 질문에 답해보려 하였다. 먼저 생각난 것이 '국민에,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이라는 구절,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라는 우리나라 헌법 첫머리, 그밖에 다수결의 원칙, 투표, 주권, 민주화 항쟁과 같은 단편적인 단어들...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을 통해 정의할 수 있는 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되는 나라' 정도의 상식적인 한 줄밖에 되지 않았다. 코스 연습을 하듯 학교라는 틀 안에서 주워삼킨 단편적인 지식들은 결국 세상에 나아가 민주주의를 외치기에는 역부족인 듯 했다. 비록 안다고 해서 모든게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지식이 부족하다고 행동할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할만한 누군가를 지지하려면 적어도 '민주주의'의 의미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이 보였다. 우리 사회 민주주의 관념의 핵심을 비판하겠다는 저자는 '국민-주권-대표'라는 대표적인 형식을 근대 정치의 기본도식라 일컫고 있는 것이었다. 그동안 통념에만 기대어 민주주의를 안다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국민-주권-대표'라는 끈끈한 유대관계가 깨어진 민주주의를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어원부터 살펴보면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민주주의라 부르는 '데모크라시(democracy)'는 민중을 뜻하는 '데모스(demos)'와 힘을 나타내는 크라토스(kratos)'를 합한 말이다. 이것은 근거와 근원을 뜻하는 '아르케(arche)'를 붙여 만든 '모나키(monarchy/군주정)'나 '올리가키(oligarchy/과두정)'와는 확연히 다른 정체(政體)이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아르케는 '아르케 없음'이기 때문에 지식도, 재산도, 혈통도, 성별도, 그리고 심지어는 수적 우세도 다른 어떤 것을 억압하거나 배제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더 나아가 민주화 투쟁이란 이런 근거들이 근거 없는 것들임을 폭로하는 과정, 근거에 의해 구분되고 소외된 민중들의 힘을 발휘하는 과정이다. 이에 대해 자끄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면 '말할 권리를 갖지 않는 자가 말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의미와 함께 탐색되는 것은 주권과 대의제이다. 우리는 흔히 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민주주의라 알고 있으며 현대와 같은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간접민주주의를 채택하고 그 대표가 되는 사람을 선출해 국민의 주권을 대행하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재고해 볼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대의제의 기원을 보면 민주주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대의제는 군주제에서도 가능하며 그밖에 다른 정체에서도 실행할 수 있다. 오히려 근대 민주주의야 말로 대의제의 하나로 등장했다고(p.71) 역으로 설명해야 옳은 것이다. 뿐만아니라 대의제는 이를 통해 지배권을 얻은 이들이 데모스, 즉 군중들이 직접 지배할수 없도록 취한 정치적 장치에 불과하다. 진정한 민주주의란 대의제를 잘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귀속된 주권으로 환원되지 않는 비국민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양상들이 사이(inter)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경지를 의미한다.

 

이처럼 통념상 알고 있던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나면 민주주의의 목표가 어디에 있을지 사뭇 궁금해 진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너무도 이상적인 민주주의의 실현 가능성이 막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토대로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저자의 주장을 들어보면 희미하나마 '정치'에 가려졌던 민주주의로부터 한줄기 빛이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점점 늘어가는 NGO, 정치적 힘을 갖지 않는 고등학생, 비정규직 노동자, 평범한 주부, 네티즌 등의 권리 주장이 바로 새로운 '이후' 민주주의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80년대 시위의 주도자였던 대학생, 노동자, 시민과 비교해 보면 사뭇 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행히도.

 

이 책은 민주주의의 기원으로부터 시작해 민주주의를 증오하고(사실상 민주주의는 초기에 많은 비난과 조롱을 받기도 했다) 폄하했던 철학자들의 주장에서 그 약점을 통해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가 통념상 올바르다 생각하는 국민주권과 대의제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그리고 대부분의 책들이 그렇듯 우리 민주주의의 현 주소를 짚어보는데, 이것이 끝이 아니였다. 마지막 장에 저자는 '민주주의에 대한 단상'이라고 하여 우화형식의 단편적인 글들을 수록한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글들은 이 책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우화를 통해 스스로 깨우쳐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단상들은 주로 인민(혹은 시민)의 역할(여기서는 역할이 곧 권리이기도 하다)을 각성케 하는 효과가 다분한 글들로, 그동안 정치 잘 할 사람을 뽑는데 혈안되어 갑론을박하고, 좌파우파하고, 보수진보했던 모습을 반성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는 누구를 대표로 뽑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데모스인 우리들이 그럴만한 힘이 있음을 깨닫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특히 '나꼼수'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지금,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지금,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말해주고 얼마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가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가 민주주의를 향해 가는가, 진정한 민주주의는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할 때이다.

 

이 책이 출간될 무렵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라는 책이 커다란 관심을 모았었다. 책도 자그마하며 가격도 비슷한 두 권인데 하나는 무척 각광을 받았고, 다른 하나는 그 힘에 눌려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이후 공교롭게도 비슷한 현상이 한 번 더 있었다. 우리의 호프 김어준 총수께서 <닥치고 정치>라는 책을 출간할 무렵, 자끄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라는 책이 출간되었는데, 역시 하나는 전례없는 판매고를 올렸고, 다른 하나는 정치철학계 구루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까 곰곰 생각해 보면, 먼저 현재 우리 현실이 '분노'가 먹히고 '씨바'가 먹히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누군가 꾹꾹 참고 있던 마음을 총대메고 폭발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물론, 진정성과 함께. 반면 민주주의는 현실에선 크게 매력이 없다. 지루한 철학자들의 언변 일색이며 각종 논리와 비판이 건조하게 이어진다. 또 한편으로는 민주주의를 논하는 학계와 실제적인 시민들의 삶이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론으로만 가득찬 민주주의를 시민의 언어로 표출해 줄만한 학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는 현재 대선을 코앞에 둔 상황에선 민주주의 보다 선거에 더 관심이 모아진다. 그러나 여전히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민주주의의 참된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되며 정치가 주목받는 시기이기에 오히려 민주주의를 돌아볼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꼼수'를 듣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시간을 내어 이 책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나꼼수'에 공감하고 박수를 보내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어떤 통치자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MB도, 김어준도 아닌 '나꼼수'의 청취자가 데모스이며 크라토스임을 깨달을 수 있다(우리들이 힘을 가진 통치자다!). 하여, 청취자들이 민주주의의 의미를 알 때 김어준의 방송이 더 빛을 발하고 의미가 깊어질 것이며 그것이 코스를 벗어나 제대로 된 도로를 달리는 민주주행에 기어를 넣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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