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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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첫째, 그는 웃음을 잘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1Q84> 그 주제의 무거움 때문에). 둘째, 그는 우리네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 아닌 4차원 세계의 사람일 것이다(<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상상력 때문에). 마지막으로 그는 매우 고리타분하며 보수적인 아저씨일 것이다(이건 특별한 작품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냥 웬지 그럴 것 같아서, 혹은 사진 때문에?).  

 

사실 이 같은 오해 때문에 <잡문집>을 읽기 시작했을 때도 큰 기대는 없었다. 정말 '잡!문!'을 모아둔 책이니 작품에 대한 뒷 이야기나, 쓰다 만 조각 글들, 거기다 자기 잘난척이 가득한 오만한 글들이 실려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편 한편 넘기다보니 '내가 생각하던 하루키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 사람, 정말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사람이잖아!

 

소설이 아닌 에세이로 만날 때 우리는 그 작가의 진가를 알 수 있다. 물론 소설도 자전적인 이야기가 녹아 들어가게 마련이지만, 자신의 생각과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올 수 밖에 없는 에세이의 경우라면 아무리 숨기고 싶어도 자신을 숨길 수 없으며, 아무리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위장하고 싶어도 절대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잡문집>을 통해 유쾌한 하루키씨를 만날 수 있다. 하루키의 작품이라고는 꼴랑 두편 반(<1Q84>와 <상실의 시대>, 그리고 반쯤 읽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뿐이니) 읽고 이 책을 읽었으니 아직 그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난 분명 하루키에게 반해버렸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나의 정신은 온갖 잡다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마음이란 정합적이고 계통적이면서 설명 가능한 성분으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나도 그러한 내 정신 안에 세세한, 때로는 통제되지 않는 것들을 긁어모으고, 그것들을 픽션=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다시 보강해갑니다.

_ 머리말, 15쪽 중에서

 

 

이 책 <잡문집>은 굳이 분류를 하자면 이런저런 목적으로 하루키가 써왔던 여러 책들의 서문과 해설, 영화 평론, 인사말과 메시지, 짧은 픽션 등이 담겨 있다. 그가 머리말에도 밝혀 놓았듯이 우리는 여러 글들 속에서 소설의 초기 단상을 발견하기도 하고, 작품 탈고 후의 생각의 변화도 읽어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아애 하나의 부로 엮은 <언더그라운드>작품에 관한 에세이들이 제일 마음에 들었는데, 작품에 대한 그의 솔직한 생각들 덕분에 그 책을 읽고 싶어졌고, <잡문집>을 읽는 도중 그 책을 주문하게 만들었다.

 

제일 재미 없겠지라고 생각했던 '각종 인사말과 메시지'는 하루키의 유쾌함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 의외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이었다. "수상은 매우 기쁘지만, 형태가 있는 것에만 연연하고 싶지 않고 또한 벌써 그럴 나이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은 작품이 받는 것이니 나 개인이 이러쿵저러쿵 말할 처지는 못 된다","4월 중순에 <1Q84> 3권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품절은 곤란하니 그 직전까지만 활기차게 판매되었으면 합니다." 등등 그의 수상소감은 평소 하루키의 겸손함과 유쾌함이 묻어났고, 2009년 논란이 일었던 예루살렘상 수상 수락과 상을 받으러 가기까지의 작가로서 느꼈던 번뇌와 고민은 예루살렘상 수상 인사말 속에 녹아있다.

 

지인의 따님에게 보낸 결혼식 축사 "나도 한 번밖에 결혼한 적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별로 좋지 않을 때는 나는 늘 뭔가 딴 생각을 떠올리려 합니다. 그렇지만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좋을 때가 많기를 기원합니다. 행복하세요." 는 박수를 보내고 싶을 만큼 멋졌고, 나도 언젠가는 이토록 유쾌한 결혼 축하 인사를 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만들었다.

 

그 글이 좋든 나쁘든, 그 글이 담고 있는 생각이 옳든 그르든, 30여 년간 묵묵히 소설가의 길을 걸어왔고, 게다가 전 세계적으로 독자 층을 이루고 있다면 그 작가는 누가 뭐래도 대단한 작가임이 분명하다. <잡문집>에는 그런 하루키의 인생이 녹아있고, 그 글들은 '잡문집'이라 불리지만 그 어떤 소설 한 편보다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있었다. 굴 튀김을 좋아하는 하루키, 수줍음이 많아 남들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 하는 하루키는 말한다. "소설가는 많은 것을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리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을 관찰해 우리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시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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