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의 속삭임 - 오십이 넘어 알게 된 것
무레 요코 지음, 박정임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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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가 된 무레 요코 작가님의 일상 에세이다. 어영부영하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중년이 되어버렸다. 남의 나라 이야기인 줄만 알았던 나이듦이 내게도 닥쳐버렸을 때, 아뿔싸! 노후준비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다는 통렬한 깨달음이 작가님의 뒤통수를 친다. 늙는다는 것은 까마득하게 먼 일 세월이 나만은 빗겨갈 거라고 무의식 중에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가 않다. 더는 노화를 외면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 깨달음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1차 그릇깨기. 덜렁대는 성격이긴 했어도 그릇만은 고이고이 사용했는데 어느 날부터 그릇 깨기 일쑤다. 아귀힘이 딸린다는 생각을 여태 해본 적이 없는데 자연스럽게 그릇을 놓치고 떨어뜨리고 주의력 부족으로 우당탕탕 실수를 저지르신다. 깨진 그릇이라는 사실을 잊고 호지차를 부어 조리대에 홍수가 난 적도 있다. 버스 손잡이를 잡을 힘이 부족해 급정거에 뒷자리로 날아갔다는 누군가의 소식이 남 얘기 같지가 않다. 2차 노안. 젊을 때는 밤을 새워 읽던 책인데 지금은 눈이 피곤해 오래 읽기가 힘들다. 젊은 작가들 책을 모조리 읽어내진 못했어도 어지간한 이름쯤 모르지 않았는데 정신차려 보니 젊은 작가 특집 기사에 아는 이름이 없다. 충격과 좌절의 이콤보. 3차 몸이 뚠뚠. 숨만 쉬어도 살찐다는 말 그것은 다 거짓이라고 생각한 때가 작가님께도 있었더랬다. 피가 활기차게 돌고 에너지 효율이 좋았던 젊은 시절엔 다이어트도 이 정도의 고문은 아니었는데. 옛날만큼 먹지도 않는데 그때의 배로 돌아오는 체중은 나 빼고 상의라도 한것마냥 하체로 헤쳐모여다. 지난 해 입은 원피스는 만세만 해도 방파제 같은 아랫배에 걸려 깡총깡총 존재감 과시 중. 중년이다. 빼도 박도 못하는 중년. 그런 깨달음 앞에 노후자금 계산을 하려고 보니 숨이 턱 막히고 긍정으로 풀무장한 마음에 빗금이 간다. 그야 젊은 시절 은인 같은 편집자가 "자기 집이 있어도 한 사람당 5000만엔 정도는 필요하니까요, 잘 기억해둬요."(p11)라고 충고도 해주었지만 그때는 돈도 잘 벌었고 설마하니 모친과 독신 남동생이 대출에 자신을 끼고 주택을 구매할 줄은 꿈에도 모르셨던 것이다. 반려견 시이와 둘만 살면 몰라도 변동금리로 더욱 부담이 큰  본가 대출금으로 갚아야 할 돈이 매년 400만 엔. 그러나 딸인 자신은 엄마의 연금도 남동생이 퇴직 후 받게 될 연금도 모르고 있다. 연금이 얼만지는 결코 알려주지 않으면서 내 돈으로 보석 사고 불당 사자는 엄마와 연금 앞 철저한 신비주의 남동생에 분노하면서 도쿄를 벗어나 친구들과 함께 들어갈 시골집을 준비하는 작가님의 나날들.

싫어하던 흙과 가까워지고(아직 만진 것은 아니다) 500엔씩 모아 종자돈을 마련하고(그럴려고 했지만 현재 장보고 책 사는데 이용 중이다), 노후의 아름다운 자태를 상상하며 일년여 기모노만 입고(사실 입지 않은 날도 더러 있었다), 지진 대비 가방의 짐을 줄이며(한살이라도 젊을 때 싸놓은 짐은 업고 일어날 수가 없다), 빵과 검은 깨 페이스트를 먹는 매일의 아침(검은 머리가 나는 것을 맨눈으로 확인했으므로 평생 이런 아침을 먹겠다고 결심하신다). 처음은 걱정으로 시작하지만 타고난 성격상 장기 걱정이 힘들다. 나중 일이야 어찌됐든 오늘만큼은 무사태평. 부서지려는 긍정을 적극사수하는 싱글 중년의 삶이 노후를 걱정 중인 싱글 독자를 즐겁게 한다. 지갑 속 노년의 허기진 속삭임은 잠깐 닫아놓자. 걱정한다고 돈이 생기면 걱정도 없겠네. 행복할 게 없어도 왜인지 행복한 무레 요코의 하루, 행복한 그녀의 책 덕분에 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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