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가까이 다가간 카메라가 창문에 부딪혀서 유리가 깨져버린 거야. 안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서 일제히 카메라를 보지. 그러자 카메라가 죄송하다는 듯이 슬슬 뒤로 물러가는 거야. 그 장면은 웃겼어." 그는 혼자 킥킥거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느낌이 전혀 오지 않는지 난처한 표정으로 미소만 지었다. - P36
말이 좀 길었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호소카와가 굵은 두 팔을 배 위에서 팔짱끼며 신음했다. "음, 틀림없이 그렇군・・・・・・ 소설 중에도 소설 속 소설을 트릭으로 사용한 작품이 많고…………… 으음, 서술트릭이라……………" - P37
2
이번엔 어찌된 일인지 오야나기 감독은 세트에서 진행하는 촬영을 모두 시나리오 순서에 따라 진행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마 이야기 속 범인을 모르는 우리가 이리저리 멋대로 추리할 거라고 짐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 P38
#5는 이번 영화의 주무대인 사기누마의 저택 2층, 나이든 여자 집주인의 침실 장면이다. - P39
레이스 달린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그 창으로 눈부신 빛이여자 집주인이 역할은 배우가 아니라 세컨드 조감독인 스도의 어머니가 맡았다)이 누워 있는 흰 침대에 쏟아져 들어온다. 오야나기 도시조 ‘시인‘의 표현에 따르면 "천사가 내려온 것 같은 느낌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광원인 라이트를 창밖에서 계속 지탱하고 있어야 하는 나는・・・・・・ 하느님? - P40
"사모님은...... 돌아가셨습니다." 희미한 탄식이 다른 사람들 입에서 흘러나왔다. 호소카와가 말을 이었다. "자살………… 하신 모양입니다." "거짓말...... 그럴 리가………… 어머니!" 미스즈는 무릎을 꿇고 침대에 누운 ‘여주인‘에게 매달려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 P41
"좋아." 감독이 신음하듯 낮게 말했다. 오케이가 난 것이다. - P42
첫날은 유난히 리허설과 카메라 테스트를 지겨울 정도로 반복하다가 정식 촬영은 단 한 번에 끝낸다. 왜 그렇게 하는지 설명해준 적은 없지만 단번에 오케이가 났을 때의 카타르시스를 생각하면 왠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 P43
3
이번 시나리오는 오야나기 감독이 직접 쓴 백 퍼센트 오리지널이고 완성될 즈음에 이미 캐스팅이 결정돼서 등장인물 이름은 담당 연기자의 예명을 한자 정도만 바꾸거나 비슷한 음을 지닌 글자로 바꾸어 붙였다. - P43
#5 다음에는 크레디트 타이틀이 흐르면서 폭우가 쏟아지는 장면이다. (중략). #14는 진흙투성이가 된 하스미가 저택의 초인종을 누르는 장면, #15는 그 모습을 저택 안쪽, 이 저택의 고용인 야이 쪽에서 바라보는 장면. - P44
#16은 하스미가 목욕하는 장면이다. 욕실 세트를 별도로 만들어 촬영했다. 대사 없이 혼자 하는 연기라 촬영은 쉽게 끝났다. 이어서 오늘 마지막으로 잡혀 있던 촬영에 들어갔다. #17, 응접실 소파에서 가운을 걸치고 떨고 있는 하스미와 그 모습을 호기심과 곤혹감이 뒤섞인 표정으로 지켜보는 호소카와, 미스즈, 다카히로, 야부우치, 모리, - P45
시나리오 순서대로 촬영하는 것이 연기자들에게 더 낫기 때문이라고 했다. 연기력이 고만고만한 배우들이라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연기가 나오기 어려울 거라는 말까지했다. 분명히 그 말도 일리는 있다. - P45
세트장 온도가 너무 높아 뜨거운 우롱차를 담아도 김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그래서 담배연기를 잔에 뿜어 카메라 프레임 안에 들어가기 전까지 손으로 덮고 있었다. 덕분에 김이 또렷하게 오르는 장면이 만들어졌다. - P46
하지만 #17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7은 상황 설명과 캐릭터 소개 장면 격인데 가장 길기도 하고 대사도 많은 장면 축에속한다. 절대 오늘 중으로 끝날 리 없다. 우리는 감독이 어떻게할 생각인지 몰라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감독이 일어서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중략). "오늘 저녁에는 단골 술집을 통째로 빌렸다. 다른 볼일이 없는 사람들은 거기서 실컷 마시고 이야기 나누도록." - P47
4
(전략). 나는 동갑이라 조명 조수인 미즈노 하루유키와 친하다. 미즈노는 영화판에서 일하는 우리가 보기에도 상식을 넘어선 영화 오타쿠로 통한다. <살인목격>³²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데니스 크리스토퍼³³ 같다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후략).
32, 살인목격, Fade To Black, 1980. 33. 데니스 크리스토퍼, Dennis Christopher, 1955- - P48
"글쎄, <톱 해트>・・・・・・ 라고 해야 하나?" 미즈노가 씩 웃으며 말했다. "흐음...... 그럼 그 영화의 감독은 누구지?" 아마도 이게 오늘의 퀴즈인 모양이다. - P49
"여기까지 올라왔어. 안다니까. 좀 기다려." 나는 내 목을 가리키며 미즈노를 제지했다. "마크 샌드리치⁴⁰죠?" 불쑥 소리가 나면서 누군가 옆에 걸터앉았다. 미나코였다 .
40.마크 샌드리치, Mark Sandrich, 1900-1945. - P50
"그래요? ・・・・・・ 그럼 미나코 씨를 위해 어려운 문제 하나. 애스테어, 로저스의 첫 공연작은 뭐죠?" "<플라잉 다운 투 리오>⁴¹잖아요?" 미나코는 미즈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했다. (중략). "맞아요. 조연인 애스테어와 로저스가 주역보다 더 돋보인 영화라서 그래요. 남자는 진 레이몬드⁴², 여자는 돌로레스 델 리오⁴³. 이제 아까 내가 손해 본 걸 미나코 씨한테 받아낼 수 있겠네요."
41. 플라잉 다운 투 리오, Flying Down To Rio, 1933. 42. 진 레이몬드, Gene Raymond, 1908-1998. 43. 돌로레스 델 리오, Dolores Del Rio, 1905-1983. - P51
하지만 미나코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다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요. 물론 예전에는 다들 영화를 좋아했겠죠. 지금도 많이 볼 테고, 또 언젠가 자기가 직접 영화를 만들겠다는 열정도 있겠죠. (중략). 가끔은 이 사람들이 영화를 증오하는 게 아닌가 싶을때도 있으니까요. 만드는 입장이 되면 모두 그렇게 변하는 걸까요?" - P52
"낮에 <고소공포증> 이야기를 했잖아?" (중략). "그거 라스트가 <북북서>지?" 미나코가 불쑥 물었다. (중략).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⁴⁴의 마지막 장면을 패러디한 것 아니냐는 뜻이다. 멜 브룩스와 매들린칸이 탑 위에서 서로 안고 춤을 추는 장면에서 갑자기 모텔방으로 연결되는 매치 컷을 말하는 모양이다.
44.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North By Northwest, 1959. - P54
"엄마와 아버지가 영화를 좋아하셨으니까." 과거형으로 말하며 쓸쓸하게 웃는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미나코는 말을 잇지 않았다. - P56
하지만 요즘 영화를 말하려니 왠지 분한 기분이 들었다. 더 오래된 영화로 거슬러 올라가볼까? "그럼 <어느 날 밤에 생긴 일>⁵⁵과 <포켓에 가득 찬 행복〉⁵⁶은?" "이번엔 프랭크 카프라⁵⁶ 특집이야? 보지 못한 작품도 많지만 그 두 편은 봤어." 나는 기억에 의존하는 것을 포기하고 가방에서 『시티로드」*를 꺼냈다.
*1972~1993년에 발행됐던 도쿄의 문화정보지. 다른 잡지보다 비평적인 기사를 많이 실어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55.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It Happened One Night, 1934. 56. 포켓에 가득 찬 행복, Pocketful of Miracle, 1961. 57 프랭크 카프라, Frank Capra, 1897-1991. - P58
"그럼 <명탐정 필립>⁵⁸과 <죽은 자는 격자무늬의 옷을 입을수 없다> ⁵⁹?"
58. 명탐정 필립, The Big Sleep, 1946. 59. 죽은 자는 격자무늬의 옷을 입을수 없다, Dead Men Don‘t Wear Plaid, 1982. - P58
미나코와 다시 대화를 나눌 기회를 계속 노렸지만 이날 밤에는 결국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에 취해버렸고, 정신이 든 곳은 스도의 아파트였다. - P61
2장
촬영 중지
1
첫날은 출정식 술자리까지 마련하며 여유를 보였지만, 원래 오야나기 감독은 빡빡한 스케줄로 단숨에 촬영을 마치는 타입이다. - P65
무명이지만 연기는 뛰어난 배우를 어디선가 잘도 찾아내는 감독의 수완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발휘된 듯하다. - P65
하루도 촬영을 쉬는 날 없이 삼 주가 흘렀다. 11월도 중순에 접어들어 거리 곳곳에서 겨울맞이 준비가 한창이었다. (중략). 개봉 예정일은 내년 1월 15일. 단관개봉이지만 일단 설 연휴에 극장에 걸린다. (중략), 여기서 화제를 불러 모으면 대개 전국에서 상영 요청이 들어온다. 예고편은 이미 내보내고 있고, 스태프들마저 결말을 모르는 영화라는 이유로 매스컴에서도 화제로 다뤄줬다. - P66
로케도 잘 마쳤다. 이제 남은 부분은 감독이 아직 공표하지 않은 결말뿐이었다. 어제인 11월 14일은 처음으로 촬영을 쉬었다. - P66
"지금까지 찍은 걸로 몇 분쯤 나와?" 시사실이 어두워졌을 때 나는 미나코에게 물었다. 각 컷의 시간을 재는 일이 기록 담당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고, 미나코라면 감독 이상으로 정확한 시간을 알고 있을 터였다. "구십육 분." "그렇게 많이?" - P67
2
"아, 그건 그렇고, 이 저택의 주인은...... 어떤 분인가요?" 가운을 걸친 남자가 웃으며 묻자, 사람들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봤다. (중략). 고용인으로 보이는 노인이 흠 하고 헛기침하며 손님의 질문에 응답했다. "사기누마 준코라는 분의 별장입니다. 그런데 사모님은……………지금 누구하고도 만나실 수 없습니다.………… 오랜 병으로 계속 자리에 누워 계시기 때문에 ……………" - P69
방 안에서는 드디어 긴장이 풀리기 시작한 사람들이 서로 자기소개를 했다. "인사가 늦었소, 나는 사기누마 씨의 주치의인 호소노라고 합 "니다."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말하자 손님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 그러십니까? 저는 다쓰미라고 합니다. 직업은 뭐랄까・・・・・・ 자유기고가라고나 해둘까요?" - P71
"안타깝지만 사모님은 역시 손님을 만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중략). 이윽고 화장이 짙은 여자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어떠세요?" 말투는 자연스러웠지만 자꾸 손님 눈치를 살피는 신경질적인 시선 때문에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중략). "사모님은・・・・・・ 오늘 아침………… 여러분이 보셨을 때와 변함이 없는 상태입니다." - P72
3
(전략). 폭우로 인한 산사태 때문에 왕년의 유명한 여배우 사기누마 준코의 별장에 발을 들이게 된 자유기고가 다쓰미를 앞에 두고 사기누마 준코의 친딸과 조카와 주치의는 무슨 까닭인지 준코가 살아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 P73
"지금까지는 좋군. 전혀 불만 없어. 그런데 앞으로 대체 어떻게 촬영하는 거지?" 하스미가 내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러시 상영이 끝나고 시사실 밖에서 서로 감상을 나누고 있었다. - P74
"정말 자네들도 대본이 없다고? 갖고 있지? 사실은 갖고 있는거지?" 촬영이 시작된 뒤로 수없이 들었던 똑같은 질문. 주위에 있던 호소카와를 비롯한 다른 연기자들도 모두 나를 바라보았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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