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나는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작가이다. 더없이 우아하고 생생하게 표현해내는 능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내가 이 점을 조금이라도 의심한다면・・・・・・ 나는 대략 이렇게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다. - P9

나는 단지 이야기의 실마리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것 같다. - P10

손이 떨린다. 고함치고 싶다. 아니면 뭐라도 박살 내고 싶다.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다・・・・・・ 이런 기분으로는 이야기를 차분히 펼쳐나갈 수가 없다. 심장을 긁어댄다. 끔찍한 느낌이다. 진정해야 한다.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태연자약할 것. 주지한바와 같이 초콜릿은・・・・・・ (초콜릿 생산 장면을 상상해보시라.) - P11

나는 방금 긴 간극이 있었음을 독자에게 알릴 필요를 느낀다. 그사이 후지산을 닮은 산 위에 떠 있는 연노란색 구름들을 불태우며 길을가던 태양이 졌다. 무거운 피로감에 잠겨 한동안 나는 앉아 있었다. 소음과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거나 여백에 코를 그리기도 하고, 선잠이 들락 말락 하다 갑자기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 P12

요컨대 나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그는 한 시간 후에 올 거라했다. 할 일도 없는데 좀 거닐까 하고 밖으로 나갔다. 바람이 불었다. 날은 쾌청했다. 얼룩덜룩한 그림자가 여기저기 드리워 있었다. 여기서 부는 바람의 먼 친척뻘인 바람이 좁은 거리를 따라 날아다녔다. - P12

저 멀리에서는 멋지게 생긴 가파른 산이 벽이 되어 하늘 위로 솟구쳐 있었다. 산을 오르기로 했다. 산의 장관은 눈속임이었다. 계단이 난 오솔길이 키 작은 너도밤나무와 딱총나무 사이를 지그재그로 지나고 있었다. 자, 자! 이제 금방이라도 경이로운 야생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어떤 장소에 다다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곳은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P13

나는 옹이투성이인 난간에 팔꿈치를 괸 채 저 아래 옅은 안개에 덮인 프라하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지붕들, 연기 나는 굴뚝들, 병영, 작은 백마. 다른 길로 돌아가기로 했다. - P13

오케스트라, 팡파르! 아니 이게 낫겠다. 곡예를 할 때처럼 숨을 헐떡이며 쪼개져라고 북을 쳐라! 믿기지 않는 순간이다. 이게 지금 진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 내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자리에 앉았다. 솔직히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른 사람이 그 모습을 봤다면 폭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나는 아연실색했다. - P14

일단 벌써 중요한 대목에 도달했고 가려움증을 가라앉혔으니, 자, 이쯤에서 내 이야기에 이렇게 명령하는 게 부적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쉬어! 조용히 되돌아가! 그리고 그날 아침 내 기분이 어땠는지,
계약할 사람을 만나지 못한 채 산책하러 나선 길에 언덕을 기어올라서는, 바람 부는 5월 어느 날의 푸른 하늘 사이로 저 멀리 둥글둥글하고 불그스레한 가스탱크를 바라보았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분명히 밝혀! 되돌아가서 밝히자. - P15

올 한 해 나는, 강하게 발달했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내 정신이 골몰해 세운 저 논리의 집이 지닌 놀라운 명확성과 조화를 철저히 시험했다. 직관의 유회, 창작, 영감, 내 생을 치장해온 고상한 모든 것이, 말하자면 문외한에게는, 심지어 똑똑한 문외한에게도 가벼운 광기의 서곡으로 비칠수 있으리라. 하지만 진정하시라.  - P15

그는 코를 벌름거리며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생의 파문이 얼굴에일었다. 그로 인해 약간 흐릿해지긴 했지만, 기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눈을 뜨고 곁눈질로 나를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하품을 주체하지 못하며 기름진 어두운 금발 머리를 긁기 시작했다. - P16

"담배 있습니까?" 체코어로 그가 물었다. 예기치 못하게 낮고 차분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그는 두 손가락을 벌려 담배 피우는 시늉을 했다.
나는 내 커다란 가죽 담뱃갑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에게서 한순간도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는 손바닥을 땅에 짚고 조금 움직였다. 그사이에 나는 그의 귀와 움푹 들어간 관자놀이를 살펴보았다.
"독일제구먼." 그가 말하며 미소 지었다. 잇몸이 드러났다. - P17

내가 물었다. "당신 뭐요, 하는 일 없소?"
그는 애처롭게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다시 침을 뱉었다. 하층민은침이 어쩌면 그리 많이 나는지 나는 항상 놀란다.
"나는 내 부츠보다 더 오래 걸을 수 있지요." 자기 두 발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그의 신발은 정말로 보잘것없었다. - P18

"이보시오." 나는 참지 못했다. "정말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겠소?"
그가 몸을 돌려 일어나 앉았다. "뭘 말입니까?" 그가 물었다. 미심쩍어하는 음울한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쳐갔다.
내가 말했다. "눈이 멀었구먼."
한십초 남짓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의 왼손은 들리지 않았다. 거의 그걸 기대했는데, 나는 왼쪽 눈을 게슴츠레 떠보았지만, 그의 두 눈은 열린 그대로였다. - P19

나는 그의 머리를 내 머리 쪽으로 당겨서 관자놀이를 맞댔다. 거울속에서 두 쌍의 눈이 춤추듯 헤엄치듯 움직였다.
거들먹거리며 그가 말했다. "부자가 가난뱅이를 닮을 리가 있겠소. 잘 알면서 그러시네・・・・・・ 그러고 보니 저잣거리에서 봤던 쌍둥이가떠오릅니다. 1926년 8월인가 9월이었소. 아니 8월이었던 것 같네요. 거기서는 정말 그 둘을 분간할 수 없었소. 다른 점을 찾는 사람에게100마르크를 걸었지요. ‘좋소‘ 하고 붉은 머리의 프리츠가 말하더니느닷없이 쌍둥이 중 한 녀석의 귀싸대기를 찰싹 때리는 겁니다. 그러고는 말하길, ‘보세요. 이 사람은 귀가 빨간데, 저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당신 100 마르크 이리 주세요.‘ 배꼽을 잡았지요!" - P20

"현재로선 자넬 도와줄 길이 전혀 없네." 나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나한테 자네 주소를 줘보게." 나는 수첩과 은 연필을 꺼냈다.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별장에서 산다고 말해봐야 소용없는 노릇이겠지요. 숲보다는 건초 더미 위에서 자는 게 더 낫지요. 그렇지만 딱딱한 벤치보다는 숲에서 자는 게 더 낫소."
"하지만 그래도 자넬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알고 싶군." 내가 말했다. - P21

교회의 먼지가 밀려들어 콧구멍이 꽉 막혔다. 코를 풀며 침대 끝에걸터앉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콧속의 가려움, 허기, 레스토랑에서 먹은 송아지 커틀릿의 불그레한 맛 같은 존재의 사소한 징후들이 이상하게 내 주의를 끌었던 것이 기억난다. - P22

실로 그 사람은 특히 자고 있을 때, 이목구비의 움직임이 없을 때, 내 얼굴을, 내 마스크를, 티 없이 깨끗한 내 시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시체라고 말하는 이유는 오직 내 생각을 극도로 선명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무슨 생각? 바로 이런 생각 말이다. 우리는 똑같은 이목구비를 지녔다. 그리고 완전한 수면 상태에서 이 동일성은 아주 분명해졌다. 죽음, 그것은 얼굴의 안식. 얼굴의예술적 완벽이다. 생은 그저 내 분신을 망칠 따름이다. 그렇게 바람은나르시스의 행복에 안개를 드리운다. 그렇게 화가가 없을 때, 그의 제자가 들어와서 시키지 않은 덧칠로 대가의 초상화를 망친다. - P23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여러분 모두를 납득시키고 싶다. 불한당인 당신들을 강제로라도 믿게 만들고 싶다.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말 그 자체의 본성 탓에 닮은 두 얼굴을 말로는 완전히 묘사할 수 없다는 점이 두렵다. 그러니까 말이 아니라 물감으로 그들을 나란히 그려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말하는 바가 관객에게 분명해지지 않을까? - P24

나는 잔뜩 거드름을 피우고 있다. 내가 내 주장을 입증했음을 알기때문이다. 모든 상황이 멋지다. 독자여, 그대는 이미 우리를 보고 있다. 둘이지만 하나인 얼굴! 하지만 가능한 결함들을, 자연의 책에 존재하는 사소한 오식들을 내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생각지는 마시라. 유심히 보시라. 내 치아는 크고 누렇다. 반면 그의 치아는 더 조밀하고 하얗다. 그러나 과연 이게 중요한가? 내 이마에는 다 그리지 못한 ‘생각‘ 같은 혈관이 부풀어오른다.**


** 이마에 혈관이 불완전한 M자 모양으로 부풀어오른다는 뜻. ‘생각‘을 뜻하는 러시아어
‘미술‘과 러시아어 철자 M의 옛 명칭 ‘미슬레테‘를 연관시킨 언어유희. - P25

바로 지금 나는 단춧구멍에 온전히 남은 마지막 제비꽃을 꽂은 채 팔을 늘어뜨리고 자고 있는 그를 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나란히 있는 우리를 주목하고 벌떡 일어나 에워싼 다음 경찰서로 끌고 가지는 않을까? 왜? 왜 나는 이 글을 쓰는 걸까? 그저 익숙한 펜 놀림인가? 아니면 두 사람이 두 방울의 피처럼 서로 닮았다는 것 자체가 실제로 이미 범죄인 걸까? - P26

2장


나는 거리를 두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데, 스스로의 모델이 되는 데 몹시 익숙해져버렸다. 바로 그 까닭에 내 문체는 꾸밈없는 자연스러움의 은총을 잃어버렸다. 나는 이제 도무지 원래의 내 껍질 속으로 돌아가서 옛 자아 안에 편안히 기거할 수 없다. - P27

 나는 늘 같은 가게에서 담배를 사곤 했는데, 행복한 미소가 변함없이 날 맞아주었다. 버터와 달걀을 사던 가게에서도 그와 같은 미소가 아내를 맞이했다. 토요일이면 우리는 카페에 가거나 영화를 보러 갔다. 우리는 중산층 중에서도 잘사는 축에 속했다. 적어도 그렇게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사무실에서 돌아오면신발을 벗고 소파에 누워 석간신문을 펼치지 않았다. - P28

아니, 여기에서 ‘증오‘는 너무 강렬한 단어인 것 같다. 그건 뭔가 가정적이고 기초적이며 여자들한테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특히 일요일이면) 비나 (특히 새 아파트에서) 빈대를 좋아하지 않듯이, 아내는 볼셰비키를 좋아하지 않았다. - P28

아내는 로이드 조지를 증오한다. 그 사람 때문에 러시아가 파멸했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내 손으로 목 졸라 죽여버려도 시원찮을 영국 놈들" 독일인들은 밀폐된 열차 때문에 혼이 난다. (그건 레닌이 수입한 볼셰비즘의 통조림이다.)****


*** 소비에트 혁명 직후 벌어진 내전 당시 (1918~1922) 영국의 총리로 볼셰비키와의 전쟁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러시아 망명자들의 증오를 샀다.
**** 1917년 2월 혁명 직후 스위스에 머물던 레닌과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독일제국 정부가 독일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가해준 덕분에 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독일정부는 레닌이 독일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밀폐된 열차를 제공했다. - P31

아내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관찰력이 부족하다. 한번은 그녀가 ‘신비주의자‘라는 말을 항상 지소사로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검은 토가를 두른, 얼굴이 별처럼 초롱초롱하고 몸집 큰 어떤 진정한
‘신비주의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음을 알게 된 적이 있다.

** ‘신비주의자‘를 뜻하는 러시아어 ‘미스티크‘의 ‘이크‘를 지소(指小) 접미사로 착각했고, 그래서 진정한 ‘큰‘ 신비주의자인 ‘미스트‘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 P32

아내에게 나는 이상적인 남자였다. 나는 명석하고 결단력이 있다.
게다가 나보다 더 맵시 있게 차려입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통 큰바지에 새 턱시도를 걸쳤던 때가 기억난다. 그녀는 조용히 두 손을 꼭쥐더니 살짝 기운이 빠진 듯 의자에 주저앉아 소곤거렸다. "오, 게르만!......" 그건 천국의 비애에 가까운 환희였다.
아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며 그녀와 타협하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그건 그녀의 행복을 위한 선하고 유용한 일이라는 느낌,
아마도 나는 이런 분명치 않은 느낌과 함께 쉽게 믿는 그녀의 성향을 이용하고 있었다. - P35

조건 없이 맹목적으로, 일종의 자연적인 헌신으로 아내는 나를 사랑했다. 내가 왜 다시 과거시제로 빠졌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뭐 상관없다. 그게 더 쓰기 편하다. 그래, 그녀는 날 사랑했다. 사랑에 충실했다. 아내는 내 얼굴을 이쪽저쪽 찬찬히 뜯어보기를 좋아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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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어느 바보의 공부 이야기
-전교 꼴찌가 수능만점받기까지


나는 바보였다.
일반 고등학교와는 다른 외국어 고등학교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중학교 졸업 직전에야 알게 되었다. 외고에 가는 친구들은 입학 전에 고등학교 1학년 과정을 미리 배운다는 것도 학교에 들어가서야알았다. 그러니 배치 고사에서 꼴찌에서 두 번째 등수를 차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P4

공부에 대한 중요한 진실 한 가지

그럼에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은 것은 공부에 대한 중요한 진실 한가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공부의 양과 성적은 비례하지 않는다는사실이었다. 공부를 1시간 한다고 해서 성적이 반드시 1점 오르는것은 아니다. - P5

그렇게 오로지 앞만 보며 나아가기 시작한 나는 수면 시간을 반으로 줄이고, 쉬는 시간마다 선생님을 찾아가 질문하고, 매주 서점에가서 문제집을 닥치는 대로 사서 풀었다. 참가할 수 있는 모든 교내대회에 신청서를 내고,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의 질문에 말이 되든안 되든 생각나는 대로 의견을 쏟아 냈다. - P6

내 이야이가 힘이 될 수 있다면.

(전략).
대학생이 되어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학생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그들의 고민을 들어 주며 함께 해법을 찾아보는 게 내 주요 업무였다. 일을 하면서 학생들이 대체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P7

그러던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마친 뒤 지하철을 타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공부에 지친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고 힘을 낼 수 있다면 책을 내는 것도나쁘지 않을 듯싶다고. 수많은 시행착오와 좌절을 겪으며 알아낸 내나름의 공부 노하우가 지금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의 실수와 후회를 막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괜찮을 것 같다고. - P7

내가 생각하는 1등과 꼴찌의 차이

모든 수험생의 목표가 수능 만점일 필요는 없다. 현재 본인 수준보다 높은 것을 목표로 삼되, 그게 반드시 최정상일 필요는 없다는뜻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할까?  - P8

노력의 진가는 우리를 더 높은 곳, 더 좋은 결과로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노력해 봤다는 경험‘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력해서 작은 난관을 넘어 본 사람은 또 다른 난관을 만났을 때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다. - P8

나는 고등학교 생활을 전교 꼴찌로 시작했지만 졸업할 때는 수능에서 전국 1등이라는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꼴찌와 1등의 차이는 생각만큼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 P8

 ‘비관주의자는 모든 기회 속에서 어려움만 보지만, 낙관주의자는 모든 어려움 속에서 기회를 알아본다‘라는 원스턴 처칠의 말처럼 꼴찌는 ‘뭘 해도 안 될 거야‘ 라는 생각에 핑곗거리만 찾고, 1등은 어떻게든 해 보려는 생각에 방법을 찾는다. - P9

포기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국어 시간에 ‘좋은 책은 하나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하는 것이라고 배운 기억이 난다. - P9

 그리고 그때까지 이 말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스스로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공부는, 그리고 노력은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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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고리치아-유럽 땅 끝에서 일어난 혁명


이것은 혁명이었다. 계급혁명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혁명이었다. 이 혁명은 사람들에게 영혼을 얼굴을 심지어 옷까지도돌려주었다. 그때까지 그들은 모든 것을 박탈당해 있었다.
-엔초 콰이¹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무엇을 바꾸고 싶은가? 그건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하루하루 지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자 사람들은이렇게 물었다. "이렇게 해서 어디로 가려는가?" 나는 대답했다. "모른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알지 못했다.
-프랑코 바잘리아²

1965년에 고리치아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이 정신병원 내부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 P15

제1부 고리치아, 1961~1968년

제1장 고리치아-유럽 땅 끝에서 일어난 혁명


1 Michele Sartori, ‘L‘infermiere della rivoluzione‘, L‘Unità, 1996년 12월 8일자.

2 Corso di aggiornamento per operatori psichiatrici. Trascrizione di duelezioni/conversazioni di Franco Basaglia con gli infermieri di Trieste,
lezioni intervallate da un dibattito. 1979, deistituzionalizzazione-trieste it. - P493

그 시작-유배지에서


나는 이 말을 슬라비치에게 들려주고 싶다. 우리가 이 공공시설 안에서 이 모든 활동을 시작했을 때 이곳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이제 이곳에는 우리가 100명은 된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일을 했고, 그런 행동이 일정한 결과로 이어졌다.
프랑코 바잘리아(1968)⁴ - P16

4 Franco Basaglia, ed., L‘istituzione negata. Rapporto da un ospedalepsichiatrico (1998), Milan: Baldini & Castoldi, pp.253-4. 이 책 『부정되는 공공시설』은 여러 판본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앞으로 토리노의 에이나우디 출판사가 1968년 이후로 펴낸 여러 판본도 언급할 것이다. - P493

 때는 1961년 겨울이었고, 고리치아는 지구의 끝 같아 보였다.⁷ 여러 면에서, 적어도 유럽의 관점에서 그곳은세상의 끝이었다. 이 현립⁸ 정신병원은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던 1911년에 설립됐으며 원래 이름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즉 공산권이라는 저쪽 세계를 가르는 철의 장막이 병원을 정통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다만 곳에 따라 바닥에흰색으로 국경을 표시했다.) - P17

7 안토니오 슬라비치에 따르면 바잘리아가 고리치아에 부임한 날은 1961년 11월 2일이다. Antonio Slavich, La scopa meravigliante. Preparativi per lalegge 180 a Ferrara e dintorni 1971-1978, Rome: Riuniti, 2003.p.257.n.1.

8 이 병원이 고리치아현 전체를 담당했는데, 당시 인구는 13만 명 정도였다. 이 숫자는 1965년에 바잘리아가 제시한 것이다. Basaglia, Scritti. I.p.263에 수록된 ‘La "Comunità Terapeutica" come base di un serviziopsichiatrico‘.) 이탈리아 통계청 자료에는 1951년 13만 3550명, 1971년 13만 7745명으로 되어 있다. 1947년 이전 인구는 그 두 배에 가까운 약 25만명이었다. - P494

높은 담과 정문, 울타리, 철창, 굳게 닫힌 출입문이라는 고전적인 구조의 건물 안에 600명이 넘는 환자가 있었다.¹¹ 그 가운데 3분의 2는슬로베니아 출신이고, 절반 정도는 이탈리아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이었다.¹² 이들 중 약 150명은 종전 이후 평화협정에 따라 수용된 사람들이었다. - P18

11 슬라비치에 따르면 1962년 3월에는 629명의 환자가 있었다(Balconi.
L‘esperienza Goriziana dal ‘61 al ‘72, p.495에 수록된 인터뷰). 도널리는 "대형(800병상 규모) 지역 정신병원"을 언급한다. Michael Donnelly,
The Politics of Mental Health in Italy, p.40.
12 이제까지 바잘리아와 고리치아에 관한 문헌에서 이 문제는 거의 다루어지지않았다. - P494

고리치아의 마니코미오(manicomio, 정신병원)는 어둡고 불길한 시설로, 가난한 사람과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을 버리는 곳이자 배척하는 장소였다. 당시 이탈리아의 정신질환자 보호소가 대부분 그렇듯 세월이 지나면서 가두고 통제하기 위한 시설물이 늘어나, 가장 통제하기어려운 환자를 감금하는 우리와 움직일 수 없도록 구속된 사람의 배변을 위해 구멍이 뚫린 병상을 갖추고 있었다. - P18

혁명을 시작하겠다는 생각이 들 만한 곳은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바잘리아는 이곳의 직책을 맡았고, 그로부터 8년 만에 고리치아는 유럽전체는 아닐지 몰라도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정신질환자 보호소가 되었다. (중략). 고리치아의 ‘혁명‘은 거의 우연히 일어났다. 바잘리아가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그곳의 정신질환자 보호소는 필15시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을 것이다.¹⁵ - P19

15 그 밖에 많은 곳이 1960년대를 지나는 동안 마리오 톰마지니, 일바노 라지멜리, 미켈레 차네티 같은 정치가들이 외부에서 개입함으로써 변화했다. - P495

프랑코 바잘리아(1924년 베네치아 출생)는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엔리코 바잘리아는 수익성이 좋은 세금 수금 회사를 경영했다. 프랑코는 베네치아의 산폴로 지구에서 자랐다. 그의 가족은 파시스트정부에 충성했지만, 바잘리아는 이내 반항자로 자라났다. 그는 십대 학생일 때 시내의 반파시스트 운동에 가담했다. - P20

베네치아는 전쟁에서 일어나는 최악의 참상을 많이는 겪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탈리아의 다른 모든 도시와 달리 폭격을 겪은 일이 드물었다(포르토마르게라 산업지구와 메스트레에 폭탄이 떨어졌고 때로는 베네치아 석호 자체에 가끔은 시내에 폭탄이 떨어지기는 했다).²¹ - P21

21 Bobbo, Venezia in tempo di guerra. - P495

1944년 8월 초, 나치는 독일군병사 한 명이 실종되자 새벽에 남자 일곱 명을 총살했다. 카스텔로 지구에서 광범위한 일제 검거도 시행했다. 나중에 문제의 독일군 병사는익사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필시 술을 너무 마신 때문인 듯했다. 희생자들은 ‘7인의 순교자‘로 알려지게 됐다. (후략).²⁵ - P22

25 Bobbo, Venezia in tempo di guerra, pp.327-44. John Foot, Fratture d‘Italia. Da Caporetto al G8di Genova la memoria divisa del paese, Milan Rizzoli, pp.13-14. - P495

베네치아의 산타마리아마조레 감옥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시내로 들어가는 철로 및 도로에 가까운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1926년에 문을 연 이 감옥은 베네치아의 전쟁사, 특히 저항운동의역사적 신경중추였다. 1943~1945년 내내 "산타마리아마조레의 수감동과 정치경찰 사무실 사이에 (실제 및 추정된) 반파시스트와 파르티잔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는데, 사무실에서 경찰이 그들을 ‘심문했고 심문은 종종 고문으로 이어졌다."²⁸ - P23

28 Bobbo, Venezia in tempo di guerra, p.39. - P496

바잘리아는 1944년 12월 11일에 체포됐는데, 필시 밀고 때문이었을 것이다.³⁰ 닷새 밤낮으로 경찰 심문을 받고 나서 베네치아의 감옥으로 보내졌다. - P24

30 옹가로와 루비니 모두 밀고자는 프란체스코 루치라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Albanese et al., Memoria resistente, p.1276, 1511), 줄리오 보보의 연구에서는 바잘리아의 사촌인 루초 루비니가 파시스트 경찰에 체포된 뒤 매질당한 끝에 바잘리아를 비롯하여 여러 명의 이름을 댄 것으로 보인다(Bobbo.
Venezia in tempo di guerra, pp.412-14). - P496

전쟁 동안 감옥은 공포와 고통, 빈대, 오물, 질병, 그리고 저항의 장소였다. 바잘리아보다 먼저 투옥된 키넬로는 "수감생활은 힘들고 어려웠다"고 썼다.³¹ 바잘리아는 한동안 루비니를 비롯하여 반파시스트 운동에 가담한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한방에서 지냈다. 많은 수의 죄수를수용하는 큰 감방 사이에서는 죄수들의 이동이 잦았다. 그들은 카드놀이와 노래, 독서, 잡담, 토론, 음모와 잠으로 시간을 보냈다.  - P25

31 Chinello, La mia "educazione sentimentale", p.52. - P496

감옥에서 보낸 시간은 바잘리아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지만, 그는 감옥 경험에 대해 심지어 친구나 가족에게조차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감방에서 배운 노래를 간혹 부르곤 했다. 그가 1961년에고리치아의 정신질환자 보호소 체제에 대해 거의 본능적인 수준의 강한 반응을 보인 것의 근원을 젊은 시절 감옥 생활의 기억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 - P26

저항운동은 바잘리아의 삶에 다른 방식으로도 영향을 끼쳤다. 학교친구인 알베르토 옹가로는 베네치아 저항운동의 핵심 가담자였으며, 공개적으로 정권에 반대한 최초의 학생 중 한 사람으로서 반쯤 전설이된 인물이다. - P27

(전략).

바잘리아는 파도바에서 좌절을 맛보았음이 확실하다. 1970년대 초에 파르마에서 대학교 체제로 돌아갔을 때 다시금 상부에 의해 승진이 가로막히는 일이 적어도 두 번 있었다.³⁶ 파도바에서 순수 연구원으로 있던 시기에는 많은 학술 논문을 발표했고, 이탈리아 정신의학계라는 보수적이고도 고리타분한 세계에 화가 난 정신의학자를 비롯한 사람들과 접촉하게 됐다. - P28

36 이 정보의 출처는 바잘리아 본인이지만(Ongaro and Giannichedda,
Conferenze brasiliane, pp.155-6)FabioVisintini, Memorie di un cittadino psichiatra (1902-1982), Naples:Edizioni Scientifiche Italiane, 1983, p.189)에서도 확인되었다. - P497

파도바에서 보낸 시간은 우정과 인맥 측면에서 중요했다. 이곳에서 함께 공부한 안토니오 슬라비치는 1962년에 고리치아 에퀴페 (équipe, 팀)의 두번째 구성원이 되었고, 고리치아와 콜로르노의 경험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잘리아와 함께했다. (중략). 1925년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서 태어나 베네치아의 아르메니아대학에서공부한 그는 나중에 바잘리아가 벌인 운동의 중요한 협력자가 되어 다양한 임명위원회에서 그를 도왔다.³⁸
바잘리아는 완전한 외톨이가 아니었을 뿐더러 독불장군도 아니었다. 고위층 친구들이 있었고, 힘있는 사람들과 협력관계를 맺고 함께일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 P29

38 나중에 테르치안은 1982년 베로나에 새로 생긴 대학교의 초대 총장이 되었다. 또 『사페레(Sapere)」지를 창간했다. - P497

그는 주로 아침 일찍 일어나 아주 늦은 시각까지 일했으며, 일하는동안 줄담배와 코카콜라의 힘을 빌렸고 가끔은 위스키도 한잔씩 했다. 그의 저술은 거의 전부 (특히 파도바 이후로) 아내 프랑카에 의해, 프랑카와 함께 쓰였다. - P30

(그를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그의 지성과 사람됨에 반했다. 그는 카리스마 있고 매력적이며 사람들로부터 사랑과감탄을 자아낸 동시에 두려움과 질투, 이따금은 미움도 불러일으켰다.
많은 사람에게 영웅이 됐지만, 1968년과 관련된 운동에 반대한 사람들에게는 나아가 ‘1968년‘ 자체의 일부 핵심 인사에게도) 악인이었다. - P31

고리치아의 직책은 한눈에도 장래성이 없고 위험하기만 했다. 그 일을 맡는다는 것은 정신의학 체제 가운데서도 아무 희망도 없는 분야에 정치적·지리적으로 고립됨을 의미했다. 온 가족이 정든 곳을 떠나야 했고,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 드는 장소를 책임져야 했다. 이 직책을맡을 유일한 이유는 변방에서, 변두리 중 변두리에서 체제 전체를 탈바꿈시켜보자는 것뿐이었다. - P32

고리치아의 중요한 현실 하나는 ‘슬라브인‘과 이탈리아인 간의 분열이었다. 이미 뿌리깊었던 정치적·민족적 적대감이 양차대전 사이에 행해진 파시스트의 인종청소 정책으로 더욱 심해졌다. 1945년에는유고슬라비아의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이 고리치아를 해방한 후 이탈리아인을 대규모로 강제 추방했다.⁴⁴ - P33

44 John Foot, Fratture d‘Italia, pp.33, 119-97 Z. - P497

바잘리아 가족(프랑코, 프랑카, 그리고 어린 두 아이-여덟 살인 엔리코와 여섯 살인 알베르타)은 1961년 말에 고리치아로 이사했다.⁴⁵ 이들은 장중한 느낌의 현 정부 청사 꼭대기 층에 있는 널찍한 아파트에 자리잡았다. 고리치아의 한복판이었고 정신질환자 보호소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아이들은 근처의 학교를 다녔다. 당시 이탈리아의 정신질환자 보호소는 대부분 현 의회에서 재원을 대고 운영했는데 고리치아에서도 그랬다. - P34

45 때로는 바잘리아의 고리치아 생활이 시작된 시기를 1962년으로 잡기도 한다. 슬라비치의 기억에 따르면 그와 바잘리아 모두 한동안 파도바에서 출퇴근했다(Slavich, La scopa meraviglhante, p.257, n.1).
- P497

. 중요한 것은 쿠라(cura, 치료)가 아니라 쿠스토디아(custodia, 구금)였다. 이탈리아의 정신질환자 보호소는 아직도 1904년과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법률 규정을 따르고 있었다.  - P34

일단 정신질환자 보호소에 들어가면 환자는 사실상 ‘비인격자‘가 됐다. 인권이 박탈되고 ‘세속적 소유물‘을 이론상 한시적으로) 빼앗겼다. 머리를 빡빡 깎고 유니폼을 입히는 경우가 많았다. - P35

 바잘리아가 볼 때 그곳 환자들은 이미 인간 이하였다. 그저 목숨만 이어갈 뿐이었다. 전기충격 치료법을 발명한 우고 체를레티는 1949년에 이렇게 썼다. "창문에는 창살을, 안마당에는 금속 울타리를 둘렀으며, 이 우리 안에 정신질환자들의 슬픈 무리가 제각각의 기괴하고 이상한 동작과 행동 방식을 보이며 빽빽이 몰려 있다."⁵¹ - P36

51 Cerletti, ‘La fossa dei serpenti‘, Il Ponte, V 11, 1949, p.1373. - P498

병원 안에서는 환자들을 보살피기 위해 많은 수의 간호사가 고용됐다. 이 간호사들은 훈련을 받지 않았고, 힘이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의 일은 어렵고 대단히 힘들며 스트레스가 많았지만 급료는 형편없었다. 정신질환자 보호소에 의사의 수가 적었다는 점을 볼 때(게다가 의사가 병원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작디작았다는 점을 볼 때) 바로 이 간호사들이 대체로 이 체제의 주된 얼굴에 해당했다. - P37

광기를 가리키는 언어도 중요했다. "마니코미오는 문자 그대로 미친사람을 보살피거나 보호하는 장소를 의미했다."⁵⁵ 나중에 공식적인 맥락에서는 좀더 중립적인 ‘정신병원‘이라는 용어가 쓰였지만, 마니코미오는 여전히 일반적으로 쓰이는 용어였다(오늘날까지도 그렇다). - P38

55 David Forgacs, Italy‘s Margins. Social Exclusion and NationFormation since 1861,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p.198. 이 책이 출간되기 전 초고의 일부분을 내게 주어 읽게 해준 데이비드 포르가츠에게 감사를 전하고자 한다. - P498

고리치아의 소장이 된 바잘리아는 곧 정신질환자 보호소 체제 전체가도덕적 파탄에 이르렀음을 확신하게 됐다. 그는 이런 공공시설 안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기존 방식에는 의학적으로 이점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히려 환자들의 괴상하고 불안한 몇 가지 행동 방식은 시설 자체 때문에 생겨났거나 악화된다고 확신했다. - P38

고리치아 초기의 바잘리아는 그 도시 자체처럼 격리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거의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생각은 극단적이었고, 그래서 학술협의회에서 동료들은 그를기피인물이나 괴짜로 대하는 일이 많았다. 이탈리아에는 정신질환자보호소 체제의 해체를 부르짖는 사람이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 P39

전체적으로 체제(정신질환자 보호소를지원하는 의료·정치·사회 구조) 내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저항이 상당히컸다. 정신질환자 보호소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자원을 끌어들였으며, 대중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목적을 충족해주었다. - P40

지금 돌이켜보면 이제까지 나온 바잘리아의 여러 전기, 바잘리아의 생각에 관한 연구, 바잘리아 운동에 관한 서술에서는 일관성을 부여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런 일관성이 꼭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의 생각과 실천)은 유연하고 유동적이었으며 시대의 조류에 맞춰 움직였다.
어떤 것을 시도해본 후 그 방식을 버리는 식이었다. - P41

그는 어떠한 당의 주의에도 얽매이지 않았으며, 종종 다양한 색깔의사람들이 어떻게든 자신의 관점에 동조하게 만들었다. 현직에 있는 동안 바잘리아는 대체로 공공시설 내부에서 움직였다. 대개는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였지만 그것을 아예 철폐하려는 목적으로 그런 때도 많았다. - P42

이제는 고전이 된 랭의 연구서 『분열된 자기』는 1960년에 나왔지만 영향력 있는 교재가 되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이 책은 부분적으로 랭이 놀이방 시기에 환자들과 접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무엇보다도 랭은 조현병과 광기가 이해 가능한 대상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광기의 언어는 지성으로 이해 가능했다. - P43

한편 남아프리카 태생의 정신의학자 데이비드 쿠퍼는 1962년부터1966년까지 런던 교외에 있는 정신질환자 보호소에서 실험적으로 개방형 병동을 운영하고 나중에 이 경험을 『정신의학과 반정신의학』에서술했다. 이 책은 또하나의 고전이 되었다.⁶³
이 모든 사례에서 완전 통제시설은 (일시적으로) 뒤엎어지고 개혁되거나 내부로부터 잠식당했다. - P44

63 David Cooper, Psychiatry and Anti-psychiatry, London: Tavistock, 1967. Psichiatria e anti-이탈리아어 번역판은psichiatria, Rome:Armando, 1969. - P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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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크니
: 현대 미술의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는 영국의 화가이자 판화가, 무대 미술가로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호크니는 1937년 7월 9일 영국요크셔주 브레드피트에서 태어났다. - P5

 호크니의 초기 작품은 그의 문학적 열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실제로 몇몇 작품에서 호크니는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의 시 일부나 문장을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동성애가 법적으로 기소될 수 있는 위법 행위였음에도 <서로를 꼭 끌어안은 우리 두 소년we Two Boys Together Clinging>(1961)과 같은 작품을 통해서 호크니는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P6

호크니는 또한 캘리포니아 집들의 내외부 모습과 친구, 친척들의 모습을 그린 이중 초상화를 통해 금세 상당한 명성을얻었다. - P6

 그가 그린 이중 초상화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클라크 부부와 퍼시Mr. and Mrs. Clarkand Percy>(1970~1971)이다. 스윙잉 런던* swinging London 에서 가장 유명했던 커플인 스타일리스트 오시 클라크ossi Clark와 텍스타일 디자이너 실리아 버트웰 Celia Birtwell 그리고그들의 반려묘인 퍼시를 그린 이 작품은 그들이 미니멀하고 편안한 분위기의 아파트에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 1960년대 런던 젊은이들의 문화운동으로 낙관주의와 쾌락주의가 풍미하고 역동적이던 런던의 모습을 가리킨다. - P7

데이비드 호크니는 뛰어난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1970년대에 호크니는 사진을 이용해 새로운 형태의 예술적 표현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1976년 말에는 소나벤드 갤러리sonnabend Gallery에서 1970년부터 촬영한 사진들을 <20개의 사진들 Twenty Photographic25>(1976)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했다. - P7

1980년대 말에 호크니는 회화로 복귀했다. 바다 풍경과 꽃, 아끼는 지인의 초상화를특히 즐겨 그렸으며, 예술과 기술의 결합이라는 아직 누구도 탐험하지 않은 창작의영역으로 첫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1986년, 그렇게 집에서 복사기로 찍어낸 호크니의 첫 복제화들이 탄생했다. - P7

2017년 2월 9일, 런던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은 파리 퐁피두 센터 Centre Pompidou 및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The Met과 협업해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업을 조명한 회고전을 개막했다. - P8

. 호크니에게 있어 예술은 미로같이 복잡한 인생에서 방향을 찾게 하는 나침반이었다. 2011년에는 호크니의 자서전과도 같은 책 《다시, 그림이다A Bigger Message >가, 2016년에는 평론가 마틴 게이퍼드 Martin Gayford와 함께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찾기위한 대담을 담은 《호크니와 게이퍼드가 말하는 그림의 역사 A History of Pictures》가 출간되었다. - P9

픽션이 섞인 이 그래픽 노블은 데이비드 호크니의 개인적인 삶과 예술적 커리어를 돌아보며 20세기부터 21세기에 걸쳐 예술계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에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작품 속 강한 자전적 함축과 다방면에 걸친 예술적 생산은 호크니를 동시대 작가들과 차별되고 독특하게 만든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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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패턴인식의문제


5억 년 전, 비둘기부터 상어, 생쥐, 개 그리고 인간까지 오늘날 살아 있는 모든 동물의 조상이자 왕할머니였던 물고기 비슷한 동물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위험을 향해 헤엄치고 있었다 - P178

우리 조상이 안전한 캄브리아기 해초 틈에서 나오는 순간 그 절지동물이 달려들었다. 수 밀리초 안으로 우리 조상의 탈출 반사반응이 발동했다. 왕할머니 물고기의 눈이 주변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사물을 감지하고 본능적으로 반사반응을 일으켜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 P179

냄새를 인식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초기 좌우대칭동물은 인간이 맡는 냄새를 지각할 수 없었다.  - P179

선충과 비슷했던 우리 조상의 세상을 인식하는 능력은 개별 신경세포의감각장치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 동물은 단일 빛 자극 감지 신경세포의 활성화를 통해 빛을 인식하거나 단일 물리적 자극 감지 신경세포 mechano sensory neuron의 활성화를 통해 물리적 접촉을 인식했다. - P180

모든 척추동물은 신경세포의 패턴을 해독해서 사물을 알아본다. 이 능력이 동물의 지각 범위를 극적으로 확장시켰다. 50가지밖에 안 되는 후각신경세포로 구성된 작은 모자이크 안에 서로 다른 패턴으로 구성된 하나의 우주가 있다. 이 50가지 세포로 표현할 수 있는 패턴은 100조개가 넘는다.² - P181

패턴인식은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 살아 있는 많은 동물은 또다시 5억년정도의 진화를 거쳤는데도 이런 능력을 얻지 못했다. 오늘날의 선충과 편형동물이 패턴인식을 한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척추동물의 뇌가 패턴인식의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는 계산과 관련해서두 가지 난제가 있다. - P182

(전략). 이것이 패턴인식의 두 번째 문제, 곧기존의 패턴을 어떻게 일반화해서 비슷하지만 똑같지는 않은 새로운 패턴을알아차릴 것인가라는 일반화 문제generalization problem다.³ - P183

7. 패턴인식의 문제

2. 켜지거나 꺼질 수 있는 50가지 세포에서 나올 수 있는 조합의 가짓수는 2⁵⁰다. 그리고 2⁵⁰은 대략1.1×10¹⁵이다.

3. D. A Wilson, 2009와 Laurent, 1999에서는 유사한 후각 부호화 모델을 제안했다. Barnes 외,
2008에서는 쥐의 후각겉질에서 패턴을 완성하는 증거를 찾아냈다. Yaksi 외, 2009에서는 어류에서 비슷한 유형의 패턴을 분리하거나 완성하는 증거를 찾아냈다. 3층 겉질에서 이런 자동연합이 일어난다고 주장한 최초의 논문은 Marr, 1971을 참고하라. - P512

컴퓨터가 패턴을 인식하는 방법


아이폰은 안면인식으로 잠금을 해제할 수 있다. 이렇게 하려면 스마트폰이 일반화 문제와 식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중략). 현대의 AI 시스템은 패턴인식의 이 두 가지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한 듯하다. 어떻게 해결한 것일까? - P184

표준 접근방식은 다음과 같다. 그림 7.4 같은 인공신경망을 만든다. 한쪽으로 입력 패턴을 제공하면 이 패턴이 신경세포의 층을 관통하며 이동하다가 인공신경망 반대쪽에서 출력 패턴으로 바뀌어 나온다. 신경세포 간 연결마다부여되는 가중치를 조절하면 인공신경망이 입력 정보를 대상으로 다양한 연산을 수행하게 만들 수 있다. - P184

정답과 함께 사례를 제공해서 인공신경망을 훈련시키는 이런 학습 유형을 지도학습supervised learning (사람이 인공신경망에 정답을 제공해 학습 과정을 지도)이라고 부른다. 이보다 더 복잡한 지도학습 방법이 많지만 원리는 같다.  - P185

아이들은 달걀과 딸기라는 단어를 배우기도 전에 이 두 냄새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한다. 둘째, 역전파는 생물학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 역전파는 수백만 개의 시냅스를동시에 그리고 신경망의 출력을 올바른 방향으로 정확한 양만큼 조정하는 마술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뇌가 어떻게 이렇게 작동할 수 있는지는 상상하기도 힘들다. 그렇다면 뇌는 어떻게 패턴을 인식하는 것일까? - P186

패턴인식을 목적으로 설계된 최초의 신경세포


어류의 후각신경세포는 자신의 출력을 겉질이라는 뇌의 상부 구조로 보낸다. 칠성장어나 파충류 같은 단순한 척추동물의 겉질은 3층의 신경세포이며⁴ 얇은 판처럼 구성되어 있다.
최초의 겉질에서 새로운 형태의 신경세포인 피라미드 신경세포pyramidal neuron가 진화했다. 피라미드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P186

4. 경골어류에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층이 없을 수도 있지만 칠성장어의 겉질에는 파충류처럼 층이 있다. 그래서 나는 초기 척추동물의 겉질에 층 구조가 있었다고 가정한다. Suryanarayana 외, 2022 - P512

그림 7.6에서 확장성과 희소성(확장 재부호화expansion recoding)이 식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포식자 냄새와 먹이 냄새의 패턴은 서로 겹치더라도 활성화된 모든 신경세포로부터 입력을 받는 겉질신경세포가 다르다. 그래서 입력 정보가 겹쳐도 겉질에서 활성화되는 패턴이 달라진다. 이런 연산을 패턴분리pattern separation, 비상관화decorrelation, 직교화orthogonalization 라고도 한다. - P187

자동연합은 척추동물의 기억과 컴퓨터의 기억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여준다. 자동연합을 통해 척추동물의 뇌가 내용 주소화 기억장치 content-addressablememory, CAM를 사용한다는 뜻이다. 이는 경험의 부분집합을 이용해 원래의 패턴을 다시 활성화함으로써 기억을 회상하는 방식을 말한다. - P188

자동연합에 의한 기억은 메모리 주소를 잃어버릴 염려가 없지만 다른 유형의 요인 때문에 간섭을 겪을 수 있다. REM을 이용하는 컴퓨터는 정보가 저장된 장소를 분리해서 새로운 정보가 오래된 정보를 덮어쓰지 않게 한다. - P188

파괴적 망각: 연속학습 문제 2부


1989년에 닐 코언 Neal Cohen과 마이클 매클로스키 Michael McCloskey는 인공신경망에게 수학을 가르치려 했다.⁶ 복잡한 수학이 아니라 그냥 덧셈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존스홉킨스대학교의 신경과학자였고 인공신경망이 기억을 저장하고 유지하는 방식에 관심이 있었다. - P189

6. McCloskey와 Cohen, 1989. 연속학습 문제에서 현재 직면하고 있는 도전과제에 대한 검토는Parisi, 2019; Chen Liu, 2018 - P512

현대의 AI 시스템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을까? 사실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 프로그래머들은 AI를 학습시킨 후에 그냥 동결시키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피하고 있다. 우리는 AI를 순차적으로 학습시키지 않는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가르친 다음 학습을 중단한다. - P190

패턴인식이 진화하자마자 파괴적 망각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함께 진화했다. 사실 어류도 파괴적 망각 문제를 끝내주게 잘 피한다. 물고기에게 작은탈출구를 통해 그물에서 빠져나가는 법을 훈련시키고 나서 1년 후에 다시 테스트해보자. 긴 시간 동안 물고기의 뇌는 끊임없이 패턴을 입력받으며 새로운 냄새, 장면, 소리를 알아보는 법을 학습했을 것이다. 그리고 꼬박 1년 후에똑같은 그물에 다시 넣으면 이 물고기는 탈출 방법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어서 1년 전과 거의 똑같이 빠르고 정확하게 빠져나갈 것이다.⁷ - P191

7. Brown, 2001. - P512

불변성 문제

그림 7.7의 두 물체를 보자. - P192

다음 페이지의 그림 7.8을 보자. 앞에서 나왔던 도형과 같은지 알아보겠는가? 그림 7.8에 나와 있는 물체와 그림 7.7에 나온 물체가 당연히 같아 보이겠지만 사실 이것은 엄청나게 놀라운 일이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따라 망막에서 활성화되는 신경세포가 전혀 겹치지 않을 수도 있다. - P193

동일한 시각적 대상이라도 시야 속 방향, 거리, 위치에 따라 활성화되는 패턴이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이 불변성 문제 invariance problem를 만들어낸다. - P194

이는 시각만의 문제가 아니다. 같은 단어를 아이는 고음으로, 어른은 저음으로 말해도 당신은 그 둘을 같은 단어로 알아듣는다. 불변성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소리의 높이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속귀에서 활성화되는 신경세포가 완전히 다른데도 당신은 그 둘이 같은 단어임을 알 수 있다. - P194

데이비드 허블David Hubel과 토르스텐 비셀 Torsten Wiesel은 고양이의 겉질을 마취하고 전극을 연결한 다음 고양이에게 서로 다른 시각적 자극을 제시하며 신경세포의 활성을 기록했다.⁹ 이들은 점, 선과 다양한 도형을 고양이의 시야에서 서로 다른 위치에 제시해 겉질이 시각 입력을 어떻게 부호화하는지 알고 싶었다. - P195

9. Hubel Wiesel, 1959, 1962, 1968. - P512

허블과 비셀의 초기 연구가 이뤄진 뒤 20년이 넘게 지난 1970년대 말에후쿠시마 구니히코라는 컴퓨터과학자가 그림 속 물체를 알아보는 컴퓨터를 만들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이 장의 앞부분에서설명한 것처럼 그런 일을 해내는 표준 인공신경망을 만들 수 없었다.  - P196

10. Manassi 외, 2013. 허락을 받아 사용. - P512

후쿠시마는 이 두 가지 발견이 뇌가 불변성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보여주는 단서일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는 허블과 비셀이 발견한 두 발견을포착하기 위해 설계된 새로운 인공신경망 구조를 발명했다.¹¹ 그의 구조는그림 하나를 완전히 연결된 인공신경망에 던져 넣는 표준 접근방식에서 벗어났다. - P197

11. Fukushima, 1980. - P512

후쿠시마의 합성곱 신경망이 뛰어난 이유는 영리하게 ‘귀납적 편향inductivebias‘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귀납적 편향이란 설계 방식을 통해 AI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가정을 말한다. 합성곱 신경망은 한 장소에서 주어진 특성은 장소가 달라져도 동일한 특성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이동 불변성 translationalinvariance 을 가정하고 설계됐다. - P198

합성곱 신경망은 뇌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뇌의 시각패턴 인식 방식을 모방했다고 하기에는 사실 빈약하다. 첫째, 시각 처리는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위계구조가 강하지 않아서 입력이 한 수준을 건너뛰고 여러 수준으로 동시에 가지치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둘째, 합성곱 신경망은 이동translation 의 제약이 있으며 본질적으로 3차원 물체의 회전을 이해하지 못한다. (후략).¹³ - P198

13. 현대의 합성곱 신경망은 동일한 물체를 회전시킨 사례를 대량으로 포함하도록 훈련용 데이터를보강해서 이 회전의 문제를 피한다. - P513

 셋째, 현대의 합성곱 신경망은 여전히 지도학습과 역전파를 바탕으로 여러 연결을 마법처럼 동시에 업데이트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중략). 넷째, 결정적으로 합성곱 신경망은 어류의 단순한 시각겉질보다 훨씬 복잡한 포유류의 시각겉질에서 영감을 받았다.  - P199

어쩌면 합성곱 신경망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이동 불변성처럼 인공신경망에서 모방하려는 특정 가정의 성공 여부가 아니라 그 가정 자체가 성공했다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 P200

진화는 원래 특정 사물을 감지하는 새로운 감각신경세포를 만들어 동물을 무장시키는 방식으로 일을 했다. 하지만 캄브리아기 약육강식의 군비경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무엇이든 알아볼 수 있는 범용 메커니즘으로 무장시키는새로운 방식으로 전환했다. 이런 새로운 패턴인식 능력과 함께 척추동물 감각기관의 복잡성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신속하게 오늘날의 형태로 꽃을 피웠다. - P200

패턴인식과 감각기관이 정교해지면서 강화학습 그 자체와 되먹임고리가형성됐다. 패턴인식과 강화학습이 동시에 진화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뇌가 세상의 사물에 반응해서 임의의 행동을 배우는 능력을 키우면 세상의 사물을 더 많이 인식해서 얻는 이점도 많아진다.  - P201

8.
생명에게 왜 호기심이 생겼을까

TD-개먼이 성공하자 연구자들은 서튼의 시간차학습을 온갖 게임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기존에는 풀 수 없었던 게임들이 하나둘 이 알고리즘을 이용해성공적으로 격파됐다. 시간차학습 알고리즘은 결국 핀볼Pinbalt, 스타거니starGunner, 로보탱크 Robotank, 로드러너 Road Runner, Pong, 스페이스 인베이더 SpaceIrvaders 같은 비디오게임에서 인간 수준의 성능을 뛰어넘었다. - P202

2018년이 되어서야 마침내 몬테수마의 복수 1단계를 통과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 개발됐다. 구글의 딥마인드DeepMind에서 개발한 이 새로운 알고리즘은 서튼의 기존 시간차학습 알고리즘에는 없던 낯익은 요소를 추가해 임무를완수했다. 바로 호기심curiosity이다. - P203

실제로 처음 호기심을 갖게 된 존재는 초기 척추동물이었다는 증거가 있다. (중략).² 척추동물은 ‘실질적인‘ 보상이 없어도 놀라움 자체만으로 도파민 분비가 촉발된다.³ 하지만 대부분의 무척추동물은 호기심을 보이지 않는다. - P204

8. 생명에게 왜 호기심이 생겼을까


2. 어류의 호기심에 대해서는 Budaev, 1997, 생쥐의 호기심에 대해서는 Berlyne, 1955, 원숭이의호기심에 대해서는 Butler와 Harlow, 1954, 유아의 호기심에 대해서는 Friedman, 1972를 참고하라

3. Matsumoto와 Hikosaka, 2009. - P513

쥐가 도박을 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차린 사람은 스키너였다. - P205

도박은 이런 속성을 활용하기 위해 꼼꼼하게 설계되어 있다. 도박에서는승리 확률이 0이면 안 된다. 그러면 게임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승률을 48퍼센트 정도로 맞춘다. 이런 승률은 승리가 가능할 정도로 충분히 높고,
이겼을 때 놀라움을 느낄 만큼(도파민 분비를 촉진) 충분히 불확실하며 결국 장기적으로는 카지노가 당신의 돈을 모두 가져갈 정도로 충분히 낮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의 피드도 이런 속성을 활용한다. 스크롤을 넘길때마다 새로운 게시물이 등장하고, 몇 번 스크롤 한 뒤에는 무작위로 흥미로운 뭔가가 등장한다. - P205

강화학습이 작동하려면 호기심이 필요하기 때문에 호기심과 강화학습은함께 진화했다. 패턴을 인식하고 장소를 기억하고 과거의 보상과 처벌을 바탕으로 행동을 유연하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발견하면서 최초의 척추동물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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