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피터, 내 조언을 원한다면 말해주지. 나한테 물은 것 자체가 실수야. 그런 건 다른 사람에게 물어선 안 되지. 자신의 일에 관한 문제니까.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르는 거야? 그것도 모르고 어떻게 살 수 있지?" "하워드, 자네가 감탄스러운 게 바로 그거야. 항상 알고 있다는 거." - P66
"어머니, 하워드와 중요한 얘기가 있어서요." 키팅은 그러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키팅 부인은 아들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키팅이 어머니를 따라갔다. - P67
"아, 젠장, 자네의 미친 이상들은 나도 알아. 하지만 난 지금 내 상황에 대한 실제적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이상은 잠시 접어두고......" "내 조언을 원치 않는군." 로크가 말했다. "아니, 원해! 그러니까 지금 묻고 있잖아!" 하지만 키팅은 관객이 하나라도 있는 한 로크와 단둘일 때와 같을 수가 없었다. - P68
키팅이 쏘아붙였다. "난 건축 일을 하고 싶은 거야. 그것에 대해 떠들고 싶은 게 아니고! 파리 미술학교는 커다란 명예를 주지. 자기들이 건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배관공 출신 어중이떠중이들 위에 설 수 있게 해주고. 그런데 한편으론 프랭컨과 함께 일할 기회가 주어졌어. 가이 프랭컨 자신이 스카우트를 제안했지!" - P69
"저어......." 키팅은 어머니를 지켜보며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제가 만약 미술학교에 간다면..…………." "좋아. 미술학교에 가거라. 거긴 멋진 곳이지. 바다 건너에 있지만 말이다. 물론 네가 파리로 떠나면 프랭컨 씨는 다른 사람을 뽑겠지. 다들 그것에 대해 얘기할 거고. 프랭컨 씨가 해마다 스탠턴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을 뽑아간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 너 말고 다른 학생이 뽑히면 모양새가 어떨까? 하기야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 "사람들이 뭐라고 ・・・・・・ 뭐라고 말할까요?" - P70
"어머니, 제가 프랭컨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아들이길 원하세요?" "피터, 난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다. 네 마음대로 하렴." 키팅은 자신이 진짜로 어머니를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어머니였고 그 사실은 모든 이에게 자동적으로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기에 자신이 어머니에게 느끼는 감정은 당연히 사랑이리라 생각했다. 그는 어머니의 판단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다. - P71
"예, 물론 그렇죠, 어머니....... 하지만예, 그건 저도 알지만......하워드?" 그건 도와달라는 애원이었다. - P71
"피터, 그 두 가지 기회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잖아. 덜 나쁜 쪽을 선택해. 파리 미술학교에 가서 뭘 배우겠어? 르네상스 궁전이나 오페레타의 배경들에 대해서나 더 배우겠지. 그런 것들은 이미 자네가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걸 죽여버릴 거야. 자넨 이따금 제법 일을 잘해. 정말로 배우고 싶으면 일을 선택해, 프랭컨은 개자식에다 멍청이지만 그래도 거기 가면 건축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럼 그만큼 빨리 독립적으로 일할 준비를 할 수 있을 거야." - P72
"로크 군도 가끔 옳은 소리를 하는구나. 말하는 건 무식한트럭 운전수 같아도." 키팅 부인이 말했다. - P72
"하워드, 자넨 이제 어쩔 작정이야?" "나?" "내가 너무 생각 없이 굴었어. 계속 내 문제만 갖고 요란을떨었으니, 어머니 날 위해 그러는 거지만 어머니 때문에 돌겠어. 그 얘긴 집어치우고, 이제부터 어쩔 작정이야?" "뉴욕으로 갈 거야." "오, 멋진데, 일자리 구하러?" - P73
"이봐, 하워드, 자넬 받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아서그러는 거라면, 그렇다면 내가 도와줄게. 프랭컨 씨와 일하게되면 연줄이……….." "피터,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어. 이미 결정났으니까." "그 사람은 뭐라는데?" "누구?" "캐머런." - P74
자기 방에서 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내던지던 키팅은 문득뉴욕으로 전보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종일 한 번도 떠오르지 않던 생각이었지만 갑자기 절박하고 다급해져서 지금 당장 전보를 보내고 싶었다. - P75
3
피터 키팅은 뉴욕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뉴욕 사람들은 아주 근사하게 잘 차려입고 있었다. 그는 프랭컨 앤드 헤이어 사무실과 출근 첫날이 기다리고있는 5번가의 건물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 P77
‘프랭컨 앤드 헤이어 건축사무소‘ 프랭컨 앤드 헤이어 건축사무소의 응접실은 멋지고 분위기 있는 식민지풍 저택의 무도실 같았다. - P78
고 인류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누렇게 뜬 뺨과 이상하게 생긴 코, 움푹 들어간 턱에 난 사마귀, 탁자 모서리에 짓눌린 배가 보였다. 키팅은 그런 모습들이 좋았다. 그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는 더 잘 해낼 수 있었다. 그는 미소를 머금었다. 피터 키팅에게는 동료가 필요했다. - P80
"노인네 것 치고는 꽤 괜찮군요." 키팅이 감탄하며 말했다. "누구요?" 청년이 물었다. "그야 프랭컨이죠." 키팅이 말했다. "프랭컨은 무슨." 청년이 차분하게 말했다. "8년 동안 개집 하나 설계한 적 없는데." 그러고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어깨너머 유리문을 가리켰다. "저분이에요." "뭐라고요?" 키팅이 돌아보며 물었다. "저분이라고요. 스텐겔. 저분이 다 한 거예요." - P81
그는 키는 작고 받은 어찌나 긴지 발목까지 내려오는 것 같았다. 긴 소매 속에서 밧줄처럼 흔들리는 말에는 크고 효율적인 손이 달려 있었다. - P82
가이 프랭컨의 방은 반짝반짝 광을 낸 것 같았다. 아니, 광을 낸 게 아니라 니스칠을 해놓은 것 같았다. 아니, 니스칠이아니라 거울을 녹여 들이부은 것 같았다. - P82
가이 프랭컨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프랭컨의 얼굴은 누렇고 뺨이 늘어져 있었다. - P83
"오, 스텐겔." 그 이름을 말하는 프랭컨의 어조가 키팅의마음속 사진기에 찰칵 찍혀 나중에 써먹을 수 있도록 저장되었다. - P85
프랭컨은 자조적으로 콧등을 찌푸렸다. "그런 만찬에선식사가 끝난 후 가벼운 연설을 하게 되지만 노골적이고 저속한 장사 얘긴 쏙 빼고 부동산업자의 사회적인 의무라든가 유능하고 인정받는 건축가를 선택하는 것의 중요성에 관한 엄선된 의견 몇 가지만을 얘기하지. 마음에 남는 멋진 슬로건 같은 것들 말일세." - P85
프랭컨은 키팅에게 그 슬로건을 다시 말하게 한 다음 앞에놓인 여러 색깔의 새 연필들 중 하나를 골라 메모지에 적었다. 바늘처럼 날카롭게 깎인 그 연필들은 전혀 사용하지 않은 상태로 준비되어 있었다. 프랭컨이 메모지를 옆으로 밀어놓고 한숨짓더니 매끄러운 곱슬머리를 어루만지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좋아, 그걸 봐줘야겠지." - P86
"제 의견을 말씀드려도 된다면, 4층과 5층 사이의 카르투슈(cartouche: 두루마리 모양의 테두리 장식-옮긴이)들이 이런 인상적인 건물에는 너무 소박한 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돌림띠장식이 훨씬 더 어울릴 듯합니다." "바로 그거야. 나도 그 점을 지적하고 싶었어. 돌림띠 장식하지만…………… 하지만, 이보게, 그럼 창호가 축소된다는 뜻인데, 안 그런가?" - P87
그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토론을 벌일 때 쓰던어조에 망설임을 살짝 넣어서 말했다. "하지만 창문은 건물 정면의 위엄보단 덜 중요하죠." - P87
키팅이 천천히 대답했다. "전, 꼭 필요한 수정을 하는 것이스텐겔 씨가 설계한 대로 무조건 통과시키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키팅은 프랭컨이 말없이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걸 보고, 그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있는데 두 손은 힘없이 늘어져 있는걸 보고, 자신이 끔찍한 모험을 걸었고 결국 승리했음을 알 수있었다. - P88
"아, 키팅, 그런데 말일세, 내가 제안 하나 해도 될까? 우리끼리 얘기고 악의 없이 하는 말인데, 그 회색 작업 가운에는 푸른색보다 진홍색 넥타이가 훨씬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자넨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맞습니다." 키팅이 선선히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내일은 진홍색 넥타이를 보시게 될 겁니다." - P89
다나 빌딩은 헨리 캐머런이 설계한 작품이었다. 1880년대에 뉴욕 건축가들은 업계 이인자 자리를 두고 다투었다. 일인자 자리를 탐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인자자리는 헨리 캐머런의 것이었다. - P91
일단 그에게 건축을 맡기면 고객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 P91
그의 건물들은 처음에는 그저 조금 달랐을 뿐 사람들을 기겁하게 하지는 않았다. 이따금 깜짝 놀랄 만한 실험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이미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고 헨리 캐머런과 입씨름을 벌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 P92
당시 서른아홉 살이었던 그는 땅딸막하고 꾀죄죄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잠도 끼니도 거르고 미친 듯 일에 매달렸다. 술은 거의 안 마셨지만 마셨다 하면 폭음을 했고, 고객들에게 상스러운 욕을 해댔으며, 상대가 앙심을 품으면 그걸 비웃고일부러 부채질하기까지 했다. - P93
헨리 캐머런은 콜럼버스 박람회장 건설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으며 그 박람회에 대해 인쇄 불가능한, 하지만 숙녀들과 함께 있는 자리가 아니라면 입으로는 옮길 수 있는 욕들을 해댔다. 그의 욕들은 입에서 입으로 옮겨졌다. - P94
그가 오랜 세월 고군분투하며 달려와 드디어 목표에 다다른 순간, 이제야 비로소 그가 추구해온 진실을 구현하려는 순간, 마지막 장벽이 갑자기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이었다. - P94
하지만 고전주의에 탐닉하여 별안간 이천 년 전으로 돌아가 버린 나라에서는 그가 설 자리가 없었다. - P95
이에 대항해 헨리 캐머런이 제시할 수 있는 건 자신의 신념밖에 없었다. 인용할 사람도, 거창하게 할 말도 없었다. 그는단지 건물의 형태는 그 기능에 따라야 한다고, 건물의 구조가아름다움의 열쇠라고, 새로운 건축 방식은 새로운 형태를 요구한다고, 자신은 스스로가 원하는 대로 건물을 짓겠노라고만 말했다. - P95
사람들은 열정을 싫어한다. 그것이 아무리 위대한 열정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헨리 캐머런의 실수는 자신의 일을 사랑한 것이었다. - P95
캐머런은 사람들을 대할 줄 몰랐다. 그는 사람들에게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원래 건축 외에는 그 어느 것에도, 자신의 인생에도 관심이 없는 인물이니까. 그는 설명이란 걸 할 줄 몰랐고 명령만 내릴 줄 알았다. 그는 사람들의 호감을 산 적이 없었으며 그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없었다. - P96
하워드 로크는 계단을 오르며 층계참마다 멈춰 서서 창문너머로 다나 빌딩을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그는 헨리 캐머런의 사무실이 있는 6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했다. - P97
"캐머런 씨를 만나고 싶습니다." 로크가 말했다. "그래요?" 노인이 도전도, 악의도, 의미도 없는 목소리로말했다. "무슨 일로요?" "일자리 문제로요." "무슨 일자리?" "설계요." - P98
"캐머런 씨, 밖에 일자리를 구하러 온 친구가 있습니다." 그러자 전혀 나이 들지 않은 강하고 또렷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뭐야, 순 얼간이 같으니라고! 내쫓아버려.. ・잠깐! 들여보내!" - P98
"아니, 나를 보러 온 건가, 아니면 그림을 보러 왔나?" 이윽고 캐머런이 물었다. 로크가 그를 향해 돌아섰다. "둘 다입니다." 로크가 말했다. 그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로크 앞에서 존재감을 잃었지만 캐머런은 지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길 속에서 자신이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 P100
"원하는 게 뭔가?" 캐머런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선생님 밑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로크가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밑에서 일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어투였다. "그래?" 캐머런은 자신이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들은 말에 대답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가 뭔데? 더 크고 훌륭한 데선 자넬 안 받아주나?" - P100
"처음 시작하는 겁니다." "그럼 뭘 했나?" "스탠턴에서 3학년까지 다녔습니다." "응? 게을러서 졸업장도 못따신 분이신가?" "퇴학당했습니다." "대단해!" 캐머런은 주먹으로 책상을 쾅 치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 P102
로크는 시키는 대로 했다. 캐머런이 굵은 손가락들로 설계도 뭉치를 두드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자넨 이것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나? 사실 이것들은 끔찍하네. 입에 담을 수도 없을 정도지. 죄악이야. 이보게." 그는 도면 하나를 로크의 얼굴에 들이댔다.
캐머런이 갑자기 말을 뚝 끊더니 설계도들을 옆으로 밀어놓고 그 위에 주먹을 얹으며 물었다. "건축가가 되기로 결심한 게 언젠가?" "열 살 때입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엔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어. 자넨거짓말을 하고 있어." - P103
"(전략). 난 자넬 보고싶지 않아. 자네가 싫어. 자네 면상이 싫어. 자넨 지독한 자기중심주의자처럼 생겼어. 아주 건방지고 지나치게 자신만만해. 20년 전이었다면 아주 기쁜 마음으로 자네 면상에 주먹을 날렸을 거야. 내일 9시 정각까지 출근해." "예." 로크가 일어서며 대답했다. "주급은 15달러야. 그것밖에 못 줘." - P105
4
"투히." 가이 프랭컨이 말했다. "엘즈워스 투히 참 괜찮은친구야, 안 그런가? 이걸 읽어보게, 피터." - P107
키팅은 기사를 다 읽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와!" 그가 경외감에 차서 말했다. 프랭컨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훌륭하지, 응? 다른 사람도 아닌 투히의 찬사를 받다니.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유명인사가 될 거야. 내 말 명심해. 유명인사가 될 거라고. (후략)." - P109
"사장님, 예술가를 해석하는 게 비평가의 일입니다. 예술가 자신도 그 해석을 통해 자신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깨달을 수있고요. 특히 씨는 사장님의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의미에대해 얘기한 것일 뿐입니다." "오." 프랭컨이 모호하게 말했다. "오, 그렇게 생각하나?" - P110
프랭컨은 미소 가득한 얼굴로 기사를 다시 읽었다. 키팅은 그가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 P110
키팅은 푹신한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이곳에서의첫 달은 성공적이었다. 그 자신은 말로나 행동으로나 아무런암시도 한 적이 없는데도 가이 프랭컨이 무슨 일이든 키팅을 올려 보내는 걸 좋아한다는 인식이 사무실 전체에 퍼졌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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