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고리치아-유럽 땅 끝에서 일어난 혁명
이것은 혁명이었다. 계급혁명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혁명이었다. 이 혁명은 사람들에게 영혼을 얼굴을 심지어 옷까지도돌려주었다. 그때까지 그들은 모든 것을 박탈당해 있었다. -엔초 콰이¹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무엇을 바꾸고 싶은가? 그건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하루하루 지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자 사람들은이렇게 물었다. "이렇게 해서 어디로 가려는가?" 나는 대답했다. "모른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알지 못했다. -프랑코 바잘리아²
1965년에 고리치아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이 정신병원 내부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 P15
제1부 고리치아, 1961~1968년
제1장 고리치아-유럽 땅 끝에서 일어난 혁명
1 Michele Sartori, ‘L‘infermiere della rivoluzione‘, L‘Unità, 1996년 12월 8일자.
2 Corso di aggiornamento per operatori psichiatrici. Trascrizione di duelezioni/conversazioni di Franco Basaglia con gli infermieri di Trieste, lezioni intervallate da un dibattito. 1979, deistituzionalizzazione-trieste it. - P493
그 시작-유배지에서
나는 이 말을 슬라비치에게 들려주고 싶다. 우리가 이 공공시설 안에서 이 모든 활동을 시작했을 때 이곳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이제 이곳에는 우리가 100명은 된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일을 했고, 그런 행동이 일정한 결과로 이어졌다. 프랑코 바잘리아(1968)⁴ - P16
4 Franco Basaglia, ed., L‘istituzione negata. Rapporto da un ospedalepsichiatrico (1998), Milan: Baldini & Castoldi, pp.253-4. 이 책 『부정되는 공공시설』은 여러 판본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앞으로 토리노의 에이나우디 출판사가 1968년 이후로 펴낸 여러 판본도 언급할 것이다. - P493
때는 1961년 겨울이었고, 고리치아는 지구의 끝 같아 보였다.⁷ 여러 면에서, 적어도 유럽의 관점에서 그곳은세상의 끝이었다. 이 현립⁸ 정신병원은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던 1911년에 설립됐으며 원래 이름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즉 공산권이라는 저쪽 세계를 가르는 철의 장막이 병원을 정통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다만 곳에 따라 바닥에흰색으로 국경을 표시했다.) - P17
7 안토니오 슬라비치에 따르면 바잘리아가 고리치아에 부임한 날은 1961년 11월 2일이다. Antonio Slavich, La scopa meravigliante. Preparativi per lalegge 180 a Ferrara e dintorni 1971-1978, Rome: Riuniti, 2003.p.257.n.1.
8 이 병원이 고리치아현 전체를 담당했는데, 당시 인구는 13만 명 정도였다. 이 숫자는 1965년에 바잘리아가 제시한 것이다. Basaglia, Scritti. I.p.263에 수록된 ‘La "Comunità Terapeutica" come base di un serviziopsichiatrico‘.) 이탈리아 통계청 자료에는 1951년 13만 3550명, 1971년 13만 7745명으로 되어 있다. 1947년 이전 인구는 그 두 배에 가까운 약 25만명이었다. - P494
높은 담과 정문, 울타리, 철창, 굳게 닫힌 출입문이라는 고전적인 구조의 건물 안에 600명이 넘는 환자가 있었다.¹¹ 그 가운데 3분의 2는슬로베니아 출신이고, 절반 정도는 이탈리아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이었다.¹² 이들 중 약 150명은 종전 이후 평화협정에 따라 수용된 사람들이었다. - P18
11 슬라비치에 따르면 1962년 3월에는 629명의 환자가 있었다(Balconi. L‘esperienza Goriziana dal ‘61 al ‘72, p.495에 수록된 인터뷰). 도널리는 "대형(800병상 규모) 지역 정신병원"을 언급한다. Michael Donnelly, The Politics of Mental Health in Italy, p.40. 12 이제까지 바잘리아와 고리치아에 관한 문헌에서 이 문제는 거의 다루어지지않았다. - P494
고리치아의 마니코미오(manicomio, 정신병원)는 어둡고 불길한 시설로, 가난한 사람과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을 버리는 곳이자 배척하는 장소였다. 당시 이탈리아의 정신질환자 보호소가 대부분 그렇듯 세월이 지나면서 가두고 통제하기 위한 시설물이 늘어나, 가장 통제하기어려운 환자를 감금하는 우리와 움직일 수 없도록 구속된 사람의 배변을 위해 구멍이 뚫린 병상을 갖추고 있었다. - P18
혁명을 시작하겠다는 생각이 들 만한 곳은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바잘리아는 이곳의 직책을 맡았고, 그로부터 8년 만에 고리치아는 유럽전체는 아닐지 몰라도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정신질환자 보호소가 되었다. (중략). 고리치아의 ‘혁명‘은 거의 우연히 일어났다. 바잘리아가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그곳의 정신질환자 보호소는 필15시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을 것이다.¹⁵ - P19
15 그 밖에 많은 곳이 1960년대를 지나는 동안 마리오 톰마지니, 일바노 라지멜리, 미켈레 차네티 같은 정치가들이 외부에서 개입함으로써 변화했다. - P495
프랑코 바잘리아(1924년 베네치아 출생)는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엔리코 바잘리아는 수익성이 좋은 세금 수금 회사를 경영했다. 프랑코는 베네치아의 산폴로 지구에서 자랐다. 그의 가족은 파시스트정부에 충성했지만, 바잘리아는 이내 반항자로 자라났다. 그는 십대 학생일 때 시내의 반파시스트 운동에 가담했다. - P20
베네치아는 전쟁에서 일어나는 최악의 참상을 많이는 겪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탈리아의 다른 모든 도시와 달리 폭격을 겪은 일이 드물었다(포르토마르게라 산업지구와 메스트레에 폭탄이 떨어졌고 때로는 베네치아 석호 자체에 가끔은 시내에 폭탄이 떨어지기는 했다).²¹ - P21
21 Bobbo, Venezia in tempo di guerra. - P495
1944년 8월 초, 나치는 독일군병사 한 명이 실종되자 새벽에 남자 일곱 명을 총살했다. 카스텔로 지구에서 광범위한 일제 검거도 시행했다. 나중에 문제의 독일군 병사는익사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필시 술을 너무 마신 때문인 듯했다. 희생자들은 ‘7인의 순교자‘로 알려지게 됐다. (후략).²⁵ - P22
25 Bobbo, Venezia in tempo di guerra, pp.327-44. John Foot, Fratture d‘Italia. Da Caporetto al G8di Genova la memoria divisa del paese, Milan Rizzoli, pp.13-14. - P495
베네치아의 산타마리아마조레 감옥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시내로 들어가는 철로 및 도로에 가까운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1926년에 문을 연 이 감옥은 베네치아의 전쟁사, 특히 저항운동의역사적 신경중추였다. 1943~1945년 내내 "산타마리아마조레의 수감동과 정치경찰 사무실 사이에 (실제 및 추정된) 반파시스트와 파르티잔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는데, 사무실에서 경찰이 그들을 ‘심문했고 심문은 종종 고문으로 이어졌다."²⁸ - P23
28 Bobbo, Venezia in tempo di guerra, p.39. - P496
바잘리아는 1944년 12월 11일에 체포됐는데, 필시 밀고 때문이었을 것이다.³⁰ 닷새 밤낮으로 경찰 심문을 받고 나서 베네치아의 감옥으로 보내졌다. - P24
30 옹가로와 루비니 모두 밀고자는 프란체스코 루치라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Albanese et al., Memoria resistente, p.1276, 1511), 줄리오 보보의 연구에서는 바잘리아의 사촌인 루초 루비니가 파시스트 경찰에 체포된 뒤 매질당한 끝에 바잘리아를 비롯하여 여러 명의 이름을 댄 것으로 보인다(Bobbo. Venezia in tempo di guerra, pp.412-14). - P496
전쟁 동안 감옥은 공포와 고통, 빈대, 오물, 질병, 그리고 저항의 장소였다. 바잘리아보다 먼저 투옥된 키넬로는 "수감생활은 힘들고 어려웠다"고 썼다.³¹ 바잘리아는 한동안 루비니를 비롯하여 반파시스트 운동에 가담한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한방에서 지냈다. 많은 수의 죄수를수용하는 큰 감방 사이에서는 죄수들의 이동이 잦았다. 그들은 카드놀이와 노래, 독서, 잡담, 토론, 음모와 잠으로 시간을 보냈다. - P25
31 Chinello, La mia "educazione sentimentale", p.52. - P496
감옥에서 보낸 시간은 바잘리아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지만, 그는 감옥 경험에 대해 심지어 친구나 가족에게조차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감방에서 배운 노래를 간혹 부르곤 했다. 그가 1961년에고리치아의 정신질환자 보호소 체제에 대해 거의 본능적인 수준의 강한 반응을 보인 것의 근원을 젊은 시절 감옥 생활의 기억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 - P26
저항운동은 바잘리아의 삶에 다른 방식으로도 영향을 끼쳤다. 학교친구인 알베르토 옹가로는 베네치아 저항운동의 핵심 가담자였으며, 공개적으로 정권에 반대한 최초의 학생 중 한 사람으로서 반쯤 전설이된 인물이다. - P27
(전략).
바잘리아는 파도바에서 좌절을 맛보았음이 확실하다. 1970년대 초에 파르마에서 대학교 체제로 돌아갔을 때 다시금 상부에 의해 승진이 가로막히는 일이 적어도 두 번 있었다.³⁶ 파도바에서 순수 연구원으로 있던 시기에는 많은 학술 논문을 발표했고, 이탈리아 정신의학계라는 보수적이고도 고리타분한 세계에 화가 난 정신의학자를 비롯한 사람들과 접촉하게 됐다. - P28
36 이 정보의 출처는 바잘리아 본인이지만(Ongaro and Giannichedda, Conferenze brasiliane, pp.155-6)FabioVisintini, Memorie di un cittadino psichiatra (1902-1982), Naples:Edizioni Scientifiche Italiane, 1983, p.189)에서도 확인되었다. - P497
파도바에서 보낸 시간은 우정과 인맥 측면에서 중요했다. 이곳에서 함께 공부한 안토니오 슬라비치는 1962년에 고리치아 에퀴페 (équipe, 팀)의 두번째 구성원이 되었고, 고리치아와 콜로르노의 경험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잘리아와 함께했다. (중략). 1925년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서 태어나 베네치아의 아르메니아대학에서공부한 그는 나중에 바잘리아가 벌인 운동의 중요한 협력자가 되어 다양한 임명위원회에서 그를 도왔다.³⁸ 바잘리아는 완전한 외톨이가 아니었을 뿐더러 독불장군도 아니었다. 고위층 친구들이 있었고, 힘있는 사람들과 협력관계를 맺고 함께일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 P29
38 나중에 테르치안은 1982년 베로나에 새로 생긴 대학교의 초대 총장이 되었다. 또 『사페레(Sapere)」지를 창간했다. - P497
그는 주로 아침 일찍 일어나 아주 늦은 시각까지 일했으며, 일하는동안 줄담배와 코카콜라의 힘을 빌렸고 가끔은 위스키도 한잔씩 했다. 그의 저술은 거의 전부 (특히 파도바 이후로) 아내 프랑카에 의해, 프랑카와 함께 쓰였다. - P30
(그를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그의 지성과 사람됨에 반했다. 그는 카리스마 있고 매력적이며 사람들로부터 사랑과감탄을 자아낸 동시에 두려움과 질투, 이따금은 미움도 불러일으켰다. 많은 사람에게 영웅이 됐지만, 1968년과 관련된 운동에 반대한 사람들에게는 나아가 ‘1968년‘ 자체의 일부 핵심 인사에게도) 악인이었다. - P31
고리치아의 직책은 한눈에도 장래성이 없고 위험하기만 했다. 그 일을 맡는다는 것은 정신의학 체제 가운데서도 아무 희망도 없는 분야에 정치적·지리적으로 고립됨을 의미했다. 온 가족이 정든 곳을 떠나야 했고,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 드는 장소를 책임져야 했다. 이 직책을맡을 유일한 이유는 변방에서, 변두리 중 변두리에서 체제 전체를 탈바꿈시켜보자는 것뿐이었다. - P32
고리치아의 중요한 현실 하나는 ‘슬라브인‘과 이탈리아인 간의 분열이었다. 이미 뿌리깊었던 정치적·민족적 적대감이 양차대전 사이에 행해진 파시스트의 인종청소 정책으로 더욱 심해졌다. 1945년에는유고슬라비아의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이 고리치아를 해방한 후 이탈리아인을 대규모로 강제 추방했다.⁴⁴ - P33
44 John Foot, Fratture d‘Italia, pp.33, 119-97 Z. - P497
바잘리아 가족(프랑코, 프랑카, 그리고 어린 두 아이-여덟 살인 엔리코와 여섯 살인 알베르타)은 1961년 말에 고리치아로 이사했다.⁴⁵ 이들은 장중한 느낌의 현 정부 청사 꼭대기 층에 있는 널찍한 아파트에 자리잡았다. 고리치아의 한복판이었고 정신질환자 보호소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아이들은 근처의 학교를 다녔다. 당시 이탈리아의 정신질환자 보호소는 대부분 현 의회에서 재원을 대고 운영했는데 고리치아에서도 그랬다. - P34
45 때로는 바잘리아의 고리치아 생활이 시작된 시기를 1962년으로 잡기도 한다. 슬라비치의 기억에 따르면 그와 바잘리아 모두 한동안 파도바에서 출퇴근했다(Slavich, La scopa meraviglhante, p.257, n.1). - P497
. 중요한 것은 쿠라(cura, 치료)가 아니라 쿠스토디아(custodia, 구금)였다. 이탈리아의 정신질환자 보호소는 아직도 1904년과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법률 규정을 따르고 있었다. - P34
일단 정신질환자 보호소에 들어가면 환자는 사실상 ‘비인격자‘가 됐다. 인권이 박탈되고 ‘세속적 소유물‘을 이론상 한시적으로) 빼앗겼다. 머리를 빡빡 깎고 유니폼을 입히는 경우가 많았다. - P35
바잘리아가 볼 때 그곳 환자들은 이미 인간 이하였다. 그저 목숨만 이어갈 뿐이었다. 전기충격 치료법을 발명한 우고 체를레티는 1949년에 이렇게 썼다. "창문에는 창살을, 안마당에는 금속 울타리를 둘렀으며, 이 우리 안에 정신질환자들의 슬픈 무리가 제각각의 기괴하고 이상한 동작과 행동 방식을 보이며 빽빽이 몰려 있다."⁵¹ - P36
51 Cerletti, ‘La fossa dei serpenti‘, Il Ponte, V 11, 1949, p.1373. - P498
병원 안에서는 환자들을 보살피기 위해 많은 수의 간호사가 고용됐다. 이 간호사들은 훈련을 받지 않았고, 힘이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의 일은 어렵고 대단히 힘들며 스트레스가 많았지만 급료는 형편없었다. 정신질환자 보호소에 의사의 수가 적었다는 점을 볼 때(게다가 의사가 병원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작디작았다는 점을 볼 때) 바로 이 간호사들이 대체로 이 체제의 주된 얼굴에 해당했다. - P37
광기를 가리키는 언어도 중요했다. "마니코미오는 문자 그대로 미친사람을 보살피거나 보호하는 장소를 의미했다."⁵⁵ 나중에 공식적인 맥락에서는 좀더 중립적인 ‘정신병원‘이라는 용어가 쓰였지만, 마니코미오는 여전히 일반적으로 쓰이는 용어였다(오늘날까지도 그렇다). - P38
55 David Forgacs, Italy‘s Margins. Social Exclusion and NationFormation since 1861,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p.198. 이 책이 출간되기 전 초고의 일부분을 내게 주어 읽게 해준 데이비드 포르가츠에게 감사를 전하고자 한다. - P498
고리치아의 소장이 된 바잘리아는 곧 정신질환자 보호소 체제 전체가도덕적 파탄에 이르렀음을 확신하게 됐다. 그는 이런 공공시설 안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기존 방식에는 의학적으로 이점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히려 환자들의 괴상하고 불안한 몇 가지 행동 방식은 시설 자체 때문에 생겨났거나 악화된다고 확신했다. - P38
고리치아 초기의 바잘리아는 그 도시 자체처럼 격리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거의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생각은 극단적이었고, 그래서 학술협의회에서 동료들은 그를기피인물이나 괴짜로 대하는 일이 많았다. 이탈리아에는 정신질환자보호소 체제의 해체를 부르짖는 사람이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 P39
전체적으로 체제(정신질환자 보호소를지원하는 의료·정치·사회 구조) 내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저항이 상당히컸다. 정신질환자 보호소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자원을 끌어들였으며, 대중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목적을 충족해주었다. - P40
지금 돌이켜보면 이제까지 나온 바잘리아의 여러 전기, 바잘리아의 생각에 관한 연구, 바잘리아 운동에 관한 서술에서는 일관성을 부여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런 일관성이 꼭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의 생각과 실천)은 유연하고 유동적이었으며 시대의 조류에 맞춰 움직였다. 어떤 것을 시도해본 후 그 방식을 버리는 식이었다. - P41
그는 어떠한 당의 주의에도 얽매이지 않았으며, 종종 다양한 색깔의사람들이 어떻게든 자신의 관점에 동조하게 만들었다. 현직에 있는 동안 바잘리아는 대체로 공공시설 내부에서 움직였다. 대개는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였지만 그것을 아예 철폐하려는 목적으로 그런 때도 많았다. - P42
이제는 고전이 된 랭의 연구서 『분열된 자기』는 1960년에 나왔지만 영향력 있는 교재가 되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이 책은 부분적으로 랭이 놀이방 시기에 환자들과 접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무엇보다도 랭은 조현병과 광기가 이해 가능한 대상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광기의 언어는 지성으로 이해 가능했다. - P43
한편 남아프리카 태생의 정신의학자 데이비드 쿠퍼는 1962년부터1966년까지 런던 교외에 있는 정신질환자 보호소에서 실험적으로 개방형 병동을 운영하고 나중에 이 경험을 『정신의학과 반정신의학』에서술했다. 이 책은 또하나의 고전이 되었다.⁶³ 이 모든 사례에서 완전 통제시설은 (일시적으로) 뒤엎어지고 개혁되거나 내부로부터 잠식당했다. - P44
63 David Cooper, Psychiatry and Anti-psychiatry, London: Tavistock, 1967. Psichiatria e anti-이탈리아어 번역판은psichiatria, Rome:Armando, 1969. - P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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