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 1
오에 겐자부로 지음, 김현경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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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만의 이런 과감한 상상력, 위태롭고 초조한 캐릭터들이 좋다 내 최애 작가 ㅠ 오에 작품들 중에서도 유난히 재밌게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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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우스의 노래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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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들린 밀러의 장편 소설 <아킬레우스의 노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보다야 훨씬 읽기가 쉽겠거니 생각하여 기꺼운 마음으로 골라든 책이다. 확실히 인물간의 대화도 묘사도 현대식으로 재구성되어 있어 난해하거나 지루한 느낌은 덜 들었다. 하지만 워낙에 많은 호평 때문에 너무 기대감을 크게 가졌던 모양인지 “내 스타일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이 책에 대한 나의 총체적 감상이다. 우선 개인적으로, 현대식으로 재편성 되어있다 보니 중간중간 등장하는 여신이나 요정의 존재가 되려 어색하게 다가왔다. 신은 인간을 미천하게 여기고 인간은 신에 대해 벌벌 떠는 모습을, 현대식 대화와 현대식 묘사로 보고 있자니 조금 오그라들었다. 하지만 아름답고 냉정한 여신, 카리스마 넘치는 테티스의 구현은 인상 깊기는 했다. 언뜻 무자비한 듯 보여도, 아들 아킬레우스에 대한 모성애만큼은 진심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장면들도 좋았다. 그녀의 성격뿐만 아니라 외양에 대한 묘사도 어찌나 섬세한지 얼음 같은 물보라와 찬 소금내가 책장을 넘어 어른거리는 듯했다. 위엄 있고 단호하지만, 어딘가 쓸쓸하고 여린 구석이 있는 신처럼 다가온 캐릭터이다. 그리고, 테티스 외에, 겉은 강하지만 속은 은근히 약한 듯 느껴졌던 또 다른 캐릭터가 있다. 바로 데이다메이아다. 학부시절 문예창작을 전공할 때, 교수님께서 책을 읽은 후, 한 문장이나 한 장면이라도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그것은 성공한 독서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아킬레우스의 노래>에서, 더도덜도 욕심 내지 않고, 내 마음 속에 기억되는 이미지 한 가지만 꼽으라고 한다면 여장한 아킬레우스와 춤을 추고 있는 행복한 표정의 데이다메이아일 것이다. 아킬레우스에게 그녀는 아무 의미 없는 여자였으나 그녀에게 아킬레우스는 그녀의 야망이며 자존심이었고, 젊은 날의 허영이면서 동시에 수줍고 순수한 열정이었기에 마음이 아팠다. 아킬레우스에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확인하곤, 비교적 온순하고 무덤덤한 파트로클로스에게 화풀이하고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대는 그녀의 모습에서 과연 한 성깔하는 인물임을 새삼 알 수 있었는데 다소 불도저 같은 성미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아주 어렸을 때,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며 작가의 꿈을 키우던 때부터 유난히 불같은 성격의 여성 캐릭터에 호감을 가지곤 했었다. <비밀의 화원>의 메리 레녹스도 고집쟁이라 마음에 들었었고,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 언쇼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드센 여자들이라서 좋았다. <아킬레우스의 노래>에서 데이다메이아는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짧은 등장 속 강렬한 언행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은 듯하다. <아킬레우스의 노래>에서는 무엇보다도 파트로클로스와 아킬레우스의 우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들의 감정선에 감명 받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보다는 데이다메이아에게 끌렸던 것을 생각하면 역시 사람마다 관점과 가치관은 다른 것이다. 하지만 나도 두 주연의 우정에 아무 감흥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소 다혈질적인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에게만은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응하던 순간들, 아킬레우스가 인간미가 있던 영웅으로 기억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희생을 마지 않던 파트로클로스의 모습들을 통해 친우로서의 애정을 넘어 상대의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깊고 탄탄한 두 사람의 관계가 멋지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테티스가 아킬레우스를 신으로 만들지 못했다며 개탄스러워할 때, 파트로클로스가 “대신 그를 만들었잖아요”라고 대답하던 장면은 특히 감동적이었다. 나에게도 파트로클로스와 같은 대답으로써 나를 높게 사고 있음을, 언제나 내 편에 서서 나를 보호할 것임을 확실히 보여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무척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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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든버러
알렉산더 지 지음, 서민아 옮김 / 필로소픽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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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든버러>라는 제목도 표지의 디자인도 너무나 예뻤어요. 굉장히 서정적인 문체로 이루어진 책일 거라 예감했는데 정말 딱 들어맞더라고요! 읽는 내내 섬세하고 감각적인 문장들을 자주 접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총 4부까지 나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 1부 때의 분위기가 가장 취향에 맞았어요. 주인공과 주변 소년들에게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성가대와 성가대원 소년들의 찬란한 느낌이 가득한 묘사라든가, 피터에 대한 주인공 아피아스 제의 열렬하고 청아한 사랑의 표현력이 그림처럼, 시처럼 마음속에 와닿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자꾸만 불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피터의 모습...! 결국에는 몸에 스스로 불을 붙여서 자살하는데 한 존재가 스러지는 방식이 굉장히 '피터'라는 캐릭터답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소설이 전체적으로 한 폭의 애틋한 수채화 같아요! 빛과 물을 많이 머금은 수채화..! 어느 기억이, 불꽃 심지의 색깔로 강인하게 그림자를 드리운다면, 손을 동그마니 모아 혼자 들여다보고 울거나 웃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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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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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로지 아룬다티 로이라는 이름 하나만 믿고 구매한 책이라고 해도 무방하답니다. 2017년 유월, 대학교 도서관에서 <작은 것들의 신>을 빌려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었지요. <작은 것들의 신>을 읽으며 아룬다티 로이는 대단한 작가로구나 생각했었습니다. 주인공 쌍둥이 에스타와 라헬, 그 쌍둥이의 어머니와 금기된 사랑을 나눈 불가촉천민 벨루타가 무자비한 폭행으로 인해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 입술 대신에 발 뒤꿈치나 아니면 다른 성한 신체 부위 어딘가로 에스타와 라헬에게 미소를 지어주었을지 모른다는 묘사가 아직도 마음 한켠에 아릿하게 남아 있어요. 아룬다티 로이의 문체는 잔혹하면서도 아름답고 세심하지요.

 

 사실, <지복의 성자>는 저에게 너무나 어려운 책이었어요. <작은 것들의 신>을 읽을 때에는 인도라는 나라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여도 책 속의 갈등 구조와, 사건이 절정을 향해 달음박질치는 선을 더듬지 못하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는데, <지복의 성자>는 읽는 내내 작가의 메시지를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유튜브로 인도와 파키스탄 국가의 분열과 탄생 배경에 대해서 알아보기도 했어요.

 1947년,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당시 분할통치 방법을 채택하게 되었죠. 분할통치로 인하여 인도는 이슬람과 힌두교라는 종교 간의 대립 구도가 서게 됩니다.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무슬림들이 건설한 파키스탄과 힌두교인의 인도로 나뉘게 되는데, 인도를 중심으로 서쪽에는 서파키스탄, 동쪽에는 동파키스탄이 형성되었죠. 영국은 각 지역 영주들에게 인도와 파키스탄 중 하나를 택하도록 지시하였다고 해요. 그때 서파키스탄과 인접한 카슈미르라는 지역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카슈미르 대다수 주민들이 무슬림이었으나, 그 영주는 힌두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카슈미르는 대다수 주민들이 속한 무슬림인 파키스탄의 것이냐? 영주가 힌두교이니 인도의 것이냐? 이 갈등으로 인하여 영국으로의 독립 직후에 발생한 것이 제 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라고 하더군요.

 배경 이해를 위하여 이 정도까지만 정리를 해도 머리가 핑글핑글 도는 것 같습니다. 지칭하는 말도 굉장히 생소한 데다가 편을 가르는 갈래가 한도 끝도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지요. <지복의 성자>에서 카슈미르의 언급이 무척 잦은데 동영상을 찾아보기 전에는 감이 오지 않았어요. 목적과 의미마저 너덜거릴 정도로 인도 내부가 자디잘게 나뉘어지고 있다는 추상적인 짐작에 의지할 뿐이었습니다. <지복의 성자>를 읽으며 알게 된 것인데, 심지어 이슬람 내에서도 시아파와 수니파가 나뉘며, 수니파 내에서도 데오반드인과 바렐비인이 나뉘고, 바렐비 내에서도 탄지흐인지 타프키르인지가 나뉘며 탄지흐에서도 탄지흐 아즈마트인지 탄지흐 파라트인지가 나뉘고 탄지흐 파라트에서도 탄지흐 파라트 자미아 울 울룸 아지메르인지 탄지흐 파라트 자미아 울 누르 메와트인지가 나뉘는 모양이더군요. 이렇게 미친듯이 나뉘는 이권 혹은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 확립성을 구하기에는, 이미 스스로가 엉망으로 분해되어 버렸다고 생각들지 않을까요? 마치 여자에도 남자에도 속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이자 아무도 아닌 사람인 안줌처럼 말이지요.

 

 아룬다티 로이가 안줌을 히즈라로 설정한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았어요. 이렇게 리뷰를 적어내려가고 있으려니, 안줌의 고통이 곧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열, 혼란과 닮게 느껴집니다. 나는 여자인가요, 남자인가요? 당신은 힌두교입니까, 이슬람입니까? 이슬람이라면 시아파입니까, 수니파입니까? 안줌은 마침내 "엄마"가 됨으로서 그녀의 작은 파라다이스를 사랑과 평화로 가득 채우지요. 인도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하던 "엄마"라는 존재가 된 안줌에게 깃든 것과 같은 평온, 그리고 안줌의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일지 몰라요. '이것'과 '저것'을 가르고 그 가른 선 너머에서 상대에게 총구를 들이미는 결과로 남는 것은, 결국 허망함과 눈물 뿐이라는 것을 아룬다티 로이는 <지복의 성자>를 통해 호소하는 듯해요. <작은 것들의 신>이 카스트제도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지복의 성자>는 훨씬 더 확대된 채인, 깊어진 채인 인도의 문제와 상처에 집중하고, 집요하게 성찰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작가라면 인류의 공생을 위한 더 나은 한 걸음, 선과 덕을 위하여 먼저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고발정신을 가져야 하지요. 아룬다티 로이는 조국애와 휴머니즘을 지닌 '작가다운 작가'로서 소설을 창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분열된 채인 국가라는 것이 사실 마냥 남의 나라 문제만은 아니지요. 부끄럽게도 한 번도 문제의식을 가져본 적 없었는데, 독서를 기회로 삼아 남한과 북한의 전망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됩니다. 갑자기 오에 겐자부로 작가에게 "서사가 많은 나라에 태어난 네가 작가로서 부럽다"는 말을 들었다는 황석영 작가의 인터뷰 내용이 떠오르네요. 개인적인 것이든 보편적 문제이든, 상처가 예술의 원천, 영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지요. 그 예술이 세상을 조금 더 인도적인 방향으로 이끌 맑은 목소리이길 희망합니다. 또한 작가는 창작자에서 나아가 사회운동가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확신을 심어준 아룬다티 로이의 앞으로의 또다른 작품을 기대합니다. 독자로서,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로서 깨어있는 정신, 인간미를 갖춘 사람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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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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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들은 너무 납작하고 단순해서 진짜 감정의 근처에도 닿지 못했다.

겨울에는 신기한 눈이 내리고, 겨울나무는 아름답고, 겨울나무는 우아하고, 눈을 맞으면 더 우아해지고, 쨍한 겨울 하늘도 좋다. 입김도, 담요도, 귤도 좋다.

외국에 나가보고 싶다. 내가 전혀 모르는 언어 속에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아기였을 때, 한살 때의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고 들었는지 너무 궁금하다. 그때 내 귀엔 어른들 말이 어떻게 들렸을까? 그때가 기억나면 좋겠다.

나는 하고 싶은 게 있지만 명확하지 않고 느슨하다. 외교관처럼 딱 떨어지는 게 없다. 모르겠다. 그냥 지금이 좋다. 하루하루를 꼭꼭 눌러서 살 수 있는 만큼 다 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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