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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우스의 노래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6월
평점 :
매들린 밀러의 장편 소설 <아킬레우스의 노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보다야 훨씬 읽기가 쉽겠거니 생각하여 기꺼운 마음으로 골라든 책이다. 확실히 인물간의 대화도 묘사도 현대식으로 재구성되어 있어 난해하거나 지루한 느낌은 덜 들었다. 하지만 워낙에 많은 호평 때문에 너무 기대감을 크게 가졌던 모양인지 “내 스타일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이 책에 대한 나의 총체적 감상이다. 우선 개인적으로, 현대식으로 재편성 되어있다 보니 중간중간 등장하는 여신이나 요정의 존재가 되려 어색하게 다가왔다. 신은 인간을 미천하게 여기고 인간은 신에 대해 벌벌 떠는 모습을, 현대식 대화와 현대식 묘사로 보고 있자니 조금 오그라들었다. 하지만 아름답고 냉정한 여신, 카리스마 넘치는 테티스의 구현은 인상 깊기는 했다. 언뜻 무자비한 듯 보여도, 아들 아킬레우스에 대한 모성애만큼은 진심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장면들도 좋았다. 그녀의 성격뿐만 아니라 외양에 대한 묘사도 어찌나 섬세한지 얼음 같은 물보라와 찬 소금내가 책장을 넘어 어른거리는 듯했다. 위엄 있고 단호하지만, 어딘가 쓸쓸하고 여린 구석이 있는 신처럼 다가온 캐릭터이다. 그리고, 테티스 외에, 겉은 강하지만 속은 은근히 약한 듯 느껴졌던 또 다른 캐릭터가 있다. 바로 데이다메이아다. 학부시절 문예창작을 전공할 때, 교수님께서 책을 읽은 후, 한 문장이나 한 장면이라도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그것은 성공한 독서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아킬레우스의 노래>에서, 더도덜도 욕심 내지 않고, 내 마음 속에 기억되는 이미지 한 가지만 꼽으라고 한다면 여장한 아킬레우스와 춤을 추고 있는 행복한 표정의 데이다메이아일 것이다. 아킬레우스에게 그녀는 아무 의미 없는 여자였으나 그녀에게 아킬레우스는 그녀의 야망이며 자존심이었고, 젊은 날의 허영이면서 동시에 수줍고 순수한 열정이었기에 마음이 아팠다. 아킬레우스에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확인하곤, 비교적 온순하고 무덤덤한 파트로클로스에게 화풀이하고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대는 그녀의 모습에서 과연 한 성깔하는 인물임을 새삼 알 수 있었는데 다소 불도저 같은 성미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아주 어렸을 때,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며 작가의 꿈을 키우던 때부터 유난히 불같은 성격의 여성 캐릭터에 호감을 가지곤 했었다. <비밀의 화원>의 메리 레녹스도 고집쟁이라 마음에 들었었고,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 언쇼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드센 여자들이라서 좋았다. <아킬레우스의 노래>에서 데이다메이아는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짧은 등장 속 강렬한 언행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은 듯하다. <아킬레우스의 노래>에서는 무엇보다도 파트로클로스와 아킬레우스의 우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들의 감정선에 감명 받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보다는 데이다메이아에게 끌렸던 것을 생각하면 역시 사람마다 관점과 가치관은 다른 것이다. 하지만 나도 두 주연의 우정에 아무 감흥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소 다혈질적인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에게만은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응하던 순간들, 아킬레우스가 인간미가 있던 영웅으로 기억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희생을 마지 않던 파트로클로스의 모습들을 통해 친우로서의 애정을 넘어 상대의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깊고 탄탄한 두 사람의 관계가 멋지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테티스가 아킬레우스를 신으로 만들지 못했다며 개탄스러워할 때, 파트로클로스가 “대신 그를 만들었잖아요”라고 대답하던 장면은 특히 감동적이었다. 나에게도 파트로클로스와 같은 대답으로써 나를 높게 사고 있음을, 언제나 내 편에 서서 나를 보호할 것임을 확실히 보여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무척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