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몽 자베스

예상 밖의 전복의 서

그는 또 말했다, ˝너는 언제나 아래에 있을 것이다. 네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생각해야만 하는 어떤 것 아래에.˝

그가 적었다, ˝너는 알고자 생각한다. 너는 네 생각조차 알지 못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에드몽 자베스

예상 밖의 전복의 서

살기란 순간의 전복을 제 것으로 행하며, 죽기란 돌이킬 수 없는, 영원의 전복을 제 것으로 행한다.

그가 말했다, ˝전복의 박자. 아! 그 박자를 되찾아야 했건만.˝

너는 창조를 다하지 않았다. 신을 본떠, 너의 작은 행위의 천구 안에서, 순간의 창조를 행할 따름이다.
전복은 장래에 대한 조약이다.

그가 또 말했다, ˝자신의 드높은 시기에, 그토록 자연스럽고 그토록 무구한 전복이기에, 나는 전복을 불안정한 우리의 균형을 회복할 남다른 순간으로 여기려 할지도 모른다˝

위협은 판독이 불가하다.

*

언어가 분명케 한들, 침묵이 어둡게 하지는 않는다. 침묵은 다시 태어나게 한다.

진부함이 해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푸른 수레국화.

(그가 말했다, ˝진부라 하여 결코 전복이 없는 게 아니다. 가치를 깎아내리려는 시간을 벗 삼은, 진부해진 전복이 바로 진부인 것이다.˝)

전복은 질서 없음을 증오한다. 전복 그 자신이야말로, 반동하는 어떤 질서에 맞서는 유덕한 질서다.

얇은 차가운 무지의 영역과 충돌한다. 아연할 깊이를 담은 바다 거울로 빛줄기가 향하듯.

(예외적 행위란 없다. 오직 자연스러운 행위가 있을 따름이다. 다만, 개중에, 중대한 것과 변변찮은 것은 있다.

창조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에드몽 자베스

예상 밖의 전복의 서

전복이란 문체의 운동 자체다. 죽음의 운동이다.
글은 거울이 아니다. 쓰기란, 미지의 얼굴을 맞닥뜨리는 행위다.
분별없는 바다이기에, 한차례 파도로는 죽을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안톤 체호프

드라마

파벨 바실리치는 난폭하게 눈을 희번덕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가슴속으로부터 치솟아나오는 듯한 괴기스런 비명을 지르더니 묵직한 문진을 집어들고 그것으로 무라슈키나의 머리통을 힘껏 내리쳤다.
˝날 잡아가라. 내가 그녀를 죽였다!˝
잠시 후 뛰어들어온 하인에게 그가 말했다.

배심원들은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고골

죽은 혼

이렇게 하층민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아서 독자 여러분께는 미안할 따름이다. 하찮은 것들과 친해지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독자 여러분의 마음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러시아인은 그런 족속이다. 조금이라도 계급 높은 사람과 친해지려 하고, 절친한 우정보다 백작이나 공작과 나누는 인사를 더 좋아한다. 그렇기에 나는 사실 6등관에 지나지 않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 걱정스럽다. 7등관이라면 그나마 관심 있게 이 글을 읽어주겠지만, 콧대가 하늘처럼 높으신 3, 4등관 나리께선 발밑에 있는 것들을 오만한 눈길로 경멸스럽게 힐끔 쳐다만 보거나, 심각하게는, 작가에겐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무시로 일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렇게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다시 주인공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두 사람이 현관을 지나, 응접실, 식당을 빠져나갈 동안, 시간이 부족하겠지만 아무튼 그 틈을 이용해 집주인에 대해서 약간 이야기해두고자 한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미리 얘기해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마니로프 부인께선.... 아니다, 사실을 말하기엔 부인이 다른 얘기를 할까 봐 걱정되므로 슬슬 주인공의 곁으로 돌아가야만 할 것 같다. 응접실 문 앞에 선 두 사람이 벌써 몇 분 째 먼저 들어가라고 서로 양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