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랜드 - 재미와 놀이가 어떻게 세상을 창조했을까
스티븐 존슨 지음, 홍지수 옮김 / 프런티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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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좋은 술을 앉은뱅이술이라 한다. 맛에 취해 마시다보니 일어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우스개소리다.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은 책도 앉은뱅이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신간 <원더랜드>가 그랬다. 오랜만에 집중해서 읽었다. 아직 독자로서 내공이 덜 여문지라 독서 안목이 평판에 좌우되는데, 이어령 전 장관, 이시형 박사, 정재승 교수 등 다양한 인사가 추천한 책이라 눈길이 갔다. '재미와 놀이가 어떻게 세상을 창조했을까'라는 주제에 맞게 재미와 놀이가 가득했고, 그것이 인류 문명을 혁신하는 과정을 담았다.



예컨대, 영국에서 촉발된 산업 혁명은 인류 3대 기술 혁명으로 일컬어진다. 면직물을 대량생산하기 위한 방직기 등이 발명되면서 박차가 가해졌는데, 왜 방직기였을까는 생각지 못했다. 1600년대 막바지 무렵부터 런던 상류층 사회에선 목화로 만든 면직물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기존의 까슬한 모 섬유에 비해 면 섬유의 부드러운 촉감은 단번에 부유층 여성에게 속옷 등 다양한 형태로 파급되었고, '옥양목 귀부인'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까지 했다. 영국 의회는 '옥양목 귀부인들'이 경제를 를 위협하고 있다는 책자를 대대적으로 발간했다.(p.56~58) 결국 이러한 패션 유행은 광풍처럼 번졌고, 일반 대중들에게 퍼져나갔다. 수요는 공급을 부른다. 면직물 대량생산을 위한 방직기의 발전으로 이뤄졌다. 패션 혁명은 런던 상업가의 풍경까지 바꿔놓았다. 단순한 상거래 장소에서 소비를 유혹하는 곳으로 변모하였다. 상인들은 재산의 3분의 2를 상점을 꾸미는 데 썼고, 결국 이러한 관행은 백화점과 상업 도시화를 촉발시켰다. 한편으론 옥양목 수요를 맞추기 위해 식민지 약탈과 노예 산업, 공장근로자의 열악한 환경 등 인류 기술 혁명의 바탕엔 반인륜적 흑역사가 맞물려 있다.



산업 혁명은 인류 문명의 혁신이었다. 하지만 역사 교과서는 왜 산업 혁명이 방직기로부터 시작했고, 면직물 대량생산이 당시 사회적 풍토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 마치 문명을 통찰한 혁신가들이 몇 백년 역사를 꿰뚫어보고 첫 발을 내딛은 양 생각하기 일쑤다. <원더랜드>는 그 간극을 메워준다. 근대 시기 사치 풍조로 사회적 비난을 받았던 '옥양목 부인들'이 산업혁명이 태동한 배경 중 하나였고, 산업 도시가 발전할 수 있었던 촉매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현자의 통찰이 아니라, 그들의 재미와 놀이가 원더랜드를 설계하는 동력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향신료가 교역과 무역을 활성화시킨 중대한 유인 중 하나였는데, 실용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다보니 오류에 당착한다. 정향과 육두구, 후추같은 향신료가 보존이 용이하지 않은 음식물 보관에 도움이 됐기 때문에 무역이 발전했다는 식이다. 그런데 후추는 상류층이 향유하던 사치품이었다. 음식보다 비싼데, 음식을 보존하기 위해서 후추에 메달렸다는 설명은 아귀가 맞지 않다. 앞뒤가 바뀐 것이다. 향신료에 매료된 사람이 먼저다. 로마는 인도와 후추 무역으로 막대한 교역 적자를 봤고, 이것은 로마가 몰락하는 계기 중 하나였다. 피에르 푸아브르(영어로 하면 피터 페퍼다)는 향신료를 유럽에 대중화시킨 일종의 산업스파이였다. 네덜란드는 동인도 무역으로 막대한 무역 수입을 올리고 있었는데, 이 외팔이 프랑스인이 지구 반대편에서 씨앗 한 줌을 훔쳐온 탓에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놀라움, 유희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뼈로 만든 피리는 기원전 3만 3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생존을 위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 인류는 동물의 뼈로 무기와 생활용품이 아닌 피리를 만들었다. 벽화는 눈에 보이는 예술이지만 음악은 지극히 추상적이라는 점에서 놀랍다. 구석기 뼈 피리는 지금도 쓰이는 음정 체계를 갖고 있었다. 음악을 향유하려는 열정은 연주에만 그치지 않았다. 음악을 기록하고 자동으로 재생시키려는 욕구다. 공자도 음악을 듣고 삼일 동안 침식을 잊었다는데, 내가 원할 때 손쉽게 즐기고 싶은 욕망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슬람 문명이 융성하던 시기에 바누 무사가 저술한 <기발한 장치들이 수록된 책>에는 저절로 음악을 연주하는 자동기계가 나온다. 저절로 음악을 연주하는 장난감은 어떻게 파급되었을까. 바로 프로그래밍이다. 16, 17세기 기계공학의 금자탑으로 불리는 뮤직 박스로 발전하였고, 이러한 원리는 방직기에 활용되었다. 건반악기에서 타자기 키보드가 파생된 덕에 컴퓨팅 기술을 급속하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음악을 자동으로 연주하고 녹음하려는 인간의 유희는 결국 코드화 개념으로 이어졌고, 모스 부호, 주파수, 또 주파수 변조기술이 확장대역 기술로 진화해, 무선전화통신망, 블루투스, 와이파이 등으로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유희는 기술 문명의 발전만을 가져오지 않았다. 물론 기술 발전과 문화는 별개가 아니지만.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사인 야코부스 데 체솔리는 다양한 사회집단의 바람직한 역할과 관련한 설교로 명성이 자자했다. 결국 사람들의 요구에 힘입어 책으로 출간되는데, 바로 역사상 두 번째로 영어로 인쇄된 <평민의 관습과 귀족의 책무에 관한 책>이다. 일명 <체스 게임>이다. 체스 교본인 동시에 기물들을 여러 사회 집단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이 책은 당시 중세 사회구조를 해체하는 데 일조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수도사가 쓴 체스교본이자 설교집이 말이다. 바로 왕 중심의 단일 유기체적인 정치체제에 대한 시각을 바꿔놓았다. 체스판 위의 기물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룰에 따라 움직인다. 사회를 체스에 비유함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을 독립된 인격체로, 사회를 법률과 계약 집단으로 바라본 것이다. 사회계약론의 원조라고 할까. 애초에 모노폴리는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데서 시작했다. 당시 보드게임은 교훈을 위한 재미를 추구했다. 종교적 가르침이 주를 이었고, 여전히 인기 게임인 인생게임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모노폴리의 원조가 되는 '지주게임'은 리지 메기라는 신여성에 의해 발명되었다. 시인, 언론인 등 다양한 직업군에 종사한 여성참정권자로, 사회정치적 혁명수단으로 보드게임을 만들었다.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에 입각한 지공주의로 지주들의 횡포를 비판한 것인데, 교훈성에 치중하여 성공하진 못했다. 이를 찰스 데로우가 지금의 모노폴리로 발전시켰고 대성공을 거뒀다. 자본주의적 요소를 담고 있어서 수업 보조교재로 쓰인다는 그 보드게임. 리지 메기의 처음 취지와는 정반대로 세계적인 게임으로 거듭났다. 뿐만 아니라 커피하우스에서 수많은 사상과 예술이 태동했고, 선술집은 민주주의가 꽃피게 된 광장 문화의 주역 중 하나였다. 오늘날 맥주집을 일컫는 펍(pub)이 퍼블리칸, 퍼블릭 하우스의 줄임말이듯이.



작년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이 전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다. 체스계는 1997년 체스마스터 파스카로프가 IBM 딥 블루에게 패배했고, 일반 체스 유저들이 쓰는 프리츠 시리즈만 해도 체스마스터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반면, 바둑은 체스에 비해 경우의 수가 비할 바가 아니라서 아직은 인간이 우위를 점친다는 분석이 다수였다. 결과는 알파고의 승리였다. 일각에선 최첨단 인공지능으로 바둑을 둔다는 점이 마뜩찮을 것이다. 실용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역사에 무지한 소리다. 게임이론이 인공지능으로 발전하고, MIT 대학원생이 모여서 만든 컴퓨터 게임 <우주전쟁!>덕분에 컴퓨터의 다양성과 발전이 증폭되었는지 모르는 소리다.  도박장에서 결과를 예측하기 위해 확률과 통계 이론이 다수 창안되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13세기 즈음 주사위 제조업자들이 균일한 주사위를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무작위성에 대한 연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것처럼 말이다.



요한 하위징아는 명저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에서, "지난 세월 동안 나는 문명은 놀이에서 생성되고, 놀이로서 전개된다는 확신을 품게 되었다."고 했다. <원더랜드>는 하위징아의 발견을 흥미롭게 풀었다. 인류 문명의 발전을 실용적인 시각에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특히 그렇다. 각종 컨텐츠 산업, 기술 발전, 요즘 화두가 되는 4차 산업혁명도 실용성과 부가가치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있다. 정작 기술을 발전시키는 주요한 동력인 놀라움, 유희는 뒷전이다. 닌텐도가 인기면 우리도 닌텐도 만들자, 포켓몬고가 인기면 우리도 증강현실 게임을 만들자, VR이 대세면 우리도 가상현실 기반 컨텐츠를 제작해 보자. 고부가가치 산업이니까. 마치 개발 경제 시절의 마인드다. 구글이나 세계적 업체들이 왜 일과 시간과 놀이 문화를 융합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유도하는지, 우리나라는 수박겉핥기식 선도 업체 따라잡기로 이해하는 시각이 많다. <원더랜드>를 추천하고 싶다. 책에서 사회적 담론을 보는 나도 구시대적 마인드가 아닐까 한편으론 성찰해 본다. 이 책은 무엇보다 그냥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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