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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Bible 리딩 바이블 (본문 + 해설집)
이재훈 지음 / 넥서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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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 시리즈를 보기엔 너무 쉽고, 거로나 영어순해 같은 난이도가 있는 지문을 보기엔 실력이 안되는 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기본기가 부족한 나같은 초심자가 보기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평이하단 느낌을 받았다. 대신 유형별 분류로 탄탄한 기본기를 쌓기에 더 없이 좋을것 같다. 고시입문자거나 로지컬한 독해에 감이 잡히지 않는 이들이 손에 쥐면 얻을게 꽤나 있는 책이다. 수준높은 리딩을 원하는 독자들은 해커스 토플 리딩이나 거로를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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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 법학자 김두식이 바라본 교회 속 세상 풍경
김두식 지음 / 홍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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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대인이야말로 두려움을 일으키는 정연한 논리로 귀족적 가치 등식을 역전하고자 감행했으며, 가장 깊은 증오의 이빨을 갈며 이를 고집했던 것이다. 비참한 자만이 오직 착한 자다. 가난한 자, 무력한 자, 비천한 자만이 오직 착한 자다. 고통받는 자, 궁핍한 자, 병든 자, 추한 자 또한 유일하게 경건한 자이며 신에 귀의한 자이고, 오직 그들에게만 축복이 있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신앙인은 ‘회개’로 봉헌해야될 현실의 삶이 고달프고 누추할수록 신에게 떳떳할 수 있고, 자신의 반성을 진실되다는 증거로 삼을 수 있다. 종교 안에서 ‘비참한 자만이 오직 착한 자’라는 니체의 지적은 더없이 타당하다. 종교는 빈곤한 인간의 비참성이 종교적 윤리성으로 추앙받고 가난한 이가 더 축복을 받는 유토피아적 공간이다. 힘들고 지친 영혼일수록 신의 보살핌이 넘치는 은혜로 다가오는 까닭이다. 소유하지 못한 이에게 냉정한 사회에서, 무소유를 예찬하는 종교란 ‘멋진 신세계’는 모든 이에게 강한 흡입력을 가진다.

2. ‘정통과 이단’이란 구호는 한국의 주류 개신교가 흔히 입에 담는 말이다. 무엇을 정의한다는 것은 정의되지 못한 것을 배제하는 행위이다. 마찬가지로 정통은 이단이 있어야만 성립할 수 있다. 동전의 앞뒷면, 남성과 여성의 구획처럼 ‘이단’이란 규정은 ‘정통’과 동시성의 맥락에서 ‘구성’된 것이다. 기독교의 이론적 근거로 간취한 성경의 형성과정은 이를 잘 보여준다. 김용옥에 따르면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대결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세력 대결이기도 했다. 아리우스는 동방교회의 주축 세력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 동방교회의 느슨한 다원적 사유를 이단으로 휘몰고 로마 중심의 서방교회를 주축으로 하여 동ㆍ서 교계를 일원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아타나시우스의 아리우스 비판은 아리우스가 예수의 인성만을 고집하고 예수의 신성을 거부했다는 테마에 집중되어 있지만, 아리우스는 예수를 또 하나의 신으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전통적 다신론 사유의 아류밖에 안 된다고 보았다.”

“예수가 인간일 뿐이다라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예수를 격하시키려는 음모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유일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예수의 인간됨을 통하여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과 합일될 수 있는 신비주의적 가능성을 열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신비주의는 예수가 신적인 권능으로써 인간의 죄악을 대속한다고 하는 구원론적 의미를 약화시키고 기독교적인 독특한 유일신관의 기저를 파괴한다고 보았다.” 『도올의 도마복음』. 지난한 대립은 당대 정치권력이었던 로마제국의 승인으로 ‘아타나시우스 27서체제’를 정경으로 확립하기에 이른다. 서방교회의 지배력의 강화로 그들의 교리체계였던 아타나시우스 정경체계가 주조된 것이다. 결국, 초기 교회사에서 정통을 확립한 주체는 야훼가 아닌 ‘정치권력’이었다. 말하자면, 신성과 영성을 견지하는 기독교의 발흥은 그 시초부터 현실의 정치지형을 반영할 수 밖에 없었다. 정통과 이단은 각 시대마다 달랐고, 한 시대의 이단이 다음 시대엔 정통이 되기도 했다. 정통과 이단의 대립과 투쟁의 역사적 결과물이 성서이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다는 ‘성경’은 이렇게도 정치적이다.

3. 신정정치의 종식과 '탈주술화'가 근대의 주요 특질이라 할 때, 한국 개신교의 정치 참여를 넘어선 권력 추구 현상은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MB지지층의 '등뼈'에 해당하는 보수 개신교의 전폭적 후원으로 집권한 당선자의 정책 구상이 '주요 고객'의 입맛에 맞는 시혜로 이어지는 것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교육 자율화'란 허명아래 종교단체가 대거 소유한 사학의 독점과 전횡을 용인하는 정치적 태도는, 자신의 충견에게 지불하는 황금주인 셈이다. 개신교의 타종교에 대한 적대는 ‘템플 스테이’ 예산안 누락을 통해 실천되고 있다. ‘헌법의 풍경’을 통해 시민사회가 감시하지 않으면 국가는 언제나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경고를 했던 김두식이 교회권력의 비대화에 천착한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종교적 낙관은 과급한 확신을 낳는다. 신앙은 이성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믿음은 상식과 토론을 배척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위험해 질 수 있다. 절대자가 사유화되고, 신이 사익을 위한 도구로 전용될 때 교회는 부패한다. 그간 저자가 목도한 ‘교회의 풍경’은 예수의 실천이 아닌 예수를 팔아 이득을 취하려는 장사꾼들로 넘처난다.

한국사회에서 개신교의 성공적 이식은 ‘서구에 대한 선망’에서부터 시작됐다. 이스라엘이 ‘시온주의’란 극우 이념을 내세워 ‘약속의 땅’인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것처럼, 식민지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에 의탁하면서 민족과 영토의 회복을 기원했다. 근대국가의 건립, 부의 축적, 서구열강으로 편입을 욕망했던 백년전 한국 개신교의 모습은 처음부터 숭미적일 수밖에 없었다. 반공주의를 표방하는 보수 개신교는 선진화와 ‘힘의 우위’를 통해 2007년 대선에 개입하고, '북한정권의 교체'란 목표를 공공연히 선언한다. 탈근대가 운위되는 시대에도 교회는 여전히 ‘영토국가’로 상징되는 근대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자유주의가 소수의 성공신화를 생산하며 개인에게 신분상승의 허위적 쾌락을 제공하는 것처럼, 교회는 물적 욕망과 성취를 예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치환하기까지 한다. 까닭에 교회 안에는 “명문 대학에 합격한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늘 성공한 사람들만이 넘쳐”난다. 기독교 서점을 점거한 자기계발서는 ‘긍정의 힘’을 믿고 ‘십일조를 안 세계의 부자들’처럼 물질의 축복을 받으라 꾸짖는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움을 토로한 예수의 고백을 한국의 개신교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종교가 자신만의 담론으로 가둔 ‘평화’와 ‘구원’은 ‘신을향한 귀의’나 ‘천국의 소망’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어 ’샬롬‘이나 헬라어 ’에이레네‘가 말하고자 하는 평화는 그런 마음속의 주관적 내적 영역으로 제한”되지 않는 포괄적인 개념이었고, 그 안에는 공익과 사회적인 가치도 들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 교회가 독점한 평화는, “단순히 마음속에서 얻는 평안으로 축소함으로 교회는 대부분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알리바이일 따름이다. 예수의 손은 하늘만 가리키지 않았다. 오히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밝힘으로써 현실의 문제를 직시했다. 예수는 정치적 박해를 받고, 당대의 지배세력과 대립했으며, 사회적 약자였던 세리와 창기의 친구였다. 요컨대 권력과 자본에 포섭된 한국의 기독교가 복원해야 할 예수의 가치는 사회적 공동체 대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저자는 줄곧 종교와 교회에 우선하는 ‘인간’을 이야기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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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경제학 (반양장)
누리엘 루비니 & 스티븐 미흠 지음, 허익준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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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렌지 수확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 있다. 평소 오렌지 거래만으로 사업을 유지하던 그는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던 차에 주스를 만들기로 했다. 오렌지 100상자를 유통, 가공시켜 오렌지 주스 1000병을 만들었다. 때마침 식약청에서 원재료 오렌지 100상자중 '한 박스'가 상했으니 유통시킨 모든 주스를 폐기시키라 권고한다. 제조업자는 이미 주스를 만들기 위해 원자재에 유통, 가공하는데 필요한 생산설비와 포장재 등을 투입한 후라 손실이 극심해 졌다. 결국, 10배의 수익을 남기려던 제조업자의 욕심은 부패한 한 박스의 오렌지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오렌지 한 상자의 비극'의 예는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의 본질을 간명하게 설명한다. "기묘하고 복잡하며 유동성도 부족한 파생상품을 통해 잘게 쪼개진 신용위험"은 시장의 공분산을 높이고 국지적 리스크나 노이즈의 출현이 곧바로 시스템의 변동성의 증대로 귀결된다. 예고된 파국인 셈이다.  

 경제위기의 본질에 대한 루비니의 설명을 들어보자. "투자자들이 호황기에 한몫을 쥐기 위해 과다한 빚을 지게 되면 거품이 이리저리 퍼져나간다. 신용대출이 쉽게 이루어지고 사람들은 너도나도 빌린 돈으로 투자를 감행한다. 소비는 늘고 기업은 이익을 내면서 개인과 기업은 더 쉽게 돈을 빌려 더 쉽게 쓴다. 악순환이 계속된다. 하지만 거품자산에 대한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게 되면 거품은 꺼지고 일시에 재앙이 닥친다." 위기의 근원은 2000년대 초부터 시작된다. 주택담보대출, 즉 모기지(mortgage)업체들이 부동산 호황기를 이용해 돈 갚을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도 무리하게 대출을 해주기 시작한다. 결국 2005년부터 부동산 경기가 위축되면서 대출상환부담이 증가하자 가장 먼저 모기지 업체가 어려워 졌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연체율이 상승하면서 주택담보부증권(MBS)의 가격이 하락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MBS에 기반한 다양한 파생상품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한 곳에서 문제가 터지면 도미노처럼 채권 부실이 급속하게 번져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데 있다. 각 금융기관이 발행한 채권의 부실은 이 채권을 보증해 준 '모노라인'(채권보증회사) 들을 어려움에 빠뜨렸고, 전 세계로 팔려나간 주택관련 파생상품(CDO, CDS)의 대규모 손실 발생이 글로벌 경기침체란 위기 증폭의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 되어 있다." 파생상품의 기초자산인 '서브프라임 모기지'란 한 박스의 썩은 오렌지는 리스크를 제어한다는 '선의'로 이리저리 쪼개고 섞여 전 세계에 취약성을 퍼뜨렸다.  

 루비니는 "금융백화점 모델은 이미 실패했다'고 주장하며 IB(투자은행)모델의 종언과 CB(상업은행)으로의 이행을 촉구한다. 은행의 본원적 역할인 예대마진에 근거한 자금중개기능의 복원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과급한 탐욕은 '수익모델의 다변화'로 포장되고, 이어서 금융업의 발전을 위해 '국가의 축소'란 주장으로 이어진다. 금융 위기의 진원지인 월가의 거대자본의 '고삐풀린 질주'를 견제해야 한다는 인식은 향후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금융 규제 개혁을 필요로 한다.  '감독기능의 정비'란 당위성의 실현은 거대자본의 압력과 전방위적인 로비로 '자기자본투자'라는 얼마든지 편법적 운용이 가능한 형식적인 미봉책으로 종결되었다. '손실의 국유화 이익의 사유화'란 언설을 이번 금융위기 해소과정의 근본 모순을 함축한다. 금융시스템의 감독-감시 기능의 부재로 야기된 '시장의 실패'는 방만한 경영에 대한 책임론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금융권의 손실은 '공적자금'의 형태로 국민에게 전가 되었을뿐, 월가는 여전히 세금으로 보너스 잔치를 벌이고 있다.  

 그린스펀 집권기의 저금리 기조와 닷컴버블로 형성된 글로벌 유동성은 미국 주택시장의 거품을 잉태한 배경이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과정이 '버블을 통한 버블의 극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더 이상 금리를 낮출 수 없는 상황에서 미연준의 양적완화는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연준의 QE2가 금융권의 부실자산 매집에 소진 됨에따라 신용확대가 정체되고 장기금리는 오히려 상승중이다. '미국의 미래' 일본을 보면 국채매입을 통한 금융권의 유동성 공급이 장기금리를 떨어뜨려 대출-신용을 증가 시킨 다기보단 그 효과가 미미하고, 오히려 정부의 포지션을 예상한 스마트 머니들의 배만 채워줄 가능성이 높다. 그러고 보면 헬리콥터 벤의 폭탄돌리기의 귀결은 이미 예고된 것이 아닐까? 버냉키의 QE3 언급은 시장의 학습효과를 자극하고, 작금의 유동성 장세를 지지하는 모멘텀으로 기능중이다. 연일 영국, 아일랜드의 CDS는 폭락중이고, 중국의 긴축기조는 달러캐리트레이드의 이머징 마켓으로의 유입 기조가 당분간 지속될 거라는 시그널이다. 문제는 미국의 양적완화 기조가 글로벌 시장에 인플레를 유발시키고, 각국 정부의 환율시장개입을 정당화시킬 알리바이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단 점이다. 외환시장의 변동성에 취약하고, 감독체계가 미흡한 '한국'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금융위기란 일반적으로 비슷한 경로를 따라 되풀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와 금융상의 취약점이 쌓이다 보면 결국에는 정점을 찍게된다. 모든 혼란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며, 위기상황 역시 습관의 산물이다." 투기자본의 팽창으로 자산시장의 거품이 이머징 마켓으로 유입되는 이 때에 루비니의 지적을 간과해선 안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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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실무 - 증보판
김종칠 지음 / 대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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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다. 최소한 자신의 언어로 재서술하는 과정은 이름걸고 책을내는 '저자의 윤리'이다. 서투른 번역투의 난잡한 문장, 술어의 호응조차 안되어 문맥이 늘어지고 무슨말인지 해석조차 안되는 문장들. 게다가 증보판이다. 책꺼풀 바꾸면 증보가 되는지? 콘텐츠 대비 터무니 없이 높은 비용으로 돌씹는 허망함을 느껴보고 싶다면 과감히 지르시기 바란다. 아니라면, 차라리 시중의 잘팔리는 무역사한권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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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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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엔 올림픽이 있었고 2006년 부산에는 APEC이 열렸다. 전두환이 올림픽 개최를 위한 도시미관 사업으로 상계동 달동네를 철거했다면 2006년엔 APEC개최로 ‘귀빈’들이 방문해 행사장으로 가는 길옆에 보이는 하층민 주택지를 칸막이로 위장했다. 그나마 민주화의 결실일까? 88년엔 불도저로 밀었다면, 그나마 ‘가리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지 모르겠다. 1세계와 3세계 혹은, 중심과 주변의 경계는 존재하는가? 고도의 압축성장을 달성한 다이내믹 코리아의 상징인 서울에 쪽방이 500개고, 로스앤젤레스가 10만이 넘는 노숙자들의 천국이란 ‘사실’은 마주하기 싫은 현실일 수밖에 없다. 전술한 현실은 중심과 주변의 경계가 허물어 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재개발’이란 허위적 미명아래 지역마다 주상복합아파트가 세워지고, ‘지역경제 활성화’란 허구아래 동네마다 거대유통자본이 들어섰지만 하층민들의 비루한 일상은 달라진 것이 없다. 건설자본과 정치권력의 유착이 낳은 사생아인 잿빛건물들은 번쩍이지만 사회안전망에 올라탈수 없는 노인들은 건물앞과 골목을 서성이며 ‘박스’와 ‘종이’를 줍는다. 지자체가 부러 나서서 허가를 내주는 동네의 ‘이마트’들은 서민들의 밥그릇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되었다. 생존권을 박탈당한 이들은 자연히 노른자위 땅인 도시의 중심부에서 멀어지고, 주변화된다. 그곳이 슬럼이다. 슬럼으로 흘러들어간 ‘거주민들의 운명은 대개 혐오하고, 기피하는 3D 직종에 일용직 노동자’로 소모되기 십상이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도시의 미래에 대해 암울하고 끔찍한 소묘를 그려놓았다. 묵시론적 고찰이라 할 만하다. 페이지와 단락마다 인용되는 섬뜩한 자료와 통계는 결국 사고를 무감해지게 만든다. ‘카불은 거대한 고형 쓰레기 저장소로 변하는 중이다,,, 끝없이 쌓여가는 쓰레기더미는 검은 비닐봉지로 가득한데, 이 속에는 아크라의 여성짐꾼들과 십대 소녀들의 자궁에서 낙태된 태아들이 담겨 있다고 한다,,, 검은 비닐봉지에 들어 있는 쓰레기의 75%가 낙태된 태아다.’ 아프간엔 피랍된 한국인만 있는것이 아니라 그네들의 처참함도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로 가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곳곳에서 슬럼과 동거하는 빈곤층의 생존권은 갈수록 축소되고 매년마다 일어나는 재해는 여지없이 가난을 할퀴고 간다. 2007년의 한국을 들여다 보자. 노무현 정부는 재난에 대비해 편성한 특별예산인 예비비 수십억을 한미FTA 홍보에 쏟아부었다. 예년처럼 이번여름에도 큰 태풍이 닥쳤으면 분명 ARS수재민 돕기 등의 이벤트로 능청스럽게 성금을 촉구했을 것이다. 이렇듯, 재해는 지극히 정치적이다.








비공식 부문의 확산인 슬럼의 원인은 중층적이다. 민중들의 안위를 도모해야 마땅한 국가는 선거철에만 허망한 공약을 내뱉을 뿐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주요타겟인 중간계층의 토지문제는 대개 건드리지 못한다. 한국에서도 드러나듯 중산계급의 쟁점 요구사안인 '감세'를 남발해 부의 재분배를 가로막고,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재정악화를 '복지예산'을 끌어와 벌충한다. 민중들이 시스템이 민주화 될수록 민주주의에 등을 돌리는 이유이다. 무엇보다 ‘슬럼의 대량확산’ 기획의 혁혁한 공로는 IMF와 세계은행을 앞세운 브레튼우즈 체제에 돌릴수 있다. 이 국제저격범들이 권고하는 구조조정안(SAP)을 자체적 검토없이 받아들인 결과 사회적 모순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세계은행의 경우 3세계 국가들에게 대출하는 개발자금을 고리로 직접 국가의 도시정책에 개입해 주거사업의 민영화를 강제하고, 주민들의 생존권을 담보로한 짭짤한 사업을 한다. 화장실이나 물사업은 거저먹는 신천지다. 또한 이들은 거대 NGO의 후원자란 지위를 이용해 빈민의 목소리를 왜곡시킨다. ‘NGO가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주민들 사이에 혼란을 일으키고 잘못된 정보를 흘리고,,,이를 통해 계급투쟁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것이다. NGO가 채택,선전하는 방안은 억압받는 주민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깨닫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에 대한 동정심과 인도주의적 감상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외부의 호의를 구걸하는 것’이라고 P.K다스가 지적했듯이 SAP의 가장 악랄함은 스스로 일어서려는 민중들의 다리를 후려치는데 있다는 것이다.








거주양식이 사유양식을 규정하는가? 지리학자인 워드는 ‘한사람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은 그가 사는 주택의 위상에 따라 형성되는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한다. 주택거주형태가 개인의 성향과 정치적 이념성에 끼치는 영향은 크다. 한국에선 공적 정당이 구성원의 정당한 발언을 포착하지 못하고 왜곡하는 경향이 있기에 일반화 시키긴 어렵지만 분명 강남구민들이 한나라당에 표를 던지는 것은 앞의 물음과 무관치 않다. 정작 문제는 유산계급은 단결해 자신들의 재산을 지켜줄 테두리를 강화하는데 비해 기층민중들은 정치에 등을돌려 각개약진 하는 것이다. 이런 구조라면 하층민에게 정치는 미진한 실망으로 기능할 수 밖에 없다.








공식부문에서 이탈된 이들은 비공식부문으로 이전한다. 서울시민은 지방시민으로 대기업 회사원은 중소기업으로, 정규직은 비정규직으로 전락한다. ‘비공식 부문이 일자리를 생성하는 방식은 새로운 노동부문을 고안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노동을 분할하고 이와함께 소득까지 분할 하는 것이다.’ 위에서는 인력과 자원을 쪼개고 나눌때, 분할되고 남은 잉여의 찌거기를 둘러싼 경쟁이 아래에서 벌어진다. 공식화 되지않는 부문에서 벌어지는 전투다. 슬럼의 모습은 쉽게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가급적이면 가리고 싶은 치부이고, 드러날 경우 지배계급의 공적 책임이 부각될 수 있기에 대개 공식수치의 외곽에 머물게 된다. 경제적 곤란에 부닥친 하층민들의 반란에 대비해 도시의 시가전을 시뮬레이션하는 랜드군사연구소의 행보는 어떤 미래를 보여주는가? 수탈장치가 잘 작동될수록 '작동체계'를 유지시키는 국가폭력장치도 공고해 지고 있는것이다. 이는 이랜드와 대추리에서 민중을 찍어 눌렀던 '곤봉과 방패'의 공포가 전지구적으로 확산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삶의 비공식화’가 지금 우리모두의 '화두'일 수 밖에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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