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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 법학자 김두식이 바라본 교회 속 세상 풍경
김두식 지음 / 홍성사 / 2010년 1월
평점 :
1. “유대인이야말로 두려움을 일으키는 정연한 논리로 귀족적 가치 등식을 역전하고자 감행했으며, 가장 깊은 증오의 이빨을 갈며 이를 고집했던 것이다. 비참한 자만이 오직 착한 자다. 가난한 자, 무력한 자, 비천한 자만이 오직 착한 자다. 고통받는 자, 궁핍한 자, 병든 자, 추한 자 또한 유일하게 경건한 자이며 신에 귀의한 자이고, 오직 그들에게만 축복이 있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신앙인은 ‘회개’로 봉헌해야될 현실의 삶이 고달프고 누추할수록 신에게 떳떳할 수 있고, 자신의 반성을 진실되다는 증거로 삼을 수 있다. 종교 안에서 ‘비참한 자만이 오직 착한 자’라는 니체의 지적은 더없이 타당하다. 종교는 빈곤한 인간의 비참성이 종교적 윤리성으로 추앙받고 가난한 이가 더 축복을 받는 유토피아적 공간이다. 힘들고 지친 영혼일수록 신의 보살핌이 넘치는 은혜로 다가오는 까닭이다. 소유하지 못한 이에게 냉정한 사회에서, 무소유를 예찬하는 종교란 ‘멋진 신세계’는 모든 이에게 강한 흡입력을 가진다.
2. ‘정통과 이단’이란 구호는 한국의 주류 개신교가 흔히 입에 담는 말이다. 무엇을 정의한다는 것은 정의되지 못한 것을 배제하는 행위이다. 마찬가지로 정통은 이단이 있어야만 성립할 수 있다. 동전의 앞뒷면, 남성과 여성의 구획처럼 ‘이단’이란 규정은 ‘정통’과 동시성의 맥락에서 ‘구성’된 것이다. 기독교의 이론적 근거로 간취한 성경의 형성과정은 이를 잘 보여준다. 김용옥에 따르면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대결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세력 대결이기도 했다. 아리우스는 동방교회의 주축 세력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 동방교회의 느슨한 다원적 사유를 이단으로 휘몰고 로마 중심의 서방교회를 주축으로 하여 동ㆍ서 교계를 일원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아타나시우스의 아리우스 비판은 아리우스가 예수의 인성만을 고집하고 예수의 신성을 거부했다는 테마에 집중되어 있지만, 아리우스는 예수를 또 하나의 신으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전통적 다신론 사유의 아류밖에 안 된다고 보았다.”
“예수가 인간일 뿐이다라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예수를 격하시키려는 음모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유일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예수의 인간됨을 통하여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과 합일될 수 있는 신비주의적 가능성을 열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신비주의는 예수가 신적인 권능으로써 인간의 죄악을 대속한다고 하는 구원론적 의미를 약화시키고 기독교적인 독특한 유일신관의 기저를 파괴한다고 보았다.” 『도올의 도마복음』. 지난한 대립은 당대 정치권력이었던 로마제국의 승인으로 ‘아타나시우스 27서체제’를 정경으로 확립하기에 이른다. 서방교회의 지배력의 강화로 그들의 교리체계였던 아타나시우스 정경체계가 주조된 것이다. 결국, 초기 교회사에서 정통을 확립한 주체는 야훼가 아닌 ‘정치권력’이었다. 말하자면, 신성과 영성을 견지하는 기독교의 발흥은 그 시초부터 현실의 정치지형을 반영할 수 밖에 없었다. 정통과 이단은 각 시대마다 달랐고, 한 시대의 이단이 다음 시대엔 정통이 되기도 했다. 정통과 이단의 대립과 투쟁의 역사적 결과물이 성서이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다는 ‘성경’은 이렇게도 정치적이다.
3. 신정정치의 종식과 '탈주술화'가 근대의 주요 특질이라 할 때, 한국 개신교의 정치 참여를 넘어선 권력 추구 현상은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MB지지층의 '등뼈'에 해당하는 보수 개신교의 전폭적 후원으로 집권한 당선자의 정책 구상이 '주요 고객'의 입맛에 맞는 시혜로 이어지는 것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교육 자율화'란 허명아래 종교단체가 대거 소유한 사학의 독점과 전횡을 용인하는 정치적 태도는, 자신의 충견에게 지불하는 황금주인 셈이다. 개신교의 타종교에 대한 적대는 ‘템플 스테이’ 예산안 누락을 통해 실천되고 있다. ‘헌법의 풍경’을 통해 시민사회가 감시하지 않으면 국가는 언제나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경고를 했던 김두식이 교회권력의 비대화에 천착한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종교적 낙관은 과급한 확신을 낳는다. 신앙은 이성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믿음은 상식과 토론을 배척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위험해 질 수 있다. 절대자가 사유화되고, 신이 사익을 위한 도구로 전용될 때 교회는 부패한다. 그간 저자가 목도한 ‘교회의 풍경’은 예수의 실천이 아닌 예수를 팔아 이득을 취하려는 장사꾼들로 넘처난다.
한국사회에서 개신교의 성공적 이식은 ‘서구에 대한 선망’에서부터 시작됐다. 이스라엘이 ‘시온주의’란 극우 이념을 내세워 ‘약속의 땅’인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것처럼, 식민지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에 의탁하면서 민족과 영토의 회복을 기원했다. 근대국가의 건립, 부의 축적, 서구열강으로 편입을 욕망했던 백년전 한국 개신교의 모습은 처음부터 숭미적일 수밖에 없었다. 반공주의를 표방하는 보수 개신교는 선진화와 ‘힘의 우위’를 통해 2007년 대선에 개입하고, '북한정권의 교체'란 목표를 공공연히 선언한다. 탈근대가 운위되는 시대에도 교회는 여전히 ‘영토국가’로 상징되는 근대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자유주의가 소수의 성공신화를 생산하며 개인에게 신분상승의 허위적 쾌락을 제공하는 것처럼, 교회는 물적 욕망과 성취를 예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치환하기까지 한다. 까닭에 교회 안에는 “명문 대학에 합격한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늘 성공한 사람들만이 넘쳐”난다. 기독교 서점을 점거한 자기계발서는 ‘긍정의 힘’을 믿고 ‘십일조를 안 세계의 부자들’처럼 물질의 축복을 받으라 꾸짖는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움을 토로한 예수의 고백을 한국의 개신교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종교가 자신만의 담론으로 가둔 ‘평화’와 ‘구원’은 ‘신을향한 귀의’나 ‘천국의 소망’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어 ’샬롬‘이나 헬라어 ’에이레네‘가 말하고자 하는 평화는 그런 마음속의 주관적 내적 영역으로 제한”되지 않는 포괄적인 개념이었고, 그 안에는 공익과 사회적인 가치도 들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 교회가 독점한 평화는, “단순히 마음속에서 얻는 평안으로 축소함으로 교회는 대부분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알리바이일 따름이다. 예수의 손은 하늘만 가리키지 않았다. 오히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밝힘으로써 현실의 문제를 직시했다. 예수는 정치적 박해를 받고, 당대의 지배세력과 대립했으며, 사회적 약자였던 세리와 창기의 친구였다. 요컨대 권력과 자본에 포섭된 한국의 기독교가 복원해야 할 예수의 가치는 사회적 공동체 대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저자는 줄곧 종교와 교회에 우선하는 ‘인간’을 이야기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