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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의 온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4
정다연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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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를 향한 사랑



정​
다연 시인의 시집 『내가 내 심장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2019)를 읽었을 때는 내가 이미 시집의 물성에 익숙해 마지않은 때였다. 그때는 하루에 세 권씩 시집을 읽었고 한 해에 100권에 달하는 시집을 찾았을 때였다. 탐독의 경험은 나에게 큰 이득을 안겨주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읽은 시집들이 모두 효용적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시집의 문제라기보단 나의 문제였다. 기술적인 부분에 치중해 시를 온전히 읽은 적이 있긴 했는지……솔직히 확답할 수 없다.

정다연 시인의 첫 시집을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좋긴 좋았는데 정확히 무엇이 좋았는지 설명할 겨를도 없이 다른 시집을 읽었다. 겨우 떠올린 인상은 ‘따뜻해서 좋았다’ 뿐. 무엇이 어떤 방식으로 따뜻해서 좋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시인의 에세이를 읽어보기로 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급하지 않은 때에-그러니까 지금-다시 읽은 시인의 시적 산문이 나에게 어떤 감각을 일깨워줄 수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다시 읽은 시인의 문장은 두말할 것 없이 깨끗했고 아름다웠다.


시인의 에세이를 읽어보기로 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급하지 않은 때에-그러니까 지금-다시 읽은 시인의 시적 산문이 나에게 어떤 감각을 일깨워줄 수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다시 읽은 시인의 문장은 두말할 것 없이 깨끗했고 아름다웠다.

시인의 이름을 자꾸만 거꾸로 발음하게 된다. 정다연. 다정. 다정함. 그런데 희미하게 스러지다가도 다시 생명력을 보이는 다정. 아주 따뜻했다. 일상의 사랑을 자기 삶의 원동력으로 해석하는 시인의 태도에서 나는 알 수 없는 온정이 느껴졌다.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없었고 삶은 출생 이후의 비관이라고 생각하는 나와는 다른 삶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시인은 오래된 누군가를 만나고 그리워하고 때로는 사람 아닌 현상을 그리워한다. 얼굴의 틀을 하지 않은 무언가를 오래 생각하면서 행복을 찾는다. 잘은 모르겠지만……사랑의 이해에 밝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내처 머릿속에 잠자코 앉아 있다. 이렇게 잘 읽히는 에세이. 이렇게 평범한 사랑을 담은 에세이. 나는 읽으면서 행복했지만 그러다가 슬퍼졌다. 잠깐씩.

“시인은 어딘가 슬픈 사람”이라고 시인의 지인이 말했다는 내용이 에세이에 등장한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싶다. 슬픈 사람은, 사람이라서 슬픈 사람이 이해할 수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도 가끔 시를 쓰지만 그건 내가 슬픈 시인이라서가 아니라 슬픈 사람이라서 더 잘 보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다. 내가 잘못 읽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믿고 싶은 것을 그대로 읽기로 했다.

시인들의 에세이는 좀 어려워서 재미있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번 에세이는 술술 잘 읽혀서 더 어려웠다. 나와 조금 가깝다고 생각되는 (괄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 (괄호)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확실한 건 설명할 수 없는 이 (괄호)가 나에게 사뭇 확실한 감각을 일깨워줬다는 점이다. 특히 시인이 가족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였다. 오빠와 처음 간 패키지 유럽 여행, 딸과 엄마의 잠정적 동거……. 그리고 에세이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인 반려견 ‘밤이’까지. 가족이란 성질은 사회적이되 유별나게 존재하는 특징을 가져서 유달리 어렵게 읽혔다. 정확히는 ‘느리게’ 읽혔다. 물리적으로는 빠르게 읽었지만. 마음으로 쉽게 떠나보낼 수 없는 문장들. 발을 떼기 힘든 산책길 속 풍경처럼.

그동안은 에세이를 잘 읽어버릇하지 않아서 몰랐지만 이번에 확실히 느꼈다. 에세이는 뭐랄까, 삶의 다른 발목을 보는 느낌이었고 또……모르는 이야기로 내 삶의 낯섦을 밝히는 신기로운 느낌이었다. 나와는 아주 딴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모순적으로 시인의 문장에 공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건 정말, 정말 낯설다. 가볍고 산뜻한 에세이가 아니었다면 알아도 모른 채 살았을 어떤 감각을 운 좋게 껴안은 읽기였다.

시인이 중학교에서 시 창작 교실을 열었던 경험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죽을 때까지 영원히 자고 싶다는 아이. 공부가 아닌 덜 풀린 고민 때문에 잠드는 아이. 오래 기억하게 될 문장이었다. 그것은 실제로 어른이 내가 청소년 시절부터 지금까지-어쩌면 영원히-해왔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만하고 싶고 더 자고 싶은 마음이 어떤 슬픔에서 쏟아진 감각인 줄 알기에 이 글은 나와 성질이 다른 이란성쌍둥이처럼 읽혔던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다른 독자들도 비슷하게 느끼지 않을까 싶은데……간결하고 산뜻한 문장으로 내면의 온기를 바라보고 싶은 독자에게 이 에세이를 추천하고 싶다.



“언니, 요즘 나는 먼 미래를 생각해. 그러면 어떤 건 시간으로부터 지켜낼 자신이 없더라고. 그런데 언니를 생각하면 시간이 비껴가더라. 어떤 사람이 길에 우두커니 서 있으면 부딪히지 않으려고 살짝 돌아가는 것처럼. 옅은 바람이 나무를 관통하지 않고 모든 가장자리를 건드리며 지나가는 것처럼. 언니가 그대로 있더라고. 그렇게 되길 바라는 소망이 아니라 또렷하게 감각되는 예감이.”

p.256


나에게도 지켜지는 나무가 있었다면. 있다면 내가 알 수 있기를. 좀 더 빨리 사랑할 수 있기를. 오늘은 단 한 번이고 하나밖에 없는 하루를 미래의 내가 용서할 수 있기를. 시인의 경험처럼, “지나치게 평범한 나의 일상을 사랑이 대단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감사합니다.

해당 게시물은 '현대문학'에서 도서를 제공받아(서평단) 주관적으로 쓰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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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3
안보윤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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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윤의 신작 장편소설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2024)가 현대문학 PIN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사회적 문제를 날카롭게 그려왔던 작가의 펜 끝이 또 한 번 우리 세계에 매서운 흠집을 내어줄 때가 온 것이다.

얼마 전까지 ‘수영’은 쿠팡 물류센터에서 근무했으며 좋지 못한 이유로 일을 그만두었다. 고강도 노동의 여파로 어깨 인대가 끊어져 물류센터 일을 지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영’에게 휴식은 허락되지 않았다. 제 능력으로 처음 마련한 전셋집은 들어가 살기도 전에 사기 피해로 내쫓겼으며, 그마저도 막대한 채무를 끌어안은 상태라 금전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집 우연히 앞에 새로 들어선 동물병원의 구인 광고를 본 ‘수영’은 빠른 채용 과정 이후 마침내 반려견 돌봄센터 관리인으로 취직한다. 센터는 ‘구 원장’이 동물병원과 함께 운영하는 시설로 늙고 병든 개들이 관리받을 수 있는 요양원이다. ‘수영’은 동료 ‘소란’과 함께 입원한 개들을 보살피는 역할을 한다. CCTV로 가득 찬, 언제 어디서고 보호자와 원장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공간에서.


‘수영’에게는 한 살 터울의 언니 ‘수미’가 있다. ‘수영’과 체형도 이름도 비슷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영악해 나쁜 짓을 일삼고도 자신은 조금도 피해 보는 일이 없었던 비범한 인물. ‘수영’은 그런 ‘수미’의 그늘에 늘 “뒷면”을 자처하며 살아야만 했다. 모르는 척하고 회피하고 당해왔다. 조용하고 아무 일 없도록, 가족을 위해서.

‘수미’가 싫어 도망쳐온 곳에는 또 다른 ‘수미’가 있다.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들과 만나며 ‘수영’은 생각한다. 최소한의 인간-“고작 이 정도의 인간”(p.158)이라도-되려는 용기에 관해서. 달력의 “뒷면”으로 남을 것인지, 웅크린 자신을 넘기고 새로운 “앞면”을 펼쳐낼 것인지 ‘수영’은 고민한다.

이 소설은 주인공 ‘수영’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수영’의 현재(병원)와 과거(가족)가 교차편집되어 묘사되고 해당 시점에서 ‘수영’이 맞닥뜨리는 “세상의 모든 전수미”들이 발견된다.

나는 이 소설이 상당히 면밀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물의 움직임이나 세계의 운동이-현실에 정확한 기반을 둔-조밀한 논리로 가동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령 지극히 현실적인 직접적 공포와 폭력적 세계에의 고발이 그러하며, 두려움과 회피에 침잠한 식물적 인간의 태도와 사고가 그랬다. 정확하고 소름 끼치는 묘사들이 곳곳에 보인다. 불행과 불안정한 환경에 온몸이 물들어 조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예민해지는 화자 ‘수영’의 모습은 이런 문장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기피 시설이나 혐오 시설 같은 게 (집 앞에) 들어오면 좋을 텐데. (…) 요양소면 너무 조용하지 않나. 실망감 때문에 아랫배가 쿡쿡 쑤셔왔다. (…) 지하철역이나 도롯가에서 간혹 마주치는 노인들처럼 목청껏 소리를 질러대는, 아고아고 나 죽는다 유난스레 나동그라지는 그런 개들이 50마리쯤 입소하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p. 41-43


돈이 없어 사글세가 오르면 언제라도 쫓겨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수영’은 집 앞에 기피 시설과 혐오 시설이 들어섰으면 좋겠다고 기도한다. 좋은 곳은 자신이 살 곳이 아니라는 듯 말이다. 표면상으론 재정 문제로 인한 곤란이지만 실상은 ‘수영’ 자신이 내면화한 불행과 불쾌감이 그것이다.

소설 여러 곳에서 이런 묘사들이 등장하는데 아주 예민하게 바라보게 되는 문장들이었다.


“전수미가 다가올 때마다 내 기이한 감각은 발작하듯 나를 두드렸다. 시야가 또렷해져 가까이 있는 것과 멀리 있는 것이 모두 다 똑같은 크기와 정교함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종아리가 단단하게 굳어 나는 어디로도 도망치지 못했다.”

p.145

‘수영’이 자신의 삶을 “달력의 뒷면” 같은 삶이라고 표현했을 때 나는 잘못 읽은 글자를 본 듯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달력의 뒷면’을 ‘달의 뒷면’으로 읽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은 명확히 구별되어야 한다. ‘달의 뒷면’은 누구나 알고 싶어 하지만 ‘달력의 뒷면’은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순수문학에 정형적인 빌런이 등장하는 때는 잘 없다. 그래서인지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는 조금 특이했다. 근래 읽은 책 중에 가장 소름이 끼쳤으며 이상한 스릴러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전수미’, 이상한 ‘구 원장’ 그리고 무엇 하나 명쾌히 해명되지 않는 이상한 ‘세계’까지. 스릴러와 순수문학을 함께 읽길 원하는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이 소설의 장점은 ‘현실 공포’에 관한 묘사를 기가 막히게 했다는 점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두려움이 눈앞에 선득하게 느껴져 실제로 해당 상황을 독자인 내가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령 ‘수미’를 찾아온 이상한 남자들에 관한 문장들에서는 이제껏 다른 소설을 읽으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괴이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런 식의 장면은 처음이라 신기했고 재미있었다.

한편 ‘수영’은 ‘식물’에 유난스러운 애정을 가졌다. 소설에서 ‘식물’은 중요한 메타포로 등장하며 이것은 곧 소설의 심상적 줄기가 된다. 식물은 가장 연약한 세계의 밑동이며, 생장이라는 낙관을 가진 생물이다. 또한 아무리 처참한 인물이라도 애정과 돌봄이 있다면 잘 키울 수 있는, 그러니까 순수한 노력과 열정이 닿을 수 있는 생물인 셈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수영’이 식물과 이어져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중반부를 넘기도록 화자 ‘수영’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다. 조용하고 안전한 소수자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인물로 읽혔다. ‘수미’로 호명되는 존재들과의 소설적 격돌이나 행동이 없는데 반해 ‘수영’ 자신의 목소리가 큰 편이라 독자에게 다소 직접적인 아포리즘을 건네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올바른 하층민 인물의 자의식이 전면에 드리워진 것 같았다.

하지만 후반부에 ‘수영’의 중요한 행동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전수미’가 아니려고 노력하는 ‘수영’의 용기가 조금씩 빛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수영’의 용기는 진실하고 중요하다. 비겁함이 무겁고 힘겨워 숨지 않으려는 식물적 용기(상승력)가 표현된다. 조금 예상 가능한 결말이긴 했어도 ‘수영’의 전진하려는 용기가 상당히 의미 있게 드러났다. 다만 현재 시점에서 ‘수미’와 ‘수영’이 부딪히는 장면이 더 등장했으면 어땠을까 한 아쉬움과 차라리 『82년생 김지영』(2016)처럼 삼인칭으로 전개되었으면 조금 더 전달력 있지 않았을까 한 아쉬움 등이 남았다.

소설을 모두 읽은 뒤 조대한 평론가의 해설(「최소한의 인간」)을 보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필자는 “(‘전수미’로 대표되는 인물들의) 행위에 우리가 선뜻 동의할 수는 없을지언정 그것이 온전히 악한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쉽지 않을 듯하다”라고 말하며 독자가 이들에게 품는 마음은 일종의 “희미한 기대감”일 것이라 설명한다. 확실히 ‘수미’와 비슷한 종류의 인물들이 확고부동한 ‘범죄’를 저질렀다고는 판별할 수 없다. 이런 지점들이 독자에게 많은 생각을 몰고 오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에게도 논리가 있고 말 못 할 사정이 있으며 나름대로 선량한 의도나 마음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모종의 불쾌감을 떨칠 수 없다.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이 세상에는 ‘순수 악’만이 판별 대상이 되고 모든 악인에게 ‘이해 가능한 동기’를 인정해 주는 꼴은 아닌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약자들의 착각(혹은 기대)이 아닐까?

그렇지만 이 소설은 누가 뭐래도 ‘수미’가 아닌 ‘수영’의 이야기다. 소시민인 우리의 이야기다. 위태로운 삶과 선택으로 번뇌하고 방황하지만 “고작 이 정도의 인간”이라도 되기 위해 분투하는 ‘수영’들을 위한 찬가다. 이 소설을 읽고 난 사람들이라면 ‘수미’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보다 ‘수영’에게 마음이 더 쓰일 것임을 반쯤 확신한다. 우리는 ‘수영’의 비겁해지지 않으려는 식물적 용기를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 모든 곳의 전수영이다.

감사합니다.



해당 게시물은 '현대문학'에서 도서를 제공받아(서평단) 주관적으로 쓰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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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 드림 창비청소년문학 130
강은지 지음 / 창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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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창비 X 카카오 페이지 영어덜트 대상 수상작으로 강은지 작가의 『루시드 드림』(2024)이 선정되었고, 며칠 전 창비 청소년 문학 130권으로 출간되었다. 가제본 서평단으로 참여하여 오랜만에 청소년 장편소설을 꺼내든 나는 접근성 좋은 문체와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을 마음에 들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내가 어렸을 때 읽었던 창비 청소년 문학 시리즈는 어땠는가. 생각해 보면 그때도 다르지 않았다. 동화에서 청소년 소설로 발돋움하는 길목에서 나는 소설 속 또래 친구들 이야기에 위로를 받음과 동시에 나와 다른 불편함을 느꼈던 것 같다. 이야기책에 등장하는 마냥 어린 친구들이 아니라 정말로 나와 닮았고, 나와는 달리 이런저런 심각한 고민에 빠진 또래 친구들과 만났기 때문이다.


강은지 작가의 『루시드 드림』에서 마주한 초점 화자 ‘강희’와 친구들도 그런 친구들이었다. 몸은 자라 어른이 되었지만 나는 청소년 소설을 펼칠 때마다 이제는 떠올리지도 못할 어린 시절의 감각을 자발적으로 환기하곤 한다. 아마 의미 모를 향수이거나 휴식이리라.

인터넷에서 읽은 문장이 떠오른다. 요즘 어른과 옛날 어른은 참말로 다르다. 정말이라고 느낀다. 젊지도 어리지도 않은 현재의 나는 내가 어린 시절 떠올렸던 ‘발전된 나’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심각하게 ‘망가진 나’도 아니다. 평범하게 되었다. 그래서 가끔 성년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스스로 시민으로서 기능하고 싶은 마음이 몸 어딘가에서 길항한다. 비단 나의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와 얼마나 닮았는지 모를 수많은 어른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소설은 성년과 미성년의 경계를 아찔하게 넘나드는 청소년 화자의 내적 성장에 주목했다. 이들 미성년의 성장은 아포칼립스 세계 속에서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어른이 대개 잠든 세계에서, 그러니까 멸망하는 세계, 아이들만이 눈을 뜬 채 살아가는 그곳에서.

그런 곳에서 성년이 되기 직전인 친구들이 중심이 된다. 인상적인 점은 그들이 자신보다 어리고 약한 존재를 배제하지 않고 ‘공존’하려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작고의 고민과 역경이 생존 중의 그들의 발밑에 붙어 선뜻 전진하지 못하게 하긴 한다. 하지만 소년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기다림을 긍정한다. 때때로 부정하며 ‘기다림’이라는 현상을 학습한다. 놀라운 방식이다. 성인용 데스 게임이나 아포칼립스 물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정서적·도덕적으로 고양된 수준의 침착한 방식이다.

이렇게까지만 말하면 이 소설이 불신 없는 긍정만을 다루었다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소년들이 실로 다양한 존재 및 정황과 맞닥뜨리며 이어가는 고민들은 성년인 나도 차마 답을 쉽게 내릴 수 없는 질문들이 많았다.

다만 글의 편집적 진행 구조가 아포칼립스라는 큰 세계관을 삼켜내기에는 다소 평면적이었다고 느꼈다. 집중적으로 논의되는 미성년 인물들이 각각 어떤 특색을 가진 인물인지 확증적으로 파악하기 힘들었고, 초점 화자인 ‘강희’보다는 ‘윤서’에 천착하는 서사 전략이 독자의 시선을 분산했기에 이야기 전체가 깨끗이 손봐졌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 읽고 나서는 ‘윤서’가 초점 화자인 시점으로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떻게 됐든 작가가 ‘강희’를 초점 화자로 설정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진행되지 않거나 행동과 사유 어느 쪽에도 발을 담그지 않고 있는 인물들의 태도도 조금은 아쉬웠고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성격적 특색을 비롯하여 초점 화자의 결정적 메인 플롯이 어떤 감각을 만들어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는 점도 아쉬웠다. 생각 이상으로 관찰자 수준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작은 이야기들보다 중심 서사를 켜켜이 편집하여-특히 명시적인 구조로써-보여주었다면 어떤 이야기가 완성되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작가의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된다.

감사합니다.


*해당 게시물은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가제본 서평단) 주관적으로 쓰인 서평입니다.

사실, 모두가 깨어나길 바라는 건 아니다.많은 자식들이 수면자가 된 부모를 돌보고 있지만 그러지 않는 자식들도 있다. 자식들은 부모를 버렸고, 버림받은 부모는 죽었다.그러나 누가 먼저 버린 건지는 명확하지 않다.
- P13

어른들은 잠들었고 깨어 있는 어른들은 우릴 보호하지 않는다.우린 언제까지 이 위험을 견뎌야 할까? 우리가 얼른 어른이 되어 스스로를 지키는 수밖에 없는 걸까? 우리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른은 뭘까?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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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왜왜 동아리 창비아동문고 339
진형민 지음, 이윤희 그림 / 창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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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키Rocky(1977)에서 실베스터 스탤론이 분한 로키는 평범한 복서였다. 무명에 불과했던 그의 인생에 가장 큰 기회이자 시련이 찾아오기 전까진 그랬다. 우연히 챔피언과 대적할 절호의 찬스였다. 결과는 불보듯 뻔했다. 하지만 로키는 당당했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자신을 갈고 닦았다. 열심히 단련하면 기적이 찾아오리라.


경기가 시작되고 로키는 도저히 당해내지 못할 것만 같던 산을 향해 일격을 날린다. 거대한 산과의 승부에서 그는 누구와 겨뤄도 기죽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눈부신 투지와 당당함이 로키를 설명하는 언어가 되었고 나는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크게 외친 그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에이드리안!”


영화에서 에이드리언로키의 연인이자 굳센 지지자로 기능했다. 기능자로서의 역할에 그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나는 에이드리언이 가진 지지자로서의 기능이 이 사회에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반추했다. ‘로키와의 마지막 포옹이 보여주듯 작은 친절 작은 연대는 가공할 기적으로 몸체를 바꿔 온다.


이 들어가는 특이한 이름의 어린이가 있다. 미로처럼 굽이쳐 잘못 쓰인 글자 같은 이름, ‘이록희가 그 주인공이다. ‘록희의 아버지는 용해시의 시장이다. ‘록희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자랑스러워하지도 않는다. 시청 인근 관저에 거주하는 아버지와 물리적으로 가깝지 않은 록희는 그가 사무실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모른다. 그저 조용히 지내고 싶을 뿐이다.


자율 동아리 시간이라니. 대충 시간이나 때울 요량이었다. 혼자서 아무것이나 하거나 아무것이나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기존에 창설된 동아리에 가입할 순 없었다. 동아리를 만들어야 가능했다. 하지만 누가 이 계획에 동의하겠는가? 대충 데굴데굴 알아서 잘 굴러가도록 내버려두면 되지 않을까? ‘록희와 친구들이 이름부터 단순한 왜왜왜 동아리로 뭉치게 된 계기는 그저 심심해서였다.


왜왜왜 동아리에는 본디 상호 협력이 배제된 말 그대로 자율 단체였다. 아무거나 궁금한 걸 동아리 시간 내내 혼자 대충 파헤치면 되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록희와 친구들은 그들이 발 딛고 사는 용해시가 눈에 띄게 망가지고 있음을 알아챔과 동시에 초심을 몽땅 잃고 만다. 작은 것들의 세상이 사라지고 있었으니까. 작은 존재가 모여 사는 지구가 이상해지기 시작했으니까. 푸른 바다를 지켜야 했다.


마을이 통째로 불바다가 되어 반려 동물을 잃고 터전마저 잃은 기주는 기후 위기의 피해 어린이다. “낡아서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 서 있는 것 같한쪽을 겨우 여며 놓으면 다른 쪽이 또 벌어져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속살을 자꾸만 들키는”(p.55) 기분을 기주는 종종 느낀다. 불타오른 마을과 길 잃은 강아지 다정그리고 이모네에 얹혀 사는 가족들까지. ‘기주는 왜 자신이 이러한 상황에 처해야 하는지 알길이 없다.


사정은 다른 친구들도 다르지 않았다. ‘진모는 손님이 끊긴 게스트 하우스로 인해 살곳을 옮겨야 할 위기에 처했다. 어떤 친구는 기후 위기로 바다 수온이 올라가 대대로 이어오던 명태 어획에 차질이 생겼다. 그런가 하면 병충해로 과실목에 피해가 상당해 농사를 더는 이어갈 수 없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왜왜왜 동아리가 있었다.

 

왜 어른들이 우리의 미래를 함부로 망치려 드나요?”

 

라는 질문과 함께 록희와 친구들은 진실에 가까워진다. 작은 것들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찾아간다. 가뭄으로 산이 불타고 농작물이 자라지 않는 세계, 식량 싸움이 벌어지고 전염병이 창궐해 생명이 꺼져가는 세계, 혹서와 혹한을 오가는 세계, 폭우와 폭염으로 지워지는 세계를 호위하기 위해서.


작은 것들의 슬픔과 괴로움을 모두 헤아리지 못한다고 해도 왜왜왜 동아리는 작은 친절과 작은 연대가 무엇인지 독자에게 똑똑히 보여준다. “마음이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정신없이 달려갈 때마다” ‘왜왜왜 동아리친구들이 우리의 이름을 불러 준다. 불러 세워서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인상적인 점은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어른들의 태도였다. 무시하고 넘기는 어른들도 있었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어른 대부분은 그들에게 작은 친절을 안겨주며 아이들이 지지와 연대의 초석을 다질 수 있는 자그마한 힘을 믿어준다. “결정적일 때 큰 도움을 주지는 않았지만, 작은 관심과 친절도 (골대에) 공을 넣는 데에 분명 보탬이”(p.58) 된다는 걸 보여준 셈이다.


초점 화자가 문제의 화신인 용해시 시장의 로 등장한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미래의 지구를 책임지는 두 세대의 입장이 대비되어 배치된 서사 전략이 재미있었다. 용해시의 현재와 희망 중 누가 승리할지 보는 맛이 있었던 소설이었다.


사소하게는 연출적인 측면에서도 재미있는 요소가 많았다. 아이들이 동아리를 개설하고 첫 모임을 가졌을 때 기주의 고민을 바로 열어보는 방식으로 서사를 진입시키지 않고 독자의 시야와 거리를 충분히 늘어뜨림으써 사건의 전개를 기대하게 만드는 서사 전략이 흥미로웠다.


아이들의 관계성이 드러나는 부분들도 좋았다. 옅게 그려지는 인물들의 감정선이 소설에 재미를 더해준 부분이었다. 이밖에도 아이들의 사회적 활동이 묘사되는 장면에서는 독자인 나 역시 그들과 동화되어 참여하고 싶다는 동기가 들었는데 어린이 시절을 지나 보낸 어른의 처지에서 새롭고도 설레는 체험적 읽기였다고 생각한다. 나도 왜왜왜 동아리부원들과 다른 어린이들처럼 코스튬을 입고 동물과 함께 환경 운동을 하는 상상을, ‘진경처럼 미래를 지키는모임을 꾸려 실천적인 자아를 만들어가는 상상을 말이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작은 포옹이 생겨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로키에게 에이드리안이 있고 록희에게 친구들이 있었던 것처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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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자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31
프란츠 카프카 지음, 송경은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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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은 코믹하고 심오하면서도 난해하기로 유명합니다. 덮어놓고 읽기에는 기꺼운 고전처럼 느껴지는 작가의 글을 읽어볼 생각을 했던 시초는 초등학생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웬 바퀴벌레 이야길 하는 혈육의 감상문이 황당무계하게 느껴져 따라 읽었던 기억인데요. 그렇습니다. 변신이 카프카와 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카프카를 읽은 어린이 대부분의 기억과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저는 호기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렇구나. 바퀴벌레로 변했구나.” 이게 독이 되었는지 득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훗날 저는 별다른 불만 없이 시적 세계를 온몸으로 감각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다만 어린이 때의 무감한 독서 경험 때문이었을까요. 카프카를 떠올리면 말할 수 있는 3대 소설 중 단 하나만이 제가 아는 카프카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문학을 전공하면서도 읽어볼 생각을 안 했다는 것이 말이죠.

고등학생 때 문예출판사에서 출간된 세계문학선을 몇 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가장 좋아했죠. 생각건대 웬만한 러시아 문학보다는 재미있을 구석이 많은 카프카의 소설을 왜 이제야 읽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골똘히 생각해보면 카프카만큼 단순한 불행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이번에는 표지 디자인이 개편되어 새롭게 재출간된 문예세계문학선을 읽었습니다. 그 첫 작품으로 카프카의 3대 소설 중 하나인 실종자라는 장편소설을 읽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읽었던 나의 첫 카프카와는 인상이 조금 달랐습니다. 카프카가 그린 주인공 카를은 잰걸음으로 성장하는 미성숙한 존재였으니까요. 계속해서 어디론가 향하지만 정주하지 않습니다. 끝없는 불행들이 그를 가로막고 있죠.

일전에 독일의 교양소설에 관해 배운 기억이 납니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읽으면서였습니다. 개인 주체의 성장에의 낙관이 문학에서 진보의 형태로 발현되었다고 설명되는데요. 이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 근대 사회의 컨베이어 벨트위의 정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듯합니다.

생각해보니 저도 소설이란 무릇 성장이 필연적이라 믿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성장과 발전이 아니라면-그것이 개인의 일일지라도-문학적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이 소설을 읽고 소설이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며, 어떻게 인물의 마지막 행보를 결정하는가에 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캐릭터의 최선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카프카가 말한 우리를 아프게 하는 책이란 결국 성장의 바깥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물이 흘러가게 내버려 두고 세계의 온갖 불행을 뒤집어쓰도록 이끎도 불능 감각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황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 카를이 겪는 불행은 다소 갑작스럽고 무능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요. ‘카를이 끝내 물질세계에 관한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기는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독자들의 눈에는 답답하기만 한 거죠. 터무니없는 사람들에게 당하고 마는 그의 순진함이-미성숙을 기원으로 한다고 해도-매번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여행 가방을 맡기는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카를은 달라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달라진 면모가 있다면 그의 환경과 태도 정도겠지요. 그는 순진하리만큼 올곧은 마음을 점점 잃고 불행을 흡수하는 쪽으로 미국 사회에 녹아드니까요.

하지만 카를이 처절하게 당해오지않았더라면, 그러니까 못지않게 행복하고 희망적인 성장의 편에 섰더라면 이야기가 흥미로웠을까요? 끝없이 나아가는 그의 이야기를 담아내기엔 아주 지루한 시간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독자들은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닌 이야기를 잘 찾아낼 수 있으니까요. 신화 바깥에 존재하는 우리의 이야기야말로 처절한 삶의 열정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이야기 도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불행은 가학적이고 불행은 우리가 자신을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카프카의 가벼운 이야기들은 우리가 너무 오랜 시간 불행을 바라보지 않게 만들기도 합니다. 잰걸음으로 미국 이곳저곳을 활보하는 우리의 주인공 카를이 앞으로 어디로 가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마도 이제껏 해왔던 대로 허무맹랑한 유랑을 계속할 듯한 느낌이 드는데요. 페이지 뒤로 실종된 소년의 이야기가 미완으로 남겨짐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걱정스럽습니다. 그가 가끔은 배 터지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선한 사람들과 온정을 나누고, 깊고 포근한 잠을 잤으면 좋겠습니다.

 

개편된 표지 디자인에 관해……

개편 전 기존 일러스트를 불규칙적으로 쪼개어 보여주는 방식도 일률적이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좋았는데요. 고전의 느낌보다는 세련된 현대 문학책을 만지는 느낌이라 색달랐습니다. 표지의 지질이 달라진 느낌은 없으나, 서가에 꽂아서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디자인 개편이었던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본 게시물은 도서를 제공받아(서평단)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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