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3
안보윤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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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윤의 신작 장편소설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2024)가 현대문학 PIN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사회적 문제를 날카롭게 그려왔던 작가의 펜 끝이 또 한 번 우리 세계에 매서운 흠집을 내어줄 때가 온 것이다.

얼마 전까지 ‘수영’은 쿠팡 물류센터에서 근무했으며 좋지 못한 이유로 일을 그만두었다. 고강도 노동의 여파로 어깨 인대가 끊어져 물류센터 일을 지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영’에게 휴식은 허락되지 않았다. 제 능력으로 처음 마련한 전셋집은 들어가 살기도 전에 사기 피해로 내쫓겼으며, 그마저도 막대한 채무를 끌어안은 상태라 금전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집 우연히 앞에 새로 들어선 동물병원의 구인 광고를 본 ‘수영’은 빠른 채용 과정 이후 마침내 반려견 돌봄센터 관리인으로 취직한다. 센터는 ‘구 원장’이 동물병원과 함께 운영하는 시설로 늙고 병든 개들이 관리받을 수 있는 요양원이다. ‘수영’은 동료 ‘소란’과 함께 입원한 개들을 보살피는 역할을 한다. CCTV로 가득 찬, 언제 어디서고 보호자와 원장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공간에서.


‘수영’에게는 한 살 터울의 언니 ‘수미’가 있다. ‘수영’과 체형도 이름도 비슷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영악해 나쁜 짓을 일삼고도 자신은 조금도 피해 보는 일이 없었던 비범한 인물. ‘수영’은 그런 ‘수미’의 그늘에 늘 “뒷면”을 자처하며 살아야만 했다. 모르는 척하고 회피하고 당해왔다. 조용하고 아무 일 없도록, 가족을 위해서.

‘수미’가 싫어 도망쳐온 곳에는 또 다른 ‘수미’가 있다.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들과 만나며 ‘수영’은 생각한다. 최소한의 인간-“고작 이 정도의 인간”(p.158)이라도-되려는 용기에 관해서. 달력의 “뒷면”으로 남을 것인지, 웅크린 자신을 넘기고 새로운 “앞면”을 펼쳐낼 것인지 ‘수영’은 고민한다.

이 소설은 주인공 ‘수영’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수영’의 현재(병원)와 과거(가족)가 교차편집되어 묘사되고 해당 시점에서 ‘수영’이 맞닥뜨리는 “세상의 모든 전수미”들이 발견된다.

나는 이 소설이 상당히 면밀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물의 움직임이나 세계의 운동이-현실에 정확한 기반을 둔-조밀한 논리로 가동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령 지극히 현실적인 직접적 공포와 폭력적 세계에의 고발이 그러하며, 두려움과 회피에 침잠한 식물적 인간의 태도와 사고가 그랬다. 정확하고 소름 끼치는 묘사들이 곳곳에 보인다. 불행과 불안정한 환경에 온몸이 물들어 조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예민해지는 화자 ‘수영’의 모습은 이런 문장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기피 시설이나 혐오 시설 같은 게 (집 앞에) 들어오면 좋을 텐데. (…) 요양소면 너무 조용하지 않나. 실망감 때문에 아랫배가 쿡쿡 쑤셔왔다. (…) 지하철역이나 도롯가에서 간혹 마주치는 노인들처럼 목청껏 소리를 질러대는, 아고아고 나 죽는다 유난스레 나동그라지는 그런 개들이 50마리쯤 입소하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p. 41-43


돈이 없어 사글세가 오르면 언제라도 쫓겨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수영’은 집 앞에 기피 시설과 혐오 시설이 들어섰으면 좋겠다고 기도한다. 좋은 곳은 자신이 살 곳이 아니라는 듯 말이다. 표면상으론 재정 문제로 인한 곤란이지만 실상은 ‘수영’ 자신이 내면화한 불행과 불쾌감이 그것이다.

소설 여러 곳에서 이런 묘사들이 등장하는데 아주 예민하게 바라보게 되는 문장들이었다.


“전수미가 다가올 때마다 내 기이한 감각은 발작하듯 나를 두드렸다. 시야가 또렷해져 가까이 있는 것과 멀리 있는 것이 모두 다 똑같은 크기와 정교함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종아리가 단단하게 굳어 나는 어디로도 도망치지 못했다.”

p.145

‘수영’이 자신의 삶을 “달력의 뒷면” 같은 삶이라고 표현했을 때 나는 잘못 읽은 글자를 본 듯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달력의 뒷면’을 ‘달의 뒷면’으로 읽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은 명확히 구별되어야 한다. ‘달의 뒷면’은 누구나 알고 싶어 하지만 ‘달력의 뒷면’은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순수문학에 정형적인 빌런이 등장하는 때는 잘 없다. 그래서인지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는 조금 특이했다. 근래 읽은 책 중에 가장 소름이 끼쳤으며 이상한 스릴러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전수미’, 이상한 ‘구 원장’ 그리고 무엇 하나 명쾌히 해명되지 않는 이상한 ‘세계’까지. 스릴러와 순수문학을 함께 읽길 원하는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이 소설의 장점은 ‘현실 공포’에 관한 묘사를 기가 막히게 했다는 점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두려움이 눈앞에 선득하게 느껴져 실제로 해당 상황을 독자인 내가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령 ‘수미’를 찾아온 이상한 남자들에 관한 문장들에서는 이제껏 다른 소설을 읽으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괴이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런 식의 장면은 처음이라 신기했고 재미있었다.

한편 ‘수영’은 ‘식물’에 유난스러운 애정을 가졌다. 소설에서 ‘식물’은 중요한 메타포로 등장하며 이것은 곧 소설의 심상적 줄기가 된다. 식물은 가장 연약한 세계의 밑동이며, 생장이라는 낙관을 가진 생물이다. 또한 아무리 처참한 인물이라도 애정과 돌봄이 있다면 잘 키울 수 있는, 그러니까 순수한 노력과 열정이 닿을 수 있는 생물인 셈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수영’이 식물과 이어져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중반부를 넘기도록 화자 ‘수영’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다. 조용하고 안전한 소수자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인물로 읽혔다. ‘수미’로 호명되는 존재들과의 소설적 격돌이나 행동이 없는데 반해 ‘수영’ 자신의 목소리가 큰 편이라 독자에게 다소 직접적인 아포리즘을 건네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올바른 하층민 인물의 자의식이 전면에 드리워진 것 같았다.

하지만 후반부에 ‘수영’의 중요한 행동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전수미’가 아니려고 노력하는 ‘수영’의 용기가 조금씩 빛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수영’의 용기는 진실하고 중요하다. 비겁함이 무겁고 힘겨워 숨지 않으려는 식물적 용기(상승력)가 표현된다. 조금 예상 가능한 결말이긴 했어도 ‘수영’의 전진하려는 용기가 상당히 의미 있게 드러났다. 다만 현재 시점에서 ‘수미’와 ‘수영’이 부딪히는 장면이 더 등장했으면 어땠을까 한 아쉬움과 차라리 『82년생 김지영』(2016)처럼 삼인칭으로 전개되었으면 조금 더 전달력 있지 않았을까 한 아쉬움 등이 남았다.

소설을 모두 읽은 뒤 조대한 평론가의 해설(「최소한의 인간」)을 보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필자는 “(‘전수미’로 대표되는 인물들의) 행위에 우리가 선뜻 동의할 수는 없을지언정 그것이 온전히 악한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쉽지 않을 듯하다”라고 말하며 독자가 이들에게 품는 마음은 일종의 “희미한 기대감”일 것이라 설명한다. 확실히 ‘수미’와 비슷한 종류의 인물들이 확고부동한 ‘범죄’를 저질렀다고는 판별할 수 없다. 이런 지점들이 독자에게 많은 생각을 몰고 오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에게도 논리가 있고 말 못 할 사정이 있으며 나름대로 선량한 의도나 마음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모종의 불쾌감을 떨칠 수 없다.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이 세상에는 ‘순수 악’만이 판별 대상이 되고 모든 악인에게 ‘이해 가능한 동기’를 인정해 주는 꼴은 아닌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약자들의 착각(혹은 기대)이 아닐까?

그렇지만 이 소설은 누가 뭐래도 ‘수미’가 아닌 ‘수영’의 이야기다. 소시민인 우리의 이야기다. 위태로운 삶과 선택으로 번뇌하고 방황하지만 “고작 이 정도의 인간”이라도 되기 위해 분투하는 ‘수영’들을 위한 찬가다. 이 소설을 읽고 난 사람들이라면 ‘수미’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보다 ‘수영’에게 마음이 더 쓰일 것임을 반쯤 확신한다. 우리는 ‘수영’의 비겁해지지 않으려는 식물적 용기를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 모든 곳의 전수영이다.

감사합니다.



해당 게시물은 '현대문학'에서 도서를 제공받아(서평단) 주관적으로 쓰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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