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경제학설.



마르크스는 <자본>에 대한 서문에서 다음으로 같이 말한다. 사람 많은 지역들에 사는 도시사람들로만, 시민들로만, 이뤄진 오래된 '근대사회'라는, 곧 자본주의적인 지배계급들에 사회에서는, 

"경제적 운동에 대한 법칙들을 드러내고자, 책을 쓴 궁극적인 목적이다." 

역사적으로도 규정된 한 사회에서 생산관계를 발생·발전·쇠퇴로부터 연구하는 건, 

마르크스 경제학설에 대한 내용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에 대한 생산들로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에 대한 분석으로는 먼저 상품에 대해서 처음부터 나누어서 분석한다.



- 물건을 구매할 때는 성분표를 먼저 보는거와도 같다.



가치. 



사용가치: 쓸값.

교환가치: 바꿀값.

잉여가치: 남긴값.


상품이란, 첫째로는 사람들에 욕구를 충족해주는 물건들이다. 

둘째로는 다른 물건들로 바꿀 수 있는 물건들이다. 


팔리는거에 대한 쓸모는 쓸 수 있는 쓸값들로 만들어준다. 바꿀 수 있는 값어치들은 바꿀값들로 또는 단순하게는 그저 값어치들로 무엇보다도 한 갈래들로부터 된 쓸값들은 굳어진 값들로부터도 마찬가지로 바꿀 수도 있는 같은 관계들로 된 비율들이다. 흔하게 겪을 수 있는 여러 건들에 달하는 바꿔지는 모든 갈래들로 된 쓸값들은, 심지어는 매우 많기도 하고, 여러가지로 되어서 서로 전혀 견주어서 보기도 힘들다. 쓸값들까지도 끊임없이 서로 견주고 있다는 걸 우리에게는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과연 특수하게 정해서 굳어진 사람들로 모인 사회에서나 모임들로 맺어진 관계들에서는 체제라는 틀 내에서도 끊임없이 서로 견주어지는 이들로부터 많은 물건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맺어질까. 이들 사이에서 똑같은 건 일노동으로부터 생산된 물건들이다. 사람들은 만들어진 물건들을 바꾸는 과정에서도 여러가지로 된 일노동으로부터도 서로를 견준다. 상품에 대해 만들어진 생산에는 하나씩 여러가지로 많게도 만들어진 물건들로 사회적 분업이라는 형태로 사람들로 따로 모여서 나누어진 생김새로도 만들어진다. 이러한 모든 만들어진 물건들에는 바꾸어지는 과정으로부터 서로 견주어지는 사람들로 모여서 사회관계들로부터 맺어진 틀이라는 체제다. 그러므로 모든 상품이란 물건들에 두루 안에서 붙었거나 닮 건, 그저 뛰어나서 굳힌 일노동에서가 아니라 그저 추상적인 막연한 생각으로만 두루 이뤄진 곧 흔한 사람들에 일노동으로부터 이뤄지기 때문이다. 수 십억이나 수 백억 건에 교환이라는 바꾸는 행위나 짓들로부터도 증명한다. 그러므로 따로 된 물건들은 그저 사회적 필요라는 사람들로부터 모여서 조르고 구하는 일노동에 대한 시간이란 때들로부터 한결같은 숱들을 드러내는데 그저 지나지 않는다. 한 물건에 값어치들에 대한 크기는 사회라는 큰모임에서도 구하는 일노동에 대한 양이라는 값이나 또는 그에 대한 물건들, 곧 그러한 쓸값들에 대한 만들어지는 생산들을 위해서 사회라는 큰모임에서도 구하고자 하는 일노동이란 시간이란 때들로부터 모여져서 결정해서는 굳는다. 사람들 서로 다른 갈래로 만든거로 바꿔서 값어치들로부터도 서로 견주는 짓들로부터, 만든거에 들일 수 있는 서로 다른 갈래에 일들로부터 사람들에 대한 일들로 또한 서로 견준다. 그들로는 섣불리 알지도 않으면서 그렇게만 한다. "<돈>에서 값어치는, 전에 한 돈 배운 사람들도 말한 바와 같게 두 사람들에 관계다. 다만 그는 다음들로 같은 점도 덧붙여야만 했었다. 무언가들에 겉모습 아래에서 감추어진 채로만 맺어지고, 따로 강조한 자취들이나, 모임들에 대한 묶여진 틀들로부터 있는 모여만들어진 틀로 바라볼 때나, 또는 여러 똑같고, 크게만 바꿔지고, 보여지고,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맺어진 틀들로부터 바라볼 때만 값어치는 무엇인지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다.  


"값어치는 모든 만들어진 무언가들로만 엉기거나, 뭉친 일때들로부터 굳어진 '셈'들에 지나지 않는다." 


<나랏돈들 따지기>. 그러므로 만들어진 무언가들로 이뤄진 일들에 대한 겹친 결들로 꼼꼼하게 쪼개본 뒤에야. 마르크스는 값어치들에 모습들이나 돈들에 대해 비로소 바라볼 수 있다. 마르크스에 대한 으뜸가는 물음들로, 값어치들에 대한 돈모습들에 깊게도 따져보고, 곧 따로·뜻 밖에 바꾸는 짓들이나, 한 만들어진 무언가에 대한 굳은셈들에 다른 만들어진 무언가들에 대한 굳은셈들로 바꿀 수 있는 처음이거나 또는 '뜻 밖에 값어치들에 처음모습들로부터 많고도, 또 서로 다른 만들어진 무언가들로부터도 하나에 같은 달리 굳어진 무언가들로부터 바꿔지고, 흔한 값어치들에 모습들도 거치고, 마지막으로는 빛나는 '쇠돈'(금)이라는 달리 굳어진 무언가로, 곧 흔하게 값어치들로 된 무언가들에 대한 돈모습들로부터 끝나는 바뀌고, 낫게 더 나아간, 자취들에 대한 길다리부터 깊게 따진다. 바꾸거나 무언가를 만들거나 더 낫게 나아간, 매우 높은 돈으로 모든 따로만 나뉜 일들에 대한 모임들에 결들로부터, 혹은 사고팔 수 있는 곳들로부터도 하나로 맺어기는 하지만 따로따로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 모임들로는 맺는거도 정작 흐리터분하고 숨기기만 한다. 마르크스는 돈들에 대한 온갖 쓰임들도 매우 꼼꼼하게 따져본다. 여기에서는 다르게 <돈>에 앞 갈래에서는 여러 가름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바라보아야만할 건 흐릿하게만, 때로는 꾸밈없이만, 따라풀게만 보이던 그저 말해진거나 꼴들로부터도 무언가로 바뀌거나, 만들어지고, 나아간 자취들에서도 매우 크게 쌓이거나, 드러난 일감들로 다룬다. 


<돈>: 있는 돈들로는 바꿔진 무언가들로부터 한결같은 길다리를 먼저 내세운다. 돈들에 대한 다른 쓰임들로, 그러니까 쉽게 만들어진 값어치들도 같은 무언가들이나 또는 흘러 널리 쓰일 수 있는 꾀들로부터도, 또는 값으로 치르는 꾀들, 감추거나, 모아진 돈들 및 어느 나라에서나 쓰일 수 있는 돈들도 여러가지 쓰임들로부터는 하나하나에도 서로 다른 가닥이나 서로 맞서거나, 모여 만들어진 뜻들로부터는 하나에 다른 여러 오르내리는 길다리들로 나타난다.   


남긴값. 


만들어진 무언가에서 한결같이 낫게만 나아간 일다리들도 돈으로만 주고받는다. 만들어진 무언가들도 흐른 돈들에 대해 써보면 다음으로 같다. C(만듦) - M(돈) - C(만듦)이다. 거스르면, 돈들에 대한 흔하게 써보면 다음으로 같다. M(돈) - C(만듦) - M(돈), 곧 남는 돈들도 덧붙여 팔거나 산다. 그래서 흘러 던져넣는 돈들에 처음 값어치들로부터는 늘어난 돈들에 대해 마르크스는 남긴값이라고 부른다. 돈지랄들에 따른 돈들도 흐르거나, 늘어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늘어나거나 바로 목돈에서 모갯돈들로, 곧 다른 자취들로부터 굳어진 모여서 맺어지고, 만들어진 모갯돈들로 달리 되진 않는다. 남긴값들로는 무언가들로부터 그저 흘러가기만 해서는 생겨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흘러가는 무언가들로는 바꿔지는 같은 값어치들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남긴값들 또한 그저 값만 올린다고 생겨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는 사람들이나 파는 사람들이나 모두 두 쪽, 모두 잃거나, 얻는 건 안 맞다가 시나브로 없어지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아주 크고 많거나 그저 고르게, 모여지거나 보여진 거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지만, 따로 일어난 걸 다루는 건 아니다. 남긴값. 얻으려면 돈 가진 사람들로는 "쓸값들로부터 값어치들로부터 흘러나온 뛰어난 결들로 지닌 무언가들이다", 곧 쓰는 길들로부터 마찬가지로 값어치들로부터 만드는 길들로부터 무언가들로 "여러 사고파는 곳에서 찾아내야만 한다." <돈>. 무언가는 있다. 다름아닌 사람들로부터 일하는 힘들이다. 사람들에 일하는 힘들로 모여, 쓰는 거도 일이고, 일한다는 건 값어치를 만든다. 돈 가진 사람들로는 일하는 힘들로부터 값어치대로 산다. 일하는 힘들에 값어치는 다른 모든 만들어진 무언가들에 값어치와 마찬가지로 일하는 힘들로부터 만드는데드는 모여진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일때'들로부터 곧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피붙이들로부터 날마다 쓰는 살림거리들에 대한 값어치들로만 굳어진다. 




돈 가진 사람들로는 일하는 힘들도 샀기 때문에, 쓰고자, 곧 하루에, 말하자면 12 때들로 움직이거나, 일한다. 그리고 일하도록 맡긴다. 그러나 일하는 사람들로는 6 때에 반드시 일때들로부터 일들 속으로 스스로에 살림들도 지킬 수 있는 만들어진 물건들도, 만들고, 나머지 6 때들로 남긴일때들에 대한 일로는 모갯돈 만지는 사람들에 돈 내어 값 치르지는 않는 만들어진 무언가들에 나머지들로, 곧 남긴값들도 만든다. 따라서 만들어지는 쪽에서 볼 때는 큰돈들에 두 가지, 곧 바꿔지는 않는 큰돈들이나 바뀌는 큰돈들에 대한 가지들로 갈라 나눠봐야만 한다. 바꿔지지는 않는 큰돈들로는 틀들, 일거리들, 만들거리들, 따위들로 만들어지는 솜씨들로 쓰여지는 구석들로, 값어치는 바뀌지도 않고 그대로 한 번에 또는 조금씩 만들어지는 무언가들로 옮겨진다. 바꿔진 돈들로는 일에 대해서도 쓰여진다. 바꿔진 돈들에 대한 값어치는 바뀌지도 않는 모습으로 있지도 않고, 일하는 길에 남긴값들로 만들면서 늘어난다. 그러므로 모갯돈들에 대한 일하는 힘들에 대해 억지로 짜낸 걸 둘레로 나타내려면 먼저 남긴값들로 들인 큰돈들 모두로 견주기만 해서는 안 되고, 오직 바꾼 돈들로부터 대보면서, 견줘봐야만 한다. 그리해서, 바로 앞에 보기를 가지고 말해본다면, 남긴꼴값들,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부른다. 6:6=100%. 


큰돈들로 생겨나는데는 자취에 대한 두 가지를 내세운다. 첫째, 만들어진 무언가들로 흔하게는 견주어보면 높은 길들로 낱낱 사람들에 주머니들로 굳어진 셈들로 돈들도 쌓어야만 한다. 둘째, 겹친 뜻으로 마음대로 하는 일하는 사람들도 있다. 스스로 일하는 힘들로 파는 데 있어 



모든 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데로부터 마음대로 할 수 있고, 터나 만드는 솜씨들로부터도 마음대로 일하는 사람들, 곧 스스로에 일하는 힘들로만 오직 팔기만 하는 살아남는 길조차도 없는 '밑돌섬돌'들도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남긴값들로부터 늘리는 밑바탕들로는 두 가지로, 일하는 때를 늘리는, '모자람 없는 남긴값', 들어간 일때들로부터 줄이는, '견주는 남긴값'들이다. 첫번째로 나눠본다면 마르크스는 일하는 때들로부터 줄이도록 일하는 섬돌들에 싸움들이나, 14-15 즈믄에 일때들에 대한 늘림들 및 19 즈음에 일터에서 줄어든 나라힘들로부터 끼어들어 매우 강하게 남긴 생김새들에 그림들도 드러낸다. <돈> 내놓는 뒤로 모든 나라들에 오랜나라들에 일하는 섬돌들에 움직이는 자취들에도 그림으로도 더욱 끝맺는 많고, 새롭게 드러나 보여준다. 



마르크스는 견주는 만들어진 남긴값들도 쪼개는 구석들로는, 돈지랄들로부터 일만들고, 큰 자취들로도 셋으로 나누어 따져봤다. 1. 쉬운일. 2. 나뉜 일틀.  3. 큰 일틀. 


마르크스는 돈지랄들로부터 더 나아가 바탕이나 눈 뜨이는 보기들로부터 얼마나 깊숙하게 파헤쳤는지를, 러시아에서 이른바 사고파는 곳에서 만들어진 손일들도 깊게 따져보며 위에 세 갈래들 가운데 첫 번째, 두 번째로, 보기를 들어 밝히고는 넉넉하고 많은 감들로부터 주고 있다는 걸 잘 알 수 있다. 크고 많은 틀들로부터 이뤄진 일들에 대한 고칠 수 있는 보람들로는, 1867해에 마르크스는 적었고 바로 뒤로는 똑같이 나눈 즈음 동안에 많은 러시아, 일본, 따위들에 '새로운' 나라들로부터 뚜렷하게 나타났다. 


나아가서 마르크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대단하고 새로운 쌓여진 큰돈들도 나눠본다. 곧 남긴값 들에 한 큰돈들로 주고받고, 그리고 남긴값들로부터 돈 많은 사람들에 낱사람들에게 얻고자하거나 분위기를 모자람 없게 쓰는게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 쓰는 걸로 나눠본다. 마르크스는 큰돈들로부터 주고받고 남긴값으로는 모두 변하는 큰돈들도 된다고 내세우는 동안에도 모든 오랫동안 돈생각만 한 사람이던 애덤 스미스 뒤로도 무엇으로 그릇됐고, 맞지 않았는지는 밝혀냈다. 말하자면 모든 큰돈들에서 만들어진 솜씨+바꾼돈들로 나눈다. 얼마 동안에 바꾼돈들에 견주어 보면 얼마 동안에 안 바뀐 돈들에 대한 좀 더 빠르게 늘린다는 건 돈지랄들로 나아가거나 모여진 사람들로부터 바꾸는 데에도 매우 무거운 뜻으로 지닌다.  



또한 쌓인 큰돈들로는 틀들로부터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틀로 세우도록 빨리 나아가게 하고, 그리고 한쪽에 맨끝들로는 넉넉함들로, 맨끝에 다른 쪽으로는 가난들도 만들어내고, 미리 일할 수 있는 사람들도 갖추고는, 곧 일하는 사람들에 견주어보아도 넘치도록 낳는다. '돈지랄들로 넘친 드나드는 사람들로는 더할 수도 없이 크가 많은 생김새를 띠고, 맨끝에 빠르기들로 늘려 만들 수 있도록 큰돈들에 붙여준다. 만드는 솜씨나 생김새들로도 쌓여진 큰돈 및 믿음들로부터 서로 맺어질 수도 있고, 돈지랄 떠는 나라들로는


되풀이해서 나타나기에 처음으로는 고르게 보자면 열 해에, 나중에는 더 길고 덜 굳어진 벌어진 사이들로부터 일어나는 넘치게 만들어진 나머지 큰돈들에 대한 깨진 두려움들도 알 수 있는 열쇠를 갖다받친다. 돈지랄들에 밑바탕 위로 이뤄진 쌓여진 큰돈들부터 으뜸들로 쌓여진 모갯돈들부터는 곧 만드는 솜씨들로부터도 억지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떼어놓게 하고, 모든 땅들로부터도 정작 밭 짓는 사람들도 내쫓거나, 나랏땅이라고는 그저 빼앗거나, 다른나라로부터 스스로에 나라마저 잃거나, 나라빚, 다른 나라들에 대한 돌봄구실, 따위들로부터는 잘 따져봐야만 한다. 한쪽으로만 으뜸으로 쌓여진 돈들에 끝에서는 마음대로 할 수는 있지만 정작 없는 사람들이고, 다른 쪽 끝으로는, 돈 가진 사람들, 곧 돈 많은 사람들만 지어내고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돈지랄들로부터 쌓여진 자취들에 기울임들로는 마르크스는 다음으로 같은 이름난 말로도 그려냈다.  


바로 만드는 사람들로부터 빼앗는다는 건 가장 모지고, 가장 끔찍하고, 그리고 가장 더럽고, 가장 나쁘고, 가장 남부끄럽고, 가장 괘씸하고, 가장 얄미운, 억누르기도 힘든 마음들 속으로 따르기만 했다. 스스로에 일로부터 얻는 낱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말하자면 낱낱으로, 홀로 선 일하는 사람들이나, 일에 대한 여러 가지들로부터도 뒤섞인 채로 낱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자리에다 딴사람들에 일들로부터 도와 딴일로 여러 꼴들마저 마음대로 비틀어 짜낸 일들도 하고선 돈지랄들도 떠는 낱사람들로 들어선다. 


빼앗긴 사람들로는 스스로 살림차리는 일하는 사람들도 아니라 많은 일하는 사람들마저 지지고, 비틀고, 짜내는 돈 많은 사람들이다. 빼앗긴다는 건 돈지랄들로부터 만들어진 바탕들로부터도 안에서부터 따르거나, 미치던 힘들로부터, 곧 모갯돈들로부터 모여진 큰돈들로 늘 돈 많은 한 사람으로는 처음부터 돈 많던 사람들로부터 모아진 돈들도 정작 없어지도록 만든다. 한 곳으로 모여, 곧 드물게만 돈 많던 사람들로부터도 나중에는 많아진 돈 많은 사람들로부터 빼앗고는 나란하지만 다르게 나아가고 더욱 더 크고도 넓게 일어난다. 


곧 일하는 길로는, 함께 일하거나, 그루를 따져보면서 깨우치거나, 무언가를 잘 다룰 수 있도록 하거나, 땅들로부터는 앞으로는 이롭게 잘 쓸 수 있도록 하거나, 만들어진 솜씨들로부터 짬들로 쓸 수 있는 꼴들로 주고받고는, 모든 만들어진 솜씨들도 모여 하나로 맺어진 모여진 일들로부터는 만들어진 솜씨들로 쓰여서 아낄 수도 있다. 여러 나라들에 나랏사람들로는 모든 나라들에 대한 사고파는 곳에 그물로 얽는다. 돈지랄 떠는 틀들로부터는 여러 나라들로부터 모여진 결들도 늘어남에 따라 더욱 더 넓고도 크게만 일어난다. 다르게 바뀌고자 하는 모든 보탬들도 가로채고는 혼자서만 모두 차지하는 크고 돈 많은 사람들도, 셈으로도, 끊임없이도 줄어들지만, 가난이나  억눌림, 매여짐, 썩어 잘못되고, 얼마나 비틀고 짜는지도 셈으로도 더욱 더 늘어만 간다. 


그러나 같은 때 일하는 사람들도 세어보면 끊임없이도 늘어가고, 돈지랄들로부터 만들어지는 얼개나 바탕들로부터 익고, 하나로 모으고, 짜여 만들고는 나눠진 사람들에 대듦도 늘어난다. 큰돈들도 홀로만 모두 차지한다는 건, 홀로만 모두 차지해서는 더불어 홀로 차지한 밑에서부터 퍼진 만드는 솜씨들도 차꼬를 차, 몹시도 괴롭고 힘들다. 만드는 솜씨들도 모이고, 모인 일들도 마침내는 돈지랄들에 겉모습들로부터 군데군데 어울릴 수도 없도록 다다른다. 돈지랄들에 겉모습들도 깨지고, 갈라지다, 마침내 터져나온다. 돈지랄들에 따른 낱사람들만 가질 수 있던 끝에도 다다른다. 빼앗던 사람들마저 빼앗긴다. <돈>.


마르크스가 보이도록 나타난 또 한 가지 더할 나위 없이 대단하도록 있게 한 두 번째 <돈> 에서는 보이도록 모임 모두에 자돈들에 다시 만들어지도록 나눠본다. 마르크스는 따로 그저 나타나도록 본다는 데만 그치는게 아니라 셈 많은 보여짐들로부터, 줄이도록 돈으로 끊어지게 하거나, 쪼개지도록 한 건 아니라 줄인 돈들 모두를 다룬다. 마르크스는 꼼꼼하게도 말한 바와 같고 오래된 돈에 대해 배우기만 한 사람들에 틀림들도 바라잡고는 또한, 모든 만드는 모임들로부터 두 가지 갈래들로, 곧 1). 만들어진 쓸모들에 대한 만듦 2). 쓸거리들로부터 만드는 걸 따로 나눠보고, 셈들로부터 자주 쓰이는 모든 모임들에 큰돈들도 흘러가는지도, 낱낱 아직까지도 크기들로는 쉽게 다시 만들고, 다시 만드는 때나, 더 크게 다시 만들고는 쌓는 때들도 모두 따져본다. 세 번째 <돈>에서는 견주어 보기에 고르게 남은 돈들도 어떻게 이루는지에 대한 물음들도 값어치들에 꼴들로부터 밑받침들로부터 얽힌 일들도 잘 치르고 마무리한다. 마르크스는 잘 따져보면서, 돈 밝히는 배운사람들에 대한 오늘날에는 테두리를 넘나들도록 배우도록 한 잦고, 스스로를 가둔 낱낱으로 일어난 일들이나 또는 이기려고 겨루는 겉모습들이나 겉보기들로부터만 나아가지는 않았고, 크고 많은 돈들로부터 보여지거나, 모든 돈들에 대한 흐름들로부터 나아간, 돈에 대해 배우기에도, 훌륭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마르크스는 먼저 남긴값들로부터 처음으로 생기던 걸 따져보고, 이어서 남긴값들에 대한 남은돈들, 치를 돈들, 땅돈들로부터 나누어 쪼개는 물음들도 깊게 생각한다. 남은돈들로부터 대대로 물려온 일들로부터 떨어진 큰돈들에 대한 모갯돈들에 남긴값들에 알맞게 견준다. 떼어낼 수는 없게 이루는 높게는 곧 바뀔 수 있는 큰돈들에 대한 바뀌지는 않는 큰돈들에 대한 남들보다 모임들로부터 고르게 높게 나타난 많은 큰돈들로부터는 고름들로는 낮은 남은 돈들에 대한 셈들도 가져온다. '떼어낼 수 없게 이루는게 낮게는 큰돈들로는 고르게는 높게 남은 돈들에 대한 셈들도 가져온다. 돈 많은 사람들 사이에 이기거나, 앞서가려고 서로 견주는 한 만드는 낱낱들로부터 다른 만드는 낱낱들로부터도 큰돈들도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건 두 가지 모두에게 남은 돈들에 대한 셈들도 고르게 남은 돈들에 셈들로 맞추고는 낮춰놓는다.  주어진 모임들로부터는 모든 팔 수 있는 값어치들에 모갯돈들로는 팔값들에 대한 모갯돈들로부터 모두 같다. 그러나 낱낱에 대대로 물려온 일들 및 낱낱으로 만드는 쪽들로부터 잘 팔고자 이기거나, 앞서고자 서로 겨루도록 미치기 때문에,  값어치, 그대로 팔지는 않고, 쓸 돈들에 대한 큰돈+고른남은값들도 모아 똑같게 돈들에 대한 셈들로부터 값들로 치고 팔린다. 마르크스는 값어치들로부터 값들에 동떨어진 틈으로, 남은값들에도 고르게 할 수 있다는 건,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하고자 값어치들에 꼴들로부터 처음부터 위로부터도 모자람 없이 잘 말했다. 모든 팔릴 수 있는 값어치들에 대한 모갯돈들도, 모아진 모든 값들에 대한 모음들로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에 무슨 모임인가에 대한 값어치들도 여러가지로도 많은 낱낱이라는 값들로만 나타나거나 쉽게는 가운데 없이 바로 가는 건 아닌지라 대단하게 얽혀있다. 오직 사고파는 곳에서만 서로 맺어지거나 흩어진 팔고자 만드는 사람들로부터 모인 모임들로는 꼭 알맞도록, 어떤 때는 이 쪽으로, 또 어떤 때는 저 쪽으로도 낱낱에 벗어난 거리들로부터 서로 주고받아 미치고, 사라지도록, 고르고, 모이고, 큰 셈들로부터도 꼭 알맞도록만 나타나지는 않는 건 더 할 수 없이는 그러하다. 



만들어진 일들로부터 나아진다는 건 바뀌지 않는 큰돈들에 견주어보자면 바뀌지는 않는 큰돈들에 더 빠르게 늘어난다는 걸 뜻한다. 남긴값들로는 바뀌는 큰돈들에 대한 노릇들이라고 할 때, 남은값들에 대한, 곧 남긴값들로부터 견주어 볼 때, 얼마나 남긴값들에 대한 그저 바꾼 큰돈들만에 견주어보는게 아니라 모든 큰돈들로부터 견주어본다. 분위기마저 낮아지거나, 띠는 건 틀림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분위기들로부터, 몰래 감추어 숨기거나, 


거스르는 움직임들로부터도 많은 까닭들도 꼼꼼하게 나눈다. 우리는 남은값들로 비싸게 받는 돈놀이들로부터 큰돈들로부터 팔고남은돈들이나 큰돈들로부터 내어진 세 번째 <돈>에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재미진 쪽들도 건너뛰어서, 매우 대단한 큰손들에 사고파는 땅들로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땅들에 넓이에 따른 크기들도 넘지는 못하게 됐고, 돈지랄 떠는 나라들에서는 땅들도 모두 낱낱에 낱사람들로만 가질 수 있도록 차지됐으므로 밭에서 만들어 판 값들로는 



가운데 높이를 지닌 땅에서나 만들어진 셈들로는 아니고 가장 낮은 땅들로부터 만들어진 셈들로부터굳어진다. 또한 만들어진 걸 사고파는 곳에다 주고 갖출 수 있는 가운데 높이나 갖출 수 있는거도 아닌 나쁘게 갖추는 아래서 밭에서 자라 판값들도 굳어지기 때문이다. 값이나 바탕들로 땅  또는 보다 낫게 가추고자 만드는 값들 사이에도 나머지 값이나 나머지 땅들도 생겨난다. 


마르크스는 나머지 땅들도 꼼꼼하게 나눠보고, 어떻게 낱낱사람들에게 땅들에 대한 걸거나, 기름지는 다름로도, 또 땅들로부터 들어간 큰돈들에 대한 많음은 얼마나 다르고, 발생하는지도 잘 보여준다.


나머지 땅들보다 바탕들에 땅들로부터도 잇따라 보다 낮은 땅들로 옮겨가는 때에만 생긴다고 본 리카도에 틀림들도 흠 없이 드러냈다. <남긴값, 자취들>도 보라. 로트베르투스에 대한 따짐들도 다르게 깊게 살펴볼 만하다. 돌아보면 거스름들도 있다. 곧 어떤 한 위아래로 본 땅들이나 다른 위아래들에 땅들로 바뀌는 논밭 기르는 재주들도 나아가거나, 사람 많은 곳에 자라남, 따위에 일들도 있을 수는 있다. 그리하여 저 나쁘게도 '하나만 거두어들이고 나머지는 조금씩 줄어들게 만드는 꼴'들로는 돈지랄들에 대한 흠 되거나, 둘레들이나 앞뒤 맞지 않고 저절로만 다른사람들에게만 넘겨짚거나, 넘겨씌워서, 밑바탕마저 틀림렸다는 걸 안으로도 안는다. 더 나아가서는, 솜씨일들 및 흔하게는 나라사람들에 아낀 돈들로부터 모든 갈래들에서도 남긴값들로 고르거나, 가지런하게 하고자 한다면 이기거나 앞서는 다툼들에서 모자람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하고, 한 만들어지는 낱낱들로부터 다른 만들어지는 낱낱들로도, 큰돈들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하도록 먼저 내세운다. 그러나 땅들도 가진 낱사람들로는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건 가로막거나, 거치적거리는 혼자 모두 차지하도록만 낳는다. 혼자 모두 차지 한다는 맺는다는 건, 큰돈들로부터 떼어낼 수 있게하는 짜임들도 견주어보자면 낮고, 따라서 낱낱으로는 견주어보아 높은 남은값들로 부터 눈에 뜨인 논밭일들로부터 만들어진 건 남은값들에 모으거나, 고르게 하는 아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하거나, 나중에는 들어가지도 않는다. 땅 가진 사람들로는, 혼자 차지하는 사람들로는 값들도 고르게 많거나, 낫도록 얻고자한다. 따라서 혼자 차지한 값들로는 맞설 거 없는 땅들도 낳는다. 


나머지 땅들로는 돈지랄 아래로는 없앨 수 없지만, 맞설 수 없는 땅들로는 이를테면 땅들에 대해 나라들로부터 가지도록해서, 곧 땅들도 나라로부터 가질 수 있게 함으로만 없앨 수 있다. 같은 토지를 나라로 뒤로 옮긴다는 건 낱사람들로부터 가지고, 혼자 모두 차지하는 걸 무너뜨릴 수 있고, 논밭일에서 앞다투어 마음대로 할 수 있게하는 한결같고, 오직 흠 없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꼴 뿐이다. 때문에 자취들 속에 다스리는 사람들 가운데 서두르는 쪽들에게 마르크스로부터 꼭 집은 바와 같이 땅들로부터 나라땅들로 하게 한다는 건 나아가서 다스리는 사람들로부터 달라고 해온 되풀이해서 내놓은거다. 그러나 땅들로부터 나라땅들로 한다는 건 오늘날에도 다르게도 대단하고, 날카롭게 보이는 혼자 모두 차지한다는, 곧 만드는 솜씨들에 흔하게는 혼자 모두 차지함으로 주고받거나 미치는 데 너무나 가까워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는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겁먹게 하고는 달라고 해서 얻는다. 마르크스는 큰돈들 대한 고르게 남은값 및 맞설 수 없는 땅들에 대한 스스로에 옳거나 그름들에 대한 더할 수 없이 까다롭지도 않고, 깔끔하고, 막힘 없이 쉽게 풀어서 쓴 속내들도 1862해 8달 2날로 된 엥겔스에게 보낸 글들도 있다. <갔다 돌아온 글집> 3번째, 77-78쪽도 보라. 또 1862해 8달 9날로 된 보낸 글, 같은 글로는 86-87쪽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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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의 지대 변천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분석을 살펴보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 분석은 노동지대 농민이 영주의 토지에서 노동해서 잉여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경우

가 어떻게 생산물지대 또는 현물지대라는 농민이 자신의 토지에서 잉여가치를 만들어내고, 이것을 '경제 외적 강제' 때문에 지주에게 넘겨주는 경우로 전화되고, 그 다음에는 화폐지대 앞 선 현물지대가 상품생산의 발전의 결과로 화폐 납부로 전환된 것. 구 러시아의 '면역지대'로, 그리고 끝으로는 자본주의적 지대 농민 대신에 농업 기업가가 나타나 임노동을 사용하여 토지 경작을 하는 경우로 전화되는가를 보여준다. '자본주의적 지대의 발생'에 대한 이와 같은 분석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것은, 농업에서 자본주의의 진화에 관해 마르크스가 표현한 일련의 시오한 러시아와 같은 후진국에 특히 중요한 사상이다. 현물지대의 화폐지대로의 전화는 나아가, 화폐를 받고 고용되는 무산 일용노동자 계급의 형성을 필연적으로 수반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계급의 형성이 화폐지대로의 전화에 선행하기까지 한다. 이 새로운 계급이 아직은 산발적으로밖에 등장하지는 않는 그 발생기의 경우, 지대 지불 의무를 지는 농민 내에서도 비교적 번영하는 층들 사이에서는 자기 자신들의 농사를 위해 농업 임노동자를 착취하는 관습이 필연적으로 발전한다. 이는 봉건시대에도 비교적 부유한 예농이 그들 자신에 더해서 다시 예농을 고용하고 있던 것과 똑같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일정 정도의 부를 축적해서 스스로 미래의 자본가로 탈바꿈할 가능성을 점차 얻게 된다. 구래의, 자기 노동에 기초한 토지 소유자 자신들이 바로 자본주의적 차지농의 양성소를 탄생시키는 주역인데, 이러한 차지농의 발전들은 농촌 밖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들의 일반적 발전들에 의해서 제약된다. 자본 3권. 


"농촌에 인구 일부의 수탈과 추방들은 산업자본들을 위해서 노동자들과 그들의 생활수단 및 노동재료들을 분리시켜놓았을 뿐만 아니라, 국내 시장들을 창조한다." 자본 1권. 한편 농촌 인구들의 빈곤화와 파산은 자본들을 위한 노동예비군 창출에도 일익을 담당한다. 다라서 모든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농촌인구의 일부는 도시 무산게급들 또는 매뉴팩처 곧 비농업 무산계급들로 끊임없이 이행하는 중에 있다. 그리해서 상대적 과잉인구들의 이 원천들은 끊임없이 유출되고 있다. 따라서 농업노동자는 임금이 최저한까지 억눌리며, 항상 한 발은 이미 궁민 상태의 늪에 담그고 있는 실정이다." 자본 1권. 농민의 자기 경작지에 대한 사적소유는 소생산의 기초이며, 소생산의 번영, 소생산의 고전적 형태로의 발전들을 위한 조건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생산들은 생산 및 사회의 협소하고 원시적인 틀 안에서만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아래서 농민들의 착취로는 


공업 무산계급들에 대한 착취와 단지 형태에서만 구분될 뿐이다. 그러나 착취자는 같다. 곧 자본이다. 개개의 자본가는 저당과 고리대로부터 개개의 농민들을 착취한다. 자본가계급들은 국가조세로부터 농민계급들을 착취한다. 프랑스에 계급투쟁.



"이재 농민들의 분할지는, 자본가가 경지에서 이윤과 이자와 지대를 끌어내면서, 토지 경작자의 임금을 어떻게 염출해낼 것인가 궁리해야 하는 일들을 경작자 자신에게 떠넘겨버릴 수 있게 해주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브뤼메르 18일>. 대개 농민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곧 자본가계급들에게 임금의 일부분들까지도 내다 바치고, "아일랜드 소작인들에 수준"으로 영락한다. 이 모든 것들이 사적소유자라는 구실 아래로 일어난다. <프랑스에 계급투쟁>. 그렇다면 "소농 분할지 소유가 지배적인 나라들에서는 곡물가격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나라들에서보다 더 낮은 원인들 중 하나"는 무엇인가. <자본> 3권. 이건 농민들이 사회에 곧 자본가계급들에게 자신의 잉여생산물들에 일부분들을 무상으로 넘겨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곡물 및 기타 농업 생산물들에 낮은 가격들은 생산자들의 빈궁의 결과이지, 결코 그들에 노동생산성에서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3권. 소생산이라는 정상적 형태인 소토지 보유는 자본주의 하에서 퇴하하고 파산하며 멸망한다. 



분할지 소유는 그 본성상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이나 노동의 사회적 형태들과 자본의 사회적 집적과 대규모의 목축과 과학의 누진적 응용들을 배제한다. 고리대와 조세제도는 어디서나 분할지 소유를 빈곤화하게 마련이다. 토지 구입들에 들어간 자본 지출들은 그만큼 자본들을 경작으로부터 회수한다. 생산수단의 끝없는 파편화와 생산자 자신의 고립화로. 



협동조합, 곧 소농민의 연합은 극히 진보적인 지배계급적 역할을 하면서도, 이러한 경향들을 약화할 뿐, 없애지는 못한다.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건 이러한 협동조합들은 부농에게는 커다락 이익들을 주지만 빈농대중들에게느 매우 적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이익밖에는 주지 않는다. 결국 협동조합 자신들에게 임노동에 대한 착취자가 된다. 



"인간 에너지의 막대한 낭비, 생산조건의 누진적인 악화, 그리고 생산수단의 가격등귀는 분할지 소유라는 필연적 법칙이다. <자본> 3권. 공업에서처럼 농업에서도 자본주의가 생산과정을 개조하는 것은 오직 "생산자의 순교"라는 대가를 치른 다음이다. 



집적으로 인해 저항력이 커지는 도시노동자와는 달리, 농업노동자는 비교적 광범위한 지역들에 퍼져 있어서 그들의 저항력은 약화된다. 도시 공업에서와 마찬가지로 근대 농업에서는 노동의 생산성의 증대와 그 유동화의 증진들이 노동력 자체가 황폐해지고 쇠약해지는 대가로 얻어진다. 게다가 자본주의적 농업에서의 모든 진보는 노동자 약탈 기술만이 아니라, 토지 약탈 기술에서의 진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파멸하게하고 비로소 기술을 발전하고, 다양한 생산과정들을 하나의 사회적 생산과정으로까지도 결합한다. <자본> 3권.



<포어베르츠>와 빈에 <노동자신문>으로 보내는 편지.



존경하는 동지들에게.



며칠 전에 <포에베르츠>는 전쟁과 사회주의라는 주제에 대해서 짧은 기사를 한 편 게재했습니다. 기사에서 나는 취리히에서 읽었던 신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었는데, 신문에 대한 전적으로 그릇된 인상들을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차르주의에 반대하는 논쟁으로만 분명 글들을 제한하고 있다는 인상들을 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적국만이 아니라 자국에 배외주의나 애국주의에도 반대해서 가차 없는 투쟁들을 수행한다는 건 모든 나라에서도 사회주의자들에 의무임을 확신하는 사람으로서도 나는 차르주의를 맹렬하게 공격해왔고, 맥락으로부터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자유에 대해서도 발언합니다. 그러나 나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도 취한 입장에는 반대해서 기회주의와 제2인터내셔널에 대한 붕괴를 말한 건 아무런 언급마저 하지도 않는다면, 내 논지에 의미는 완전하게 왜곡될 소지도 분명하게 있습니다. 두 시간에 걸친 내 보고에서 10분에 9만으로 비판으로 다룹니다. 내게 밝힌 누락 부분들로부터 <포어베르츠>에 또는 게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회민주주의적 인사를 보내며.



여기서 말하는 레닌에 대한 보고에 기사로는 1914년 11월 10일자로 <포어베르츠>라는 <전진> 308호와 11월 7일자로 된 빈에 <노동자신문> 309호에도 게재됐었다. 1914년 11월 22일, <포어베르츠> 편집국에서는 레닌에 대한 편지에 답하는 짧은 글들을 게재해서, 레닌에 보고들로부터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 취한 입장들을 비판했고, 제2인터내셔널로부터 된 일련에 붕괴들에 대한 평가를 제시했다고 밝혔다. - 원서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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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Left Wing Communism - As Infantie Disorder."

부제: 좌익공산주의 초보적인 단계.



6. 과연 혁명가들은 반동적인 노동조합들에서 활동해야만 할 건가.



독일에서도 "좌익들"은 자신들에게 관계하는 한에서는,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무조건 부정으로 대답하는 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혁명가들이나 공산주의자들에게 사회배외주의적, 타협적, 반혁명적, 칼 레긴 같은 분류에 황색 노동조합들에서 활동하는 건 필요하지도 않고 또한 용서할 수도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선 "반동적"이고 "반혁명적"인 노동조합들에 대한 아주 "확고하면서도", 아주 어리석게도 내뱉은 칼 호르너에 열변들이나 분노에 대한 외침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좌익들'도 얼마나 굳건하게 그런 전술들에 대한 혁명주의들에 대해 확신하고 있든지, 그들에 전술에는 사실로도 근본적으로도 오류일 뿐이고 공허한 문구들 외에는 무엇도 든 게 없다. 이 사실들을 더 분명하게 하고자 나는 이 작은 책자에서 볼셰비키주의에 대한 역사나 오늘날에 전술에서도 일반적으로도 흔하게 적용해볼 수 있도록 서유럽에 대한 목적으로부터 유효하고 전반적인 구도에 따라서도 우리 자신들에 경험으로부터 먼저 말해보고자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오늘날 러시아에서 지도자들·당·계급·대중들에 관계나 노동조합들에 대한 무산계급이나 무산계급들에 당 독재에 대한 태도는 다음으로 같다. 곧, 독재는 소비에트들로부터 조직된 무산계급들로부터 수행할 수 있고 무산계급들은 볼셰비키 공산당에 지도를 받는다. 1920년 4월에 당 대회 자료에 따르면 볼셰비키 공산당에서 당원들은 총 61,001,000명이다. 당원 수는 1917년에 10월 혁명 이전이나 이후로나 변화는 아주 많았다. 심지어는 1918년이나 1919년조차도 현재보다 훨씬 적었음에도 우리는 당마저 무척이나 커지는 걸 오히려 우려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마땅하게도 총살해야 할 출세주의자들이나 협잡꾼들은 집권당에 대열에도 합류하고자 했고 자신들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건 마찬가지지만 피할 수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에게만 당에 문을 활짝 열었고 마지막 시기 당시에 제국군 사령관이던 유데니치는 가까운 베르스타 내에서 페트로그라드 앞에 있었고 1919년 겨울에 지휘관이던 데니킨은 350베르스타로 떨어진 오룔에 있었다. 곧 소비에트 공화국에서는 풍전등화라는 위험에 빠졌고, 투기꾼들, 출세주의자들, 협잡꾼들이나 대체로는 믿을 수 없던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에 합류하면서부터 출세에 길을 달리리라고는 절대로 기대할 수도 없었고 오히려 교수대와 고문을 더 기대해야 할 때였다. 오히려 당원들은 천 명당 한 명 꼴로 된 대의원들을 기반으로만 열렸다. 일년마다 개최되는 당대회에서는 선출된 19명으로 이뤄진 중앙위원회들에 지도를 받고서, 모스크바에 있던 일상적인 업무들은 바로 "조직국"이나 "정치국"이라는 훨씬 작은 기구들에서 수행했는데 이 기구들에서는 중앙위원회로부터 위원 5명씩으로 이루어졌고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거쳐서 마침내 선출됐다. 따라서 이를 두고서 사람들도 그저 보기에는 "과두제" 자체로만 보일거다. 우리들에 공화국에서는 무슨 기구든지 당 중앙위원회에 지도 없이는 무엇도 정치적인 문제들이나 조직적인 문제들 마저도 절대로 쉽사리 결정하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에 활동에 있어서도 당은 직접적으로도 노동조합들에만 의존했는데 1920년 4월 대회들에 지난 자료들에 따른다면, 이전에 노동조합들은 현재보다도 400만 이상으로 조합원들을 확보해왔고, 형식적으로는 당파적이지도 아니했다. 실제로는, 기본적으로도 전국적인 총 노동조합중앙회나 전국노동조합중앙평의회와 같은 총노동조합국들에 모든 지도기구들까지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이뤄졌었고 당들에 모든 지시들을 충분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우리들에게는 오히려 형식적으로는 공산주의적이지도 아니할 수 있어서 보다 더 침착했고 비교적 넓으면서도 매우 강력한 무산계급 기구들도 갖고 있었다. 이 기구들로부터 당에서는 계급 및 대중들로부터 밀접하게 접촉할 수 있었고 이 기구들로부터 당 지도 아래로부터 계급독재들마저도 수행할 수 있었다. 경제적인 건설에서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건설에서도 노동조합들로부터 유연한 접촉마저 없이는, 노동조합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들마저 없이는, 노동조합들에 헌신적인 노력이라도 없이는, 우리는 당연하게도 2년 반도 안 됐거나 2달 반마저도 나라나 지역들을 직접 한 번이라도 다스려보거나 독재를 해볼 수는 없었을거다. 물론 이런 매우 긴밀한 접촉들에는 실제로 선전이나 선동들로 된 형태들에서도 그리고 지도적인 노동조합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작용들을 이끌 수 있는 전반적인 노동조합 활동가들에 입김들로부터 시의적절하게 매번 토의로 이뤄진 형태들로부터 매우 복잡하고 많은 작업들을 요구했다. 또한 이 접촉들로부터 멘셰비키들에 맞선 단호한 투쟁들도 뜻했는데, 이들 멘셰비키들은 여태껏 거느리고 있던 자신들에 얼마 안되는 추종자들에게는, 지배계급들에 민주주의를 사상적으로도 수호하기를 노동조합들은 그저 "독립적"이라 불리는 무산계급들에 국가권력으로부터 꼭 "독립!"이라고 부르면서 무산계급들에 뿌리 깊던 본보기들 마저도 거부하려 들거나 설교하는 등등에 이르는 온갖 갈래들로부터 반혁명적인 음모들이라는 잔꾀들마저도 역시나 가르치고는 말았다.


우리는 노동조합들로부터 "대중들"에 대한 접촉만으로는 충분하지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혁명과정에서도 실천하는 활동들로부터 당파적이지 아니하고 같은 때에는 노동자·농민·협의회들 같은 제도들도 만들어냈으며, 우리는 대중들에 분위기마저도 잘 살펴보고, 그들에게는 최대한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으며, 그들에 요구들도 충족해줬고, 그들 중 가장 훌륭한 사람들을 국가에 대한 직책들에도 발탁해주거나 맡기는 등등으로부터 갖은 수단들을 다해서도 이 제도들을 지원하고자, 발전하고자 했고, 확대하고자 애썼다. 국가에 대한 제한들을 담당하는 인민위원회에서는 "노동자·농민·감찰원"으로 바꾸는 근래에 법령들 중에서는 하나로 이런 갈래로는 당파적이지 아니한 협의회들로부터 여러가지에 갈래들에 법에 대한 개정 등으로 수행할 수 있는 국가감독위원회들을 선출하는 권한들도 부여했었다.


물론 게다가 모든 당 활동들은 작업에 관계없이도 노동대중들을 포괄하고 있는 소비에트들로부터 수행하고 있다. 소비에트군대회에서는 민주주의적인 제도로부터도 지배계급들에 세계에서도 어느 매우 훌륭한 민주주의에 대한 공화국조차도 이와 비슷한 건 전혀 가져본 적도 없었다. 의식 있는 노동자들은 농촌지역들에서 갖가지 직책들에 끊임없이 파견되어보면서 이들 대회들로부터는 당들도 할 수 있는 한 주의깊게 지켜보고자 애썼지만 농민들에 대한 무산계급들에 지도적인 역할들도 수행해왔고, 도시·무산계급들에 독재로부터, 곧 지배계급들에 착취적인 무리들인 수입도 많기만 하던 부농들에게도 체계적인 투쟁들마저도 수행할 수 있었다.


바로 이와 같은 "위로부터", 곧 독재들에 대한 실질적인 수행으로부터 본 무산계급들에 국권들로는 그저 일반적인 기구들 가운데에는 일부분일뿐이다. 바라지만, 독자들은 이 기구들을 25년 동안이나 이해해왔고, 합법적이지 아니한 조그만 지하조직들로부터 발전해오던 걸 보아온 러시아에 볼셰비키들로부터 "위로부터"인가 아니면 "밑으로부터"인가, 지도자들에 독재들인가 아니면 대중들에 독재들인가 하는 따위에 이 모든 우스운 지껄임들은 우스꽝스럽고 유치하기 짝도 없는 허튼 소리로서, 곧 누군가는 "사람들에게 왼쪽 다리와 오른쪽 팔 중 어느 쪽으로 그에게 더 쓸모 있겠느냐"하고서 의논하기만 할 수 밖에 없던 이유를 이제서야 이해해야만한다.    


우리는 독일 좌익들에 거만하고 매우 박식하고 겁나게 혁명적인 지껄임들로부터, 곧 공산주의자들은 반동적 노동조합들에서도 활동할 수도 없고, 활동해서도 안되고, 그러한 활동들을 거부해도 좋고, 노동조합들로부터 탈퇴해서, 썩 밝게는 그리고 아마도 대부분은 매우 젊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발명한 참신하고 순수한 "노동자동맹"을 만드는 일도 필요하다는 따위에 지껄임들도 마찬가지로, 우스꽝스럽고 유치하고 허튼 소리들로 밖에는 들리지도 않는다.


자본주의는 한편으로 수 세기에 걸쳐서 이뤄져서 내려 온 노동자들 사이에서 낡은 직업들이나, 수공업들에서 구분할 수 있는 유산들을 사회주의에게 필수적으로도 물려준다. 다른 쪽으로는 자본주의는 노동조합들도 물려줬는데 이러한 노동조합들은 직업에 대한 이기적인 성격을 좀 더 벗어나서, 동업조합, 수공업, 직업들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에 대한 전반들을 포괄할 수 있는 보다 폭 넓은 산업연합들로부터 해를 거듭할수록 아주 느리게 발전할 수 있고 또 발전하고, 나아가선 이들에 산업연합들로부터도 사람들 사이에서도 노동에 대한 세분화들을 제거하고, 모든 쪽에서 발전하고 모든 쪽에서 훈련된 사람들, 곧 모든 걸 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교육하고, 계발하고, 훈련할 수 있게하고, 또 하게할거다. 공산주의는 이 목적으로부터 전진하고 있고 또 전진할 수밖에는 없고, 그리고 목적들에도 도달하겠지만, 기나긴 세월로 흐른 뒤에야 알 수 있을 뿐이다. 완전하게 발달할 수 있고 완전하게 확립할 수 있고 안정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전개할 수도 있는 성숙한 공산주의에 대한 미래에 결과들은 현재들로부터 실제로 내다보려고 하는 건 고등수학들을 그저 네살짜리 먹은 어린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 드는 짓일 뿐이다.  


우리는 추상적이거나 그저 남다르게 마련한 인간재료로써가 아니라 자본주의로부터 우리들에게 물려준 인간재료로써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 말할 거도 없이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이러한 과제에 대해서는 다른 방식으로 토론해 볼 만큼 가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발전에 초기단계에서 노동조합들은 노동자들을 분리하거나 절망에 빠진 상태에서도 계급적으로 단결할 수 있었던 건 노동계급들에게는 큰 전진이었다. 무산계급들에 계급적 단결들에 대한 최고형태로는 혁명적 무산계급 당이라는 이 당은 지도자들을 계급 및 대중들에게 하나로는 더 이상으로 나누지 못하도록 전체로도 결합할 줄 알 때까지는 아직은 혁명적 무산계급 당이라는 이름에는 어울리지는 않겠지만 혁명적 무산계급 당에서 막 성장하고 있을 때는 노동조합들에게 알맞은 반동적인 모습들, 알맞게 치우친 관념, 알맞게 그저 머무는 상태로만 피할 수 없도록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나 무산계급들에게는 노동조합들로부터 맺어지지 않고서는, 노동계급에 당이나 노동조합에 상호작용들로부터 관계하지 않고서는 세계에 어느 곳에서도 발전하지는 못했고 발전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무산계급들에 정치권력에 쟁취는 계급으로서도 무산계급들에게 있어서도 거대한 전진이다. 그러므로 당은 전통적인 옛 방식뿐만 아니라 더욱 더 새로운 방식으로도, 노동조합들을 교육하고 지도해가야만 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당에서는 잊지 말아야 노동조합들은 매우 중요한 "공산주의·교육"이자 무산계급 독재 수행들을 위한 예비적인 학교로서도 한 나라에 개인적인 직종들 말고도 전 경제생활에 대한 운영을 노동계급들에게, 다음에는 모든 노동인민들에게 점진적으로도 넘겨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조직들이고, 오랫동안 꾸준하게 그렇게 남으리라는 사실이다.    


곧바로 말한 뜻에서는 노동조합들에 알맞은 "반동성격"에는 무산계급들에 독재 아래에서는 피하지도 못한다. 이걸 이해하지도 못한다는 건 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지를 이행하는 기본조건들마저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뜻한다. 이러한 "반동적인 성격"들을 두려워한다거나, 그 마저도 회피하려들거나 뛰어넘으려고 하는 건 터무니도 없을 뿐이고 어리석은 짓들이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이나 농민들에게는 매우 뒤떨어진 계층들이나 대중들을 끝까지 훈련하고, 교육하고, 계몽해서라도 새로운 삶으로 끌어들이는 무산계급들에게 앞장 선 전위들에 대한 작용들마저도 두려워한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다른 쪽으로는 편협하게 치우친 직업들에 대한 이기주의적인 관념을 가졌거나 동업·조합적이거나 노동조합적인 편견들을 지닌 활동가들은 한 사람도 없을 때까지는 무산게급들에 독재에 대한 성취를 미룬다는 건 더욱 더 중대한 오류이다. 정치가들에 기술이나 스스로에 대한 과제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올바른 이해는 무산계급들에 전위로부터, 충분하게 성취할 수 있는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전위로부터, 권력을 충분하게 장악할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다음날에도 노동계급이나 아직은 무산계급들은 아닌 노동대중들에 충분하고도 넓은 계층들로부터도 충분한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그리고 이후에도 훨씬 더 넓게 노동인민대중들을 교육할 수 있고, 훈련할 수 있고, 이끌어들이면서도 자신들에 지배를 유지하고, 강화하고, 확대할 수 있게 된 조건들이나 계기들로부터 올바르게 헤아리고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어디 계속해보자. 러시아보다 선진적인 국가들에서는 노동조합들에 알맞은 반동성격들은 러시아보다도 훨씬 크게 나타났고 또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멘셰비키들은 바로 한 쪽으로 치우친 동업조합이거나, 직업들에 대한 이기주의와 기회주의 덕분에 노동조합들에서도 지지를 얻었다. 그리고 극히 일부로 노동조합들에서는 아직도 지지를 얻는다. 서유럽에서 멘셰비키들은 노동조합들에서 훨씬 견고한 "발판들을 획득해왔다." 서유럽에서는 노동조합적이고, 편협하게 치우치고, 이기적이고, 심지어는 철면피에다, 탐욕스럽고, 속물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분위기들마저 가진, 제국주의자들에게 매수되고 타락한 "노동귀족" 층위들은 러시아에서 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게 이뤄지고 있다. 또한 논쟁에 여지마저도 없는 사실들이다. 서유럽에서는 사무엘 곰퍼스, 레옹 주오, 아서 핸더슨, 메르하임스, 칼 레긴 일당들 같은 회사·주주들에 맞서는 투쟁들은 완전하게 같은 성격으로 사회적, 정치적 유형에서도 우리 멘셰비키들에 대한 투쟁들보다도 훨씬 더 어렵다. 우리에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투쟁에서는 바로잡을 수도 없는 모든 기회주의와 사회배외주의 지도자들을 철저하게 비판해서 노동조합들로부터 쫓아낼 수 있을 때까지도 가차없어야 하고 또 필수적으로도 이뤄져야만 한다. 


투쟁들은 알맞은 단계에도 도달할 때까지는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는 없고 또한 함부로 정치권력을 잡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 이 "알맞은 단계"에서는 나라마다도 주어진 상황마다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는 각 개별국가들에 사려깊고, 경험있고, 구분할 수 있는 무산계급들에 정치지도자들만이 올바르게 측정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1917년 10월 25일에 무산계급 혁명이 일어난 며칠 후로 1917년 11월에 제헌의회 선거들로부터 이러한 투쟁들에 성공을 가늠할 수 있던 기준들에 일부였다. 이 선거에서는 멘셰비키들은 완전하게 패배했다. 그들은 볼셰비키로부터 얻은 9,000,000표에 대해서 700,000표에다 자카프카지예에 표까지 더하면 1,400,000표를 더 얻었다. <공산주의·인터내셔널>에 제7·8호에 실린 내 논설인 <제헌의회 선거와 무산계급 독재>를 살펴보라. 우리는 노동자 대중들에 이름으로, 그리고 그들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고자, "노동귀족"들에 대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는 노동계급들을 최대한으로 많이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고자 기회주의적이고, 사회배외주의적 지도자들에 대한 투쟁마저도 벌이고 있다. 이러한 매우 쉬우면서도, 또 매우 자명한 진리마저도 망각한다는 건 어리석을 짓일 뿐이다. 그리고 노동조합 상층부에 지도부에서는 '반동적인 성격', '반혁명적인 성격'들을 빌미로, "노동조합에서 탈퇴하자." "노동조합에서 활동하기를 거부한다." "새롭게 고안해놓은 형태로 노동자 조직들을 만들자."고 결론짓는 독일에 "좌익" 공산주의자들에게도 바로 이런 어리석은 짓들마저도 저지르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지배계급들에게 바칠 수 있는 매우 큰 봉사와 마찬가지로 도저히 용납할 수도 없는 어리석은 짓들이다. 왜냐하면 모든 기회주의적, 사회배외주의적, 카우츠키파적 노동조합 지도자들이나 마찬가지로 우리 맨셰비키들은 늘 맨셰비키들에 대해서 말해 온 바 대로 "노동운동에서 지배계급들에 앞잡이."들이거나 미국에 다니엘 드 레온 추종자들로부터 그저 멋만 들어지고 아주 참된 표현을 빌리자면, "자본가 계급들에 노동 관리인", 곧 하수인들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반동적인 노동조합들에서 활동하기를 거부한다는 건 충분하게 발전하지도 못했거나 뒤떨어진 노동자 대중들을 반동적인 지도자들, 지배계급들에 앞잡이들, 노동귀족들, 또는 "지배계급으로 된 노동자들"에게 1858년에 엥겔스마저도 영국노동자들에 대해서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들을 봐도 이런 작용들로부터 아래로 그저 내버려뒀음을 뜻한다. 


공산주의자들은 반동적인 노동조합들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바로 이 우스꽝스런 "이론"들은 이 "좌익"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대중들"에 영향력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경솔하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대중들", 자신들에 주장을 얼마나 악용하고 있는지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준다. 당신들은 "대중"들에게 도움을 주고 "대중"들에 동조와 공감이나 지지를 얻는다면 "지도자"들은 기회주의자들이나 사회배외주의자들이므로 대부분에 경우 그들로부터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지배계급이나 경찰로부터 반드시 걸쳐져 있다. 이로부터 오는 어려움들, 곧 고통, 속임수, 모욕, 박해, 등을 두려워해서도 안 되며, 반드시 대중들도 있는 곳에서 넓게 작업해야만 한다. 아무리 반동적일지라도 무산계급이나 무산계급들에 반대하는 대중들에게만 있는 기구들이나 협회 및 결사체들에서도 체계적으로도, 견딜 줄 알고, 끈덕지고, 꾸준하고, 끈기있게, 선전이나 선동을 하기 위해서는 무슨 희생이라도 치를 수 있어야 하고, 헤아릴 수조차 없는 난관들도 극복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도 노동조합들이나 노동자협동조합들은 때때로는 적어도 협동조합들로부터는 바로 이런 대중들만 있는 조직들일 뿐이다. 스웨덴에 신문이던 <인민일보정책 3월호>에서는 1920년 3월 10일 자에 인용된 자료에 따른다면 영국에 노동조합원 수는 1917년 말에 5,500,000명에서 1918년 말에는 6,600,000명으로 19%로 증가했다. 1919년이 끝날 무렵에는 7,500,000명으로 추산했다. 나는 프랑스와 독일에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로부터 대응하는 자료들마져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 나라에서는 노동조합원들 수로는 크게 늘고 있다는 걸 입증한다는 사실에는 전혀 반박에 대한 여지도 없고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사실들만으로도 이미 수 천 가지에 다른 낌새들도 보인다. 곧 무산계급들에 대중들 사이에서도, 일반적인 "서민들" 사이에서도, 뒤떨어진 사람들에 의식이나 조직들에 대한 노력마저도 증가하고 있다는 건 명백하게 보여준다. 영국, 프랑스, 독일에 수 백만에 노동자들은 전혀 조직도 없는 상태에서도 아주 처음으로 돌아가는 수준이고, 아주 저급하고, 아주 단순하고, 지배계급들에 민주주의적으로 치우친 편견들로부터도 현재까지도 철저하게 물들어 있는 사람들로서도 아주 다가가기 쉬운 조직형태로만, 곧 노동조합들로부터도 맨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혁명적이기는 하나 분별력이나 눈치도 없는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그저 "대중", "대중". 하고 외치면서 개지랄이나 떨고 발광하고 방관한다. 노동조합들마저도 활동하기를 거부한다. 노동조합들에 반동적인 성격을 핑계로 거부한다. 아주 새롭고, 아주 순수하고, 지배계급들에 민주주의적 치우친 편견들에도 물들지도 않은, 그리고 주어진 업무들을 수행할 수 있거나 치우치고 편협한 주어진 업무들로부터 노동조합들에도 죄를 짓지는 않는 "노동자동맹"들을 충분하게 고안해볼 수 도 있었다. 이 동맹들도 매우 넓었고, 이 동맹에 참여하는 데에는 오직 "소비에트 체제와 독재를 인정하기"만 하면 됐다. 


혁명에 대해서는 이러한 "좌익" 혁명가들도 저지른 더 큰 어리석음들이나 해악들을 생각하기는 쉽지도 않고, 더욱 어려우리라. 러시아에 지배계급들이나 연합국에 대해서는 전례도 없던 승리를 거둔 지는 2년 반도 지난 오늘날에 러시아에서도 우리들은 "독재를 인정한다는 건" 노동조합에 가입조건으로만 삼는다면 우리는 매우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거고, 대중들에 대한 우리들에 힘에 대한 작용들마저도 손상하고 있고, 멘셰비키들을 도와주는 꼴만 된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에 참된 과제는 뒤떨어진 성격들에 사람들을 설득하고, 뒤떨어진 성격에 사람들 사이에서 작업할 줄 안다는거지, 억지로 고안해 내서는 유치하거나 미숙한 "좌익" 구호들로 그들을 둘러막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사무엘 곰퍼스, 아서 핸더슨, 레옹 주오, 칼 레긴 등에 여러 일당들에 독일에서는 "원칙에 대한 측면"들에 대한 반대파들. "하나님, 우리를 그러한 '원칙들'로부터 보호하소서."나 미국에서는 세계산업노동자조합에 일부 혁명가들도, 반동적인 노동조합들을 포기하거나 그러한 조합들 속에서도 활동하기를 거부할 걸 설교하는 이들 "좌익" 혁명가들에게 오히려 매우 감사하고 있음은 의심할 바도 없는 일이다. 기회주의 "지도자" 양반들은 공산주의자들을 노동조합들로부터 배제하고 갖은 수단을 다해서도 그들을 내쫓고 노동조합들에서도 활동하기를 할 수 있는 한에서도 꺼리도록 만들고 그들을 모욕하고, 괴롭히고, 박해하고자, 모든 지배계급들에 외교들에 대한 술책들에서도 그리고 지배계급들에 정부들, 성직자, 경찰 및 법원들에 도움에 호소하리라는 건 의문을 품을 수도 없던 일이었다. 우리에게 노동조합들에 들어가서 그들 속에 머물러야만 무슨 일이라도 있더라도 공산주의 활동들을 수행하려는 한에서도, 우리는 이 모두에 맞설 수 있어야만 하고, 무슨 희생들이든지 기꺼이 치를 수 있어야만 하고, 심지어는 부득이 한 경우에도, 갖가지에 채략이나, 교묘한 꾀나, 합법적이지 아니한 방법이나, 진실에 대한 침묵이나 은폐에 대해서도 호소할 수 있어야만 한다, 차르주의 아래에서도 1905년까지는 "합법적 기회"들마저도 전혀 없었다. 그러나 비밀경찰이던 주바토프는 오히려 혁명가들을 체포하고 그들로부터 싸우고자 1905년에 만들어진 극우 반동적 폭력단체인 검은 백병대나, 러시아 국민동맹, 대천사 미하엘 동맹 등에 총칭으로도 이후에도 일반적으로도 폭력적이고 극우적인 성격들에 사람들은 "검은 백병대" 라 불린 성격에서도 드러났지만 노동자회들이나 노동자협회들을 조직했을 때 우리는 우리 당원들을 이들 회의와 협회에도 보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그들에 한 사람이던 바부슈킨 동지를 떠올렸는데,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피체르에서 지도적인 공장노동자로 차르장군들로부터 1906년에 총살됐다. 그들은 대중들에게 쉽게 접촉할 수 있었고 자신들에 선동 활동들을 교묘하게 수행했었고 노동자들을 주바토프에 앞잡이들로부터 그에 힘으로부터 떼어냈다. 물론 아주 깊숙하게 뿌리박은 준법주의적, 입헌주의적, 지배계급적, 민주주의적으로 치우친 편견들에 물들어 있는 서유럽에서는 이런 일들을 더욱 성취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그건 마찬가지로 성취될 수 있고 또한 성취되어야만 한다. 보다 체계적으로도 짜임새 있게 성취할 수 있고 성취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내 의견으로는, 제3인터내셔널에 집행위원회에서는 일반적으로는 반동적인 노동조합들에 참가하기를 거부하는 정책에는 적극적으로 비난하면서 왜 그런 거부들은 정작 슬기롭지도 못하게 해결하고, 무산계급들에 혁명들에 대한 대의에서도 얼마나 극단적인 해악으로 폐해마저 끼칠 수 있는지를 보다 상세하게 설명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특수하게는 이런 잘못된 정책들을 지지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공공연하든 암암리에든,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문제시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네덜란드 공산당에 당원들에 지도노선들을 적극적으로 비난해야만 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대한 차기대회를 더 소집해야만 한다. 제3인터내셔널에서는 이러한 골치아픈 문제들을 회피하거나 감춰두어서도 안 되고, 오히려 적나라하게 제기해야만 한다. 우리는 '독립파' 독일에 독립사회민주당들에게도 온 진실들을 공개해서도, 터놓고 말해왔으며, 또한 '좌익'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온 진실들을 터놓고 말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사무엘 곰퍼스파, 아서 핸더슨파, 레옹 주오파, 칼 레긴파는 실제로는 주바토프파와 다름 없는 자들이다. 주바토프로부터 우리와 구분할 수 있는 건이들은 단지 유럽적 외관이나 품위를 지니고 있고 자신들에 야비한 술책들을 치사하게 수행하는데 있어서 세련되고, 고상하고, 민주주의적으로도, 

다듬어진 방법들을 취했을 뿐이다.   



P.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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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에서 열린 구성원들은 국외로 거주하는 지부들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재외지부 회의는

며칠 전 의사일정을 모두 끝마쳤다. 회의는 순전하게 국외적인 문제들로 이에 대해서 중앙기관지로는 다음 호에서 간단하게 논평해볼 예정이다. 이에 대한 심의 외에도, 중요하고 긴급한 전쟁 문제들에 대한 결의들을 작성했다. 우리는 여러 의견들로 뒤섞여 난무하는 요즘에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이 혼란 상태는 말로는 국제주의를 인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행동에서도 어떻게든 사회배외주의와 타협하고자 하는 행태에서도 단적으로 나타난다. 


이를 벗어나서 활기차게 사업을 수행할 길을 성실하게 찾고 있는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는 이 결의는 도움을 줄 거라는 그나마 기대로부터 결의를 발표한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유럽합중국' 구호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토론은 전적으로 정치적인 측면에서만 편중되었어서, 이후 출판물로부터 경제적 측면에 대한 문제로 토론으로도 이루어질 때까지는 문제에 대한 거론들은 미루기로 결정했다. 



회의들에 대한 결의.



본 회의는 <사회민주주의자> 33호에 발펴된 중앙위원회 선언을 기반으로 해서 우리 당에 선전에도 우선적인 부문들로도 부여해줄 같은 방침들을 다음으로 결정했다.



전쟁에 대한 성격으로. 



현 전쟁들은 그에 대한 성격에 있어서도 제국주의 전쟁이다. 이 전쟁들은 자본주의로 발전할 수 있는 최고 단계에도 도달한 시대적 조건에 대한 결과물들이다. 상품 수출뿐만 아니라 자본 수출들은 최대에 의의를 점하게 되고, 생산에 대한 카르텔화와 경제생활에 대한 국제화에 비중으로 현저하게 높아지고 있으며, 식민지 정책으로부터 전 지구적으로 대부분 완전하게 분할되고 있으며, 세계적인 자본주의에 대한 생산력들은 민족국가로 제한된 국경 범위를 뛰어넘어서도 성장함에 따라서 사회주의 실현들을 위한 객관적인 조건으로 완전하게도 무르익은 단계는 바로 이 최고 단계인, 제국주의 단계이다. 



'조국방위' 구호.



이 전쟁에 대한 본질로는 영국·프랑스·독일 사이에서 진행되는 식민지에 대한 분할이나 경쟁국 약탈들을 위한 싸움들일 뿐이다. 차리즘이나 러시아 지배계급들에 입장에서는 페르시아. 몽골. 아시아 영토에 터키. 콘스탄티노플. 갈리치아. 등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시도들이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전쟁에서 민족적 요소들은 완전하게는 곁딸린 뜻만을 지닐 뿐, 전쟁에 대한 전반적인 성격, 곧, 제국주의적 성격에 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지난 이삼십 년 사이에도 경제사나 외교사 전체를 살펴보면 교전국 양 진영 모두에서는 현재와 같은 전쟁들을 체계적으로 준비해왔음을 알 수 있겠다. 먼저 어느 쪽은 군사 공격을 했으며 또는 어느 쪽으로부터 최초로 선전포고를 했는가 하는 문제들은 사회주의자에 전술 결정에는 어떠한 뜻도 주지는 못한다. 조국방위, 적 침략으로부터 반격, 방어전 따위와 같은 서로에 대한 문구들은 인민들을 기만하는 말들에 불과하다. 


남달리 참된 민족 전쟁이던 1789년이나 1871년에 일어난 전쟁에서는 대중적인 민족운동, 절대주의와 봉건제에 항거하는 투쟁, 민족 억압에 대한 타도, 민족적인 기반 위에서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전제로부터 국가들을 이루는 밑바탕으로 오랜 과정으로도 깔려 있었다. 


시대로부터 만들어낸 민족적인 사상들은 중산계급 대중들이나 무산계급들에 일부에도 깊은 도장들을 새겨왔다. 지배계급 궤변론자들이나 그들에 뒤꽁무니나 뒤좇는 사회주의 배반자들은 현재에도 이 민족적인 사상들로부터 당시와는 상황마저도 완전하게 다른 시대들인 제국주의 시대에서도, 노동자들을 분리하게 하고 노동자들에 주목마저도 그들에 대한 계급적인 목표나 지배계급에 대한 혁명적인 투쟁으로부터도 다른 데로 돌리고자 애쓰고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에게는 조국이란 없다."는 <공산당·선언>에 대한 구절들은 과거에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더 참되다. 지배계급들에 대한 무산계급들에 국제적인 투쟁만큼 무산계급들은 쟁취한 성과물들을 더욱 보존할 수 있고, 억압을 당하고 있는 대중들에게도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길은 충분하게도 열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혁명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에 구호. 



"단 하나에 올바른 무산계급들에 구호로는 현재에 제국주의 내란으로 전화해야한다. 코뮌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1912년에 바젤 결의에서는 제시된 윤곽으로 이 구호로는 고도로 발전한 

지배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모든 조건들을 가리키는 결론이다. 


오늘날 혁명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도 요구하고 있는 내란들은 무산계급들에게는 지배계급들에 맞설 수 있는 무장투쟁들로,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자본계급들에 대한 수탈들을, 러시아에서는 민주공화제, 지주 토지 몰수, 8시간 노동제에 따른 민주주의 혁명들을, 일반적인 낙후된 군주제 국가들에서는 공화제 수립들을 목적으로 둔다. 전쟁에 대한 원인으로부터 대중들에 참화나 고통들은 혁명적인 감정들이나 운동들을 부르지 않을 수도 없겠다. 내란 구호들은 이 같은 감정들이나 운동들마저 일반화할 수 있는 쪽으로 부여할 수 있는 역할들을 해야만 한다. 


노동계급들에 조직들은 매우 심각한 손상마저 입고 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혁명적인 위기들은 무르익고는 있겠다. 전쟁 후로는 모든 국가들에서 지배계급들은 무산계급들에 해방운동들을 수 십 년 뒤로도 돌려놓고자 갖은 각색으로 강화된 노력들을 기울일거다. 혁명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에 임무로는 혁명적 발전으로 급속하게 전개되든 위기로 길게 지속되든 간에 장기적·일상적인 작업들을 방기하지는 말고, 현재까지도 계급투쟁에 대한 방법들을 어느 하나도 버리지는 말자. 대중들에 혁명적인 투쟁에 대한 정신으로부터도 의회투쟁이나 경제투쟁 모두에서도 기회주의들에 맞서도록 지도하는 건, 모든 혁명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에 임무들이기도 하다.


다음 사항들은 현 제국주의 전쟁들을 내란으로 전화할 수 있는 방침들이다.   


1. 전쟁공채들에 대한 찬성 투표를 절대로 거부하고, 지배계급들에 정부에서도 사임한다.


2. 계급휴전이라는 국내에 평화정책들에는 완전하게 단절한다.


3. 정부와 지배계급들은 계엄령을 도입해서 헌법으로 된 자유를 폐지하는 곳에서든 어디서든 

   합법적이지 아니한 조직들을 만든다. 


4. 참호에서는, 그리고 전장에서는 교전국 병사들 사이에 우애들을 두루 지지한다. 


5. 무산계급들로부터 모든 갈래에 혁명적인 대중행동들도 두루 지지한다. 



기회주의와 제2인터내셔널에 파괴.



제2인터내셔널들에 붕괴로는 사회주의적 기회주의들에 와해다.

사회주의적 기회주의는 그에 따르는 노동운동 발전에 '평화적인' 시기에 산물로서도 

성장해왔다. 이 시기들은 노동계급들에게는 의회활동들을 비롯한 모든 합법적인 기회들조차도

같은 중요한 투쟁들에 수단들을 활용하고, 대중적인 경제적·정치적인 조직들이나 넓은 노동·

언론들을 창설하는 법들을 가르쳤다. 한편으로, 이 시기에는 계급투쟁을 부정하고 계급평화를 설교하고, 사회주의 혁명들을 부정하고 비합법적인 조직들로부터 원칙들 자체를 폐기하고 지배계급들에 애국주의를 인정하는 등에 기울어진 분위기들 마저 감돌았다. 노동운동 관료들이나, 세계 시장에서 자신들에 '조국'에 특권적인 지위나, 식민지에 대한 착취로부터 나온 이윤에 대한 일부로 부스러기를 받는 노동귀족들이나 노동계급들에 특정 층으로 사회주의 당 내에서도 중산층들에 동조자들은 이런 분위기들로부터 사회적인 지주들이자, 무산계급들에게는 지배계급적인 작용마저 미치게 하는 길목들이다. 기회주의들에 대한 해로운 작용들은 제2인터내셔널에 공식적인 사회민주당들 대부분에서는 전쟁으로 벌어진 때에 취하는 정책에서 매우 강력하게 나타난다. 전쟁공채에는 찬성 투표를 던지고, 정작 지배계급들에 정부들에는 참여하고, 계급휴전 정책들을 취하고, 적들로부터 합법적으로 폐지된 마당에서도 합법적이지 아니한 조직들을 거부하는 건 모두 인터내셔널에서는 매우 중요한 결정들을 위반하거나 모독했고, 사회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반려이다.



제3인터내셔널. 



전쟁으로 조성한 위기들은 기회주의에 대한 참된 실체로부터 지배계급으로부터 공조해서 무산계급들에 맞서는 지배계급들에 하수인이라는 걸 명확하게 드러냈다. 카우츠키를 필두로 하는 이른바 사회민주당에 '중앙'들은 실질적으로는 완전하게 기회주읠로 넘어간다. 지극하게 유해하고 위선적인 문구들 뒤에 숨기만 해서는, 제국주의와 비슷한 내용들로 그저 베낀 '마르크스주의' 뒤에 숨어서 슬그머니 기회주의로 달아난다. 현재까지에 경험으로는, 이를테면 독일에서는 사회주의 입장들에 대한 옹호들로부터 오직 당 지도부 다수파들에 결정들에 대한 단호한 반대로부터만 할 수 있다는 걸 말해주는 실정이다. 기회주의자들로부터 완전하게 조직적인 단절을 하지 않고서도 참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재건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 그건 해로운 환상들이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는 무산계급들로부터 모든 국제적인 혁명적 대중행동들을 지지하고, 인터내셔널 내에서도 배외주의조차도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최대한으로 모아야된다.



평화주의와 평화구호.



평화주의, 그러니까 평화를 추상적으로만 설교하는 건 노동계급들을 잘 속일 수 있는 수단 중에는 일부들이다.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특히나 그 제국주의 단계에서는 전쟁으로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쪽으로는 제국주의 전쟁도 아닌, 혁명적인 전쟁들은 존재한다. 이를테면 1789년에서 1871년 사이에 벌어진 전쟁들, 민족 억압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나, 분산된 봉건적인 소규모에 국가들로부터 자본주의 민족국가들을 창설하고자 벌인 목적으로 수행된 전쟁들이나, 또는 무산계급들로부터 지배계급들에 맞서서 승리한 쟁취물들을 빼앗기지는 못하게 막고자 수행된 전쟁들도 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런 혁명적인 전쟁에 대한 적극적인 속뜻들을 놓칠 수는 없겠다. 현 시기에는 혁명적인 대중행동들에 대한 요구들은 동반되지는 않고 그저 평화선전만으로 단지 환상들을 퍼뜨리고 다니고 무산계급들을 혼란하게 하거나 기세저하로까지 몰아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런 식에 평화선전으로는 무산계급들로부터 지배계급들은 그저 인간적이라고 하거나 믿게 만들기도 하고, 교전국들에 비밀외교들에도 그저 놀아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익히나 나란한 혁명들 없이도 이른바 민주주의에 대한 보강만으로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고 뚜렷한 오류들이다.                




차르군주제에 패배.



저마다 나라들에서는 혁명적인 선전들에 결과로부터도 저마다 나라들마저도 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기 때문에,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정부들에 대한 투쟁들은 더욱 더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정부군들에 패배는 정부를 약하게 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정부들로부터도 억압된 민족들에 해방들로부터 장려하게 할 수 있고, 지배계급들에 대한 내란들도 쓸모있게 한다. 이 명제들은 러시아에서도 매우 참이다. 러시아에서 승리는 반동에 대한 강화로부터도 전 세계에서나 러시아 내에서나 전부를 가져올거고, 이미 점령된 지역들에 살고 있는 인민들에 완전한 예속들을 대동할거다.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러시아는 패배하는 쪽으로 모든 조건에서 위해들은 

매우 작다고 생각한다. 



다른 당들로부터 주어진 모임들에 대한 태도.



넘치는 배외주의들을 가져온 이 전쟁들은 나로드니키에 민주주의나 지식인들이나 <미슬>을 중심으로 모인 혼미한 사회주의혁명가당, 플레하노프에 지지를 받는 <나샤 자리야> 같은 청산파에 다수파 등들은 모두 배외주의에 사로잡힌 적들인 포로임을 드러내준다. 위장한 채로 숨기고 은밀하게 배외주의를 지지하고 있는 라린이나 마르토프를 비롯해서 애국주의를 원칙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악셀로드에 이르기까지도 실질적으로는 조직위원회들도 배외주의 쪽으로 가담했다. 독일에 친화적인 배외주의로 우세를 점한 분트파도 마찬가지로 배외주의로 넘어갔다. 1914년 7월 3일 자로 브뤼셀 시가지에서도 붕괴된 한편으로, <나셰슬로보> 주위로 결집해 있던 사람들은 국제주의에 대한 그저 순수하고 관념적인 가담이나, 무슨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나샤자리야> 및 조직위원회들로부터 대동단결로 뭉치고자 하는 열망 사이에서도 그저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같은 동요들은 치헤이제라는 사회민주주의 모임에서도 일고 있다. 치헤이제 모임들은 한편으로는 플레하노프 쪽이면서 배외주의자인 만코프를 빼어서 제외하면서도 다른 쪽으로는 어떻게든, 플레하노프, <나샤자리야>, 악셀로드, 분트파 등에 배외주의를 감싸주고자 갖은 수를 다 쓰고 있다. 이같은 러시아에서 사회민주노동당에 임무는 1912년에서 1914년에 주로 <프라우다>로부터달성된 무산계급들에 단결들로부터 더욱 다질 수 있고 사회배외주의자들로부터는 더욱 단호하게 조직적으로 단절한 기반 위에서만 오직 사회민주주의 노동계급들에 조직들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 그리고 일시적인 협정으로는 오직 조직위원회, <나샤자리야>, 분트파와는 단호한 조직적인 결별마저 지지하는 사회민주주의자만 할 수 있을 뿐이다.



P.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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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인민 대중들은 더더욱 가난해지고 있는 러시아에서는, 과연 자본주의는 싹을 틔우고

완전한 발전에도 도달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는 발전하기 위해선 우선 광범위한 국내 시장은 있어야 하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농민층의 붕괴는 이러한 시장을 약화하게 하고 모조리 문을 닫게하고, 위협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질서에서 구성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자본주의는 직접 생산자들에 자연경제를 상품경제로 의도적으로 전환하게 하고 스스로 시장을 창출하고 있는 건 사실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궁핍한 러시아 농민들에 자연경제 가운데서 고작 남아 있는 보잘 거도 없는 자투리들은 이 나라에선 서구처럼 강력한 자본주의 생산 발전에 토대를 이룰 거라고 생각할 수는 있을까. 대중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이 나라 자본주의는 무력하고, 토대는 형성되어 있지도 못하고, 나라 전체에 생산을 아우르고 사회적 경제에 근간을 이루는 데 있어서도 무능력하다는 건 확실해 보이지는 않는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반대하는 국내에 여러 문헌에서도 끊임없이 이런 질문들은 충분히 제기되고 있다. 시장에 대한 부재는, 러시아에서는 마르크스 이론을 접목 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로 제기하는 논점 가운데 하나이다. 이제 곧 논의하게 될 <시장문제>라는 문건에 목적도 바로 마르크스 이론을 접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먼저 반박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시장문제>를 쓴 마르크스에 주된 전제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보편적이고 배타적인 지배"라는 가정이다. 그러한 전제로부터 마르크스는 <자본>에 2권, 3편에 있는 21장에서 사회적 총자본에 재생산이나 유통에 내용들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사회적 생산은 어떻게 노동자와 자본가에 개인적 욕구를 충족하게해주는 생산에 일부를 대체하고, 그 생산에 일부들은 어떻게 생산자본에 요소들을 형성하는지에 대한 검토에 착수한다. 그러므로 1권에서는 개별 자본에 생산이나 재생산에 대한 검토들은 자본에 구성 요소들이나 그 가치에 따른 생산물에 따른 분석으로 <자본> 1권에서는 생산물에 가치들은 C: 불변자본(ConstantCapital)+ V: 가변자본(VariableCapital)+ S: 잉여가치(SurplusValue)로 구성되고 있음을 드러내주고 있으며 제한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생산물들은 우선 그 물질적 구성 요소들로 분할되어야만 하는데, 자본에 성분들로 구성되는 생산물들에 일부들은 개인적 소비를 위해서는 사용될 순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마르크스는 사회적 총생산들을 따라서 총생산물들은 


1. 오로지 생산적 소비를 위해서만 기능할 수 있는 상품들인 생산수단들에 생산, 즉 

   생산적 자본에 요소. 


2. 노동계급이나 자본가계급에 개인적 소비들을 위해 기능하는 상품인 소비수단들에 생산. 


이렇게 두 부문으로 나뉜다. 이를테면 아라비아 숫자들은 수백만 루블이나 같은 가치에 대한 단위들로 설명한다. 다음에 오는 로마 숫자들은 위에서 언급한 사회적 생산에 부문들을 설명해준다. 잉여가치율은 100퍼센트라고 상정했다. 이 연구로 기초로 삼는 공식은 다음으로 같다.


. 4,000C+1,000V+1,000S=6,000.

. 2,000C+500V+500S=3,000.

자본=7,250. 생산물=9.000.



먼저 단순재생산, 즉 생산으로 확대되지는 않고 예전에 규모로 영구하게 유지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는 자본가들은 잉여가치에 전부를 생산적이지도 않게 소비하고 있고, 축적도 아닌 그저 개인적인 요구들을 위해 사용한다는 걸 뜻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우선 Ⅱ500V와 Ⅱ500S는 동일하다는Ⅱ.에 제기한 부문 내에서만 자본가와 노동자로부터 소비되어야 한다는 건 분명해진다. 

그 생산품들은 개인적 욕구에 충족을 위한 소비수단에 형태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선, 동일한.부문 내에서만 자연적 형태에 4,000C는 자본가들에 의해서도 소비된다. 생산규모들은 불변하는 상황에서는 앞으로도 생산수단에 생산을 위해서는 똑같은 자본으로 유지하고자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에 대한 이 부문을 대체하는데는 아무런 어려움들은 없다. 석탄, 철, 기계 등이나 같이 자연적 형태로만 존재하는 생산물들에 해당 부문들은 생산수단들을 생산하는 자본가들 사이에서는 분명 교환될테고, 종전에 같이 불변자본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Ⅰ. (V+S)와 Ⅱ. C는 여전하게 남는다.      


여기서 Ⅰ.1,000V+에서Ⅰ.1,000S는 생산수단에 형태로만 존재하는 생산물이고, 

Ⅱ. 2,000C들은 소비수단에 형태로만 존재하는 생산물들이다. Ⅰ. 부문에서는 단순재생산, 

즉 전체에 대한 잉여가치들에 소비에서 노동자들이나 자본가들은 2,000에 대한 가치(1,000V+1,000S)를 소비수단으로 소비해야만 한다. 예전에 규모대로 생산을 계속할 수 있게하려면, Ⅱ. 부문에서 자본가들은 자신들에 불변자본인 Ⅱ.2,000C를 대체하기 위해서는 2,000 정도까지에 생산수단들을 획득해야만 한다. 여기서 볼 때는 Ⅰ.V+Ⅰ.S=Ⅱ.C로 교환되어야 한다는 건 명확해진다. 그렇지도 않다면, 예전에 규모대로는 생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도 단순재생산에 대한 조건들은Ⅰ.부문에서 가변자본이나 영이가치에 대한 총합들은 Ⅱ.부문에서도 불변자본으로는 똑같아야만 한다. 그러니까 Ⅰ.(V+S)=Ⅱ.(C). 달리 말해서, 두 부문에서도 일년 동안이나 생산된 모든 새로운 가치들에 대한 총합들은 소비수단에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생산물들에 총가치와는 동일해야 한다는 법칙을 이끌어낼 수 있다.


Ⅰ. (V+S) + Ⅱ. (V+S) = Ⅱ. (C+V+S).


물론 실제로는 단순재생산이란 존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전체 사회에서 생산들은 매년 예전에 규모에만 머물를 수는 없고, 축적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생산들은 어떻게 규모 면에서는 확대되거나 축적은 이뤄지는지를 과연 검토해보도록 해보자. 축적은 이뤄지는 상황에서는 잉여가치에 일부로만 자본가들에 개인적인 욕구를 위해서만 소비되고, 나머지 부분들은 생산적으로만 소비된다. 즉 생산에 확대를 위한 생산적 자본에 일부로만 전환된다. 따라서 축적은 이뤄지는 한에서는 Ⅰ. (V+S)와 Ⅱ. C는 동일할 수도 없다. 분명 Ⅰ. 부문에서 잉여가치에 일부는 소비수단으로 교환되지도 않았고 생산에 확대를 위해서 적어도 사용되기 위해선Ⅰ. (V+S)는 좀 전에 Ⅱ. C 보다도 커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공식도 얻게 된다.         



A. 단순재생산 공식. 


Ⅰ. 4,000C+1,000V+1,000S=6,000.

Ⅱ. 2,000C+500V+500S=3,000.

Ⅰ. (V+S)=Ⅱ. 2,000C.


B. 초기 축적 공식.


Ⅰ. 4,000C+1,000V+1,000S=6,000.

Ⅱ. 1,500C+750V+750S=3,000

Ⅰ. (V+S) > Ⅱ. 1,500C.


이제 축적이라도 이뤄진다면 사회적 생산들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첫해에는.


Ⅰ. 4,000C+1,000V+1,000S=6,000.

Ⅱ. 1,500C+750V+750S=3,000.

자본=7,250.  생산물=9,000.


여기서Ⅰ.(1,000V+500S)는 단순재생산에서와 마찬가지이므로 Ⅱ. 1,500C와 교환된다.

Ⅰ.500S는 축적, 그러니까 생산을 확대하기 위해서 투입된 자본으로 전환된다. 

우리는 방금 분활된 부분들을 불변자본이나 가변자본으로 나눌 수 있다.



Ⅰ. 500S=400C+100V 이다.



추가로 400C라는 불변자본들에서 자연적 형태는 생산수단이기 때문에 생산물 Ⅰ. 에서도 포함되지만, 추가로는 100V라는 가변자본들은 두 부문에서 자본가들로부터 확보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그들은 축적을 할 수밖에는 없다. 그들은 Ⅱ. 100S라는 잉여가치에 일부로 Ⅰ. 100V라는 생산수단으로 교환해서 이 생산수단을 추가된 불변자본으로 전환한다. 

그러므로 그들에 불변자본은 1,500C에서 1,600C로 분명하게도 증가한다.



그걸 처리하기 위해서는 추가 노동력이던 -50V- 마저 필요해지는데, 

이거마저도 역시 두 부문에서 자본가들에 잉여가치들로부터 가져온거다.

최초로 자본에다는 Ⅰ. 부문들이나 Ⅱ. 부문들로부터 가져온 추가 자본까지도 보탬으로써

우리는 다음에 생산물 분배 공식을 얻을 수 있다. 



Ⅰ. 4,400C+1,100V+500S=6,000.

Ⅱ. 1,600C+800V+600S=3,000.



괄호 안에서 묶여있는 잉여가치들은 자본가들에 소비 자금, 그러니까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건 아니고 자본가들에 개인적인 욕구를 위해서 들어가는 잉여가치들에 일부로 나타낸다. 

그렇다면 생산들은 예전에 규모대로 진행하고자 한다면 연말에 이르러서는



Ⅰ. 4,400C+1,100V+1,100S=6,600.

Ⅱ. 1,600C+800V+800S=3,200.

자본=7,900.  생산물=9,800.

이다. 



Ⅰ. 1,100V+550S들은 Ⅱ. 1,650와도 교환된다. 추가된 50C는 Ⅱ. 800S로부터도 얻어지고,

C가 50만큼 증가함으로써 V도 25만큼도 증가한다. 

더 나아가서 Ⅰ. 550S는 예전처럼 그대로 축적된다. 



Ⅰ. 550S=400C+110V.

Ⅱ. 165S=110C+55V.

Ⅰ.110V=Ⅱ. 110C.



그리고 Ⅰ. 4,400C에다 440, Ⅰ. 1,100V에다 100V, Ⅱ. 1,600C에다 50C와 100C, Ⅱ. 800V에다 25V와 55V, 또한 초기 자본에다가 추가 자본까지도 더해본다면 따라서 우리들은



Ⅰ. 4,840C+1,210V+550S=6,600.

Ⅱ. 1,760C+880V+560S=3,200.



을 얻게된다. 

그리고 생산들을 더 진전해보면 우리들은



Ⅰ. 4,840C+1,210V+1,210S=7,260.

Ⅱ. 1,760C+880V+880S=3,520.

자본=8,690.  생산물=10,780.



으로 얻는다. 

본질적으로는 사회적 총자본에 재생산에 대한 마르크스에 연구 결과들은 다음에도 같다. 이런 연구들은 반드시 의문을 품어봐야만 한다. 저자에 글에서도 아주 간결한 형태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검토에 대한 상대로도 질문으로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마저도 없기 때문에, 

이를테면 부속으로 대체하던 화페에 대한 유통이나 서서히 닳아 없어지는 고정적인 자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마저도 마르크스는 생략했기 때문이다.



P.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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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농업 국가입니다. 유럽 국가들 가운데 가장 후진적인 나라에 속합니다. 사회주의는 그곳에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 농민에 성격이나 귀족에 수중에 광대한 토지는 집적되어 있는 현실은 1905년에 경험으로 판단하기에는 러시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 강력한 추동력을 줄 수 있으며 우리 혁명을 세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서막으로, 향하게 하는 일보 전진으로 만들 순 있습니다.


우리 당은 1905년이나 1917년 봄에 경험에서도 완전하게 확인된 이러한 사상을 위한 투쟁 속에서, 다른 모든 당들에 대한 타협 없는 투쟁 속에 만들어졌고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사상을 위해 계속 투쟁해나갈 겁니다.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는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는 승리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농민 대중은 피할 수 없이도 절박한 농업 개혁을 귀족들이 지닌 모든 대소유지를 몰수하는 데까지는 밀고 갈 순 있습니다. 이건 늘 우리에 구호였고, 현재까지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우리 당에 중앙위원회와 당에 신문인 <프라우다>로부터 다시 제기되고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구호를 위해서 투쟁하고 있으며, 농업 노동자들이나 그들에게 긴밀하게도 동맹한 가장 가난한 농민들을 한편으로 하고, 1907년에서 1914년에, 스톨리핀에 농업 '개혁'으로 입지는 강화된 부농들을 또 한편으로 해서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는 없던 무자비한 계급투쟁에 눈을 감지는 않을 겁니다. 

1906년에 1차 두마와 1907년 2차 두마에선 104명에 농민 대표들은, 모든 토지에 국유화와 완전한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해서 선출된 지방위원회는 그걸 분배하기를 요구하던 혁명적인 농업법안을 제출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그런 혁명들은 그 자체로는 사회주의는 될 순 없을 겁니다. 하지만 세계 노동운동에는 커다란 추진력을 제공해줄 겁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에 입지를 넓힐 수 있고 ㄱ그들은 농업 노동자나 극빈 농민들에게까지도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엄청나게 강화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영향력에 대한 힘 위로부터도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같은 혁명적인 조직을 발전할 수 있게 합니다. 이 조직들은 군대, 경찰, 관료제를 사용하는 낡은 억압 기구인 부르주아 국가들을 대체할 수 있고, 견딜 수 없이 부담스러운 제국주의 전쟁이나 그 결과로 인한 압박 아래서도 상품에 생산이나 분배들을 통제하기 위한 일련에 혁명적인 방책들을 수행해나갈 겁니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혼자만에 힘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을 승리에 대한 결말로 이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가장 유리한 조건을 창출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출발하게 할 수 있는 강력한 추동력을 러시아 혁명에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정세를 북돋아서 고양을 촉진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으뜸가는, 가장 믿을 수 있고, 가장 확실한 협력자인 유럽이나 아메리카에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결정적인 전투에도 참전할 수 있을 겁니다. 


P. 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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