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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꿈
앨런 라이트맨 지음, 권루시안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4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람들은 순간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 p.48
극강의 현실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이지만 종종 사람마다 흐르는 시간이 다르다는 상상을 한다. 특히, 아버지께서 병상에 누워 있는 시간에 유독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해 업무를 하는 나의 시간과 종일 인공호흡기와 수면제에 의지해 하루를 보내는 아버지의 시간은 과연 똑같이 흐르고 있을까. 절대적으로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그냥 스치는 잡념에 불과했지만 돌아가신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그 생각에 잠긴다.
이 책은 앨런 라이트먼의 장편소설이다. 사실 소설이라는 생각보다는 제목에 꽂혀 선택한 책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인슈타인의 꿈은 무엇일까. 소설이라는 점에서 어차피 가상의 이야기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겠지만 그래도 상상으로나마 할 수 있을 법한 소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깝지만 먼 아인슈타인의 꿈을 찾아 페이지를 넘겼다. 기대감보다는 호기심이 더욱 컸다.
소설에서는 젊은 청년이 등장한다. 축 늘어진 청년은 시간을 연구하는 학자다. 독일 학회지에 발표할 이론을 가지고 새벽 일찍 사무실로 나간다. 그가 보고 있는 풍경들이 묘사되고, 이후부터 그가 꾸는 꿈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시간별로 시간은 멈추기도, 또는 흐르기도 한다. 또한, 역행하기도 하고, 미래로 흘러가기도 한다. 그렇게 총 서른 가지의 꿈에 대한 이야기, 중간에는 인터루트라는 이름으로 아인슈타인과 베소가 나누는 내용이 나온다.
개인적으로 '1905년 6월 9일'의 꿈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인간을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진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은 무한대로 흐르니 모든 일을 뒤로 미루는 나중족이며, 두 번째는 삶에 끝이 없기 때문에 뭐든지 바로 할 수 있다는 지금족이다. 두 종족에게는 차이점이 너무나 많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친척이 많아진다는 것이며, 이 대가로 죽음을 생각한다는 마무리이다.
시간의 무한함으로 나중족과 지금족을 말하지만 유한하게 흐르는 현재 시점도 크게 다르지 않아 공감이 되었던 파트이다. 유한하기 때문에 바로 해야만 하는 지금족과 신중하게 처리해야만 하는 나중족. 지극히 사적인 성향으로는 후자에 가까운 편에 속해서 이를 상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또한, 시간의 유한과 무한을 떠나 죽음이라는 것은 어쩌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조금 어려운 작품이었다. 주인공이 명확하지 않고, 시간도 흐르다가 멈추고, 스토리가 뚝뚝 끊어지는 등 보통의 소설과는 다른 느낌을 받아 읽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거기에 시간을 철학적으로 그리는 문장들이 많아 어떤 면에서는 철학 도서처럼 읽혀지기도 했다. 흥미로웠지만 물리학적으로 시간을 말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도전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읽고 나니 평범하게 흐르는 일상에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