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어렵지 않았고 에두르지 않아 쉽게 닿았다.이런 말씨도 퍽 괜찮지만 사회문제엔 통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작가가 시대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엔 동의하고 싶지 않다.그런 잣대로 김영랑을 비판하는 글을 읽으면 화가 났다.나는 작가들이 시대의식을 저버리지 않는 한, 모든 글에 그런 정의를 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그럴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과연 현실을 외면한다손 그것이 현실을 모른다는 의미일까. 도피적이고 회피성향이 강하고 등등의 말투를 몹시 경멸한다. 정치적 무관심을 지적하는 이들의 손가락을 꺾고 싶다. 노력을 강요하고 의식개혁을 종용하는 사회가 밉다. 그들은 모두 강자이거나 기득권이거나 말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그냥 살아간다. 그게 무엇인지 관심두지 않고, 관심둘 수 없어서, 그냥 산다.나는 늘 약자인 것만 같고 이런 약자를 보호해야하는 강자들이 나를 구경하는 게 싫고 도움이랍시고 배려랍시고 원치 않는 오지랖을 부리며 우월감을 느끼고 뿌듯하고 흐뭇해하는 게 억울하다. 시인이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쓰기 위해 노력했고,그가 말하는 것이 꼭 곧이곧대로 믿고 행해지는 것이 아님에도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신화로 만들고 맹신하고 숭배했기에가끔 공적인 자리에서 말하는 사람들의 피곤을 간접경험했다.가끔은 그냥 모든 게 살아있어서 안타까웠다.
물욕을 앞세워 데미안을 사고 또 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데미안이 브랜드라면 나는 충성도 높은 고객이 되어버렸을터다.작가의 다른 글보다 나는 꼭 이 데미안이 좋았다.소년만화 같은 느낌이 드는 데미안을 읽으면 언젠가 충격받았던 일본소설 <일식>에 안드로규노스가 떠올랐다. 뭔가 아프락사스가 아낙수나문을 떠오르게 했기에 그로테스크한 무엇, 그런 두려움을 소설 전반에 걸쳐 흥미진진하게 느꼈다. 공포영화를 소름끼치게 싫어하면서도 호기심이 이는 이런 류의 양가감정이 데미안의 전체 분위기를 형성한다고 믿었다. 데미안을 읽으면 마음이 울컥거린다. 성장소설이란 장르를 버리고 일반소설로 읽으면 더욱 좋다. 지극히 사견이다.
성장소설을 읽으면 눈물이 잦다. 굳이 참기에도 우습고 하염없이 울자니 청승맞지만 한참 울고나면 몸이던 마음이던 자란 기분이 든다. 그래서 가끔 좋아서 읽는다.<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와 <박사가 사랑한 수식>, <운수좋은 날> 산발적으로 떠오르는 비슷한 책들, 죽음을 배우기 위해 이런 수 많은 책을 읽어왔던 시간을 생각한다. 그럼에도 익숙하지도 낯설지도 않은 죽음이란,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한 마음이, 어른이 무엇인지 모르는 내가 미숙아인 상태로 영영 늙어가는 것일까.<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나는 눈물을 참기 어려웠고 참기 힘든 감정은 그냥 두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