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독서의 힘 - 전략이 있는 부모를 위한 독서 인문학
심영면 지음 / 지학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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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은 눈과 귀로 들어와서 혀와 펜으로 나간다. 듣고 읽지 못하는데, 말하고 쓰는 능력이 생길 수 없다. 결국 많이 읽고 많이 들어야, 잘 말하고 잘 쓸 수 있다. 어떤 기능은 '인풋'이고 어떤 기능은 '아웃풋'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위치에 오를 수록 '인풋'기능만큼이나 '아웃풋' 기능이 필수적이다. 두 기능 모두 물론 중요한 기능이지만 어떤 이들은 '인풋' 기능에만 특화되고, 어떤 이들은 이 두 기능에 탁월하다. 이런 능력 차이는 분명 '역할'에도 차이를 만들어낸다. 고로 '사회'는 '아웃풋' 기능을 가진 자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한다.

다만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이 모두 연결 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상호 보완적인 위치에 있으나 명백히 다른 영역이다. 이것을 깨닫는데 10년 간의 해외 생활이 한 몫 했다. 유학 시절에 들었던 3.3.3 법칙이 있다. 3개월이면 듣기의 '감'이 생기고, 3년이면 대략 '말'을 할 수 있고, 30년이 돼야 '쓰기'의 감이 생긴다. 실제 그렇다. 아무리 많이 들어도 말이 트인지 않는 고민은 나를 괴롭게 했다. 물론 아무리 많이 읽어도 쓰기가 쉽지 않은 일도 마찬가지다. 그 많은 고민과 시행착오 끝에 알게 됐다. 말하기 위해서 많이 듣는 것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많이 듣는 것은 '기본'이고 다시, 많이 써야 한다.

이것을 어린 아이에게 적용해도 비슷하다. 아이의 성장도 생후 3살, 만 3살, 만 서른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언어는 저절로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즉 많이 들었다고 말을 잘하고 잘 읽고, 잘 말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보통의 부모는 시간이 지나며 점차 아이의 어휘력이 늘어남을 확인한다. 일상의 언어를 이해하고 간단한 소통에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 단,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어느 순간부터 교육은 '듣기'보다는 '읽기'를 중요하게 여긴다. 결국 초등 고학년이 되면 아이는 소리로 듣는 학습에서 벗어나, 문자로 이해하는 학습으로 넘어간다. 실제로 고학년부터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은 음성으로 전달하기 힘들어진다. 점차 다양해지고 방대해지는 정보 때문에 교육은 그것을 습득하기 위해 '문자'를 사용한다. 결국 '문자'를 읽는 능력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문자를 습득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있어야 할까. 문자를 많이 접해야 한다. 별 수 없다.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한국어를 잘하고,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영어를 잘하는 것처럼 결국 '노출'이 답이다. 고로 아이의 언어능력을 향상 시키기 위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아이와 많은 대화를 할 것.

둘째, 아이에게 많은 책을 읽어 줄 것.

결국 이 둘이다. 아무리 고상한 언어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대체로 2000~3000단어의 어휘만을 사용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나 '관료제'에 대한 이야기를 할 일이 적고, '메소포타미아'나 '미토콘드리아'라는 말을 사용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학교에서 이런 어휘를 상용한 문자를 읽게 하고 그것을 확인한다.

결국 어휘력은 몹시 중요하다. 수업 일정에 맞춰 수업하는 '교사'나 집에서 일상 생활을 하는 '부모'에게 몇 번의 그 어휘를 접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아이가 그것의 이미를 인지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난 멈춰진 정보가 필요하다. 그것을 가장 저렴하고 쉽게 이용하는 방법은 '종이 문서'가 유일하다.

그것을 혼자서 읽고 이해하는 아이들은 단순 정보를 더 자주 접할 수 있게 된다. 자주 접하면 쉽게 익힐 수 있다.

아이의 지능 발달과 상관없이 아이의 학습능력은 고로 '습관'에서 비롯된다. '습관'은 굳게 마음 먹거나, 단순히 '의지력'으로 하루 아침에 얻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상이 중첩된 결과물이다. 수 십 명의 아이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공교육'에서 모든 아이의 능력을 확인하고 교육 할 수는 없다. 결국 공교육은 '학습'보다는 '평가'하는데 집중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아이가 학교를 끝나고 어떤 생활 습관을 쌓고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인간은 처음부터 문자 보고 이해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처음에는 '청각정보'를 가지고 정보를 받아드린다. 그러나 7~8살부터 그 정보를 습득하는 창구의 변화가 생긴다. 바로 '글자'이다. 점차 '글'을 통해 정보를 습득하는 능력이 올라가는데 소리로 정보를 받아 들이는 양과 문자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양이 정확하게 '크로스'되는 지점은 만 12살이다.

어느 순간 아이는 '영상'이나 '강의'가 아니면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지에 도달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사회에 '사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아이들 대부분이 이 황금기를 놓쳐 주요 학습 나이로 접어 들었기 때문이다.

'학교 성적은 과연 중요한가. 우리는 그것 때문에 책을 읽는가.'

이 질문에 대답은 아니다. 한때, '부자가 되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온라인에서 떠돌았다. '읽기'가 수단인 사람들에게 '읽기'를 '생활'과 '습관'이 되라고 할 수 있을까. 수단 즉, 도구는 단순히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될 뿐이다. 이는 육아와 비슷하다. 육아는 아이를 '고학력'으로 만드는 목적 혹은 수단이 아니다. 육아는 그저 아이와 살아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경험과 추억을 쌓고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이다. 고로 책은 '수단'이나 '목적'이 아니다. 그저 '기호'이고 '생활'이어야 한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갑자기 아이에게 뛰어난 성적을 기대하기에 대부분의 성인은 '도서'를 멀리한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성인의 절반 이상이 1년에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에게는 책을 들여다 보고, 문제집을 풀어 고득점을 받길 원한다. 이탈리아 신경심리학자 리촐라티 교수는 원숭이의 다양한 동작을 관찰하면서 '거울뉴런'을 발견했다. 원숭이가 다른 우너숭이의 행동을 보기만 해도 자신이 움직일 때와 마찬가지로 반응하는 뉴런이 있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아이의 뇌에 어떤 행동을 심어주고 있는가. 결국 아이가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처럼, 아이의 습관과 성적, 가치관에 부모가 완전히 책임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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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9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송상기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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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하다. 이런 류를 '고딕 소설'이라고 한다는데, '고딕 소설'은 19세기에 영국에서 유행한 공포와 로맨스가 결합된 분위기의 소설이란다. 그러하다. 소설은 기묘했고 묘했다. 우리 영화 '장화홍련'에서 느꺼지는 적막하고 오묘한 분위기의 소설이다. 더군다나 반전까지 덧붙인다면 더욱 그렇다.

소설의 화자는 주인공을 '너'라고 부른다. 마치 '독자'에게 이야기 하듯 담담한 목소리로 '너'의 이야기를 읊은다. 화자는 젊은 역사학자 필레페 몬테로를 '너'라고 칭한다. 필레페는 구인광고를 보고 '콘수엘로' 부인의 글을 정리하기로 한다. 콘수엘로는 그가 집에 머물면서 작업을 하길 바라고 결국 필레페는 그렇게 하기로 한다. 집안은 신비롭고 음산한 분위기로 가득차 있으며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둠으로 가득차 있다. 이 어둠에서 '필레페'는 초록색 눈의 아름다운 소녀를 본다. '아우라'다. 아우라는 콘수엘로의 조카다. 그 젊음이 매혹적이다.

마른 양파 껍질같은 피부를 가진 노파, '콘수엘로'와 너무나 대조적인 '아우라'는 완전히 극적으로 대조적이다. 이런 대조 속에서 주인공 '필레페'는 '노파'에 대한 혐오와 '아우라'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교차하며 느낀다. 음산한 분위기의 이 고딕 미스터리 소설은 매우 짧지만 강렬하다.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독특하게도 이 소설에서 2인칭 서술 방식을 사용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데, 이런 서술방식의 소설은 처음 읽어 본 듯 하다. 이 기법은 독자인 내가 소설의 신비로운 경험을 직접하도록 한다. 이야기 속 행동과 결정의 주체가 마치 자신이 된 것 같은 착각 속에서 그 몰입도가 월등하게 높아졌다. 전지적 시점으로 쓰인 다른 소설처럼 독자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능동적 참여를 하는 참여자로 만들어 낸다. 다시 생각해보니,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듯 하다.

이 소설은 현실과 환상, 꿈과 실제가 모호한 경계로 이어져 있다. 그 묘한 분위기 속에서 '필레페'는 아우라와 그녀의 이모인 '콘수엘로' 사이에 벌어지는 신비한 사건에 휘날린다. 콘수엘로 남편의 기록을 정리하는 단순한 서사로 시작되지만 초자연적 사건, 아우라와의 관계, 심오하고 어두운 사건들과 비밀이 짧은 순간에 동시적으로 일어나며 다양한 내면적 갈등이 일어난다. 소설을 다 읽고도 남은 여운을 잊지 못해 꽤 한 동안 그 이야기를 곱씹게 된다.

이 소설은 '젊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종종 젊은 캐릭터를 통해 시대의 변화와 정체성에 대한 고뇌를 그리는 작가다. 대체로 개인과 사회 간의 갈등을 주제로 하는데, 이 소설인 '아우라'에서도 콘수엘로 부인의 남편 글을 정리한다. 이 글은 '회고록'으로 꽤 역사적인 사건을 개인이 관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글이 쓰여지던 1960년대는 '카를로스 푸엔테스'가 있던 '멕시코'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사회적 혹은 문화적인 변화를 겪던 시기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푸엔테스는 이런 '젊은이'들의 '변화'와 '혁신'에 대한 이미지를 종종 작품에서 사용했다.

사실 '멕시코 문학'은 처음 읽었다. 소설의 군데군데 묻어 있는 '멕시코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있고 신기하다. 라틴 아메리카하면 우리가 배우는 주된 역사와 꽤 떨어진 곳이 아닌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로 하여금 만난 첫 멕시코 문학에 대한 꽤 깊은 인상을 받았다. 소설이 짧아 쉽게 시작했으나 여운이 길어 짧은 소설을 읽었다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민음사'에서 출판한 '세계문학전집'이라는 '세트'가 없었더라면 과연 나는 이 책을 읽어 볼 수나 있었을까. 반전이 있는 소설이라 줄거리를 모두 기록 할 수는 없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될 명작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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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 - 개정판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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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는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에 오른 소설이다. 이미 두 번을 읽은 책이며 주변에 선물도 했던 책이다.

이번이 특별한 이유는 '윌라 오디오북'에서 성우의 목소리로 이 책을 다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윌라'는 '대체 불가능한 오디오 플랫폼'이다. 고로 나는 2020년 부터 햇수로 5년 간 윌라를 이용한 도서의 리뷰를 작성했다.

'인플루엔셜'과 '윌라'에서 프로젝트로 제작한 이 오디오북이 즐거운 이유다.

소설은 여러 단편이 묶인 단편소설이다.

그 첫 문장은 시작과 동시에 흡입력 있게 이야기를 몰입 시킨다.

"저주에 쓰이는 물건은 예뻐야한다."

'술 빚는 주조사 할아버지'가 말하는 저주에 관한 이야기다. 저주에 쓰이는 복스러운 토끼가 어떻게 저주를 발동하는지 그 초자연적인 힘에 대해 꽤 그럴싸한 설득력으로 말한다.

이런류의 소설에는 쉽게 집중하지 못하는 나 또한 이 소설은 특별하게 몰입할 수 있었다. 어떤 영화나 소설, 드라마도 분명 허구의 것이지만 적당히 넘어 갈 수 있을 법한 설득력이 없다면 좀 처럼 몰입은 쉽지 않다.

다만 '저주토끼'가 소재에 비해 몰입이 쉬운 이유는 작가가 각 소설마다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심층성과 몰입도가 높아졌다. 입체적인 캐릭터를 따라 이야기를 전개하다 보면, '저주'나 '마법', '영혼' 따위의 이야기가 전혀 '어색함' 없이 다가온다.

멈추지 않는 생리에 '피임약'을 먹고 '임신'하게 된 여성의 이야기라던지, 화질실 변기 속에서 튀어나온 '머리'가 나에게 말을 건다는 소재는 꽤 도발적이지만 그럴싸하게 몰입하여 읽게 된다.

이미 두 번이나 읽은 이 소설을 더 흥미롭게 한 것은 '성우'들의 연기다. 출판사 '인플루엔셜'에서 '윌라 오디오북'과 함께 '전자책&오디오북'을 소개해서 그렇다.

'윌라 오디오북'은 역시 책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체 불가능한 플랫폼'이다. 윌라 오디오북에서는 '오디오북'과 '전자책'을 함께 읽을 수 있도록 어플리케이션 업데이트를 진행했다. 개인적으로 이번에는 '오디오북'으로만 들었는데, 아이들과 '공원'에서 산책하거나 가벼운 집안일, 운전을 할 때 듣기에 매우 좋다.

소설이 짧고 간결해서 이런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도 전혀 흐름의 방해가 없이 들을 수 있고 더군다나 개인적으로는 '윌라 오디오북'은 자기계발서나 인문학책도 좋지만 이런 '소설'을 듣기에 매우 적합한 플랫폼이라고 생각된다.

그밖에 '내 치즈는 어디에서 왔을까', '말하기 수업', '언바운드', '수학이 필요한 순간', '내가 백년식당에서 배운 것들', '스탠퍼드는 명함을 돌리지 않는다', '부의 골든타임', '미움받을 용기', '뉴타입의 시대' 등 내가 읽었던 꽤 흥미로운 책들도 '인플루엔셜' 출판사에서 제작한 작품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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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스티브 잡스 - 잡스 사후, 애플이 겪은 격동의 10년을 기록한 단 하나의 책
트립 미클 지음, 이진원 옮김 / 더퀘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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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스티브 잡스가 사망한 해, 애플은 엑슨모빌을 따돌리고 미국 시가총액 1위의 기업이 됐다. 차고에서 시작한 작은 회사가 기술 산업의 거인으로 자리 잡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애플의 성장은 단순히 경제적 수치를 넘어 현대 기술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011년 애플 사망 두 달 전, 팀쿡은 애플의 CEO로 공식 취임했다. 잡스는 자신의 후임자로 '팀 쿡'을 강력히 추천했다. 팀 쿡은 '스티브 잡스'와는 꽤 결을 달리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관리형' 인재에 가까웠다. '팀 쿡'은 '혁신'보다 '관리'에 적합한 인물이었따. 그는 IBM과 컴팩에서 공급 체인 관리를 경험했고 어떻게 하면 공급 체인을 최적화하고 비용을 절감하며 재고를 줄일 수 있는지를 고심했다.

잡스 사망 이후 사람들은 애플에 대한 걱정은 이어졌다. 애플 성공이 잡스의 비전과 혁신적인 리더십에 크게 의존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3년 애플은 시가총액 3조 달러를 돌파하며 한국의 GDP의 무려 1.7배 규모를 갖게 됐다. 스티브 잡스가 사망한 해의 8배나 되는 규모다.

그 동안 애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잡스'는 자신의 사망 후에 '애플'의 미래에 대해 이런 고민을 했다.

직원들이 모두 '잡스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독창성을 잃고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우려했다. 그는 애플이 '스티브 잡스'라는 개인에게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직원들의 혁신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성장하길 기대했다. 실제 '스티브 잡스'는 '다르게 생각하라'라는 애플의 광고 표어에 대해 우려를 하기도 했는데, 이 표어가 자칫 '애플'이 아니라 '자신'을 광고하는 마케팅 수단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잡스는 애플이 그의 개인적 이미지나 특정 인물의 존재보다는 회사의 핵심 가치와 정체성을 담기를 원했다. 이런 다양한 니즈는 '팀 쿡'이라는 관리형 인재를 선택하도록 했다.

스티브 잡스 사망 이후 애플은 꾸준히 새로운 '제품'이 발표했다. 발표할 때마다 언론은 '사라진 혁신'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실제로 애플은 지속적 혁신을 했으며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팀 쿡은 애플 내에서 개방적이고 협력적인 사고를 장려했다. 직원들이 스티브 잡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자 했다. '잡스라면 어떻게 했을까'가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도록 했다.

이는 과거 스티브 잡스가 추구하던 '폐쇄적 경영 방침'과 크게 달랐다. 물론 '애플'은 지금까지도 꽤 폐쇄적인 회사로 알려져 있으나 잡스의 '비밀주의적'이고 '집중적인 경영방식'에서 보다 투명하고 포용적인 문화를 조성하고자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조너선 아이브'를 비롯한 스티브 잡스의 최측근 몇몇은 상당한 어려움에 처했다. 잡스의 리더십 아래에 오랜 기간 협력했던 이들은 잡스 특유의 비전과 작업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팀 쿡의 다른 경영 스타일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조너선 아이브'는 애플의 디자인을 총괄하면서 잡스와 긴밀한 협력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잡스가 강조하던 디자인의 단순함과 혁신을 줄곧 이어가길 원했다. 이는 팀 쿡의 방향성과는 달랐다. 제품 디자인과 관련된 결정에 조금 더 많은 인물들이 참여하면서 꽤 길고 지루한 회의와 협의 과정이 필요했다. 직관적이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제품을 창조하던 '잡스'와 '아이브'는 '데이터'와 '효율'을 중요시 하는 '팀 쿡'의 접근 방식과 꽤 달랐다. 이 과정에서 꽤 많은 핵심 인물들이 '애플'을 떠났고 '아이브' 또한 최근 애플과의 계약 만료로 애플을 떠나게 됐다. 이렇게 '관리'와 '효율'의 경영을 우선시 하면서 '팀 쿡'은 꾸준히 새로운 핵신적인 제품을 내놓았다.

'애플 워치'와 '에어팟', '애플펜슬', 애플TV' 등이 그렇다. 팀 쿡은 잡스의 기본적인 철학을 유지하면서도 서비스를 확장하고 제품 라인을 다양화하는데 더욱 초점을 두었다. 제품에 있어서 '잡스'는 몇 개의 핵심 제품에만 집중하는 전략을 선호했다. 이는 제품 라인을 간소화하고 각 제품에 대해 집중하여 완성도를 높이는 전략이었다. 다만 팀 쿡의 경우는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수익원을 다변화하고 시비스를 확장하여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하도록 했다.

'스티브 잡스'는 아이튠즈, 아이팟, 맥, 아이폰을 통해 디지털 콘텐츠의 구매와 관리 및 재생에 대한 최초의 생태계를 구축했다. 마치 '애플'의 생태계 속에서는 다양한 '제품군'이 하나의 기계인 것처럼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생태계는 '팀 쿡'을 만나며 아주 빠르고 넓게 확장됐다.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을 맥북으로 불러 오거나, 맥북에서 '복사'한 글을 '아이패드'에서 '붙이기' 할 수 있는 등 실제 애플 제품을 사용할 때, 하나의 커다란 디바이스를 사용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모든 조직은 '규모'가 확장되면 '통제'보다 '자율성'을 만나 더 큰 성장을 이룬다. 스티브 잡스의 사망 이후 '애플'은 '잡스'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창의적인 제품을 출시하며 성장해 가고 있다. 잡스의 강렬한 개인적 영향력과 그가 애플에 미친 깊은 인상, 그의 리더십에서 벗어나 직원 개개인의 창의성을 발휘하고 실패를 허용하는 문화를 만들어냄으로써 더 장기적인 비전을 만들어 가고 있다.

시대와 세계의 집중을 받는 기업으로써 많은 문제점과 단점이 언론을 통해서 꾸준히 노출되지만 어쨌건 '애플'이 만들어낸 영향력에서 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애플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를 아는 것이 의미 있어 보인다.

*매일 새벽 5시에서 두 꼭지 씩 열흘간 읽었던 책입니다. 꽤 재밌습니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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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좀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 - 삶과 인간관계로부터 지친 당신에게
윤글 지음 / 딥앤와이드(Deep&WIde)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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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눈을 떴더니 침침한 것이... 삭신이 쑤시는 것이...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는 노인이 된 꿈을 꾸었다. 배게에 머리를 대고 하늘만 꿈뻑 꿈뻑 쳐다 보았다. 이 길고 긴 시간이 언제쯤 끝이 날지, 전역날을 기다리는 말년 병장의 마음으로 지루하게 천장만 바라 보았다. 천장의 무늬에 온갖 서사를 갖다 부치며 동공을 비우고 한참을 있던 내가 꿈을 깨고 떠올린 것은 친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 친할머니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하는 농사일을 가끔 도와주셨다. 어머니, 아버지는 '거베라'라는 꽃을 작농하셨는데, 그 꽃잎이 가지런히 모이도록 플라스틱 컵을 씨우고 가지가 꺾이지 않도록 철사 하나를 꽂은 후에 파란색 테이프를 칭칭 감는 작업이었다. 할머니는 그 일을 도와주셨다. 정정하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기억의 부재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 간에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나름대로 삶을 살았다. 다시 살아난 나의 기억에 할머니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TV화면을 보셨다. 채널은 항상 1채널이라 불리는 KBS였다. 한 칸만 내리거나 올리면 '오락프로'라고 불리는 프로그램이 많은데도 할머니는 가만히 1채널에서 방송하는 편성을 그대로 시청하셨다. 크게 웃지도 않으셨고 어떤 반응도 하지 않으셨다. 할머니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 나는 거기에 앉아 TV화면을 배경으로 한 할머니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것이 나의 다음 기억. 이어지는 기억의 부재 뒤, 할머니의 모습은 천장을 보고 계셨다. 그 공간의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온전히 함께 시공간을 채우던 시기는 지나갔고 나의 손에는 다른 세상에 연결되는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그 화면을 들여다보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 있었다. 그것을 호주머니에 집어 넣으면 초침과 분침은 속도감을 온전히 전하려는 듯 천천히 흘렀다. 그 견디지 못할 지루함을 반대쪽에서 할머니는 어떻게 보내고 계셨을까. 그 느리게 흘러가는 공간을 벗어나면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스마트폰에서는 알림이 끊임없이 왔다. 친구들의 농담은 공간을 달리해서도 이어졌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들의 시덥잖은 농담과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렀다. 나의 하루는 그 방향 전환이 빨랐다. 동으로 갔다가 서로 갔고 다시 북으로 갔다. 하루와 하루의 결정으로 인생의 방향이 크게 달라졌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가끔 그 기억의 부재와 부재 사이에 어럼풋한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를 때가 있다. 할머니의 시간은 무엇으로 채워졌을까. 음악도 듣지 않고 TV도 스마트폰도 없는 방에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됐을까.

10대에 나는 이별이나 상실에 대해 깊은 상처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이별보다 만남이 더 흔하고 잦은 나이였다. 이별과 상실을 겪으면 새로운 인연이 그 자리를 채웠고 다시 이어서 새로운 인연이 그 자리를 매우고 채우고 넘쳤다.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그러다보면 비어진 자리를 느낄 새는 없었다. 스물이 넘어서는 그 '만남'과 '이별'의 분기점이 갈라졌다. 점차 만남과 이별의 횟수가 평행을 이루었다. 어떤 이별에는 그것을 채우는데 한참의 시간과 인연이 필요했다. 서른이 되고 이제 마흔에 닿는 나이가 되면서 점차 '새로운 인연'보다 '사라진 인연'이 많아짐을 느꼈다. '결혼식', '환영식' 보다 '장례식'이나 '송별회'에 참석하는 일이 많아졌고 어떤 경우에는 만나는 사람에 '정'을 두는 '감정 소모'를 피하게 됐다. 이미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갔고,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은 그 자리를 채워내지 못했다. 사회적으로 풋내기에 속하는 마흔 언저리가 느끼는 건방진 상실감은 과거 '할머니'를 떠올리면 숙연해진다. 괜히 시간을 축내서 채워진 '나이'가 아닌 상실감으로 가득찬 나이. 그것을 오롯하게 감내한 나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자신을 키워주던 부모와도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난 '자식'과 작별하고 일했던 이, 친구, 반려자와도 이별하하여 점차 혼자가 되는 시기가 되면 나의 시간은 무엇으로 채워질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볼 때가 있다. 내가 채워야 하는 것은 그저 '숫자'에 불과한 '자산'이나 '인맥'이 아니라, 어느 순간 유일하게 남게 될, '나'와 '기억'이 아닐까.

나에게만 있을 것 같다는 '이별'과 '상실'을 사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공유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대략 인생의 절반인 마흔에 알게 됐다. 밖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비슷한 기억을 갖고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한 그들에게 남은 시간과 나에게 남은 시간은 여전히 '상실'과 '이별'이 훨씬 더 많을 거라는 것도 안다. 모두가 상실하며 살아가는 시대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누구에게도 함부로 할 수 없다.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적 있다. 별 생각없이 던졌던 나의 말을 꽤 가슴 깊은 곳에 담고 사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그는 가끔 나에게 그 기억을 말하곤 한다. 나에 이야기에 꽤 적잖은 힘을 얻었던 모양이다. 그의 그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나는 입을 다물었지만 내가 그에게 던졌던 말은 그저 대책없이 던저진 '위로'에 불과했다. 상대가 '잘 해 낼 수 있을지, 앞으로 더 잘 될 거라던지', 나는 알 수 없다. 나의 미래도 모르는 망정, 상대에게 던졌던 대책없는 위로가 누군가에게 힘이 됐다. 모든 위로하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무게도 감당하지 못하면서 감히 누군가의 미래를 긍정한다. 그러나 그 거짓 위로는 위약이 만들어낸 '플라시보'처럼 가짜 효과를 만들어내어 상대를 치료한다.

삐뚤빼뚤 자전거를 타면서 뒤에서 잡아주는 손이 놓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혼자 타는 자전거를 앞으로 나가게 만든다. 믿을만한 이의 선한 거짓말은 때로 불가능을 아무렇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우주에 인간을 보내 도시를 건설하는 것 만큼이나 누군가에게는 '자전거 처음타기'가 불가능한 일이며 그 불가능의 영역은 사실 모든 '처음하는 일'에 드리워져 있다. 우리는 모두 미래라는 모두가 처음 경험하는 '불가능'에 맞딱드리며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위약'의 효과에 감탄한다. 때로는 의미없고 진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불특정 다수에게 던지는 메모에도 우리는 위로하며 힘을 얻는다. 잘 모르는 미래에 대해 잘 모르는 이의 막연한 응원을 받고 힘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가끔 보면 불가능했던 거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아마 내가 속았던 선의의 거짓말처럼 나의 선의의 거짓말도 누군가를 속여 불가능을 가능하게 바꿀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우울'과 '상실'의 늪에서 아무렇지 안게 건져낼지도 모른다. 고로 나는 누가될지 모를 상대의 불행과 우울, 상실에 대해 이렇게 장담하고자 한다.

내가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장하건데, 당신의 미래는 아름다울 것이다. 모두 잘 될 것이고 그러기 위해 그러고 있는 것이다. 분명하다. 틀림없다. 내가 보장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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