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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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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 우리 몫의 돌
-조이스 캐럴 오츠의 '그들'을 읽고-




 모든 것이 로레타의 것

 로레타는 삶을 사랑해왔다. 그녀는 버니를 사랑했고, 오빠 브록을 사랑했으며, 아버지마저도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모든 긍정이 현재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사랑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 그의 오빠 브록이 총을 들고 다니며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는 양 으시댔던 것처럼, 그녀 또한 자신의 젊음을 무기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하워드 웬들과 결혼하고 난 다음, 기나긴 시골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디트로이드로 떠났을 때 그녀가 잡은 건 그녀의 친구 리타 뿐만이 아니었다. '고작 스물다섯'밖에 되지 않은 자신의 생이었다. 그녀의 자식들이 생기고 그녀가 점점 늙어갈수록,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린 카드패가 점점 줄어들어간다고 생각했다. 위기감을 느낀 그녀는 자신의 카드패들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카드패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녀에게 내던질 수 있는 카드들은 너무나도 적었다. 로레타는 줄스를 사랑하는 한편 줄스를 원망했고, 모린을 질투했으며, 베티를 두려워했다. 줄스는 그녀의 또다른 가능성, 또다른 남자였지만 정작 그녀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끌어주기는 커녕 그녀에게서 도망치기에 바빴고 모린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처럼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그 차별성이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반면 베티는 로레타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탈주하고 '흑인'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끊임없이 반항한다. 소설에서 베티에 대한 서술이 극히 적은 것은, 그녀가 하나의 폭탄이기 때문이다. 로레타는 베티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를 해칠 수도 없다.  
 모린이 집안에서 느낀 모든 현기증들은 '모든 것이 로레타의 것'이라는, 로레타의 폐쇄적인 세계에서 얻은 질병들이었다. 로레타의 물건들이 뒤범벅된 세상에서 로레타는 팰롱과 모린이 서로를 의심하고 질투하면서 자신을 두고 싸우게끔 조장했다. 그들은 로레타를 증오하면서 그녀의 조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로레타로 하여금 둘 다 잃게 만든다. 팰롱은 도망쳤고 모린은 결국 그녀를 벗어난다. 폭동 앞에서 로레타가 느낀 건 절체절명의 고독이었다. 수많은 자식들을 낳았으나 정작 그녀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로레타가 가장 사랑하면서도 증오하는 건 줄스도 모린도 베티도 랜돌프도 아니다. 바로 그녀 자신이다. 그녀가 계속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며 강요하고 몰아붙였던 자신. 로레타는 남자로부터 벗어나서, 자식들로부터 벗어나면 새 시작이 가능할 것이라고 읊조렸지만 그녀의 자식 말마따나 그녀는 계속 잠들어 있다. 그녀의 꿈속에서는 모든 게 가능했다. 로레타는 자신이 깨어나면 이 꿈들을 언제든지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에게 남은 현실이라고는 차갑게 식은 버니의 시체 뿐이었다. 그녀는 그 시체라는 실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버니를 첫사랑으로, 하워드 웬들보다 버니를 닮은 줄스로 방향을 바꾸면서 환상을 꾸며낸다. 그리고 그 기나긴 환상은 그녀의 삶을 한편의 악몽으로 만든다. 로레타는 거듭 깨어나려고 하지만, 깨어나지 못한다. 결국 이 꿈은 깨어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그녀가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

 로레타의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줄스와 모린, 베티는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 네이딘이 줄스에게 느꼈던 위기는 줄스의 생존에 대한 집착, '어떻게서든' 살아남으려고 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줄스는 네이딘처럼 죽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다. 남매들은 이 불안한 삶이 어디로흘러갈 지 알지 못하고, 어떻게 살아야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도 알지 못한다. 그저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소유하려고 애쓰고, 부득불 살아남는다. 그들이 왜 살아남아야 할지도 모르면서. 왜일까? 언젠가 삶이 나아지리라는 희망 때문일까? 살다 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일까? 아니, 죽으면 조용해질 뿐, 어떤 것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브록이 그의 아버지 대신 버니를 죽이고 그 집을 탈출했듯 줄스 또한 삶의 불행을 하워드 때문으로 돌리고,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증오했다. 하지만 하워드는 줄스 때문에 죽지 않았다. 줄스는 증오했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은 그를 당혹하게 하는 한편 연민하게 만든다. 줄스가 깨달은 건 지리한 삶이 자신에게도 반복되리라는 것이었다. 페이는 그에게 캘리포니아로 가봤자 새로운 삶은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권태, 줄스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그 여유로움. 네이딘은 줄스라는 삶이 자신에게 끼어드는 것에 대해, 자신의 권태를 치료할 수 있다고 믿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깨져나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권태의 두려움은 질리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다. 익숙해지는 순간 어떤 변화도 두려운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네이딘이 줄스에게, 줄스가 네이딘에게 '살아남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면서도 동일하다. 그들은 서로의 삶을 지루해하는 한편 그 삶을 깨버릴 수 있는 서로에 대해 두려워하고, 그리고 그 삶이 바뀌기는 커녕 결국 그 굴레가 견고하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게 될까봐 서로를 증오한다. 네이딘이 차가 망가졌을 때 결국 부모에게 전화해 자신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듯이, 그녀는 줄스로 인해 이 세상이 아예 뒤바뀌거나 바뀌지 않는다면 멸망하길 바랬다. 하지만 어느 쪽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줄스는 네이딘에 의해 '살해'당할 뻔 한 다음, 다시 살아나 모트의 곁에서 '살아남으면서'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움직임에 가담하나, 이미 그 자신도 그 전복을 믿는 동시에 믿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좀 더 오래 살아남는 것뿐이다. 모린은 '로레타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원조교제를 하지만 결국 로레타의 망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는 남자들의 폭력과 소유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린이 선택하는 것은 그들의 소유욕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짐 랜돌프는 불안한 삶을 견디지 못하지만, 그의 아내는 그 불안을 함께 짊어지는 대신 불안을 불안으로 여기지 말라고 말한다. '그게 아니면 뭘 할거야?' 모린은 그의 불안을 눈치채고, 그가 불안해하면서도 잡고 견디고 싶어하는 것들을 욕망하며, 그에게 공감하고 그를 끌어당긴다. 그녀는 그러면서 로레타의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반면 이 소설에서 가장 적은 분량의 서술을 차지하는 베티와 랜돌프의 경우, 물론 랜돌프야 막내이기 때문에 적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베티는 끊임없이 줄스와 모린, 로레타에 의해 '이해할 수 없고' '전과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애'로 명명되면서도 이 소설에서 가장 '잘' 살아남는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덜 망가진다.' 웬들 할머니의 폭력에 대해 모린이 속수무책으로 견디고 참아왔던 것과 달리 베티는 할머니를 뒷문으로 밀어버리며, 로레타의 비꼬고 조롱하는 태도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다. 줄스가 하워드를 대충 무시하면서 대꾸하려는 태도를 꼬집으면서 그들의 정면적인 충돌을 유도하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흑인'들--설령 자신들이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백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흑인' 위에 있다고 자부심을 느끼는-과 어울리면서 이 집으로부터 '탈주한다.' 로레타와 그의 아이들이 로레타를 닮아 이 삶에서 탈주하려고 애썼던 것과 달리, 베티는 이 삶을 받아들이고 이 삶에서 살아나가려고 애쓴다. 그들이 '미래'를 꿈꾸면서 돈을 모은다면 베티는 철저히 현실을 즐기기 위해 소비하고 외치고 날뛴다. 그녀가 이 소설에서 별로 쓰여지지 않는 것은 그녀의 행동이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로레타가 말했듯이 '로레타의 세계'인 이 소설 안에서 로레타가 알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랜돌프는 가장 마지막 아이지만, 다리가 삔 상황에서도 집에 머무는 대신 '돌아다닌다.' 그는 결국 자신의 삔 다리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이미 그들은 '다리가 삔' 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다리가 삔 채로 태어났지만 로레타는 그 다리가 '단박에 낫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다른 다리를 꿈꾸고, 줄스는 다리가 하루만에 나아버리길 바라면서 삔 다리를 외면한다. 모린은 조용히 다리가 낫기를 기다리면서 발목을 거부한다. 반면 베티는 발목으로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거나 삔 다리에 익숙해질 것이다. 그들은 결국 이 악몽같은 삶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획득하려고 한다. 그게 미래든 과거든 현재든. 


 그들(Them)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네이딘과 짐, 그들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외감과 경계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외부인들에게는 당연하게 주어진 것들이지만, 그들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로레타가 브록과 부모 중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 말싸움을 벌일 때, 그녀는 '진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생각한다. 그녀의 말마따나 브록이 버니를 죽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녀에게 중요한 건 버니가 죽었으며 그로 인해 그녀의 삶이 꼬이리라는 것뿐이다. 로레타는 적극적으로 '브록'을 탓하면서 그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쓴다. 양심의 가책이나 악몽, 두려움에 시달리지 않는 그녀는 독자로 하여금 당혹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1페니를 주우면서 '재수가 좋다'라고 생각한다. '진실'보다 중요한 건 그녀가 살아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진실'은 하워드와 결혼한 후로 '비밀'로 바뀌어 발화된다. 알아봤자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유해한 것으로. 무익함에서 유해함으로 바뀌는 순간 그녀의 모든 삶은 꿈처럼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모린과 줄스, 베티는 이 거짓말 같은 가능성만 믿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모린은 줄스에게 자신의 안에는 짐 랜돌프의 아이가 자라고 있으며, 새로운 삶에 들어선 자신을 더이상 로레타의 세계로 끌어들이지 말라고 간청한다. 로레타가 모린에게 기대는 순간, 모린은 또다시 악몽을 맛보게 되므로. 줄스는 모린이 결국 획득해낸 모든 것에 대해 칭찬하고 축하하지만, 그녀가 온전하게, 그리고 영원히 그 안전한 세계에서 머무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한다. 결국 '그들'에 속해 있으리라는 그 예감, 그들은 살아남으려고 했다. 그 살아남음이 어떤 윤리적인 판단이나 도덕의 기준에 위배된다고 해서 과연 비판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이 기나긴 소설의 끝에서, 지루할 정도로 번복되는 자극적이고 신파적인 삶들의 번복에서 깨닫게 되는 두려움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쉽게 비판할 수 없으리라는 것,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계층에 속해있고 어떤 자본을 가지고 있던 간에, 우리 또한 그런 불안을 내재한 채 살아가고 있으며 그 불안이 언제든 그들처럼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거리를 둔 '그들'이면서 동시에 '우리들'이 되어버린다. 이 기나긴 설득은 소설의 모든 상황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부정하려는 모든 안전에 대한 시도들을 굴복시켜버리는 힘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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