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 영국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 계급의 사랑과 긍지
브래디 미카코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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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이 우리 모두를 속일지라도

 -브래디 미카코의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2022)를 읽고-


 

 솔직해지자. 

 우리는 인생에게 속아 넘어간 지 오래다.

 속아 넘어간 지 오래면서 속았다고 분개하고, 억울해하며, 슬퍼하다가 이내 체념한다. 체념하면서 착각한다. 지난 선거 때 진보당을 찍었지만 생각보다 세금이 많이 나오자 속았다며 화를 내고 다음 선거 때는 보수당을 찍는다. 신뢰가 무너졌다고 착각하는 한편 여전히 어딘가에는 진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개신교 교회에서 기도발이 듣지 않으니 천주교 성당에 가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어리석다고 냉소하는 사람 역시 어리석기 그지없다. 삶을 가능케 만드는 건 의심과 불신이 아니라 믿음이다. 작고 큰 믿음들이 우리 삶을 지탱한다. 가령 우리가 집을 짓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면 그냥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수밖에 없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마당에 몇 시간씩이나 무방비하게 잠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현실은 냉혹한 법(Reality Bites)


 물론 무엇이든 덥석덥석 믿을 순 없다.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음식인지 아닌지 살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덥석 먹었다가는 눈꺼풀과 목이 붓는 건 물론이고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브렉시트 사태 당시 소위 영국의 엘리트들은 탈퇴에 표를 던진 국민들이 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에 놀라워했고, 잔류에 표를 던진 이들은 탈퇴에 찬성한 이들을 두고 ‘시대에 뒤떨어진, 못 배운 이들’이라거나 ‘인종주의자’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레이철뿐 아니라 레이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첫째 아들마저도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졌다는 이유로 레이를 몰아세운다. 그런 레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동은 자신은 ‘평화’를 원했을 뿐이라는 걸 몸소 증명하는 것이다. 허나 레이의 팔뚝에 새겨진 단어는 평화平和가 아니라 중화中和라는 단어다. 차라리 영어로 평화peace를 썼더라면 저지르지 않았을 실수다. 레이는 한자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인터넷을 검색했고, 얼추 비슷한 형태의 단어를 도안으로 들고 갔다. 물론 이러한 실수는 본래 의도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레이는 레이철과 자신의 가정을 복구하길 원했고, 브렉시트에 찬성한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정부의 긴축 정책으로 인해 ‘일 안하면서 놀고먹는 벌레’가 되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복구하는 한편 NHS의 부활을 꿈꿨다. 탈퇴파는 브렉시트로 마련된 예산을 공공 의료 시스템에 돌릴 수 있다고 주장했고, 탈퇴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당연히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믿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떠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본래 사기꾼들은 상대방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내미는 법이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면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훌쩍 떠나버린다. 부두 노동자인 션은 탈퇴파지만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이유로 같이 일하던 동료에게 욕을 듣는다. 책임을 지는 쪽은 사기 당한 사람, 즉 믿은 사람이다.

 왜 믿었는가.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살아가기 위해서. 하지만 그들은 뒤통수를 맞았고, 뒤통수를 치고 달아난 이의 책임까지 모조리 떠맡아야 한다. 그들을 두고 어리석다고 말하는 건 쉽지만, 그들이 속지 않도록 도와주는 건 어렵다. 사람들은 어려운 쪽을 어렵다고 말하면서 내버려두고, 쉬운 쪽은 쉽다는 이유로 남용한다. 사이먼과 사이먼의 조카는 사이가 좋지만, 사이먼이 젊은 배거에게 잔돈을 주자 조카는 그의 행동이 안일하고 무책임한 자선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에 사이먼은 “너희 세대는 왜 그런 식으로 합리적으로 정리하려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말이야, 사람은 그렇게만 살 수 없다고.”(p.62)라고 대꾸한다. 션이 아일랜드 청년을 집에 들였다가 돈이 되는 물건을 모두 털렸듯이 사이먼에게 구걸했던 배거는 그 돈으로 술병을 산다. 현실은 냉혹한 법, 어떤 사건이든 결말이 희망이 아니라 절망적인 현실을 재확인하리라는 회의적인 신념은 희망으로 기울어진 이들을 어리석은 자로 여긴다.

 과거 노인들은 ‘살아 있는 도서관’이라는 말마따나 오랜 세월을 거쳐 지혜를 얻은 이들로 대접받았지만, 이제는 빠르게 바뀌는 세상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이유로 뒤떨어지고 거치적거리는 부산물이 되었다. 사회화를 마친 지 오래라고 믿었던 중년은 사회화를 마치지 못한 아랫세대로부터 문화화의 요구를 받는다. 세대를 뚜렷하게 구분할수록 세대의 전형으로부터 벗어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진실과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브래디 미카코는 코로나로 인해 상점들이 폐쇄되었을 때 사람들이 나서서 거동을 못하는 노인들을 대신해 생필품을 사다주겠다고 자처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허나 코로나 사태가 잠잠해지고 다시 삶의 문제가 대두되자 노인들은 도서관이나 도와야 할 존재가 아니라 미래를 방해하는 존재가 된다. 정말로 그런가? 



언제나 인생의 밝은 면을 보기를(Always Look of The Bright Side of Life)


 박완서는 산문 <생각을 바꾸면>에서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는 정보는 한정적이며, 그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은 편견에 의해 ‘자연스럽게’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작가는 전철에서 뚱뚱하고 땀을 뻘뻘 흘리는 남성이 자리에 앉아서 어느 예쁜 여자를 힐끔거리면서 쳐다보는 모습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그 남성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데, 여자는 알고 보니 아이가 딸린 어머니였다. 박완서는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정보들을 제 나름대로 오해한 것이다.

 브래디 미카코의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에서 나오는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실수 연발이고 지나치게 감상적이며 참견도 많이 한다. 스티브는 탈퇴파지만 10대 청소년들이 중국인 이민자들의 집에 테러하지 못하도록 자경대를 만들어 활동한다. 브래디 미카코의 남편은 지고 싶지 않은 기분에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을 견디면서 NHS 예약일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제프는 자신과 피가 섞이지 않은 나타야의 어린 아들을 자신의 아들인 양 돌본다. 대니는 다운증후군 조카의 입학을 거부했던 유치원에 가서 담판을 짓고 조카의 취직까지 살핀다. 대니의 여동생 제마 역시 오빠 대니를 기리겠다며 대니의 친구들을 모아 한바탕 떠들썩하게 추모 행사를 연다. 테리의 친구이자 브래디 미카코의 옆자리에 앉았던 데이비드는 으리으리한 저택에 어울리지 않는 포크파이 모자를 침실에 장식한다. 

 이런 모습들을 보노라면, 비록 그들 중 다수가 연합 탈퇴에 표를 던졌을지언정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다. 한국에서도 ‘아저씨’는 ‘목소리가 크고, 툭하면 마스크를 벗고 다니며, 공공질서를 지킬 줄 모르는 데다 잘 모르면서 함부로 남에게 참견하는’ 존재지만, 눈과 귀가 어두워지고 간의 알코올 해독 능력이 점차 떨어지고 있다는 약점들을 간과한 판단일지도 모른다. 두시간 반 거리를 오가면서 일하던 시절, 이마에 열패치를 붙인 채 손잡이에 매달려가던 내게 자리를 양보한 사람은 한 아저씨였다. 그는 ‘자신의 딸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브래디 미카코의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에서 나오는 심퍼시와 엠퍼시의 공통점은 상상력이다. 완벽하게 솔직한 인간이란 없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확신할 수 없는데 어떻게 상대방에게 솔직함을 요구하는 것일까. 상대방이 미처 말하지 못한 부분-의도적으로 감추거나 의도하거나 의식하지도 못한 자신의 진실-은 그저 상상력만으로 헤아릴 수밖에 없다. 상상력은 소통으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가끔은 오해와 망상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브래디 미카코 주변의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억울하기만 한 존재라고 본다면 그야말로 이 책의 취지를 흐리게 될 것이다. 젊은 세대의 비정함을 탓하면서 나이든 세대의 순수함에 대한 향수로 읽는다면, 그야말로 ‘적폐’다. 스티브는 영국으로 들어와서 돈만 벌고 나가려는 이민자들 때문에 사회가 엉망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나타야는 제프와 나이차가 현격하게 나는 태국인이다. 대니가 투병하는 동안 베트남 여성은 그의 곁을 지켰고,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그가 오래 살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건 얼마 안 되는 유산과 염치가 없다는 비난뿐이었고, 영국 비자마저도 연장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한쪽만을 비판하고 옹호하기에 삶은 다채로운 법이다. 나타야는 ‘가장에게 순종적인 동양 여성’이라는 역할을 거부하고 제프에게 육아를 떠맡긴다. 대니의 곁을 지켰던 베트남 여성은 레이와 다시 연락을 나눈다. 대니의 여동생 제마는 대니가 살아있을 적 그를 돌보는 베트남 여성에게 누구보다도 친밀하게 대했지만, 유산 문제가 일어나자 ‘감히’ 끼어든다는 이유로 그녀를 배척한다. 데이비드는 성소수자고, 그는 빈곤에 대한 혐오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한편 긴축 정책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이들을 어린애 취급한다.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선한 존재’가 아니다. 마냥 ‘인생의 밝은 면’만 보면서 살아갈 수만은 없다. 

 


 여전히 거칠고 낯선 곳을 헤매고 있을지라도(Still Wandering Around The Wild Side)


 어느 서평자는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에서 ‘아저씨’들을 향한 브래디 미카코의 애정 어린 시선이 드러난다고 했다. 애정이라는 건 그 사람이 선하다는 이유만으로는 성립되지 않지만, 악하다는 이유로 철회되지 않는다. 애정은 상대방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과정이다. ‘받아들인다’는 뜻은 종종 이해와 납득으로 오인된다. 하지만 한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건 그 사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면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는 게 아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결론 내린다면 애정이 아니라 기만이고, 혐오 역시 같은 구조로 작동한다. 혐오는 누군가의 행동이나 결정을 이해할 수 없고,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면서 어떻게든 본인의 가치관에 억지로 구겨 넣은 결과다. 그래서 납작하고 편파적이며, 쉽게 누군가를 어리석다고 여길 수 있다. 어리석다고 여기는 순간 그들의 말을 들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된다. 그저 ‘혐오’로 일관하며 ‘이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추락한 자신의 위상을 추켜올리는 것이다. 

 브래디 미카코는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2020)>에서 사립중학교 대신 지역의 공립중학교를 택한 아들과 아들 주변의 친구들을 바라본다. 이민자 출신이지만 인종 혐오를 그대로 드러내는 다니엘이나 사립학교와 공립학교의 레인을 당연하다는 듯이 갈라놓는 수영장, 가난하다는 이유로 멸시받는 팀……. 그녀는 아들과 또래인 아이들의 작은 사회가 어른들이 만든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이들은 인종이나 빈부격차에 따라 분류되고, 그 분류에 따라 ‘정의’된다. 정의된 이상 아이들의 미래는 정해진 경로를 따라 흘러갈 뿐이다. 우리의 무의식중에 내재된 분류법은 어떻게 한 사람을 이해하기를 포기한 채 오해하게 만드는가.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의 베이비부머 세대나 Z세대, M세대 역시 특정 사회 분위기에 따라 임시로 분류된 유형일 뿐이다. 브래디 미카코가 각 세대들을 나눈 기준에 관해 설명을 덧붙인 건 그 분류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해하고 싶은 대상들을 둘러싼 세계에 관해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목을 조여 오는 긴축 정책과 부정적인 인식 가운데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이들을 있는 그대로 조명하기 위해서다. 

 스티브의 에피소드는 분류와 정의가 얼마나 얄팍한 술수인지 보여준다. 정부는 긴축 정책을 이유로 동네 도서관을 폐쇄하고 민간 부지로 매각한다. 그러나 폐쇄라는 부정적 표현을 쓰면 빈민가 복지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인상을 줄 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인지 도서관을 커뮤니티 센터로 이전하겠다고 알린다. ‘이전’이라는 단어로 ‘폐쇄’라는 실상을 가리는 것이다. 그들은 빈민층이 ‘독서’를 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비싼 책값을 들여가며 읽지도 않을 책을 구비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효율적인 방법으로 부지를 ‘재활용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논리가 아닌가. 이전한 도서관은 놀이방 구석에 처박혀 있지만, 스티브는 저항하듯 계속 공공도서 서비스를 이용한다. 그는 자신이 읽고 싶은 도서를 꾸준히 신청하는 한편, 놀이방을 이용하는 모녀들을 도와준다. 그 답례로 받은 부활절 달걀은 내내 정부의 긴축 정책에 당당하게 맞서던 스티브의 눈가에 눈물을 맺히게 만든다. 

 솔직해지자. 

 우리는 믿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믿지만 속을 수 있고, 속아도 계속 믿을지도 모른다.

 믿기 위해서 의심한다. 

 세대와 빈부격차, 성별에 따른 분류를 마냥 믿을 수도 있지만, 그 분류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분류에 따른 정의로 재단된 누군가를 발견할지도 모르고, 나 역시 그 틀에서 벗어나 대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 그곳은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미래, 한없이 거칠고 낯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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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현명했지만 어떻게 보면 비열했던 것 같다고. 상수가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이리 온, 잘 잤니보다 더 자주 들었던 정의란 그런 것을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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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유령일 뿐 민음사 모던 클래식 71
유디트 헤르만 지음, 박양규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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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디트 헤르만을 처음 읽은 건 한 출판사에서 내놓은 시리즈 서포터즈로 활동할 때였다. 장편으로 나왔다지만 거의 중편 분량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얇았다. ‘알리스’를 읽으면서 껍질이 다 벗겨져 가는 나이 든 나무 옆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사라진 사람들이 살아있는 순간을 쓰면서 담담하게 행복했다고 말하고, 그 순간을 동시에 햇빛이 잠깐 비춘 것과 같았다고 말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나는 ‘알리스’의 문체가 왠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단단해지고, 두드리면 맑은 소리가 나는 나무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르만의 단편집 ‘단지 유령일 뿐’을 읽었을 때는 달랐다. 그녀의 두 번째 단편집이고, 초창기에 가까워서 그럴지도 모른다. 잠깐 두근거린 순간들,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는 위기의 순간들을 얇은 거즈로 덮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순식간에 주변은 조용해지지만, 거즈 밑은 여전히 들끓고 있다. 

 ‘차갑고도 푸른’에서 나오는 요니나와 마그누스, 요나스와 이레네의 모습이 그랬다. 요나스가 찍은 사진 한 장이 요니나로 하여금 ‘벽에 못질을 하고 싶게 할 만큼’ 충동질을 한다. 요니나와 마그누스, 수나는 다 같이 평온하게 살고 있지만 요나스는 언제든 그걸 단번에 뒤집어 버릴지도 모른다. ‘루스’도 그렇다. 라울은 자신에게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루스에 대해 묘한 배반의 욕구를 느끼는 나조차도 끝내 그 상황을 견뎌내지 못한다. 어떤 변화들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대가를 요구한다. 펠릭스와 엘렌도 서로에게 진저리를 내면서도 헤어지지 못하고, ‘어디로 가는 길인가’의 나도 야곱에게 정착한다는 변화를 택하지 못한다. 

 다만 그들은 아주 얇은 거즈를 덮을 뿐이다. 상처에서 진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소독하고 약을 바른다. 그 상처 위에는 딱딱한 딱지가 올라올 것이고, 가끔씩 그 상처 부위의 딱지가 갈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거즈를 뜯어 열어볼 수 있겠지만 이내 다시 덮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 상처를 보면 눈살을 찌푸릴 것이기 때문이다. 상처를 전시하고 내보이는 것, 솔직해 지는 건 그들에게 어렵다. ‘뚜쟁이’의 나는 요하네스가 다시 그녀에게 되돌아왔다고 여기고, 다시 그와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미리암이 정말 요하네스에게 자신의 은반지를 대신 받을 사람이 아니고, 창녀였다는 걸 알고 난 뒤 드는 안도감은 잠시일 뿐이다. 그녀는 클럽에서 처절하게 깨닫는다. 다시는 이전의 요하네스와 사랑할 수 없고, 그녀가 믿던 이전의 요하네스도 그 요하네스가 아닐 수 있다는 걸. 상처는 아물 것이다. 아물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거즈를 떼면, 사실 아물지 않고 남아 있다. 흉터 자국으로.

 ‘아쿠아 알타’에서 나는 베니스에서 부모님의 어린 자식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차마 낯선 남자에게 말을 걸 수도 없고 다가설 수도 없다. 다가가서 뺨을 후려칠 수도 없다. 그저 부모님의 보호를 받고, 동시에 자신을 보호해주는 부모님을 보호할 뿐이다. 부모님은 나와 동생을 매우 사랑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이라고는 ‘분명히 늦을 거예요’라는 답변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행을 떠난다. 마치 그들의 젊은 아들딸들처럼. 여행지에서 만난 자식들을 보며 ‘이제 우리가 너희를 만나러 왔다’라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발코니에서 하루종일 그들을 기다린다. 진정으로 그 여행을 즐기지 못하지만, 나는 차마 그 진실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또다시 덮을 뿐이다. 

 ‘단지 유령일 뿐’의 대사들은 의미심장했고, 서술들은 외국어를 번역한 것인데도 묘한 리듬이 있었다. 엘렌은 “정말 너무 시간이 없어”라고 말하며 그녀가 펠릭스와의 관계에서 절망에 빠지지 않는 방법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 방법을 안다는 건 이미 그녀 자신이 절망 한가운데에 있다는 걸 인지한 것이다. 그리고 버디가 자신의 아이에게 사주는 운동화에 대해 묘사할 때, 나도 모르게 숨죽여 읽게 되었다. 아주 비참한 한 순간에도, 그렇게 소중하고 사랑한다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아이에게 작은 운동화 한 켤레를 사주는 것”이 얼마나 말하기 어렵고, 행복한 것인지를 말하는 버디는 그 누구보다도 현명해 보인다. 


 “그건 말이야…….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지만, 정말 좋아, 운동화는 얼마나 작고 앙증맞은지, 그리고 완벽해. 성인 운동화를 그대로 완벽하게 축소해 놓았다고. 그렇지? 안창이 깔려 있고 튼튼한 끈이 달린 파랗고 노란 신발이 작고 완벽한 신발통에 들어 있고, 그걸 사 가서 아이에게 신기는 거야. 아이가 그걸 신고 걷는다고, 그걸 신고 걸어. 그게 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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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하는 인간
정소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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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소현의 ‘실수하는 인간’의 화자들은 모두 입으로는 실수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실수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양장 제본서 전기’에서 화자인 영지는 어머니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 실수라고 생각하고 어머니를 책으로 만들어 처분하려 한다. 하지만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책이 되기로  마음먹는다. 어머니는 집이 되어 가고 있고, 영지는 그 집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실수하는 인간’에서 석원은 늘 ‘삐끗’하며 실수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실수하는 인간들은 그를 ‘얕본’ 사람들이었다. 모든 실수들은 그에게 행운으로 이어진다. 
 
 이 소설집 뒤편에 실린 평론에서 말한 것과 같이, 모든 소설들의 부모들은 부재하거나 폭력을 휘두른다. 그리고 그 폭력에 맞서는 화자들은 이미 그 위협적인 시기를 지난 이들이다. 그들은 웅크리고, 도망치고, 숨다가 또다른 가해자가 된다. 그들의 심성을 지배하는 건 어떤 죄책감이 아니라 ‘체념’이다. 석원이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건, 그가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긴 적이 없어서였다. 그는 다만 그의 여동생이 어쩌다가 욕이나 하는 아이로 변해버렸는지 안타까워한다. 이미 벌어진 일 앞에서 그는 여동생을 탓할 수도 없고 자신의 비운을 한탄할 수도 없다. 그저 묵묵히 안타까워하며 전화를 끊을 뿐이다.

 ‘빛나는 상처’에서 ‘나’는 부모와 집을 기억과 함께 잃어버렸다. 그리고 남자는 어머니를 고의로든 실수로든 ‘상실’한 뒤 누구든 자신과 함께 있어주기를 바란다. 남자는 ‘나’를 안지도 못하고, 어떻게 해치지도 못한다. 그저 주변을 빙빙 돌며 그녀가 자신에게서 멀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는 자신이 어떻게 할지도 모르는데 괜찮냐고 묻는 남자에게 ‘도리어 자신이 나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맞받아친다. ‘나’의 기억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어떤 것에도 기억을 부여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기억했던 건, 그 묘한 공동체였다. 온기와 유대를 그 누구보다도 필요로 하고 절실하게 살아남으려 했던 아이들의 공동체. 

 ‘이곳에서 얼마나 먼’이나 ‘폐쇄되는 도시’, ‘돌아오다’는 사실 뻔한 공식의 이야기였다. ‘이곳에서 얼마나 먼’의 경우 제인에 대한 집착이 ‘제인이 내 삶을 망치고 있다’라는 피해망상적인 상상이 되면서 자신의 모든 실패에 대한 변명이 된다. 하지만 제인이 그녀의 생각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걸 보면서 나는 갑자기 허둥거린다. ‘폐쇄되는 도시’의 경우 김중혁의 서사와 왠지 닮았고, ‘돌아오다’는 말 그대로 딸에게 돌아오는 어머니, 모든 과거들이 다시끔 돌아와 미래를 구성할 수 있는 ‘집’을 그린다. 

 어찌 본다면 ‘실수하는 인간’에서는 과거를 끊임없이 중얼거린다고 볼 수 있겠다. 그들은 과거를 계속 중얼거린다. 그들에게 미래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미래의 가능성은 상실되었으며, 그들에게 남은 건 과거를 곱씹고 회상하며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 따져보는 것뿐이다. 생각에 잠겨 땅만 보고 걷다가 ‘사다리를 발로 차는 등’의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하지만 어떻게 본다면 우리가 ‘미래’가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실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래란 막연하고, 모든 것이 한없이 낯설어질 수 있는 시간이다. 

 ‘지나간 미래’야말로 이러한 작가의 시간관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화자는 자신에게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고 남편이 곧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녀가 미래라고 생각했던 환상들은, 사실 과거의 것들이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철장에 갇힌 채 누군가의 구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진짜 미래라고 믿었던 것은 무너지고, 진정한 미래가 다가온 순간 그녀는 ‘과거를 곱씹으며 서울역에 있었던 것’이 훨씬 더 행복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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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라이프 1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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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드, 그리고 주드

-한야 야나기하라 의 리틀 라이프』-

 

 

 

  희한한 시대의 영웅

 

  주드의 인생은 재난에서 시작되었다. 전형적인 성공 드라마의 인물이라거나 먼치킨(munchkin: TRPG 게임에서 나오는 갈등의 만능 해결자, 비논리적이고 초월적인 인물)에 가깝다는 비난들은 잇따라 오는 결말이 그의 자살, 찬란한 성공이나 열어둔 창문처럼 무책임한 해피엔딩-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으로 무용해진다. 물론 요즘 소설과 드라마 속 인물들이 추락하고 자멸하는 결말의 빈도가 늘어나서 이런 배드 엔딩 혹은 새드 엔딩도 하나의 전형이 되어버렸다는 지적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과연 이 소설의 결말을 무작정 해피나 새드, 혹은 배드 엔딩으로 정할 수 있는가? 해럴드는 남겨진 자고, 애도하는 사람으로 외로움과 슬픔을 느끼지만 그건 애석하게도 본인에 한정된 시각에 불과하다. 해럴드는 주드에게 평범한 삶, 평범하게 행복한 삶을 선사하고 함께 꾸려 나가길 희망했다. 결국 새드 엔딩을 맞은 건 해럴드 본인이지 주드가 아니다. 해럴드는 주드에게 끊임없이 삶을 재조정하면서 생존의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평범한 개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해럴드의 실패는 주드의 변덕이나 은혜를 모르는 배덕 때문이 아니다. 주드는 해럴드나 수많은 독자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결국에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보잘것 없지만, 그가 믿는 삶Little life. 해럴드 본인이 주드에게 매혹되었던 것은 바로 그 비범하고 아름다운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주드는 먼치킨이고, 이상을 초월한 비현실적인 인물로 서사에 핍진성을 상실하게 하는가? 장편 소설의 서사적 긴장을 유지하고 깊이를 더하는 소금으로 두 요소를 들 수 있다. 사고와 인물이다. 소설의 인물은 어느 날혹은 갑자기자신의 삶과 연관이 없을 것만 같은 사고에 휘말리고, 그에 대처하면서 자신의 성격과 기질에 따라 유발되고 유발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겪는다. 주인공이 되는 소설의 화자는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라고 믿으면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려다가 사고를 맞이하면서 소설의 주인공이 된다. 마치 어떤 선택지를 고르느냐에 따라 엔딩이 각각 달라지는 게임을 하듯이, 그는 망설이거나 주저 없이 선택한다. 그 선택지는 그가 원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모든 사건의 원형인 사고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는 사고를 개인의 운명이었다거나 신들의 계시로 무마하며 필연의 공식으로 설명하려 하지만, 어느 누가 그런 사고를 자처했겠는가? 욥의 부유함이 불행을 초래했는가? 그가 단죄받아야 할 일을 저질렀는가? 왜 꼭 그가 수난의 주인공으로 선택되어야 했는가?

 인간은 세계를 거대한 문제로 보았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논리와 식을 구축해 순수 실재를 파악하려 했다. 종교와 학살은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강압적인 종결이다. 위안이자 위악이었고, 겸손이자 오만이었다. 재난에 대한 방어적인 반응은 이러한 기반에서 비롯된다. 빙하가 녹고 쓰나미가 닥쳐오자 정치와 경제, 문화 등 다방면의 논리들이 다채롭게 펼쳐졌다. 그러나 그 논리들은 재난의 현실에 빛을 밝히는 대신, 깊고 넓은 그늘을 드리운다. 마녀 사냥이나 희생양, 다수와 소수의 생명을 둔 판가름, 계급에 의한 가치 판단과 생사의 갈림길. 옴 진리교 사건의 희생자와 가해자 인터뷰가 수록된 언더그라운드에서 의사 나카노 간조가 언급한 것처럼 부정 탄 사람이라는 인식의 역사.

주드는 부정 탄과거에 대해 침묵한다. 물론 그 부정은 주드의 판단보다 다른 사람들의 인식과 판단이 앞선 결과였다. 그들에 의하면 주드는 무력했고’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나 과연 주드는 아무것도 몰랐는가? 아무것도 몰랐다고 해서, 주드는 부정으로부터 결백한가? 그들은 주드에게 세상이 공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주드는 그 공정이 얼마나 피상적인지, 얼마나 자신을 무력하게 만들고 기만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가 불공정하다는 이유로 부정하는 순간, 주드는 한없이 가엾고 딱한 인물로 전락한다. 그 가엾고 딱한 인물, ‘불구가 그의 실재인가? 주드는 거부한다. 욥을 성경의 인물로 만든 건 바로 그의 태도였다. 욥은 사고를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대신 자신의 사건으로 받아들인다. 돌이킬 수 없고 부정할 수 없으며, 감수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욥은 살아나갈 수 있다. 주드 또한 마찬가지다. 삶을 포기하는 대신 살아나가길 선택했다. 주드의 말마따나-그는 무한한 낙천주의자였다.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

 

 최신과 매번 문명의 극점에 다다랐다는 점을 강조하는 현대 사회는 미신과 징크스로 논리의 빈 부분들을 채워 넣는다. 생존을 위한 이기를 강요하면서, ‘눈과 귀를 닫고 입을 막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톱니바퀴 속 작고 작은 부품이며 아무것도 아닌생으로 평온하게 살아가라고 말하지만(옥상달빛 희한한 시대), 과연 누가 그런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세상이 정한 자신의 분수를 받아들이고 묵묵히 규칙과 질서에 맞춰 살아가는 그런 삶을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이 소설 속 네 명의 인물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주어진 삶에 순응하고 만족을 느끼는 것에 부끄러워하거나 주어지지 않은 삶에 대해 갈망하고 애원한다. 미래는 희망이고 야망은 종교가 된다. 백화점 쇼윈도우부터 지하철 패널까지 자유를 광고하는 사회에서, 다양한 인종과 사상을 지닌 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실현하기 위해 모여드는 뉴욕에서 실패는 철저히 개인의 몫이 된다. 추락에 순응하는 순간 개인은 전락한다.

 그러나 실패를 감수하거나 실패를 비판하는 건 주변부의 타인이 아니라 본인이다. 오톨란의 전직 배우배우의 기준은 암묵적이고, ‘배우인 윌럼은 전직 배우인 웨이터들을 경멸하거나 비웃는 대신 그들을 통해 추락한 뒤 가능한 미래를 본다. ‘젊은그들에게 미래는 두려운 것이 되고 그 두려움을 막는 방파제는 위안을, 자기만의 것을, 세상의 무시무시한 거대함, 불가능성, 그 세상의 분들과 시간들, 날들의 가차없음을 저지할 무엇인가를’(리틀 라이프2, p.116) 잡고 놓쳤다가 이내 가까스로 다시 찾아내는 과정들이고, 그런 과정을 함께 겪어내는 친구들이다. (설령 이 소설이 남성판 섹스 앤 더 시티라고 한들, 그 비난이 얼마나 쉬운지 생각해 봐야 할 여지가 있다. 일단 섹스 앤 더 시티에 대한 일방적인 가치 절하가 기반이다. 다수의 친구가 나오는 작품으로는 앙투라지도 있을 텐데.) 네 남성이 등장하고, 뉴욕에 살고, ‘성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서로 절교를 하지만 격렬하게 상대방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미워할 수 없는 것이다. 제이비는 약에 취해 저지른 짓을 사과하지만, 그 사과는 단순히 약에 취했었다는 변명으로 무마될 순 없었다. ‘공정은 제이비의 상황을 고려하지만, ‘옳고 그름은 그 상황의 여지 대신 제이비의 생각과 행동을 부각하고 주드는 노력하지만 끝내 제이비를 용서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헐뜯고 끌어내리지 않는다. 그들은 이 전투를 함께 버텨낸 전우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전쟁의 의미가 서로에게 다를지언정 그들이 원하는 전쟁의 목표는 동일했다. 바로 전쟁의 종결이었다. 제이비가 주드를 적으로 여겼다면 그가 전시회를 열었을 때 사과의 표현보다는 자신의 성공을 과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이비는 주드에게 화해를 요청하며 주드를 그린 그림을 보낸다.

 야망, 자신이 바라는 미래를 실현하려는 나르시시즘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는 한편 보잘 것 없는그들을 지키는 방파제가 된다. 만약 그들이 강인하다면, 처음부터 모두에게 인정받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방파제가 필요했을까? 넷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다 보면 이 결핍이 메꿔지리라고 믿는다. 제이비는 성공한 예술가가 되고 맬컴은 자신의 조그만 집들을 크게 지을 수 있으며, 윌럼은 오톨란에서 벗어나고 주드는 깨끗한 몸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신화 속 영웅은 성공한다. <일리아드>의 아킬레우스는 트로이를 함락시켰다. 신화가 신화로 끝날 수 있는 이유는 영웅이 추락하기 전에 장렬하게 전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영웅이 된 이들은 쉽게 죽지 못한다. 현실의 영웅들은 추락하고, 구차하게 살아남는다. 성공의 찬란함이 가시고 퇴색하자 대신 좌절이 찾아와 그제서야 클라이막스에 이른다. 그들은 희극이 아닌 비극의 무대에 올라와 있다는 걸 뒤늦게서야 깨닫는다. 그들을 가로막는 건 미래가 아니라 과거였다. 오이디푸스의 발목을 잡는 것이 테베에 찾아든 재앙이 아니라 그가 저지른 부친 살해였듯이. 나르시시즘은 그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미래를 그리는 동시에 감출 수 없는 그들의 결핍을 드러낸다. 아집과 연약한 자기 확신으로 이루어진 나르시시즘은 그들 자신의 결핍에 마주하게 하며, 결핍을 극복하려는 집착 끝에 거대한 태평양에 다다른다.

 지나간 과거들, 넷이 함께한 과거나 그 이전의 과거들은 평평하게 압축되고 추상화되어 하나의 스테인드 글라스로, 미래를 향해 선 그들의 등 뒤에 존재한다. 그 과거는 그들을 움직이고 나아가게끔 떠받치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극복될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해가 질 무렵, 점차 어두워지는 현실 앞에서 과거는 자신의 존재를 강렬하게 드러낸다. 죽어 있는 줄로만 알았던 과거들은 아무 소리도 없이 색색의 빛으로 그들을 짓누른다. 제이비는 친구들을, 맬컴은 진정한 애정의 부재를, 윌럼은 자아를, 주드는 모든 것으로부터 상처받은 자신을 마주해야 한다. 황혼의 끝자락에서 그들은 끝없는 밤과 마주한다. 그들이 믿고 있던 재능’, ‘확신들은 점차 무용한 것이 된다. 태평양의 파도들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이 세운 방파제를 타넘고 무너뜨릴 것마냥 위협적으로 번복된다

이미 과거를 공공연한 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주드에게, 밤은 하이에나들이 찾아드는 시간이 된다. 케일럽은 과거로부터 그가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자각하게 했다. 다른 친구들보다 그에게 더 빨리 찾아든 이 절망은, 그가 타고나면서 불행했다는 고지식한 태생의 문제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다. 애너나 앤디, 해럴드의 말마따나 그는 잘못한 게 없고’ ‘결백하다’. 주드는 아름답다. 하지만 그건 그가 결백하기 때문은 아니다. 주드에 대한 공정성옳고 그름에서 기반한다. 그의 딜레마는 단순히 모두가 과거에 대해 느끼는 부끄러움, 악한 사람에게 나쁜 짓을 당했다는 분노와 부끄러움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주드는 세상이 흑백으로 공정하게 나누어질 수 없다는 것을, 가장 최선은 옳고 그름의 판정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주드는 묻는다. ‘너무 순진하고 너무 외롭고 너무 애정이 그리운 어린아이여서 아무것도 모른 채 유혹당하던 시절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루크에 대한 그의 모든 감정이 부정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에게 아름다움과 행복, 즐거움을 처음 가르쳐 준 사람은 루크였고, 비정상과 수치, 혐오를 선사한 사람도 루크였다.

 주드를 구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주드를 불쌍한 주드 외에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주드는 더 나아지려고 노력했고,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케일럽의 폭력은 주드를 더 불쌍하게, 더 불행한 존재로 만들었다. 주드는 사랑받았지만 그 사랑 때문에 자신이 경험하거나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 투성이인 삶-자신의 과거로서 자신을 형성하는-이 쓰레기가 되는 것을 감내해야 했다. 주드는 그런 쓰레기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온전히 자기 것이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있는 삶을 되찾기 위해- ‘첫번째 시도를 한다

 

 

  세인트 프랜시스 주드의 두 번째 생

 

 소설은 비극으로 치닫는 듯하지만, 이내 비극에서 벗어난다. 비극의 주인공은 자신의 오점, 오만으로 인해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간과한 결점에 의해 실패하고 추락한다. 제이비는 주드처럼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배경을 가지고 고유한 인물, 하나의 아이콘이 되고 싶어했고 그 길로 자신이 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의 집안이 그에게 말했듯이 그는 똑똑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똑똑한 아이로 살아가기 위해 그는 약을 했고, 주드와 친구들을 자신에게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한편 뮤즈로 취급하는 오판을 벌였다. 맬컴은 되어야 했지만 절대 되지 못한이름들로 불리면서 내내 독특하고 유일한 자신, ‘랫스타에 가려지지 않는 유일한 자신이 되길 바랐지만, 그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부유한 부모님의 돈부유한 흑인이라는 딜레마, ‘흑인으로서의 타고난 비극성이 부재한현재에 사는 자신이었다. 맬컴은 사랑이나 결혼에 대해서도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며 계속 누군가의 뒤꽁무니를 따라가야 하는지 의문을 품지만, 계속 막바지에서 종종거릴 뿐이다.

 그에 비하면 윌럼과 주드의 경우 자신들의 발목을 붙잡는 과거에 대해 비교적 일찍 깨달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서로에 대해 묘한 동지애를 느끼게 된 것은 단순히 둘 다 부모님이 없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윌럼은 살갑지 못한 부모님과 달리 자신에게 늘 미소를 지어주는 형 헤밍을 통해 가족애를 배우고-이를 보존하려 했다. 과거의 윌럼은 헤밍에 대한 자신의 애정은 진짜, 부모가 헤밍에게 보이는 행동은 효율성이라고 믿었다. 헤밍이 입원한 병원에 오지 말라거나 가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부모에게 윌럼은 분개를 터뜨리지만, 사실상 부모의 죽음 후 윌럼은 부모 또한 헤밍을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부모는 헤밍이 입원했던 병원에 거액의 돈을 꾸준히 보냈고, 윌럼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죽어간 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이 생존하기만을 바랐고, 그게 그들의 애정 표현이었다. 설령 그게 윌럼에게는 상처가 되었을지언정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윌럼은 그들을 무작정 비난할 수도, 옹호할 수도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가 보이는 모든 살가운 행동들은 무뚝뚝한 부모에 반하는, 혹은 그로 인해 고집스럽게 유지되었던 이타심이었다. 하지만 순수한 이타심은 없다. 어느 정도의 이기심이 이타심을 유지하게 한다.

 이 글에서 주드의 과거가 얼마나 불행했는지 논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가 주드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그의 몸을 더러운 것으로 규정했던 트레일러 박사와 케일럽의 폭력에 경악하기 전에, 그 전에 루크 수사와의 관계가 어떻게 종결되었는지-그 종결을 주드가 어떻게 파악했는지 읽어내야 한다. 주드는 깨끗한 몸과 백지의 과거로 새롭게 살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의 몸과 기억들, 과거는 그를 뒤쫓아와 맹렬하게 비난을 퍼붓고 공격했다. 그의 놀라운 실력, 노래를 잘한다거나 수학과 법에 능통하고 책을 좋아하는 모든 것들, 그의 아름다운 외모까지 사람들이 찬사를 보내는 요소들은 다 루크 수사가 알려준 것들이었다. 루크 수사는 그에게 행복과 절망을 선사했다. 루크 수사에 대해 느꼈던 감정이 틀렸다고 판정하는 순간 주드라는 존재도 부정되고 만다. 그에게 모든 걸 알려준 루크 수사 본인마저도, 정작 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현실의 법정에 서기 전에 도망쳐 버렸다. 주드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가 옳은지 그른지를 물어야 한다. 자신은 존재해도 되는가?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일정한 조건을 받아들인 후 이대로의 그 자신을 승인할 것을 요구하지만, 주드는 그 협상에 응하지 않는다. 그의 첫 번째 시도는 그에 대한 항거였다.

 윌럼은 주드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주드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는 주드에 대한 이타심만으로는 본인의 감정을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윌럼은 그를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 때만큼은 윌럼은 순수한 이기주의로 빛난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과거를 없었던 것으로 부정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케일럽은 주드에게 휠체어를 사용하게 된, 몸을 팔았던 과거를 부정하고 치워버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 과거까지도 모두 주드였다. 주드가 해럴드가 아닌 윌럼에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했던 이유는, 그가 현재를 비롯해 과거의 주드까지 모두 주드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과거는 예비 로켓-추진체에 불과하며, 떨쳐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달리 윌럼은 주드의 과거를 받아들이고 그 과거를 극복했노라고 말해준다. 윌럼은 배우가 되어가면서 자신을 잃어가고 텅 빈 껍데기가 되어 버릴까봐 두려워한다. 그는 현재를 향유하며 비어가길 원치 않기에, 그는 과거의 모순과 오판을 받아들이고 과거를 통해 구원받고자 한다. 헤밍의 대체품이 주드가 아니냐는 말은 사실상 쉬운 공식 대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를 구원하며 서로에게서 구원받는다. <일리아드>의 기나긴 전쟁을 끝마치고 그가 믿었던 낙관적인 미래의 모습들이 어떻게 퇴색되어 가는지 목격한 윌럼은, <오디세이아>오딧세우스는 묻는다. “말해다오. 난 절대적 확신을 원한다. 내가 도착한 이곳이 정말 이타카인가?”(p.38)

 비록 그 과거들이 점차 낡고 둔해져 본래의 모습을 잃어갈지라도, 윌럼이 생각하고 주드가 바란 온전한 미래가 아닐지라도 그들은 이 난파선 같은 현실에 머무르길 택한다. 윌럼이 공연했던 연극 대사처럼. “하지만 이건 영화가 아니잖아. 현실 세계에서는 남은 인생에서 그중 어떤 세 가지를 가지고 살고 싶은지 파악하고, 그걸 가진 사람을 찾아야 하는 거야. 그게 진짜 인생이라고.” 주드는 자신의 삶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믿는다. ‘첫번째 죽음후 얻은 두번째 생, 아이러니하게도 상실이후에야 찾아온다.’ 주드는 윌럼을 잃은 뒤, 윌럼의 모든 흔적들에 집착하고 그가 원했을지 모르는 복수들을 수행한다. 우리는 가장 완벽하게 행복할 때가 아니라 상실했을 때, 그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깨닫는다. 주드를 살린 건 윌럼이었다. 그는 이전의 자신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을, 끝내 과거로 회귀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주드가 혼자만의 과거로부터 스스로를 압사하게 만들기 전에 윌럼과 함께 했던 과거가 윌럼을, 제이비를, 맬컴을, 그리고 주드마저도 구조해냈다는 것을 알려준다. 윌럼과 주드가 공유했던 과거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떠도는 주드에게 사회가 말하는 가엾은 불구가 아닌 주드를 되찾게 한다. 수난을 극복하고 이겨낸 성 주드, 주드는 두번째 주드가 된다.

 

 0x의 공리 

 

 루크 수사에 이어 윌럼도 그의 곁을 떠나갔지만, 윌럼은 그의 삶을 0의 공리에서 x의 공리로 바꾼다. 0무의 개념을 가정하지만, 증명할 수 없,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음, 평온한 무. 해럴드는 0의 공리에 대해 못마땅해 하지만 주드에게는 그 0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하나의 위안이었다. 그에게 x의 공리도 결국 0의 공리와 마찬가지나 다름없었다. 누구도 쉽게 옳고 그르다고 규정할 수 없다.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없지만, 존재한다. 케일럽의 폭력을 마주했을 때도 주드는 자신의 삶을 x로 지칭했다. 결국 그는 한없이 가엾고 딱한 불구가 되어버릴 것이라고, 처음부터 그랬듯이 그의 삶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그가 원한 것이라고는 제이비가 비난한 평범한 삶이었는데도-주드의 보잘것없는 삶은 그마저도 허락해 주지 않았노라고.

 그러나 윌럼의 존재는 주드의 x를 바꾼다. x는 모두가 인정하고 주드마저도 공공연하게 내비칠 수 있을만한 애정이었다. 캔버스 위에 있는, 주드의 이야기를 듣는 윌럼의 모습이 주드의 x가 된다. 주드는 모두로부터 사랑받았지만 정작 주드 자신만은 주드를 사랑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주드는 윌럼이 사랑하는 주드로, 가까스로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가 어떻게 방어로만 비춰질 수 있겠는가? 우리는 쉽게 누군가를 돕겠다고, 구원해주겠다고 약속한 다음, 자신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핑계를 대며-살아남아야 한다는 슬픈 구실 아래-그 손들을 뿌리쳐 온 적이 있었다. 윌럼과 주드의 사랑은 가십란과 사람들에게 완벽하고’ ‘최고의 것으로 비춰지나, 정작 그들은 이 현실로부터 그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주드는 윌럼이 준 두 번째 생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두 번째로 얻은 그의 삶은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오롯이 그 자신만의 것이었다면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윌럼은 주드에게 끊임없이 주문을 걸어넣었고, 흙이 되어 바스라질 뻔했던 주드는 생명을 얻었다.     

 이 소설은 네 명의 실패담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성공했다. 단순히 커리어에 의한 판단만은 아니다. 그들의 슬픔이 그들의 성공을 완성했다. 제이비는 그가 원했던 유일무이한 아이콘이 되었다. 그의 예술성을 발휘하게 해준 뮤즈들, 세 친구들이 그를 외롭게 남기고 죽었지만 그로 인해 그는 유일무이해졌다. 맬컴은 남의 집을 짓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집들을 지었고, 자신이 정말 사라를 사랑하고 결혼해야 할지 의문을 품었던 한편 잠시나마 완벽한 가정을 이루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 어바인 씨는 맬컴을 사랑했었다고 고백한다. 맬컴은 죽은 뒤에서야 아버지의 뒤늦은 인정 고백을 받는다. 윌럼은 주드를 사랑했고, 주드가 사라진 뒤의 자신을-어느 누구도 자신의 자아를 보증해 주지 않는-두려워했다. 윌럼은 주드보다 먼저 죽었다. ‘주드를 사랑하는 윌럼으로, 그리고 주드에게 사랑받는 윌럼으로. 주드는 그가 원했던 새로운 주드가 되었다. 새로운 주드는 이전의 주드와 단절된, 완벽하게 다른 존재가 아니다. 비극과 희극을 가를 수 없는,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다양한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누군가는 상처 투성이라 추하다고 하지만-, 윌럼의 아름다운 표현에 의하면 용암 지대처럼 누구도 감히 판단할 수 없는 태고의 기억들을 끌어안고 있는 몸으로 주드가 된다. 사람들은 주드의 상처투성이 몸에서 그의 과거를 보지만, 윌럼은 주드의 상처투성이 몸에서 미래를 보는 사람이었다. “주드의 피부는 그 정도로 가지각색이었고 그 정도로 불가사의했고, 어떤 부분에서는 아예 피부 같지 않아서, 공상적이고 미래적인 무언가, 지금부터 만 년 후의 육체가 어떨지 보여주는 원형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p.67) 첫 번째 시도에서 주드는 자신의 과거를 말하기를 거부하며 죽길 선택했지만, 두 번째 시도에서 주드는 자신의 과거를 여덟 페이지의 편지로 간결하게 담아낸다. 그건 포기가 아니다. 주드는 죽더라도 가엾은 주드로만 죽지 않는다. 그의 앞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내내, 그를 놓지 않았던 윌럼이 있었기 때문에 주드는 비로소 주드로서 살고, 죽었다.

 다만, 끝이 비극처럼 보이는 까닭은 마무리 멘트를 하는 이가 해럴드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실패한 사람은 해럴드다. 해럴드는 제이컵을 잃었던 과거를, 상실을 극복하려 했다. 제이컵이 있던 가정을 해체하고 줄리아와 새로운 가정을 꾸렸을 때 그가 마주한 것은 상실을 온전히 극복한 상태로 되돌아왔다는 안도가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었다. 영원히 메꿔지지 않는 상실은 상실을 상징하던-제이컵이 만든-컵을 깬 주드에 의해 극복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해럴드는 결국 주드의 상실을 겪는다. 그 상실은 그에게 무한한 슬픔만 안겨주는 것이 아니다. 이미 늙어 이 끝났고 완결되었다고, 소설의 보조 인물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해럴드는 주드와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었고, 그 희망 때문에 그는 내내 두려워한다. 하지만 주드가 완전히 과거가 되어 버리자 해럴드는 늘 예상하고 있던, 두려워했던, 준비하고 있던 순간을 무사히 지났다는 것을 깨닫고, 그 순간 찾아드는 묘한 안도에 휩싸인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내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근거도 공감도 하나 없지만 적어도 그에게 위로가 되는 상상을 해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는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고, 어떤 이야기는 우리를 무한한 희망에 빠뜨린다. 이 소설은 아이러니하게도 끝에서야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이야기는 마치 과거를 절망과 실패로 규정하고 현실을 비극적인 결말로 무마하려는 완고한 몸짓을 거부하는, 보잘 것 없는 손짓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손짓은 그 모든 해석을 뒤집을 만큼 강력하다. 해럴드의 요청에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드 스스로 자처한 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주드는 말하고, 그제야 우리는 다시 돌이켜 듣는다. 이 과거들, 기나긴 투쟁의 연대기를, 이 보잘 것 없는 삶들little lifes.

    

하지만 그때, 리스페너드 스트리트에 서 있을 때는 이런 걸 몰랐어. 그때 우린 그냥 서서 그 붉은 벽돌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난 주드 때문에 두려워해야 할 필요 없는 척하고 있었고, 그는 그런척하는 나를 봐주고 있었지. 주드가 저지를 수 있었던 그 모든 위험한 일들, 내 가슴을 찢어놓을 수도 있었던 그 온갖 방법들은 이야깃거리인 과거 속에 있었고, 우리 뒤에 놓인 시간은 무서웠지만 우리 앞에 놓인 시간은 그렇지 않았어.

옥상에서 뛰어내렸다고?” 난 주드 말을 되풀이했다. “도대체 그런 짓을 왜 했는데?”

긴 이야기예요.” 그는 심지어 싱긋 웃으며 말했어. “이야기해드릴게요.”

그러렴.” 난 말했어.

그리고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어.

 

                                                               -리틀 라이프2, p. 427(마지막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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