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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여지도 - 두 발과 땀으로 써내려간 21세기 대한민국 노동의 풍경
박점규 지음 / 알마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네비게이션이 아닌 지도

 -박점규 '노동여지도'를 읽고-

 

 

 

 

 

우리는 모두 노동자다

    

  우리의 일은 당신의 돈보다 아름답다.’ 한국 사회에서 물건에 관련된 인간은 기존의 분류와 다른 양상을 띤다. 기존의 분류가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두 축이었다면, 이제는 노동자와 소비자로 나뉜다. 생산자였던 사람들은 노동을 하는 입장이 되거나 노동을 소비하는 생산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 이분법은 동시에 계급화 과정을 수행한다. 노동자는 소비자에 비해 하층 계급이 된다. 이 계급적 표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몇몇 사람들은 노동자를 블루 칼라와 화이트 칼라로 나누면서 노동권을 면제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 했다. 사무직은 공부를 잘 한 이들의 성과이고, 그들은 자신의 육체를 사용해 땡볕에서 일하는 이들보다 우월하다는 논리를 세웠다. 그러나 노동 현장에서의 상해는 육체가 아닌 정신에서 더 많이 드러난다. 육체의 질환의 원인도 스트레스로 드러난다. 우리는 모두가 노동자이며, 이 명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완벽한 소비자가 될 수는 없다.

  기존의 한국 현대사에서 노동자를 조망하는 시선이 주로 용역이나 공사장의 인부들, 공장에 머물렀다면 노동여지도의 시선은 그 편견을 극복하고자 한다. 가령 대전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소위 공부를 잘하는 박사들’, 그리고 회사원들까지. 공부 잘하고 성실해지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미래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은 헛말이 되어버렸다. 강남과 강북을 가르는 한강 물줄기는 마르기는커녕 점점 더 깊게 강바닥을 파내려갔다. 최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실린 강남 좌파였던 사람의 고백은, 그가 태생적으로 강남주민이었으며 김진숙 위원장 등 노동자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그 시간에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었다는 진실을 토로한다. 이는 아주 사소하면서도 경악스러운 고백이다. 누군가는 생을 위해 투쟁할 때 누군가는 프랑스어를 공부한다. 자신들이 철저한 소비자라고 배워온 사람들은 그들이 노동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신문의 자극적인 보도에서 접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대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무시하는 것이다. 그들과는 아예 상관이 없다고. 그들은 부당해고를 당할 일도 없으며 원하는 일을 취사선택할 수 있을 것이고 집안에서는 그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지지해줄 것이라고. 그들은 노력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들 자신도 노동자라는 걸 깨닫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가능한 미래이거나, 멀어도 그들과 똑같은 한 인간이 당하는 현재이다.

    

 

번복되는 세기

    

  노동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모토였다면, 흔한 운동권의 도덕에의 강요에 그쳤을 것이다. 휴대전화가 스마트폰으로 바뀌고, 데스크톱이었던 컴퓨터가 태블릿 PC로 바뀌는 등 기술은 점차 진화해 왔다. 그렇다면 현실 또한 어떠한가. 토마스 모어가 처형당하는 와중에도 한 끝 주저함이 없이 주장했던 유토피아에 가까워지고 있는가?

  19961127일 평택시 에바다 농아원에서 농아원생들이 시위를 했다. 재단운영자가 다시 풀려 나와 재단을 장악하자 노동자와 학생들이 일어나 농아원생의 권리를 주장했다. 덕분에 최성창 일가를 축출하고 에바다 농아원은 진정한 복지기관이 되었다. 이어 2006년 평택시로 미군기지의 이전을 막기 위해 사람들이 투쟁했다. 이 반대투쟁의 주축이 된 건 노동자였다. 노동자들은 왜 이 투쟁에 참여했는가? 산업 발전을 외치며 새마을 운동을 하던 시절, 공순이들과 공돌이들은 사회의 도구가 되었다. 독일로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수출 산업을 위해, 달러를 위해 마음대로 쓰이고 내던져졌다. 그들이 생산자가 아니었기에 그들은 그들이 만든 것들을 온전히 다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은 이 부당함을 알기 때문에 그 부당함을 이해하는 이들과 연대했다. 그 당시의 한국문학에서 지식인들은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자신의 무력함을 자책하는 식으로 표현되곤 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노동자의 본질과 가치를 일깨우는 것이었다. 혹은 노동자들이 놓쳐버린 어떤 것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지적은 어느새 노동자의 우둔함을 부각시키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설령 의도가 그게 아닐지라도, 그들의 인본주의무식함의 탓으로 돌려버렸다. 쌍용자동차가 대한민국 1호 자동차 회사이고 그 공원들이 평택에서 일어난 수많은 시위에 참여하며 사회의 부당한 처우에 대해 항의했지만 결국 그들 자신이 내쫓길 처지가 되어버렸다는 것은 부당함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21세기의 노동사를 그렸다고는 하지만 이 책은 과거를 언급한다. 현재 뿐만이 아니라 과거도 언급하면서, 과거가 번복되는 양상이 현재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현재를 또다시 번복해 미래라는 현재를 만들어 낼 것인지 아니면 이를 깨닫고 굴레에서 벗어날 것인지, 그 선택은 누구에게 달려 있을까.

 

 

 

 슬픈 열대

 

  책을 읽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식인이라는 뿌듯함 뿐 아니라 이 책을 시간 내서 읽을 수 있다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그 특권은 잘 쓰면 좋은 특권이 되지만, 나쁘게 쓰면 다른 사람을 해하는 특권이 되어버린다. 동정은 금물이다. 동정은 결국 사회가 원하는 계급화를 납득하게 만든다. 노동여지도가 원했던 건 굽어 살피는 동정이 아니다

 이 책의 말미에서 나오는 파주출판단지의 노동자와 편집자들은, ‘동정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들은 저항하고 있으며, 그 저항을 책으로 펴내고 있다. 책은 모르는 곳을 여행하는 지침서가 아니라 경고장으로 작동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빚이 있거나 상환 날짜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통지서로 깨닫는다. 카프카의 요제프 K는 자신과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한 법정에 출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어느날 아침 찾아온 불청객 사내들로 인해 알게 된다. 이건 부당한 진실인가? 아니면 우리가 여태껏 깨닫지 못했지만 우리를 천천히 조여 오고 있었던 목줄인가? 책은 인간의 지혜와 노고를 담은 정수라고 하지만, 책은 어떤 고귀한 상황에서 계시처럼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저 깊은 바닥, 바위와 흙이 뒤섞인 곳에서부터 끌어올려지는 약수와 같다.

  완벽한 포식자는 존재하는가? 적어도, 이 책을 경고장으로 받아들이게 된 사람들은 포식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책을 동정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완벽한 포식자라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은 아직 자신들이 포식자라고 착각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과 그에 따른 운동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어떤 것도 완벽해진 것이 없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아직도 계속 진화해야 한다. 그 진화를 가로막는 건 완벽의 신화다. 이미 완벽함은 신화로 도래했고, 우리는 현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 모두들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부한다. 우리는 거부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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