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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지음, 변광배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평점 :
소설을 위한 준비
다이빙의 순간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를 읽고-
소설은 언제 쓰이고, 쓸 수 있는 것일까?
바르트는 어머니를 잃은 뒤, ‘소설을 쓸 준비’를 준비한다. 평생을 텍스트와 도상의 해석으로 보내면서 그 누구보다 그는 창작에 민감했다. 모든 비평가들은 창작자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바르트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소설 텍스트를 사랑했고 그 누구보다도 소설이라는 돌 속에서 진주를 발견해 낼 수 있는 예민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텍스트를 사랑한 이상으로 그가 사랑했던 사람은 ‘어머니’였다. 소설은 그에게 어머니의 텍스트였고, 어머니는 한 편의 소설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그는 어머니를 한편의 거대한 소설로 인지하게 된다. 상실된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쓰는 것, 그것이 그의 애도였다.
하지만 쓴다는 것은 노타시오-메모하기의 딜레마를 초래한다. 메모는 시간성에 의해 가능해지면서 제한된다. 시간은 계속 물이 흐르듯이 흐른다. 물은 단단하고 거친 돌을 매끄럽게 다듬고 구덩이를 점점 더 깊게 만든다. 메모의 가치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흘러가야 하지만 흘러가서는 안 될 어떤 것을 붙잡는 것이다. 그러나 흘러가는 물 속에서 반짝이던 어떤 것은 건져 올려진 순간 낡은 부츠와 빈 깡통처럼 빛을 잃고 무미건조한 사물이 되어버린다. 일방적인 정지는 그 순간을 영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당혹스러울 만큼 초라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 초라함을 극복하는 것은 바로 ‘기억’이다.
프루스트는 조그맣고 부드러운 조개 모양의 마들렌을 홍차에 적셔 한 입 베어 먹었을 때, 그는 그의 죽었던 과거가 다시금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르트는 ‘슬픔 뒤에 이어지는 끝없는 권태’를 기록하고, 그 권태를 정지시키려 한다. 모든 슬픔은 자극 뒤에 권태가 오며, 그 권태 끝에 결국 생존하기 위한 삶으로 꾸역꾸역 되돌아가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생의 충동이다. 그러나 바르트에게 그러한 생으로의 귀환은 어머니에 대한 애도의 거친 종결이었다. 이를 중지하고 끊임없이 메모해 가는 것, 그러나 동시에 어머니라는 텍스트를 읽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 그가 만약 소설을 썼더라면, 그 소설은 어머니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바르트가 생각한 소설은 하나로 집약되었다가 끊임없이 확산되는 것이었다. 만화경을 들여다 보면 조그만 사각형과 삼각형들이 하나로 모여들었다가 분열된다. 색과 모양과 배치가 바뀌면서 아름다운 하나의 ‘환상’이 펼쳐진다. 이는 ‘하이쿠’의 형식과 같다고 볼 수 있다. 하이쿠는 매번 다른 ‘순간’을, 집약된 세 문장으로 제시한다. 만약 하이쿠를 일본의, 어떤 형식으로 구분되는 시로 여긴다면 하이쿠를 즐길 수 없을 것이라고 바르트는 단언한다. 그가 번역해 온 수많은 텍스트들은 사실 그 텍스트들의 ‘형식적 전통’이 아니라 그 형식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어떤 ‘내재된 것’의 전달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나의 사케 잔 속에서
벼룩이 한 마리 헤엄치네
절대적으로
(잇샤, 코요)
일상의 순간, 대수롭지 않게 넘길 몇 초밖에 되지 않는 순간을 잡아 ‘정지’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바르트가 본 하이쿠였다. 그가 어머니와 함께 한 시간들, 아무렇지도 않게, 손바닥에 가득 담은 모래가 소리없이 빠져나가 버리는 것처럼 흘러가는 그 시간들을 잡기 위해서는 하이쿠가 필요했다. 잔 속에서 헤엄치는 벌레를 보면서 ‘절대적으로’라는 생에 대한 강박까지 어떻게 다다를 수 있었을까? 기형도는 모든 사람들의 입속에 돋아난 검은 잎을 보면서도, 어떻게 말로써 또다시 써내려갈 힘을 얻었을까.
하지만 바르트의 한계는 그 집약에서 그친다는 점에 있다. 그는 자신의 소설을 프루스트처럼 펼쳐나가기를 바랐으나, 그의 결정적인 단점은 바로 기억력이었다. 그가 잘 ‘깜박거린다’가 아니다. 바르트가 말하는 기억력은 물에 띄우면 저절로 봉오리가 열리면서 꽃을 피우는 일본의 종이꽃과 같은 것이었다. 어떤 한 매개를 만나면, 죽어 있던 봉오리가 하나의 꽃으로 다시금 태어나는 순간을 쓰고 싶어했던 것이다. 어쩌면 소설가에서 평론가로 전환하기는 쉬울지 모르나 평론가에서 소설가로 전업하기에는 어렵다는 말이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이상을 가지기는 쉽고, 거대한 숭고로 그려낼 수 있지만 그 숭고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순간 경악하고 공포를 느낀다. 마크 로스코는 단면 회화를 연속해서 그렸지만, 대중이 그에게서 느낀다는 ‘카타르시스’, 감정의 정화를 그는 느끼지 못했다. 그가 마주한 ‘붉은 그림’에서, 그는 어떤 공포와 절망을 느꼈는가. ‘하나의 환상, 매번 달라질 수 있는 환상’, 바르트는 끊임없이 ‘이상화’했고, 소설을 위한 준비만을 거듭했다. 이 강의는 마지막이되 마지막을 내지 못한 강의다. 바르트를 죽인 건 차가 아니라, 응급실에서 처치를 거부한 그 자신이었다. 동시에 그는 타살이라고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거대한 이상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을지도 모른다. 준비는 늘 행복하다. 하지만 준비가 끝날 때면 우리는 한없이 두려워진다.
하지만, 어떤 바다에 뛰어들지 않는 이상 우리는 수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를 수밖에 없다. 헤엄쳐 나가야 한다. 짜고 차가운, 묵직한 파도가 온 몸을 두들겨 패 눕히더라도. 이제, 써야 할 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