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잊으려 하면 할수록 잊지 못하는 동물이다. 망각에는 특별한 노력 따위는 필요도 없는 것이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새로운 일들 따윈, 거의 모두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잊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게 보통이다.
잊을 수 없는 여자가 있다고 해서 지금이 불행하다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매일매일 이 거리의 푸르고 투명한 하늘처럼 상쾌한 기분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다. 물론 아오이와의 사랑을 회복하고 싶지도 않다. 아오이와는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도 들고, 실제로 만난다 해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건 분명 기억의 심술이다. ... 나는 어딘지 모르게 과거에 흔들리는 나 자신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될 그런 때가 있는 법이다. 예를 들면 사별 같은 것... 아오이와 나는 과거에 그런 이별을 했다. 나는 이미 그녀가 죽어버렸다고 믿으려 했다.
이탈리아어로 르네상스를 'Rinascimento'라 한다. 원래는 '재생'이라는 뜻이지만, 15~16세기에 걸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문화운동을 가르키는 말로 정착되었다. 피렌체는 그 리나시멘토의 발상지이다. 여기서 근대적인 빌딩을 찾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16세가 이후, 시간이 멈춰버린 거리, 거리 전체가 미술관이다. 겨울은 난방이 안되어 얼어붙을 듯이 춥고, 여름은 바람이 통하지 않아 찌는 듯이 덥다. 그것을 사랑할 수 없으면 결코 여기서 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거리에서 나 자신을 재생시킬수 있을까. 내 안에 르네상스를 일으킬 수 있을까.
정말 필요한 게 있는 걸까. 그 정도로 중요한 것이 과연 우리 주위에 얼마나 있단 말인가. 적어도 이 우아한 피렌체 거리에서, 지금 당장 해야만 할 일 따위는 없다.
사람이란 살아온 날들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소중한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고, 난 믿고 있다.
미래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아 늘 우리를 초조하게 해. 그렇지만 초조해하면 안돼. 미래는 보이지 않지만, 과거와 달리 반드시 찾아오는 거니까.
"안젤로, 난 한꺼번에 여러 가지 감정을 끌어안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야. 난 지금 애인 하나만으로도 힘들어."
후회없는 인생이 있을까. 나는 후회만 계속해왔다. 평생, 후회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런 생각을 하면 갑자기 다리가 무거워진다.
누구에게도,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살아가는 과정에 어두운 그림자 한둘은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몇 사람분의 쾌활함을 가지고 있는 메미의 가슴에 깃들인 그 어두운 그림자가 너무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것은 나 자신의 인생과도 겹치는 회색 그림자이기도 했다.
나는 자신의 미래를 너무 한정시키려 했다. 조금 더 유연하게 세계와 대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미의 요구로 그녀를 품에 안아도, 마음은 이미 거기에 없었다. 남자라는 동물이란 이렇게도 허망하다. 마음에도 없는 여자를 안을 수도 있기에. 그것은 반쯤은 동정에 의한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메미를 모욕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관계를 마칠 때마다 후회하지만, 오늘이라는 날을 어떻게든 지내고 보자는 게으르고 자포자기적인 성격 탓에 나는 일순의 쾌락에 몸을 맡겨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 번잡하다. 마음이라는 부분이 육체의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르는 탓도 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지만, 어깨나 발목의 아픔과는 달리 어떻게 처리할 길이 없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나는 가슴에 생채기를 내는 아픔을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었다.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흘러가는 시간이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과거를 잊게 해주리라 기원하면서...
나는 그녀를 안으면서도 때로 착각에 빠진다. 내 가슴 아래 안겨 있는 이 여자가 메미가 아니라 아오이인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왜 눈을 감고 있었어?" 메미는 관계가 끝난 후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든 나를 향해 물었다.
솔직히 말해, 메미와 헤어진 다음 십년 후에, 그녀를 아오이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하늘은 늘 변한다. 구름은 늘 자유롭게 모습을 바꾸어간다. 하늘을 올려다본다는 것은 마음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 여러가지 하늘이 있듯이, 여러가지 인간이 있다. 그렇다. 이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아오이는 미국인 애인의 사랑을 받고 이렇게 아름다워진 것이다.
남자란 과거를 질질 끌며 살아가는 동물이라고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마음의 스위치를 전환하는 데는 여자보다 훨씬 서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