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바다,후포에서-신경림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한 잘못이 맷방석만 하게

동산만 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보다


멀리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날-신경림


우리들 

깨끗해지라고

함박눈 하얗게

내려 쌓이고


우리들

튼튼해지라고

겨울 바람

밤새껏

창문을 흔들더니


새벽 하늘에

초록별

다닥다닥 붙었다


우리들

가슴에 아름다운 꿈

지니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 우화>


사랑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듯이, 영원히 사랑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을 뿐이다.


벽에 붙어 있는 설경이 아름다운 달려, 오늘 날짜에 동그라미가 표시되어 있었다. 뭐지? 생각이 안 난다. 가끔씩 찾아오는 이 아득한 상실감이 겁이 난다.


네가 날으는 곳까지/나는 날으지 못한다/너는 집을 떠나서 돌아오지만/나는 집을 떠나면 돌아오지 못한다/... 저녁이 오면/너는 들녘에서 돌아와/모든 슬픔을 꿀로 만든다. "일곱 번도 넘게 읽으니까 네가 오더군" 판화 곁의 액자 속에 담긴 시구에서 눈길을 떼자, 창규가 웃는다.


그가 고개를 숙인다. 끝에 닿았다고 체념을 하고 나면 어느 구석에서 작은 희망이 솟아오르곤 했다. 부질없는 일인 줄, 곧 다시 처음보다 더 나빠지고 말 줄 알면서도 나는 그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창규에겐 이제 더 들킬 것도 없다. 그래서인가? 창규에게 따뜻할 수 없는 것은.


분명 삶에는 기습이 있다. 헤어 나오려고 온몸을 부술수록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드는지도 모른다.


편지를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 지수는 누구보다 깨끗해졌지만, 내게 고백을 했으므로 함구하고 있을 때보다 더 조급하고 불안하리라. 일등을 해보고 싶어 책을 가져 간 건 훔친게 아니라 감춘 거지. 


나를 바래다 주는 길목 어느 집의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어둠 속에서 그가 말했었지. 널 사랑해, 어떡하지?


사람은 누구나 다 외로운 것이고, 그것은 다른 형태로 바꿀 수 없는 무서운 것이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어떤 상처가 깊숙이 자리잡을 때부터였을 거야. 외로움 앞엔 무엇으로부터도 안전할 수 없어. 말줄임표의 까만 점이 여섯 개쯤 찍혀 있는 맨 끝에 그녀는 사랑밖에, 라고 쓰고 있었다. 외로움은 무서울 뿐 아니라 깊이 들어가면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건 아닐까? 어느 길로 들어왔느지 입구, 출구를 전혀 찾을 수 없고 버려졌다는 슬픔에 사로잡히고 말지. 


자기의 이야기를 많이 한다 해서 상대방과 가까워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을 털고 나면 빈자리에 이상한 우수가 깃들인다는 걸 알고 있다. 뒤끝으로 남는 허전함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도. 그런데 여자에게 자꾸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무엇일까? 여자에게 얘기하고 싶은 이유는?... 살붙이에게나 느낌 직한 이 본능적인 친밀감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작은 노인이 나의 몇 배나 돼 보인다. 칠십 년을 넘게 살아 낸 기다림에 지치지 않는 노인의 의지 때문이리라. 



<지붕과 고양이>


-너를 보면 힘이 솟아... 억울한 생각들을 잊게 하는 힘을 가졌어. 넌.



<밤길>


"잠깐밖에 안 돼." 그렇게 말했던 것도 같다. 내가 그때 그렇게 발음하지 않았기를 지금 나는 원한다. 그랬다면 이숙에게 외로움을 더 가중시켰을 테니까... 그리고 정말 그리고... 잠깐밖에 안 된다는 것이 영원히 안 되는 것으로 되어 버렸으니까. 


여자는 별을 품듯 아기를 품고 있다.


"...밤에 내리는 눈을 보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방의 창문이 떠올라요. 그때는 날마다 밤이... 왜 그렇게 무서웠던지. 밤만 되면 빨리 날이 밝기를 눈뜨고 앉아서 기다렸죠. 아침이 되면 눈이 쌓였다고 밖은 한참 소란스러운데 난 그렇지 않았어요. 그 시절, 겨울에 눈은 나 몰래 내린 적이 없었거든요. 날이 빨리 밝기를 기다리다가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걸 지켜 봤고 어쩐지 그런 밤만 무섭지 않았어요."


"그를 잃고... 어렸을 때 밤을 무서워했던 그때로 되돌아간 것 같아요. 그는 나에게 아주 잘했어요. 나는 결혼 전에 한 사람과 헤어졌고... 그가 그이보다 못하다고 생각했었죠... 사실 나는... 그래요 나는 다람 사람을 나만큼 사랑해 본 적이 없었을 거예요. 그가 있어서 불행하거나 외롭지는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었어요... 그를 잃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나만 사랑하면서... 무서워요. 하느님이 마치 나에게 무엇을 깨우쳐 주기 위해 그를 데려간 것만 같아서."


"...나는 말예요. 이제야 저녁때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요. 그는 이젠 올 수 없는데 말예요...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그와 같거나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에요. 그만이 내 사람이었어요. ... 아세요? 내 마음... 이제야 나는 그과 진짜 사랑하며, 기쁨을 느끼며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가 살아 있기만 하다면...그의 조끼를 만들고... 살았을 때 그가 원한 것처럼 그에게 내 무릎도 내주고... 기다리고 사랑하는 데 나를 다 바치겠어요... 그가 살아 있었다면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닐 거예요. 나는 나만 사랑마며 그저 그런 날들이 흘러간다고 짜증을 내고 있을 뿐일 테죠." 말하는 동안 입술은 건조해졌지만 여자는 가끔 미소짓고 목소리의 평정도 잃지 않는다. "그의 죽음과 내 마음을 맞바꾼 것만 같아요."


"...사고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났어요... 그래서인가 봐요... 저물녘이면은요... 그가 꼭 집으로 오고 있는 중인 것만 같거든요... 그 생각에 친정집에 더 있을 수가 없어요... 빨리 가야 한다 빨리... 그가 와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를 찾고 있는 그의 모습이... 찾다가 ... 찾다가 ... 실망해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그의 모습이 ... 터무니 없지요? 그는 안 오지요?"


<황성옛터>


추억만을 가지고 얼마나 한 사람을 질기게 사랑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한없이 그녀를 밀쳐 내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은선은 세상에 헛발을 딛는 듯 아득했다. 그 세월이면 익숙해지기라도 할텐데 매번 그 아득함은 새로운 구덩이를 보여 주며 멀미를 동반한다. 피해 의식인가? 그날 이후 스물 일곱이 된 지금도 어쩌다 우연한 아버지의 시선이 자신에게 오래 머물면... 차라리 너와 바뀌었더라면...아버지가 그 생각 하시는 건 아닌가 그녀는 귀밑이 붉어진다. 


니 맘쓸까 말 안 헐라고 했제이... 말 안 하려고 하는 것이 더 마음쓰인다는 것을 어머니는 모를까?


<성일>


습관이란 감정을 바꿔 놓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처음엔, 뭐 이런 사람이, 했던 것이 엽서가 갑자기 뚝 끊기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궁금해졌으니까. 


<어떤 실종>


단 한 사람이라도 그를 다 알기란 불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관심과 애정이 적어서가 아니라 사람이 갖고 있는 복잡함과 미묘함이 너무 깊어서.  


눈송이는 세상을 하얗게 덮어야 할, 꼭 그래야 할 일이 있는 듯이 어느 집 창문 약간 홈진 데까지 찾아가서 쌓였다.


<밤고기>


엉겁결에 내뱉은 양희의 말은 누구에게도 반응을 못 일으키고 저 혼자 떠돌다가 스러졌다.


<강물이 될 때까지>


"그와 결혼을 한다고?" 그녀는 흠칫 당황했다. 한다고? 해진의 목소리 톤이 그녀의 신경을 충분히 긴장시켰다. "더는 참을 수 없어. 너 그와 결혼하면 난 죽고 말테야!" "..." "난 그를 포기 못 해, 절대로!" ... 해진이가 그를? 그녀는 갑자기 세상이 생경스러웠다. 어쩌면 나는 까마득히 ... 그렇게 그에 대해 예민했었는데. 그녀는 자주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해진이 그 곁에 그렇게 바싹 있으리라고는, 그녀는 하염없이 아득했다. 해진은 정말 그에 대한 애정, 그에 대한 노여움을 수면제로 대변했다. 그건 동물적이야, 위협이라고. 해진을 향해 화를 내면서도 해진의 소동이 미수에 그쳤음을 다행스러워하는 그녀의 이면에는, 해진의 존재감보다도 얼결에 그녀에게 지워질 평생 상처를 떠맡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섞여 있기도 했다. 의식을 되찾은 해진의 첫마디는, 그는 나에게도 다정했어, 였다. 울고 있는, 소리도 안 내고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두고 나오면서, 결국 그녀는 복도 의자에 철버덕 주저앉아 버렸다. ... 서로 친구라는 것을 오랫동안 괴로워한 끝이어서였을까? 해진은 정직했고 대담했다. 정직한 건 힘이라는 걸, 설득력이라는 걸 그녀는 해진을 통해 알았다. 


병가를 떠나는 그녀를 앞에 두고 그는 위험스럽게 이어지고 있던 침묵을 먼저 깨뜨렸다. "어쩌겠어...?" 그녀는 그때야 그가 복잡한 것을 싫어했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여자에 대한 그의 의식은 간단하고, 가볍고, 유희적이었음을, 사뿐사뿐하기조차 했었다는 것을. 그랬다. 그는 해진의 말대로 분명 순간 순간 해진에게 가볍게 다정했으리라. 무의식적인 것도 같은 산만하고 유혹적인 눈빛을 해진과도 교환했으리라. 처음으로 그에 대한 저항이 솟아올라 그녀는 퉁박스럽게 그의 말을 되돌려주었다. 내가 물을 소리예요? 어쩌시겠어요?


"... 해진과는 어쩔 수 없어 ... 한 번도 나를 놓아준 적이 없지... 무안을 줘도 ... 떼놓아도 ... 본 척을 안 해도 ... 금방 내 곁에 와 버려." 그의 짧은 인중에 짜증기가 역력히 고이는 것을 보며 거짓말하지마세요. 하마터면 소리칠 뻔했다. 당신은 주춤거렸죠. 나를 바래다 주면서 해진에게도 섭섭한 작별 인사를 몰래 나눴죠. 당신은 내게 그랬던 것처럼 해진으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했을 거예요. 아쉬운 듯 여운을 남기고 가능성을 줬을 거야. 그리곤 모른 척 외면해서 속을 태우고 ... 비겁하지만 탓할 순 없는 일이라는 것 알아요. 알아. 그게 바로 당신이니까. 발음되지 못한 말들이 속에서 아우성 쳐서 그녀는 혀 끝을 깨물었다.


광기야, 해진의 소동을 포기 상태에 이른 사람의 무분별한 광기일 뿐이라고, 외면하고 싶은 마음 저편에 또 하나의 마음이 대립하고 있었다. 그를 위해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이 해진의 인생에선 없을 것이라는, 죽음과 생을 거의 똑같이 내놓을 대상으로 해진이 그를 정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한 결정은 이미 되어 있었는데도 그 결정을 피해 보려 했던 것은 그에 대한 미련이 아니었다. 그와의 온갖 습관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도, 그가 빠져 나간 그 텅 빔 속에 혼자 남게 되리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시간 한켠에 애매하게 섞여 있느라, 세상과 문을 닫아 버린 그 몇 해 동안의 자신과 마주서는 것에 겁을 먹은 것이었다. 아무 정열도 없었던 자신, 어떤 세계에도 통틀어 내줄 수 없었던 자신을 만날 일이 두렵고 고통스러워서였다.  


<조용한 비명>


"우리들은 이제 서로에게 아무런 울림을 주지 못하죠?"


운명처럼 느껴졌던 모든 좋았던 순간들이, 또 운명처럼 느껴지며 나쁜 순간들로 돌변해 있다.


<외딴방>


가끔 나는 기억이 안 난다. 어떤 부분, 그냥 지나칠 만도 한 어떤 부분을 너무나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는가 하면, 그냥 누구나 당연히 자연스럽게 기억나야 할 부분은 볕 좋은 날 양지처럼 텅 비어 있다. 


"어마, 내 정신 좀 봐 ... 나 시골 집에 좀 며칠 다녀올 거야... 깜박 잊고 문에 열쇠를 안 채웠네. 니가 저녁에 가서 좀 채워 줄래..."

...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고 남자는 문을 부쉈다. 냄새 때문에. 기다림 때문에.

...

아이를 떼라 했지요. 헤어지자는 게 아니라 아직은... 아직은... 그러나 그 말이 그녀를, 너무나 그리워 지금 가슴이 쥐어 뜯기는 것 같은 희재 언니를, 구더기밥이 되게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녀의 희미한 웃음이.. 한 줌이나 될까 한 허리가... 유품으로 나온 백 몇십 만원의 저축액이... 그 남자는 아이를 떼라, 했고... 나는 희미하게 웃고 있는, 어쩌면 그때는 희미하게 울고 있었을지도 모를 그녀를 안에 두고, 그 선반 위 육 개월도 채 못 신은 학생화를 안에 두고... 열쇠를 채웠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입술 속의 새

...

나는 슬픔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너를 껴안는다

내 모든 것을 잊기 위해

...


 

잔 없이 건네지는 술


세상의 어떤 술에도 나는 더 이상 취하지 않는다


당신이 부어준 그 술에

나는 이미

취해 있기에



구름은 비를 데리고

...

나는 삶을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속눈썹


너의 긴 속눈썹이 되고 싶어

그 눈으로 너와 함께

세상을 바라보고 싶어

네가 눈물 흘릴 때

가장 먼저 젖고

그리움으로 한숨지을 때

그 그리움으로 떨고 싶어

언제나 너와 함께

아침을 열고 밤을 닫고 싶어

삶에 지쳤을 때는

너의 눈을 버리고 싶어

그리고 너와 함께

흙으로 돌아가고 싶어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

첫눈 속에 파묻힌

생각들

지켜지지 못한

그 많은 약속들 위로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한때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었다, 그렇다, 나는

삶을 불태우고 싶었다

다른 모든 것이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릴 때까지

다만 그것들은 얼마나 빨리

내게서 멀어졌는가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여기, 거기, 그리고 모든 곳에

멀리, 언제나 더 멀리에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편 언덕-류시화


슬픔이 그대를 부를 때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라

세상의 어떤 것에도 의지할 수 없을 때

그 슬픔에 기대라

저편 언덕처럼

슬픔이 그대를 손짓할 때

그곳으로 걸어가라

세상의 어떤 의미에도 기댈 수 없을 때

저편 언덕으로 가서

그대 자신에게 기대라

슬픔에 의지하되

다만 슬픔의 소유가 되지 말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