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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 - 170일간의 재판 기록으로 밝힌 10.26의 진실
안동일 지음 / 김영사 / 2017년 6월
평점 :
책은 타인의 말에 쉽게 응답하지 않는다. 한 번 출판된 이상 개정판이 나오기 전까지 독자들의 찬사와 비판 혹은 비난까지 모두 묵묵히 견뎌내야만 한다. 오랜 시간 누군가의 책꽂이 속에서 숨쉬고 있으며, 그 '누군가'가 생을 다한다해도 책은 여전히 숨을 쉰다. 이것이 내가 책이라는 매체를 사랑하게된 까닭이다. 사실 책의 융통성없을 정도의 묵묵함은, 하루하루 빠르게 변화하고 그 변화에 대처해야하는 오늘날에는 적합하지 않다.
언제 가치가 폭락할지 모르는 비트코인들처럼 세상이 어떤 것에 가치를 두는가-는 무서울정도로 빠르게 변한다. 하지만 책은 그 흐름에 편승하지 않고 묵묵히 숨을 쉬고, 자신만의 가치를 실현한다. 순간의 가치에는 둔감할지 모르지만, 보편적인 가치와 함께 넓은 시대상을 반영한다. 아주 오래전에 쓰여진 고전들을 읽는 이유는 바로 이 떄문일 것이다. 어떻게 그런 매체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는 바로 그런 매력을 맘껏 뽐내는 책이다. 제목 그대로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저자가 당시 언론에는 공개되지 못했던 그 모든 기록들을 한풀이라도 하듯 풀어낸 이 책은, 내가 역사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음을 실감하게 해준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벌어진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재판에 대한 기록은 너무도 상세해서 내가 그 시대를 살고 있는 듯, 느끼게 했다.
이 재판의 기록들은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의 재판 씬과 닮은 듯 하다. 우선 뫼르소와 피고인 김재규 외 6인은 살기 위해 스스로를 변호하기 보다는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였으며, 전자는 살인 행위보다는 그의 평소 행실에 대한 판단으로, 후자는 너무도 빠르게 이루어진 재판 과정으로 부조리에 마주하게 된다. 자, 뫼르소가 아랍인을 총으로 쏜 것은 순전히 스스로의 욕구떄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소설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극단적 상황이고 10.26은 실화다. 그렇다면 후자의 경우는 왜 총을 쐈을까?
이유를 생각해봄에 있어서, 나는 내가 역사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수 십년전까지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가장한 독재 체제였고 이에 반항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리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지만은 지금 우리는 이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체감할 수가 없었는데, 이들의 변론과 재판과정은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케한다. 저자의 말마따나 "박정희 시대를 비롯하여 과거 정권의 쓰레기들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고, 이를 제거하는 몫은 우리와 우리의 후손에게 남겨진 책임이다. 역사와 시대에 대한 평가에서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 모두는 자유로울 수 없"다.
김재규는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유신의 심장에 총구를 겨눴다고 했다. 그가 평소에 썼던 붓글씨들을 보면 충동적인 살인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그 길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사후처리가 엉성했고 그의 사후처리가 달랐다면 그가 부조리로 가득한 재판 과정 속에서 죽어가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다. 그가 오늘날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재판 과정 속에서 그가 보여준 초연함과 굳건한 가치관이 한 몫했을 것이다. 뫼르소나 김재규가 왜 총아쇠를 당겼는지, 소설 속 가상의 인물과 현실 속 실존 인물을 비교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그 둘의 행동은 유사했지만 개인의 욕구를 추구했느냐, 집단의 욕구를 추구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 같다.
그의 재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명백한 사실들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였고 재판과정은 졸속으로 이루어졌다라는 것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사실들이 밝혀질 것이고 거짓의 그늘 속에 가려졌던 진실들이 고개를 들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섵부르게 '그가 의인이었다.' 혹은 '그는 악인이었다.'라고 판단을 내리지는 않으려 한다. 다만, 역사 속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나는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할 것 같다.
그가 최근 대중들에게 재평가를 받게 된 것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그가 생전에 말했던 "최태민을 조심해야한다."라는 말 덕분이다. 만일 게이트가 터지지 않았더라면 그가 대중들에게 재평가 될 수 있을정도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을까? 만일 박근혜가 성공적으로 대통령 임기를 마무리했다면 그가 이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 여태까지 하루하루 살기 바빠 가까운 과거조차 당연시하며 익숙해졌던 스스로를 반성하게 된다. 나는 역사 속에 살아가는 피고인이었으며 이제 나는 변론하기 위해서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