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영혼의 힐링 숲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단편소설 5 영혼의 힐링 숲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단편소설 5
알베르 카뮈 지음 / 붐북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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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는 허술하고 번역도 그냥저냥이지만 즐겁게 이 책을 읽은 것은, 대여 개념을 이용한 전자책의 저렴한 가격과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읽을만한 단편들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5번이라고 이름붙여진 것을 보아 시리즈로 된 듯한데, 여기서는 카뮈의 <어떤 손님>, 지드의 <전원 교향곡>, 옌센의 <앤과 암소> 그리고 사르트르의 <벽>이 수록되어 있다. 옌센을 제외하곤 현대 불문학하면 떠오르는 작가들의 짧은 작품들로, 분량은 적지만 작가의 철학은 잘 담겨있는 작품들이다.


어떤 손님

 <이방인>과 <페스트>는 가장 유명하지고 <전락>이나 <칼리굴라,오해>까지는 꽤나 유명하지만 이 단편은 따로 번역되지도 않았다. 포로를 호송하는 임무를 맡은 교사 다뤼, 전쟁이라는 부조리 앞에서 다뤼는 그와 포로인 아랍인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뤼와 선택과 아랍인의 선택. 보통 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아랍인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보이지만 이 작품에서 보이는 모습은 사뭇 다르다.


전원 교향곡

 지드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을 알고가는 것은 꽤나 중요하다. 독실한 청교도 집안에서 억압되며 자란 그는 성장하면서 그동안 눌려왔었던 감정들을 마구 분출하게 된다. 그러면서 종교에 대한 합리적 반항이 싹트게 되고, 이를 그의 작품에서 보여주게 된다. 제르트리드를 대하는 목사의 시선으로 소설을 전개해가는데,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을 화자로 설정해놓고 맘껏 비판하는 모습이 인상적인 작품.


앤과 암소

는 너무 짧아서. 소설이라기보단 짧은 콩트를 본 기분.


네 사형수가 곧 마주하게 될 벽은 죽음이자 불가항력이며 부조리 그 자체다. 인간의 생존에 대한 욕구와 이를 저지하는 죽음앞에 인간은 무기력해진다. 하지만 이 죽음 앞에서 인간은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소중한 정체성들을 지키고자한다. 그런 측면에서 톰이나 주앙과는 다르게 이비에타의 신념은 꽤나 놀라울 정도고 또 그의 모습이 사르트르나 카뮈가 말한 실존주의적인 모습이겠지만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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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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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국내 작가, 그러니까 '믿고 읽는 작가'가 3명 있는데 바로 성석제와 이기호, 그리고 김영하다. 앞의 두 분이 이야기꾼의 끝판왕이라면 김영하 분은 약간은 형이상학적이고 야릇야릇한 메세지를 남기는데 그 것이 너무 좋다. 물론 필력이나 문체는 기본적으로 장난이 없다. 이번 김영하 분의 신간은 <오직 두 사람>이라는 단편과 이 전에 발표했었던 단편들을 묶은 단편집이다. 발표시기가 제각각이다보니 같은 작가가 쓴 글임에도 약간씩은 차이가 느껴진다.



오직 두사람

 단편집의 제목이자 가장 최근에 쓰여진 글. 서간체를 통해 마치 소수민족의 최후의 두 사람처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서로뿐인 아빠와 딸의 이야기. 사회 속에 살고 있지만 결국 그녀와 같은 민족이었던 아버지의 죽음 앞에 복잡해진 딸. 관계는 많지만 그 모든 이들이 같은 민족은 아닐테다. 복잡미묘한 감정에 말이나 될까 싶을정도로 다소 극적인 편이지만 수미상관을 이루는 소수민족의 예시가 강하게 와닿았다.


아이를 찾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게 읽었던 작품. 시종일관 담담하게 그려지면서 다 읽고나서는 머릿속이 하얘져버릴 정도로 충격이 있었다. 잃어버린 아이에서 아내와 삶을 잃어버리고, 돌아왔다가 다시 사라지는 아이와 새롭게 등장한 아이. 음, 뭐랄까. 소유와 상실, 행복과 불행 사이의 미묘한 경계를 줄타기하는 듯하다. 사르트르의 <닫힌 방>이 생각나기도.   


인생의 원점

 가장 난해하다고 느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지만 쉽사리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제목을 중심으로 풀어보자면, 인생의 반환점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을 통해 인생의 원점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원점과 반환점은 누가 정하는가? 인생 안에는 수많은 선택과 책임이 따르고 그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극 중 인물의 말처럼 "인생의 원점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그런 정신적 사치가 아니라 바로 살아있다는 것. 그게 진짜 중요한거야."


옥수수와 나

 이 작품은 재작년인가 읽어본 적이 있다. 소설과 현실 사이를 넘나드는 방식이 독특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소설 안에서 주인공이 써내려가는 소설을 통해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꼬집는다. 의도한 것인지는 알겠지만 이미 한 번 느껴본 것인지 크게 와닿진 않았다. 그래도 다시 읽으니 믿음과 현실 사이의 거리감에 대해서 다시 읽게 된다.


슈트

 이 글은 그냥 세 네페이지 분량의 콩트로 써도 됐을 법했다. 다 읽고나서 읭?하면서 다시 읽었지만 글쿤, 하고 넘어가게 되었는데 아마 내 식견이 짧은 탓이리라? 


최은지와 박인수

 <아이를 찾습니다> 다음으로 좋았던 단편. 화자가 최은지와 박인수라는 인물과의 대화에서 보여주는 전개는 이상야릇하게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 위선이여 안녕, 이라는 말로 작품을 끝맺지만 결국 그에겐 최은지도 박인수도 남지 않았다. 


신의 장난

 SNS에서 이 책을 홍보할 때 이 단편을 카드뉴스로 올렸다. 예전에 봤던 희대의 불쏘시개 <이니미니>를 떠오르게 했으나 김영하라면 어떨까, 기대를 걸었다. 만 초반의 예상가능한 전개와 중반의 충격, 그리고 김 빠지는 후반부. 



 7년이라는 세월동안 쓰여진 글들인지 제각각 다른 느낌이지만 전체적으로 음울한 느낌의 단편집으로,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모든 단편들이 하나같이 삶과 죽음, 혹은 소유와 상실을 역설한다. 관계를 갖거나 끊거나, 무엇인가를 갖거나 잃어버리거나, 그 두 상충되는 것들은 사실 종이 한 장 차이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소유하기를 바란다. 소유욕이 커질 수록 상실하는 것도 많아진다. 그리고 사회는 점점 회색빛으로 물드는 것 같다. 소설가는 소설을 통해서 목소리를 낸다고, 김영하가 이 단편집에서 내고자 했던 7년간의 목소리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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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락 범우문고 42
알베르 까뮈 지음, 이정림 옮김 / 범우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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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카뮈가 '우연'한 교통사고로 삶을 마감하기 전 발표한 마지막 작품인 『전락』은 꽤나 난해한 작품이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등장하지만, 대화라기보다는 며칠에 거쳐서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떠들곤 한다. 독자들 또한 전직 변호사 클라망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게 된다. 그렇다고 시시콜콜하고 가벼운 이야기하는 건 아니고 과거를 회상하며 그가 느낀 바를 줄줄이 읊어댄다.


 유능했으며 낮은 곳에 있던 사람들을 변호하면서 존경을 받았던 클라망스는 "인격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남들의 존경을 받는 완전무결한 사람이 되기를 꿈꿨"다.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과정에서 그는 타인보다 위에 섬으로써 군림했다. 


 하지만 어느 날 저녁, 센 강에서 한 여인의 자살을 목격하지만 그는 방관해버리고 만다. 그것이 그가 마주한 '전락'이다. 그녀를 살려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함"에 그는 그저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을 뿐이다. 이 사건 이후로 그는 변호사의 길을 접고 고해 판사의 길을 걷게 된다. 그가 여태까지 써왔던 위선의 가면을 인지하고 벗어버리기로 한 것인데, 타인에게서 비난받는 것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먼저 자발적으로 비난-참회-하고 그 이후에 판사의 입장에서 타인을 판단하기 위함이다.


 말들은 어렵지만 쉽게 생각해보면 클라망스가 여인을 구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나 그 일이 벌어지고 난 이후 그가 자각하는 것-예컨대 위선이나 선함의 가면-이 곧 부조리다.『이방인』에서 부조리의 형태가 사회의 도덕적 통념과 죽음으로 나타났다면, 여기서는 아마 인간의 선과 악의 마음이며 이를 여인의 죽음을 통해 드러낸다. 선함의 탈을 쓰고 있지만 사실 인간에게 악한 마음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너도 나도 우리 모두, 우리는 모두 같은 흙탕 속에 빠져있다. 아무리 나는 다르다-고 몸부림 쳐봐도 결국은 같은 흙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를 인지하고 타인을 판단하기 앞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찰과 반성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위선에 앞서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진솔함에 따른 '잘못'들을 누구보다 먼저 반성하고 성찰한다- 이 것이 부조리에 대한 색다른 모습의 반항일런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소설의 내적인 모습보다 외적인 상황이 더욱 인상적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 책은 카뮈의 마지막 작품이다. 1954년 『반항하는 인간』을 통해 공산당을 비난하면서 그의 학문적 형제와 도 같았던 사르트르와 여럿 실존주의자들과 대립하며 비난의 칼날을 세웠고, 2년 뒤 알제리 혁명이 발발했을 때 카뮈는 그의 중립적인 태도로 좌익과 우익 모두에게서 비난을 받았다. 그의 노벨문학상은 찬란해보이지만 그 속에는 수도 없는 비난 속에 그의 멘탈은 갈기갈기 찢겨졌을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발표한 『전락』. 클라망스가 카뮈 자신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며, '너나 나나 모두 같은 흙탕 속에 빠져 있다'는 말은 어쩌면 그를 비난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향한 것처럼 느껴진다. 당신들이 나를 이토록 비난하지만 당신들이나 나나 그렇게 다른 처지는 아니라고, 그렇게 외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 그가 1960년 그 날, 사고 없이 여행을 잘 떠나고 더 많은 작품을 냈다면 어떤 작품이 나왔을까? 이루어질 수 없었던 과거기에 더욱 궁금증이 커진다.

천만에, 내가 염증을 느끼게 된 건 특히 다른 사람들에 대해섭니다. 물론 나의 결함을 모르는 바 아니었고, 그것을 유감으로 여기기도 했지요.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퍽 휼륭하다고할만큼 집요하게 잊어버리기를 계속했어요. 그 반면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힐난이 쉴 새 없이 내 마음속에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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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인간과 일
토머스 대븐포트.줄리아 커비 지음, 강미경 옮김 / 김영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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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차 산업혁명이니 인공지능이니 하도 매스컴에서 많이 언급을 하는 탓인지, 요근래에는 이와 같은 흐름을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나도 사실 그 "많은 사람"들 중 하나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을 보고나서야 인공지능이 우리의 턱 밑까지 올라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어릴 적 스티븐 스필버그의 <A.I>를 보고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언젠간 저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겠지? 물론 그때쯤엔 난 이미 죽었을테고"하던 것이 단지 10여년 전이라니. 무서운 속도로 발전해오는 AI가 이제는 무서울 지경이다. 사이버펑크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이 어쩌면 가까운 미래의 모습일까?


 AI가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모습은 사실 사이버펑크물처럼 자아를 가진 로봇들과 매우 집약적인 기술들이 인간의 삶을 구속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노동력을 AI가 대체하면서 AI가 인간의 일자리들을 빼앗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AI 시대, 인간과 일』에서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일자리들을 덜 빼앗길 수 있는가, 에 대해 논한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는 대체 무슨 소리를 했길래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 있을까, 하며 의심부터 들었다. 나는 AI가 단순 노동의 영역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지식집약적인 사업까지도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생각 앞에 무기력해졌고, 그래서 '사람 대 사람'으로 지속될 수 있는 감정노동에 관한 업을 가져야만 할까ㅡ 생각 했다. 그래서 이 책이 단순한 자기계발서처럼 뜬구름 잡는 소리만 늘어놓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자기계발서지 않을까라는 내 걱정이 무색하게 이 책은 매우 구체적인 편이다. AI가 지식노동자들의 일자리까지 빼앗을 수 있다고 경각심을 불어넣으며 저자인 토머스 대븐포트는 이에 대한 해결책이자 대처 방법으로 "증강"을 주장 한다. 


증강은 인간의 약점이나 한계를 찾아내 보완한다. (...) 게다가 증강은 약점보완이라는 목표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의 상대적 '강점'을 찾아내 더욱 증폭하거나 잘 활용할 수 있게 도와준다.                                                             -100~101p

'증강'이라는 어휘자체가 생소할 수 있으나 결국은 reinforce, 무엇인가를 강화시키는 의미인데, 어떤 전략으로 강화시키냐-에 대한 질문에 저자는 이와 같이 대답한다.


  전략들의 이름들이 너무 비유적이다 느껴질 수 있지만 전략에 대한 예시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각각의 방법에 맞는지에 대한 설명이 꼼꼼한 편이다. 자신이 어떤 부류의 사람이고 어떤 전략을 택해야할지 궁금하다면 책을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사족을 붙이자면 나는 옆으로 비켜서는 사람에 속하지 않나-싶다.


즉 일터란 정교한 기계와 인간이 협력관계로 결합해 서로를 증강하는 곳이다. 증강은 지식노동자들이 개인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고, 고용주는 경쟁상의 이유 때문에 추구해야 하는 것이며, 사회에서도 크든 작든 독려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저자가 책의 전체에서 강조하는 것은 증강이다. 증강은 인간이 그들의 내재적 능력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기계들을 적절하게 '이용'하며 발전해나가는 것이다. AI에 대한 대응법으로 영국의 경우 공교육으로 학생들에게 코딩을 가르치지만, 저자는 이와 같은 교육이 그가 말한 다섯 가지 방법 중 세 가지만 강조할 뿐이라며 비판한다. 앞서 그가 그렸던 다섯 가지 전략에 대한 묘사들은 이 주장에 대한 타당한 근거로 생각 됐다. 모든 인력들을 세 가지 부류에 넣을 수는 없다.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다양한 트랙과 가능성은 열어두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오늘날 많은 지식노동자들이 기계의 부상을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 유례없는 도구가 우리 인간을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려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엄청난 변화의 한복판에서 무기력하게 있어서는 안된다. (중략)

 저자가 책 말미에서 내리는 결론이자 요약은 마치 따라가기 힘든 기술의 발달 앞에 무기력해진 나를 저격하기라도하는 듯 느껴졌다. 저자 말마따나 "우리가 능력을 부여한 기계와 새롭고 긍정적인 관계를 맺"으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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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 - 170일간의 재판 기록으로 밝힌 10.26의 진실
안동일 지음 / 김영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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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타인의 말에 쉽게 응답하지 않는다. 한 번 출판된 이상 개정판이 나오기 전까지 독자들의 찬사와 비판 혹은 비난까지 모두 묵묵히 견뎌내야만 한다. 오랜 시간 누군가의 책꽂이 속에서 숨쉬고 있으며, 그 '누군가'가 생을 다한다해도 책은 여전히 숨을 쉰다. 이것이 내가 책이라는 매체를 사랑하게된 까닭이다. 사실 책의 융통성없을 정도의 묵묵함은, 하루하루 빠르게 변화하고 그 변화에 대처해야하는 오늘날에는 적합하지 않다. 


 언제 가치가 폭락할지 모르는 비트코인들처럼 세상이 어떤 것에 가치를 두는가-는 무서울정도로 빠르게 변한다. 하지만 책은 그 흐름에 편승하지 않고 묵묵히 숨을 쉬고, 자신만의 가치를 실현한다. 순간의 가치에는 둔감할지 모르지만, 보편적인 가치와 함께 넓은 시대상을 반영한다. 아주 오래전에 쓰여진 고전들을 읽는 이유는 바로 이 떄문일 것이다. 어떻게 그런 매체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는 바로 그런 매력을 맘껏 뽐내는 책이다. 제목 그대로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저자가 당시 언론에는 공개되지 못했던 그 모든 기록들을 한풀이라도 하듯 풀어낸 이 책은, 내가 역사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음을 실감하게 해준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벌어진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재판에 대한 기록은 너무도 상세해서 내가 그 시대를 살고 있는 듯, 느끼게 했다.


 이 재판의 기록들은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의 재판 씬과 닮은 듯 하다. 우선 뫼르소와 피고인 김재규 외 6인은 살기 위해 스스로를 변호하기 보다는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였으며, 전자는 살인 행위보다는 그의 평소 행실에 대한 판단으로, 후자는 너무도 빠르게 이루어진 재판 과정으로 부조리에 마주하게 된다. 자, 뫼르소가 아랍인을 총으로 쏜 것은 순전히 스스로의 욕구떄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소설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극단적 상황이고 10.26은 실화다. 그렇다면 후자의 경우는 왜 총을 쐈을까?


 이유를 생각해봄에 있어서, 나는 내가 역사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수 십년전까지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가장한 독재 체제였고 이에 반항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리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지만은 지금 우리는 이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체감할 수가 없었는데, 이들의 변론과 재판과정은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케한다. 저자의 말마따나 "박정희 시대를 비롯하여 과거 정권의 쓰레기들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고, 이를 제거하는 몫은 우리와 우리의 후손에게 남겨진 책임이다. 역사와 시대에 대한 평가에서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 모두는 자유로울 수 없"다.


 김재규는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유신의 심장에 총구를 겨눴다고 했다. 그가 평소에 썼던 붓글씨들을 보면 충동적인 살인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그 길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사후처리가 엉성했고 그의 사후처리가 달랐다면 그가 부조리로 가득한 재판 과정 속에서 죽어가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다. 그가 오늘날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재판 과정 속에서 그가 보여준 초연함과 굳건한 가치관이 한 몫했을 것이다. 뫼르소나 김재규가 왜 총아쇠를 당겼는지, 소설 속 가상의 인물과 현실 속 실존 인물을 비교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그 둘의 행동은 유사했지만 개인의 욕구를 추구했느냐, 집단의 욕구를 추구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 같다.


 그의 재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명백한 사실들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였고 재판과정은 졸속으로 이루어졌다라는 것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사실들이 밝혀질 것이고 거짓의 그늘 속에 가려졌던 진실들이 고개를 들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섵부르게 '그가 의인이었다.' 혹은 '그는 악인이었다.'라고 판단을 내리지는 않으려 한다. 다만, 역사 속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나는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할 것 같다.


 그가 최근 대중들에게 재평가를 받게 된 것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그가 생전에 말했던 "최태민을 조심해야한다."라는 말 덕분이다. 만일 게이트가 터지지 않았더라면 그가 대중들에게 재평가 될 수 있을정도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을까? 만일 박근혜가 성공적으로 대통령 임기를 마무리했다면 그가 이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 여태까지 하루하루 살기 바빠 가까운 과거조차 당연시하며 익숙해졌던 스스로를 반성하게 된다. 나는 역사 속에 살아가는 피고인이었으며 이제 나는 변론하기 위해서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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