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예찬 - 정원으로의 여행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안인희 옮김 / 김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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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는 향기가 있다. 간혹 향기를 맡기 힘든 책도 더러 있지만, 책에는 글이 있고 글에는 저자가 있으며 저자에게는 생각이 있다. 생각에는 향기가 난다. 혹자는 이를 악취라고도 한다. 그건 글에 담긴 생각이 어떻게 독자에게 와닿았는가에 달렸다. 무슨 이유로 책을 읽는가? 종이책은 무겁고 불편하며 글자를 읽는 것은 고단한 하루로 지친 현대인의 눈에 너무도 가혹한 일이다. 그럼에도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타인의 향기를 맡기 위해, 나는 그래서 책을 읽는다. 이 책에는 어떤 향기가 나고 또 저 책에는 어떤 향기가 나는가, 궁금하기에.





『땅의 예찬』, 표지부터 기묘한 매력이 풍긴다. 저자는 '한병철'로 한국인이지만 옮긴이가 따로 존재한다. 독일어로 집필된 작품이고, 이는 저자가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저자의 약력 또한 흥미롭다. 한국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하고 독일로 가셔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셨고 지금은 독일에서 철학 교수로 계시다고 한다. 최근에 '인문학적 소양'이 각광받았던 때가 있었지만, 문-이과를 모두 전문적으로 파고들기란 쉽지 않다. 왜 그 길을 걷게 된 것일까? 감성과 이성을 모두 경험한 사람의 생각에는 어떤 향기가 날까? 이 책에는 어떤 향기가 날까?




 이 책은 표지를 넘기면서부터 엄청난 향기가 난다.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로 향기가 난다. 출판사에서 매 페이지마다 피톤치드 향이라도 뿌려놓은 것 같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의 자연예찬. 일언반구의 여지가 없는 자연의 향기다. 





자연을 찬미하는 글에는 저자의 생각이 담겨있다. 『피로사회』에서 찌들 때로 찌든 현대사회를 비판했던 저자의 발길은 자연에서 멈췄다. "나의 정원이 다시 찾은 현실"이라는 문구가 심히 와닿는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거칠게 뛰어가고 있는 것일까? 급할 때일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하물며 종착지가 어딘지도 모르고 급한지 여유 있는지도 모르는 와중에, 박차를 가하는 게 맞는 걸까. 성과만을 바라는 현대사회일수록 자연으로 돌아가라. 이 책에서 느껴졌던 강렬한 향기는 이 메시지 때문일까.
 정원에서는 저만의 시간들이 교차한다고 했다. 현대인의 시간은 교차하지 않고 외롭게 흘러만 가는데.


정원의 시간은 타자의 시간이다.

정원은 내가 멋대로 할 수 없는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모든 식물은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정원에서는 수많은 저만의 시간들이 교차한다.


 글이 정밀하고 섬세하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지만, 너무 담백해서 저자가 얼마나 자연을 사랑하는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문장에서 편백나무 향이 나고 글자에서 장미꽃이 보인다.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수목원을 거니는 기분이다. 내가 글을 읽고 있는 건지 나무 그늘 아래 누워 나뭇잎을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껴 읽고, 아니 아껴 보고 싶었는데 하루 만에 다 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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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 100세 철학자의 대표산문선
김형석 지음 / 김영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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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이래로 출판 시장이 호황인 적 없다'라는 모 교수의 말처럼, 대한민국 연평균 독서량이 줄어드는 것은 이제 괴롭지도 않다. 글을 읽는다는 건 사실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보다는 고통에 가까운 일이다. 글을 읽으면서 즐거움을 얻는 이들이 많았다면 독서량은 줄지 않았을 것이다.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고, 너무도 빠르게 흘러가는 하루하루는 책 읽을 시간을 할애할 만큼 녹록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때때로 글을 읽는다. 정보를 얻기 위함일 수도 있고, 이 글을 읽는 것처럼 타인의 생각이 궁금할 수도 있으며, 긴 글을 읽기만 하면―넉넉하게 세 문단만 넘어가도 긴 글이라고 하자―발작을 일으키는 병에서 벗어나고 싶을 수도 있다. 


 얼마 전까지, 나는 그중에서도 세 번째, 긴 글에 익숙해지고 독해력을 위한 독서가 가장 절실하며 실용적인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형석의 『남아있는 시간을 위하여』를 읽고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뭐, 어떻게 본다면 모든 이유를 종합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내가 생각하는 독서의 이유이자 필요성은 타인의 생각에서 자신의 생각을 유도함에 있다. 글자를 읽는 것에서 생각을 끌어내는 것으로, 그러는 것이다.

 1920년 출생이시니 약 100세를 눈앞에 둔 저자의 이 책은 삶, 이별, 종교, 향수 등 추상적이고 무거운 것들에 대한 담백하고 가벼운 산문집이다. 철학과 교수였기에 자신의 인생관이 글 곳곳에 담겨 있는데, 그렇다고 이름만 들어봤을 여러 철학자들의 이론을 끌어온 글은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그의 생각을 찬찬히 읽어보고, 그다음에는 자신의 생각을 찬찬히 끌어내면 된다.


고독에 관하여
 저자는 비교적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인연을 떠나보냈다. 친구, 가족, 동반자 등, 여러 인연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고독의 시간을 보내는 저자의 글은 덤덤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절절하다. 


두 여인이 떠나 가정이 비었는데, 

두 친구가 먼저 간 후에는 세상이 비어버린 것 같아졌다.


"이런 생각도 해보셨어요? 우리 셋이 이미 팔순을 넘겼는데 언제 어떻게 자연의 순리에 따라 누가 먼저 가게 될지 모르잖아요. 욕심을 낸다고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만일 누가 먼저 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때의 허전함과 외로움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어요? ... 이제 다시 깊은 정을 쌓았다가 다가오는 사태를 어떻게 견디려고 그러세요..."


그러나 물속에서 두 손으로 물을 밀어내면 밀려 나가는 물보다는 밀려들어오는 물이 더 많은 법이다. 외로움을 잊으려고 애쓰면 더 큰 외로움이 찾아들곤 한다.


고독이 마음의 상태라는 말 속에서 '마음'은 인간적인 내용의 표현이며,

따라서 모든 고독은 인간적인 것이다.


 고독이라는 소재는 많은 문학작품에서 다뤄졌고, 그래서 흔하디흔한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상실'과 더불어 '고독'이라는 단어는 두 음절만 들어도 눈물샘이 자극될 정도로 언제나 애처로운 것이다. 이 상황이 제법 빈번하게 일어나는 데다가 상황에 마주했을 때 얼마나 괴로운지를 알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에서의 고독보다 수필에서 드러나는 고독은 더 마음이 아린다. 허구와 실제는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타인의 고독에서 사람들은 위로를 얻기도 한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구나, 아니면 나보다 더 한 사람도 있구나, 하고. 그의 생각과 글에서 나는 나의 고독을 돌아보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체감한다. 이게 글이 주는 순기능 중 하나일까.

삶의 이유에 대하여
 각자의 삶에 있어서, 가끔은 뒷전으로 밀릴 때도 있지만, 삶의 이유를 자문해보는 건 중요하다. 왜 사는가? 왜 사는가! 하루하루 이렇게 치열하든 치열하지 않든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은 죽은 물고기가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같이 

생명력이 없는 인간에 그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완성을 육체적이거나 자연적인 욕망에서 얻으려 해서는 안된다.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인간의 운명적인 과정이다.

그것을 거부하거나 무로 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완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격의 충분한 성장과 우리의 삶의 의미를 역사와 사회 속에 남기는 일이다. 즉, 삶의 의미와 가치를 나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와 역사 속에 남길 수 있을 때 참다운 완성이 가능해진다.


 삶은 유한하지만 이름은 무한하다. 잊혔다고 해서 그것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누군가의 손길이 다시 닿을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저자의 삶의 이유에 대한 생각이 나의 것과 다르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꼭 역사와 사회 속에 이름을 남겨야만 삶이 완성되는 것인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당연한 생각이고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타인의 생각을 읽어보고 자신 역시 생각을 해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매우 중요하지만 쉽게 잊고는 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자문하자.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답이 결코 나올 수 없는 질문에 각자의 대답에 근거를 들 수는 있어야 한다. 남아있는 각자의 시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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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흐르듯 대화하는 기술
요코야마 노부히로 지음, 김지윤 옮김 / 김영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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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온갖 말들이 오고 가지만이것들을 모두 '대화'라고 보긴 어렵다
대화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대화 (對話) [ː]

[명사]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 또는 그 이야기.


 어느 쪽이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바람에 '받기' 하는 대화도 있고, 설사 주고받고 있더라도 너무 대화가 헛도는 탓에 '주고받는다'라고 느껴지지 않는 것도 있다그럼에도 하루하루 살아가다보면 대화를 시도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해야만 한다, 해야만 한다! 어차피 해야할거라면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야 한다.


앙증맞은 디자인의  책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어떤 식으로 대화의 방향을 원하는대로 끌고갈  있는지를 설명한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을 유형별로 구분하고, 각각의 경우에 어떻게 대해야 그나마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유도할 있는지 설명한다


 예컨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를 외국인으로 간주한다든지-일종의 정신승리 같기도 했다-, 상대방의 헛소리에 일일이 대꾸해주지 않는다든지 . 교과서적인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어서 조금 실용 서적처럼 느껴진다.


 '경청' 중요성은 지겹도록 강조되지만 대화 중에 자기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면 입에 가시가 돋는 사람들도 간간이 있다. 단순히 조용히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말하며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알아줬으면 하는지, 일종의 '행간의 의미' 파악하는 , 말은 쉽지만 실제로 대화하다 보면 상대방의 말에 지쳐서 듣기를 포기한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대화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하니까. 해야지 ,


 책을 읽다 보면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싶기도 한다. 말을 주고받는데 있어서 논리 커뮤니케이션과 표면 커뮤니케이션의 비율을 조절한다는  조금은 딱딱하고 경직된 것처럼 느껴진다. 아마 저자가 컨설턴트인지라 공적인 자리에서 대화를 많이 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없잖아 있을 것이다


  마디로 빚을 갚는다- 말도 있듯이 대화의 중요성은 아주 오래전부터 강조됐다. 공적인 자리뿐만 아니라 사적인 대화에서도 ' 흐르듯이 대화'하는 것은 중요하다. 대화를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선 마냥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끊어야  때는 끊고 해야  말을 하는 , 아마도 원하든 원치 않든 평생 대화하며 살아가는 인생에서 꽤나 중요한 것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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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사기 - 우석훈의 국가발 사기 감시 프로젝트
우석훈 지음 / 김영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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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고만 살았냐? 속고만 살았다.

 ‘정직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에게 도덕의 영역으로 자리잡아왔지만, 애석하게도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땅땅거리며 사는 것 또한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온 현실이다. 남을 속이고 자신의 배를 불리는-이 모든 것을 사기라고 하자- 부조리를 방지하기 위해 국가는 법이라는 장치를 마련했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건으로 우리는 국가의 사기를 바라볼 수 있었다. 이 사건이 유일한 국가의 사기일까?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권력을 가진 자들의 부정부패는 너무도 쉽게 찾아볼 수 있어서 심지어는 예술작품들의 흔한 소재가 되기도 했다. 사기를 방지해야 하는 주체의 사기를 보고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정권이 바뀌었다고 세상이 좋아졌을까?

 

 우석훈의 <국가의 사기>는 개인이이 국가의 사기에 반응하는 방향을 제시한다. 정확히 말하면, 어떠한 사기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불편한 진실로 다가올지는 모르겠지만, 정보의 습득 자체는 어느 때보다도 용이해진 지금, 침묵보다는 진실에 마주하고 인지하는 것이 그가 생각한 국가의 사기에 반항하는 방법이다.

 

예나 지금이나, 시끌벅적하게 많이 떠드는 사회가 좀 더 건강할 뿐더러, 경제적으로도 효율적이다. 왜 이런 귀찮은 일을 지금 해야하는가?

...

구조와 싸우는 것은 실체 없는 그림자와 싸우는 것과 같은 일이다.

 

 책의 제목과 표지디자인은 음모론스럽고 자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알맹이가 꽉꽉 찼다. 저자부터가 경제학자이기 때문에, 상당한 수치와 통계로 국가의 사기를 까발린다. ‘클랜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몇몇 공공기관의 부조리함을, 사회적 배경과 수치를 통해 국가의 실패한 정책-유난히 MB의 것들이 많다고 느낀건 기분 탓이다-들을, 그러면서도 최근 사회적 문제로 부각된 관트리피케이션이나 사교육 문제를 조명하며 온갖 종류의 사기들을 개인들이 인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개인보다도 국가또한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사기를 당한 사람이 어떤 사기를 당했는지 인지하는지도 중요하지만, 사기를 치는 놈들이 자신의 부도덕함을 부끄러워하는 것도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그들에게 국민들을 대변하고 대리할 권리를 주었지, 국민들을 사기칠 수 있는 권리를 준 것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는 주택과 사교육에 너무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고 지식이나 문화로 지출하는 돈은 오히려 줄어드는 경향이다. 많은 나라가 국민경제의 미래라고 생각하고 있는 지식경제와 문화경제와 우리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저자가 밝힌 것처럼, 부조리 앞에 침묵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우리들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우리는 항상 더 행복한 삶을 추구하고, 그래서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모든 사람들에게 하루는 공평하게 주어졌지만,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는 제각각이다. 우리의 어제와 오늘이 더 나은 삶을 위해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꽤나 오랫동안 열정적인 하루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하루하루가 똑같이 흘러간다면, 방향이 틀린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국가는 그 존재 자체가 사기다. 사기를 아예 없앨 수는 없다.
그렇지만 지금보다 현저히 줄일 수는 있다.
그게 우리가 갈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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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새뮤얼 버틀러 지음, 한은경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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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태까지 많은 디스토피아 읽어 왔다. ‘디스토피아라는 가상의 세계관을 설정한 작품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현대 사회를 생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1984』나 『멋진 신세계』를 읽고 독자들은 전제주의에 대한 경계심과 우민화에 대한 우려를 갖고제각기의 방법으로 이에 대항해왔다.
  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기존의 이성이 파괴되었던 20세기에 발표된 디스토피아 작품들은 21세기의 현대인들에게까지 위대한 메시지를 던진다. 20세기의 디스토피아는 21세기에도 파급력을 가졌다그렇다면 19세기의 디스토피아는 어떤가?

 

신성이라는 단어만 언급되어도 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흐려진다. -184p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 존재의 절반의 놀라운 기능을 박탈하게 될 편협하고 배타적인 이성에 대한 시각에서 이중성이 추론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231p


 
새뮤얼 버틀러의 『에레혼』은 1872 초판 디스토피아 계의 할아버지쯤 되는 풍자 소설이다1984』나 『멋진 신세계』는 물론이거니와 조르주 페렉의 W 혹은 유년의 기억』  W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은 에레혼과 매우 닮았다버틀러의 에레혼nowhere 거꾸로  erewhon 19세기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준다에레혼은 그야말로 부조리’  자체라고 있다질병은 죄악이라 몸이 아픈 사람들은 법으로 처벌을 받는다오히려 범죄자들은 일말의 죄의식도 갖지 않는다. ‘비이성의 대학 존재할 정도로 이들은 이성보다도 부조리를 우선시한다이와 같은 일반적인 도덕관을 역으로 뒤집어 놓은 것은 당대 영국의 풍습들에 대한 풍자로 보인다 
 

판사의 선고가 끝나자 죄수는 자신이 정당하게 처벌받았으며 공정한 재판이라고 중얼댔다. -132p

 

 특히 11번째 챕터인 병자에 대한 재판에서부조리하다고 생각되는 병자에 대한 처벌을 모두가 이해하고 인정한다심지어병자인 죄수까지도만약 유리몸인 내가 에레혼에서 태어났다면 진작에 종신형을 받았으리라아니아기에 대한 이유 모를 비난이 당연시되는 사회이니 아마 태어나자마자 나를 향한 손가락질에 화병으로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인간의 귀가 불필요해지고 기계 자체의 세밀한 구조에 의해 기계끼리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으며, 그 언어도 동물의 울음소리에서 인간의 언어처럼 복잡한 구조로 발전하는 때가 오리라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253p

 

 하지만 소설의 백미는 소설의 끄트머리 쪽에 있는 기계에 대한 에레혼 사람들의 인식이다. 23챕터 이전까지는 에레혼의 전통을 소개하며 독자들이 가상의 세계관에 빠져들게 했다면이후부터는 에레혼의 가까운 과거와 현재예상되는 미래를 이야기하며 독자들이 살고 있는 현대 사회를 되돌아보게 한다에레혼에서는 대규모로 기계를 거부하는 러다이트 운동이 있었다반기계파의 승리로 모든 기계는 파괴되었고 화자의 시계가 문제 되었던 것도 때문이다러다이트 운동은 실제로 19세기 영국에서 있었던 일인지라 소설에 당대의 시대상이 반영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하지만 반기계파에서 내세운화자의 번역으로 작성된 기계의 ’ 챕터에서 보여주는 통찰력은 감탄스럽다.
 

증기기관에 의식 같은 것이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중략)…

현재 인간은 자신이 이 주제에 관심이 있다고 믿고

기계가 더 번식하게끔 수많은 노동과 시간과 생각을 투여한다.

 
 19
세기 중반인 1859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되고 학계는 논쟁에 휩쌓였다기저에 창조론을 종교계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고대립이 시작되었다버틀러는 진화론을 기계에 차용한다기계에게도 의식 존재하며 인간이 그랬던 것처럼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는 기술의 발전이 현대 사회기술을 사용하는 주체인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없다 지배는, 당장 우리에게 주어진 문명의 이기를 앗아간다면 이전 같은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편리함의 지배 모습으로 나타난다이제 와서 19세기의 러다이트 운동처럼 편리한 것들을 파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하지만우리가 1984』나 『멋진 신세계』를 읽고 비판 의식을 가진 것처럼편리함에 모든 것을 의존하지는 말아야 같다. 편리한 것들이 해결해줄 없는 필수 불가결한 불편함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불편함을 밀어내지 말아야 한다.
 
 
에레혼에서는 모든 기계를 파괴하는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이에 대응했다에레혼에서도 기계파와 반기계파 사이의 오랜 갈등이 있을 정도로 극단적인 방법이다에레혼이라는 국가가 디스토피아로 설정되었기에 과격한 모습을 보였지만어쨌거나 그들이 보여준 비판 의식은 그들의 '내재되고 자연스러운 부조리함'과는 달리 꽤나 건강해보인다. 어떤 면에서는에레혼이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사이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친다인공지능을 포함한 고도의 문명의 혜택은 유토피아인가디스토피아인가 질문에 대한 논의로부터 진정한 유토피아 향하는 길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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