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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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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에게 '전간기'라는 표현은 매우 낯설다. 유럽에서 두차례 일어난 세계대전의 '사이' 기간을 일컫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한국인들이 '아직' 조선이었던 시점이었다. 오늘날 한국을 풍미(하는, 혹은 ) 할 것처럼 보이는 '뉴라이트' 역사관에 의하면, '본토' 일본이 '한반도'를 '본토'처럼 개발한 덕분에 오늘날 한국의 경제성장이 가능했다는 것인데, 이 '새로운' 역사관에 의하면, '전간기' 시점은, 조선이 '본토' 대우를 받으면서, 집중 투자가 이루어지는 시점이 되겠다. 

그런데 그런 '본토'중의 하나가 바로 영국이었다. 영국과 일본은 섬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섬'에 사는 사람들의 특성을 고루 공유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단지 일본보다는 영국이 더, '농업'을 했고 '지주'가 많았고 이 '지주'들이 '전국대표자회의' 형식의 의회를 구성하여 국왕 권력에 대항했다는 역사가 있다. 물론 일본인들은 '국왕'까지 세우는 정치체제를 오랫동안 갖추지 못해 '막부' 즉 일종의 '임시' 군사통치기구를 오랜 세월 유지했다는  차이가 있다.  

1920년대 '본토' 영국은 비록 '황혼기'에 이르기는 했지만 여전히 '제국'의 위용을 갖추고는 있었다. 오웰의 글에 의하면, 이 시기에 버마는 여전히 영국의 통치하에 있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듯 말이다. 그의 글 교수형에 보면 알 수 있다.  

죄수는 목에 올가미가 고정된 순간부터 자신의 신에게 외치기 시작했다. "람! 람! 람! 람! 람!" 하며 고음으로 반복하는 이 외침에는 도움을 청하는 기도나 절규처럼 급박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종소리 같은 안정감과 리듬감이 있었다.(27쪽 7-8줄)  

나는 '람 람 람 람 람'이 뭘까를 고민해보았다. '뭘까' 보다는 당시 비록 황혼녁에 와 있기는 하지만 '아직' 글로벌 영향력이 강성했던 영국의, '최고' 엘리뜨 눈에 비친 '버마' 원주민의 '종교'에 대하여 사유하게 되었다. 조지 오엘은 아마도, 독일의 쇼펜하우에르처럼, 불교를 공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에 들어간 불교는 인도보다 미얀마에서 유래되었다. 미얀마 불교는, 19세기 후반기 민돈왕 시기에 '수행'이 장려되어 위빠사나의 복원이 이루어지던 시점이었다.  

결국 '람 람 람 람 람'은 일종의 사마타 수행을 위한 '주문'이었을 것이다. '사마타' 수행이란 무엇이든 하나에 집중하면 가능한 수행법이다. 이 '사형수'가 람 람 람 람 람을 '안정감있게' 반복했다는 것은 평소에 수행을 했다는 의미다. 모든 기도는 이런 '사마타'의 의미가 담겨있다. 단순 반복의 '주문'도 그러하다. 한국에서 오랜 전통을 가진 '염불' 수행은, 불교 수행의 40가지 사마타 수행법중의 하니였다. 이 '고등 종교'의 나라 미얀마에서, 1920년대쯤이면 수행불교가 점점 확장되어 가던 시점 아닌가.  

조지 오엘은 이튼 출신이었다고 한다. 버마에 와서 경찰로 5년을 근무했다. 그야말로 '인류'학적 견지에서, 보다 '우월'한 앵글로 색슨족이 어떻게 '식민지 종속국의 원주민'을 다루는가 잘 나와 있다. 헌데 5년 근무로 끝이 났다. 조지 오웰은 제국의 황혼녁에서 진정한 지식인의 길을 걸었다.  

그의 첫번째 길은, 런던시내에서 노숙자 노릇을 하는 것이었다. 이 낯익은 풍경은 서울역을 연상케 한다. 한국에도 조지 오엘과 비슷한 실천을 한 '인문학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지 오웰은 식민지 경찰을 그만두고 돌아와서 스스로 노숙자가 되었으니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그 결과 지독히도 상세하고 런던 시내의 1920년대 '노숙자 생활'을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읽고 쓰는 것은 지식인의 질병과도 같다. 인터넷때문에 오늘날은 더욱 심하다. 블로그는 물론 이와 같은 '서재'도 그러하다. 조지 오엘도 이런 질병에 걸려 있다. 한국인들이 가령 식민지 시대에 '식민지'라는 것을 천추의 한처럼 머리에 이고, '읽고 쓰는' 질병에 걸린 지식인들을 배출한 것처럼, 제국의 황혼에 있는 영국에서, 조지 오웰은 '제국의 엘리뜨'라는 사실에 절망하여 읽고 쓰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상상력은 '제국'의 중심에 있는 나라의 엘리뜨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데까지 나아간다. 오늘날 지구는 그의 '상상력'과 매우 유사하게 구성되고 있다. 1984년에서 그는, '대형'에 의해 지배되는 지구를 묘사했다. 특히 지구가, 몇 개의 '국가연합'으로 짜여지는 구도를 그는 벌써(!) 일찌기도 사유했던 것이다. 유럽연합에 이어서 남미연합이 형성되었고, 아시아연합은 태동중이며, 북미연합은 '급작스럽게' 실현될 가능성이 높다. 그의 사유, 정말 대단했다. 1984년에서 그는 '국가연합' 사이의 전쟁으로 끊임없이 위기에 직면한 지구를 그린다. 정말 엄청난 상상력인데, 제국의 지식인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사유이기도 하다. '제국의 수도'에서 그 분위기를 흠뻑 적셔야 가능한 사유인 것이다. 그러니까 빽투더 퓨처!!  과거가 미래였다. 런던이 당대 제국의 수도였다. 그는 그 분위기를 '저항'으로 감지했을 뿐이다. 허나 달도 차면 기운다.  비엔나가 1917년까지 제국의 수도 비슷한 지위를 가졌지만, 1920년대에 들어오면 '추억'이 되버리듯, 런던도 그런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런 것을 예민하게 감지했던 것이다. 1984년의 세계관은 '디스토피아'이다. 데쟈뷰는 지속된다.

요컨대 오늘날 서울시의 '화려한' 풍경을 '제국의 수도' 런던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에 모두 거쳤다는 의미인데, 아마도, 1851년 '만국 박람회'를 지나면서, 1890년대가 그 절정이었을 것이다. 해가지지 않는 제국은 '농담'이 아니었다. 이튼 출신은 그 제국의 '경영'을 맡는 사람으로 성장했는데, 이튼에서 '케임브리지'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케임브리지에는, 오늘날 장하준이 교수로 재직하는 '정경대학'에서, 가령 케인즈가 있었다고 하며, 비트겐슈타인이 또 여기 머물렀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사숙 스승격인 러셀과 화이트헤드도 여기 있었다. '번영의 한복판' 혹은 그 '말엽'에 있었던 풍경이었고, 이런 것은 지구의 이곳 저곳에서 데쟈뷰 되고 있다. 오늘날 런던은 '뉴욕'에 뒤쳐져 있다. 비엔나가 19세기 말엽에 런던에 뒤쳐져버린 것처럼 말이다.  

조지 오엘은 그 모든 것을 겪은 셈이다. 그의 '경력'을 뉘라서 대신할 수 있을까? 한국에 대입하면 '우물안 개구리'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적어도 박지원의 시기만해도 그러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소중화주의'를 이해했는데, '감히' 요나라를 물리쳤다는 자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송이 요에 조공을 바치던 무렵, 고려는 요나라 군대의 침공을 여러차례 물리쳐버린 '전력'이 있다. 이 '놀라운' 역사는, 오늘날의 번영과 중첩된다. 무슨 이야기인가!! 지 20의 영향권도 있지만, 갑자기, 한국의 '그 모든' 역사들이 자랑거리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조지 오엘의 1920년에서 1950년까지는 '제국의 황혼녁'이었고 '세기말'적인 대전쟁이 두차례나 일어났다. 이 두차례의 대전쟁에서 그는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그의 생애는 '종속국'에 있으면서 제국의 수도를 들락거렸던 당대의 '글로벌 지식인' 박지원보다 훨씬 다채롭고 모험적이면서 '황혼'을 반영한다.  

그리고 인간은 어디나 유사한 캐릭터가 데쟈뷰됨을 나는 실감한다. 하지만 한국인의 적응력은 너무도 탁월해서, 조지 오엘과 같은 '글로벌 수준의 저항 엘리뜨'도 다시 보기 어려울 것 같다. 그는 스페인 내전에까지 공화국군으로 참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국의 황혼에 대한 '대처' 법으로 스스로 사회주의자가 되어, 영국 노동당에 가입했다. 이 영국 노동당은 제국의 황혼을 장식하는 일을 맡았는데 그래서 주황색을 띠는 것일까? 헌데 한국에는 과연 조지 오엘 수준의 글로벌 저항 지식인이 있기나 할까? 한국의 이튼은 경기고교이다. '경기고교' 출신으로 '운동권'에 몸담았다가 지금 유력한 진보진영의 인물로 큰 사람이 있을까? 눈을 씻고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은, 계기가 오더라도, 한국인이 '제국'으로 성장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일까? 허나, 유목국가 요의 압력을 물리친 고려는 당대에 이미, 송나라와 대등한 수준으로 교역하는, '부유한' 강소국이었다. 이런 점에서 한국에서도, 조지 오엘과 같은 캐릭터의 데쟈뷰 개연성은 충분하다. 물론, '제국' 혹은 그와 비슷한 포지션 설정도 불가능하지 않은 역사적 계기를 맞이하고 있다. 따라서 '반엠비니' 하면서 정치를 '우물안 개구리 다툼'으로 만드는 이런 것을 완전히 청산할 필요가 있다. 조지 오엘의 저작은 이런점에서 '섬세'하기 짝이 없으면서 읽고 쓰지 않으면 병발하고 마는 제국의 황혼기 지식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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