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간의 굴레에서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평점 :
2011년쯤 읽었던가? 그리고 올해 초에 두 번째로 읽었고..
내가 읽은 세계문학 중에서 세 번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재미있게 본 책이다.. 작품의 줄거리도 물론 재미있지만 인생을 살아가면서(결혼 전까지) 겪을 수 있는 사연들이 그토록 다양하고 구구절절 많을 줄은 나 역시도 경험해 본 바있는 성장기이긴 하지만 미처 그렇게까진 느끼지 못했었다.. 그 정도로 작가 써머셋 모옴의 스토리 창출 능력은 그 어떤 작가보다도 탁월했다.. 그의 작품은 달과 6펜스 말고 더이상 읽지 못했지만 이 두 작품만으로도 작가의 위대성과 흠모는 내게 있어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절름발이 필립.. 다리를 저는 것만큼이나 성격도 둔하고 센스 없지만 착하기로만 따진다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좋은 남자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백부의 손에서 자란 탓에 약간 기가 눌린 상태로 성장을 하긴 했지만 천성은 그리 의기소침한 편도 아니어서 '아니, 병신 주제에 놀고 있네~'라는 평가를 심심찮게 타인들로부터 들을 정도로 자신감도 어느 정도는 소유하고 있는 남자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본인에게 남겨 놓은 유산을 믿고 유학 시절부터 돈의 소중함을 모른 채 인심 좋게 베풀면서 살아 갔던 것이 필립의 젊은 시절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는 첫 번째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됐다.. 친구들에게 비교적 후한 인심을 쓰면서 살아가던 필립에게도 심적 육체적으로 여자라는 존재가 나타났으니 그 잡것이 바로 밀드레드.. 음식점의 웨이츄레스로 일하는 그 잡것에 순진한 필립이 제대로 feel 이 꽂힌 것이다.. 비록 약간 불구의 몸이지만 한창 젊은 혈기가 뻗치는 시기였으니 필립의 눈엔 그 잡것의 좋은 점만 보였을 건 당연한 이치일 게다.. 열심히 그 잡것을 쫒아다니면서 어떻게든 자기의 여자로 만들어 보려는 정열 그 하나 때문에 필립의 눈은 썩은 동태의 눈으로 타락하게 되고 말았다.. 그 눈이 콩깍지가 씌어서 그랬든 어쨌든 간에 호감이 가는 여자가 진정한 여자인지 잡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눈이라면 그건 썩은 동태눈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잡것보다 더 더 잡것은 필립이 감기로 아파 누워있을 때 그를 간호해 준 의대생 자식,,(이름은 기억 안 난다.. 그런 개자식은 이름 같은 거 몰라도 된다..) 필립을 도와 줄 때까지만 해도 꽤 괜찮은 녀석이었는데 나중에 밀드레드 그 잡것과 눈이 맞아 필립을 희롱한 천하의 개잡것..
모옴 작가님께서는 그 자식을 길거리를 걷다가 마차에 확 깔려 뒈지게 만들어 주셨으면 참 좋았을 것을.. 내 기억엔 그 자식이 별로 불행해지지 않은 걸로 기억이 된다.. 하지만 어쩜 그런 설정이 훨씬 현실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잘못을 했다고 무조건 붓으로 그 놈 모가지를 댕강 날려버리는 것도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자고로 남의 돈 떼먹은 놈들하고 남의 애인 꼬드겨서 붙어 먹는 것들은 이 세상 최고의 저질들 중에 저질 그 부류에 속하는 것들이리라..
그 착한 필립의 단점이라면,, 앞서서도 말했지만 필립 자신에겐 백부가 죽으면 상속받을 유산이 꽤 되는 액수라서 그걸 믿고 생활을 좀 나태하게 해 왔다는 게 그나마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밀드레드를 또 받아 주고 또 받아 주고를 반복할 수 있었던 것도 필립 특유의 착한 천성도 그 이유였겠지만,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유산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필립은 밀드레드에게 금전적으로 많은 걸 베풀 수 있었고, 그런 것들이 필립의 단점을 더욱 부각시킬 수 있었던 계기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나중에 주식 투자 같은 걸로 생활의 빈곤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백부가 왜 이리도 오래 사시나, 이젠 돌아가실 때도 됐으련만' 하며 백부의 죽음을 손꼽아(?) 기다리는 장면은 써머셋 모옴 선생님만 쓰실 수 있는 인간의 저 밑바닥 솔직성의 서글픈 유머적 우리네 자화상이어서 한편으론 우스우면서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또한 이런 류의 장면 장면들이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솔직한 속마음을 들춰내는 것...공감이 너무 커서 부끄러워 혼났다.. 그럼 나도 나쁜 놈인가?
필립은 젊은 시절 웬만한 굴곡의 시기를 겪는 젊은 사람들의 고된 경험이란 경험은 다 해 본, 길거리에서 노숙까지 할 정도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올라옴으로써 그의 고통의 시절은 여자의 배반과 사람들의 표시 안 나게 저지르는 무시의 속삭임등으로 최저의 바닥을 찍고 그의 인생에도 새로운 빛줄기가 비추기 시작했다.. 백화점에서 열심히 일을 하며 능력을 인정받았고,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꽤 괜찮은 인생의 선배를 만남으로써 실제로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받는 동시에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됐으며, 아울러 그 멘토의 큰 딸과 결혼까지 이르게 되어 거친 인생의 파노라마에서 변곡점을 거쳐 결국 상승의 시기로 접어드는, 조금 늦기는 했지만 마지막 정열을 다 바쳐서 의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진정 자신을 필요로 하는 무의촌으로 아내와 함께 제2의 인생을 위해 떠나간다.. 그리고 나는 그 장면에서 무한한 감동과 함께 눈물도 조금 흘렸다.. 비록 몸이 좀 불편했지만, 별로 기죽지 않고 착한 심성으로 세파를 꾸준히 견뎌내고 결국엔 안정된 생활의 가장, 그리고 한 시골 마을의 의사선생님이 된 그의 모습에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휴머니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밀드레드,,한 여자로서 어쩜 불쌍하게도 느껴지는,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 잡것.. 필립이 자기를 무조건 좋아한다는 생각으로 상대방의 진심을 약점으로 잡고 그 착한 남자를 가지고 놀았던 잡것.. 결국엔 '한 번 창녀는 영원한 창녀'라는 금언을 만들어 내고서 그 잡것은 사라졌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느껴 왔던 몇 가지의 지론 중에서,,<한 번 말썽피우는 것들은 끝까지 말썽을 피운다>라는 지론에 그 힘과 무게를 실어 준 장본인,, 잡것 밀드레드..
여우 같은 얍쌉한 삶의 잡것 밀드레드 보다는, 거북이처럼 느리고 아둔해 보여도 착한 심성을 갖고 자기 길을 향해서 묵묵히 걸어가는 필립을 그래도 내가 닮고 싶은 이유가 이 작품의 결론에 있다.. 나는 최소한도 필립의 끈기를 추종하며 오늘도 재미 없는 세상,, 그래도 나만의 재미를 필립과 함께 찾아 보면서 살아 간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이제 겨우 두 번밖에 읽지 못했지만, 아마도 내가 죽기 전까지 열 번은 읽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톨스토이는 '두 번 이상 읽고 싶지 않은 책은 애초부터 읽지 말라'고 했고, 써머셋 몸은 '책이란 그저 한 번 읽는 걸로 족하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한 번만 읽으면 족하다는 독서의 철학을 갖고 계셨던 분이 쓴 당신의 작품을 후세 사람들이 이토록 계속해서 읽고 또 읽고 싶은 책이라고 생각하게 될 줄 모옴 선생께서는 예상하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