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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평점 :
"뭐라고요?"
"메타포라고!"
"그게 뭐죠?"
시인은 마리오의 어깨에 한 손을 얹었다.
"대충 설명하자면 한 사물을 다른 사물과 비교하면서 말하는 방법이지."
"예를 하나만 들어주세요."
네루다는 시계를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좋아, 하늘이 울고 있다고 말하면 무슨 뜻일까?"
"참 쉽군요. 비가 온다는 거잖아요."
"옳거니, 그게 메타포야"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중 28쪽에서 -
메타포가 위험하다는 것을 나는 이미 말한 적이 있다.
사랑은 메타포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작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작은 상자에 담겨져서 물에 떠 내려온 아기"
사랑은 메타포로 시작하는 것이다.
-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
칠레 남부의 작은 섬...이슬라 네그라
꿈도 희망도 없이 하루 하루를 의미없이 보내고 있는 청년 마리오 히메네스가 우연한 기회에 우편배달부가 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늘 같은 일상의 반복으로 삶이 무미건조했던 마리오에게 칠레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편지를 배달하는 일이 훗날 그의 삶 전체를 바꿀만한 위대한 사건이었음으로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을 평면적으로 펼쳐놓고 보면, 무수히 많은 만남과 이별의 반복이다.
스쳐가는 의미없는 만남도 있지만,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만남과 이별도 존재한다.
호기심 많고 순수한 우편배달부 청년 마리오에게 메타포의 예를 드는 장면에서
나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렸다.
토마시와 테레자... 테레자를 작은 상자에 담겨져서 물에 떠 내려온 아기로 비유한 토마시...
메타포는 그렇게 그들 사랑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또한 마리오와 시인 네루다는 메타포를 통해 서로에 대한 우정을 조금씩 쌓아가기 시작한다.
마리오에게 메타포의 아름다운 세계를 열어준 네루다가 스승이자 친구였다면...
그의 가슴을 설레임과 떨림으로 이끈 것은 베아트리스라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사랑에 빠진 마리오는 네루다에게 베아트리스에게 줄 시 한편을 써 달라고 부탁하고,
네루다는 결혼을 반대하는 베아트리스의 어머니를 설득해 주는 사랑의 메신저 역할까지 하게 된다.
"그가 말하기를..... 그가 말하기를 제 미소가 얼굴에 나비처럼 번진대요."
"그러고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났어요."
"그랬더니?"
"그랬더니 제 웃음에 대해 뭐라고 말했어요. 제 웃음이 한 떨기 장미고 영글어 터진 창이고 부서지는 물이래요. 홀연 일어나는 은빛 파도라고도 그랬고요."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중 62쪽에서 -
베아트리스의 어머니는 마리오의 메타포를 사악한 마약으로 치부했지만, 사랑에 빠진 마리오와 베아트리스에게는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들일 뿐 이었다.
네루다와 만남은 마리오의 언어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 만남은 세상과 사물을 보는 시각을 변화시켰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사랑에 빠진 자신의 마음을 메타포로 고백하며 시인의 꿈을 꾸게 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천국으로 가는 열차는 완행이고, 축축하고 숨 막히는 역에서 지체하는 법이다. 오직 지옥행 열차만이 급행이다. 바로 그 지옥의 열기가 혈관을 따라 솟구쳤다.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중 79쪽에서 -
"시인 동무, 당신이 저를 이 소동에 빠뜨렸으니 책임지고 저를 구해 주세요. 당신이 제게 시집을 선물했고, 우표를 붙이는 데에만 쓰던 혀를 다른 데 사용하는 걸 가르쳤어요. 사랑에 빠진 건 당신 때문이에요."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예요!"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중 85쪽에서 -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손으로 직접 쓴 편지이다.
손으로 만든 선물은 그 사람의 체온이 담겨 있어 가장 정성스럽고 소중하다. 그 중에서도 마음을 담아 쓴 편지만큼 나를 감동시키는 선물은 없었다.
그 편지에 파블로 네루다의 시 한구절이 인용되어 있다면... 아마 나는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을 열렬하게 좋아하게 될 것 같다.
나는 네루다의 시집 "질문의 책"을 갖고 있지만, 이 소설 속에는 주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에 담긴 시들이 인용되어 있다.
베아트리스의 어머니가 마리오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장면은 노골적이지만 유머러스했으며, 베아트리스와의 사랑을 나누는 장면의 비유적 묘사도 특별한 재미를 준다.
무엇보다도 잔잔하면서도 편안한 문장들... 그 안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너무 좋아서 책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살바도로 아옌데가 칠레 대통령에 당선되며 네루다는 파리 대사관으로 임명된다.
단 한 사람을 위한 우편배달부였던 마리오와 그를 시의 세계로 이끌었던 네루다는 이별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프랑스에서 날아 온 한통의 편지와 소포 꾸러미
"유식한 척하는 양반, 유몰론자가 뭐요?"
코스메가 입에 거품을 물고 말했다.
"장미와 통탉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할 때 항상 통닭을 집는 사람이죠"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중 130쪽에서 -
마리오는 이제 더 이상 섬에서 시간을 죽이며 살아가는 꿈없는 백수 청년이 아닌 것이다.
모든 사물에 의미 부여를 하며 메타포를 만들어 가는 삶에서 몸과 마음으로 시를 쓰는 시인으로 바뀌었다.
외교관이 되어 프랑스로 간 네루다는 마리오와 친구들이 있는 작은 섬...이슬라 네그라를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 녹음기를 가지고 이슬라 네그라를 거닐면서 마주치는 모든 소리를 녹음해 줘.
우리집 유령이라도 필요해. 건강이 좋지 않다네. 바다가 아쉬워. 새들도 아쉽고. 우리 집 소리를 실어 보내주게. 정원에 들어가서 종을 울리게. 먼저 바람에 울리는 작은 종들의 가냘픈 소리를 녹음하게....그 다음에는 바윗가로 가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담아줘. 갈매기 소리가 들리면 녹음해 주고. 밤 하늘의 침묵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까지도. 파리는 아름답지. 하지만 내겐 너무 큰 옷이라네.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중 108쪽에서 -
마리오는 네루다를 위해 소리를 모으기 시작한다.
시와 바람소리, 큰 종을 울리는 소리, 갈매기 울음소리, 벌집 소리, 파도가 물러가는 소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기의 탄생을 알리는 울음 소리를 녹음한다.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우선 책장을 넘기는 바스락 소리, 공원으로 소풍 나온 아가들의 까르륵 거리는 웃음소리,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의 순수한 속삭임 그리고 새벽의 적막함을 녹음하고 싶다.
그리고 자동차 소리, 핸드폰의 쉼없는 진동벨 소리, 미움과 갈등의 소리, 전자제품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는 제외하고 아날로그의 소리만 남기고 싶다.
병을 얻어 다시 이슬라 네그라로 돌아온 네루다는 이미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아옌다의 노력도 결국 쿠데타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고 칠레는 사회적,정치적 혼란의 시대를 맞이한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마리오는 마지막으로 편지를 배달하려 하지만, 군인들의 통제로 그것마저 여의치 않게 되자 전보의 내용을 모두 외워 버린다.
그리고 네루다와 마리오의 마지막 만남...
"무덤을 파는 건 좋은 직업이라네, 마리오. 철학을 배우니까."
그 검은 물이 지금 이 순간 시인에게 비밀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아름다움과 무가 교차된 검은 물, 쿠데타 발발로 두 눈이 가려지고 손목마다 피를 흘리고 있을 시체들 아래도도 흐를 그 검은 물이 네루다의 입에서 시 한수가 흘러나오게 했다.
마리오는 네루다를 뒤에서 안고 신들린 눈동자를 손으로 덮어주면서 말했다.
"제발, 제발 죽지 마세요, 선생님."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중 158쪽에서 -
네루다는 마리오 곁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마리오는 새벽에 방문한 의문의 남자들과 함께 나간 후 행방 불명이 된다.
마지막 장면을 읽으며 여러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다 읽었다는 아쉬움과 허전함 그리고 오랫동안 잊지 못할 따뜻한 감동을 느꼈다.
이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혼의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인연들을 나는 만날 수 있을까 ?
이들처럼 조건없는 사랑과 우정이 정말 존재할까 ?
오랫만에 재미와 감동을 다 주는 책을 만나 기쁘고 반갑다. 하지만 흐뭇함과 함께 느껴지는 애잔함은 아마도 마지막 죽음 장면 때문인 것 같다.
작품 곳곳에 묻어있는 아름다운 시적 표현들과 마리오의 정신적 성장을 지켜보는 과정은 이 작품이 주는 큰 즐거움이었다.
저급한 언어들이 난무하는 요즘... 아름다운 삶의 메타포를 담은 말을 나는 만들어 낼 수 있을까 ?
오늘 내가 나누었던 많은 말들을 떠올려 보니 직설적이고 단순한 말들의 홍수였다.
문학에서도 빠르고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이 시대를 살면서 은은한 비유가 있는 말과 글이 너무 그립다. 이 책은 소설인데...난 갑자기 시가 너무 읽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