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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평점 :
일전에 산속에 틀어박혀 공부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 3개월 만에 집으로 가기 위해 고속버스를 탔었죠. 버스를 오랜만에 탔긴 했지만 그간 자주 타왔던 버스였습니다. 그런데 차창 밖 풍경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해요. 저는 경탄을 담은 눈빛으로 지나가는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매끈한 도로, 늘어진 건물들, 그리고 공사 중인 건물들. 그 모든 익숙한 풍경들이 어찌나 신기하게만 보이던지요. 인간이 이 모든 것을 이루었고, 내가 그 ‘인간’이라는 족속에 속해있다니. 당시 제게는 마치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세상만사가 신비하게만 보였었습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에 특별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지나가는 자동차, 지하철, 가로등 등. 이들이 당연히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당분간 없어질 거라 생각지 않지요. 간혹 세상이 이렇게나 발전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지만 아주 잠깐일 뿐, 이내 아무렇지 않게 스마트폰을 쓰고 노트북을 꺼내듭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혹은 인터넷이 불가능하던 시절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던 것일지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당연하게만 여기던 문명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어떨까요?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은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불시착하게 된 소년들의 무인도 생존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무인도 표류이야기라고 하면 사실 여러 작품들이 떠오릅니다.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 책 말미에도 언급되는 로버트 밸런타인의 『산호섬』 등이 있죠. 골딩의 『파리대왕』은 이전 작품들과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파리대왕』은 1954년 출판되었고, 이때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를 고려하면 골딩의 『파리대왕』이 유독 다른 색채를 띠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세계는 이성의 결정체로 대표되는 문명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됩니다. 인간이 이룬 것들로 문명을 잿더미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과 실제로 잿더미가 된 문명을 목도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인간 그리고 문명의 발전에 대한 낙관주의에 제동이 걸린 것은 당연하겠죠. 이런 시각이 『파리대왕』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살아남은 소년들은 처음에 각자 역할을 정해 화합을 이루려 하죠.. 물론 뜻대로 쉽게 일이 흘러가진 않습니다. 봉화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랠프와 멧돼지 사냥을 중시하는 잭. 잭이 사냥을 나가면서 맡았던 봉화가 꺼진 사이 배가 지나가고 이 사건을 계기로 둘은 갈라서게 됩니다. 텍스트를 보다 보면 랠프와 잭의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봉화를 중시하고 규율을 지키며 소라를 불어 회합을 여는 랠프 일행은 이 무인도에서 문명을 회복하려 하는 반면, 사냥을 좋아하고 춤을 추며 얼굴에 칠을 하는 잭 일행은 중반 이후 ‘오랑캐’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야만 그 자체가 되어가죠.
분명 랠프 일행이 옳아 보이고 잭 일행이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갑니다. 점차 많은 인원이 잭에게 가면서 랠프네는 그 중시하던 봉화를 피우는 일조차 버거워지고, 오랑캐(잭 일행)들은 멧돼지를 사냥하고 고기를 먹으며 파티를 벌이죠. 소년들은 점차 야만 쪽으로 기웁니다. 처음에는 잭이 무서워서 따랐고, 이후에는 고기를 먹을 수 있었으니까요. 이는 본능에 가까운 행동입니다. 심지어 문명을 대표한다는 랠프조차 자신 내면의 폭력적인 욕구를 부정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즐기는 순간도 있죠.
“갈색의 연약한 살점을 한 줌 손에 쥐고 싶었다. 상대를 눌러 해치고 싶은 욕망이 간절하였다.” (랠프)
점점 봉화를 통한 탈출은 비현실처럼 느껴지기에 눈앞에 쾌락을 주는 사냥은 힘을 얻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잭 일행이 돼지의 안경을 훔쳐 간 행위에 대해 항의를 하러 간 랠프 일행은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됩니다. 잭 일행이 떠민 돌덩이에 돼지가 치여 즉사하고 동시에 문명의 상징이자 랠프가 가진 권력의 기반이었던 소라마저 산산조각이 나버립니다.
폭력과 야만의 승리. 이는 텍스트를 읽다 보면 그리 놀라운 결과는 아닙니다. 성가대원이었지만 랠프와 함께했던 사이먼은 소년들의 내면에 잠재되어있는 야만적인 폭력성에 대해 깨닫게 됩니다. 바로 텍스트의 제목인 ‘파리대왕’을 만나게 되면서요.
“넌 그것을 알고 있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아주 가깝고 가까운 일부분이란 말이야. 왜 모든 것이 틀려먹었는가, 왜 모든 것이 지금처럼 돼버렸는가 하면 모두 내 탓인 거야.” (파리대왕)
실상 파리대왕은 작품 속에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지요. 파리대왕은 잭 일행이 사냥을 하고 산 정상에 있던 괴물에게 바치는 제물입니다. 단지 꼬챙이에 꽂힌 암퇘지 머리에 불과합니다. 이를 먹기 위해 수많은 파리가 들러붙었고 이를 파리대왕이라 사이먼은 생각합니다. 그리고 환상 속에서 파리대왕과 대화하는 것이지요.
작품의 결말은 좀 더 남았지만 돼지가 죽은 랠프 일행이 패배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야만에 문명이 굴복하고만 것이지요. 인간의 잔혹한 본성과 우리가 누려온 문명이 허망할 정도로 깨지기 쉽다는 사실은 읽는 이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간 비슷한 소재의 작품들이 이성을 활용한 문명의 승리를 점쳤던 낙관주의였다면, 골딩의 『파리대왕』은 세계대전을 경험으로 이 낙관주의에 의문을 던졌던 것이지요.
소년들이 폭력적으로 변하는 모습과 그에 맞서는 주인공의 저항과 실패. 전반부를 지나 후반부로 갈수록 엄청난 흡입력을 보여주는 『파리대왕』은 분명 충격적인 텍스트입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의구심을 던지기도 하고, 문명에 대한 불안한 시선을 던지기도 하죠. 하지만, 혹시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잘못한 것은 잭이 아니라 랠프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잭은 바뀐 환경에 적절하게 반응하여 현실적으로 적응하였고, 되려 랠프가 이미 지나간 문명에 대한 미련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멸을 초래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 어느 쪽이 되었든 『파리대왕』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여전히 끊이지 않는 전쟁과 끝을 모르는 문명의 진보. 지금도 어디선가 파리대왕은 우리를 보고 웃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