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생각해 봐! - 세상이 많이 달라 보일걸
홍세화 외 지음 / 낮은산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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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를 지나 중세까지 인간의 시선은 인간외부의 세상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세상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을까? 신과 인간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 등이 관심사였다면, 근대에 접어 들어서는 인간 자신에 대한 인식에 관한 문제로 좀 더 세밀화 되었다. ‘라는 존재는 어떻게 세상을 인지하는가? 등이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였다. 하지만 두 번에 걸쳐 일어난 세계전쟁은 라는 인간중심의 철학에서 구조속에서 인간을 인식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혼자만 따로 떨어져 세상을 스스로 인식하면서 자기를 구축해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라는 물결 속에서 몸을 맡기기거나 싸우면서 자신을 형성해 간다는 것이다. , 인간을 완전히 독립적인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사회적 동물로 무리 속의 일원으로서 보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곳, 내가 다니는 학교와 내가 만나는 친구들이 현재의 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거꾸로 생각해봐....’ 라는 책은 우리의 인식의 방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자는 의도로 쓰여진 책이다. 광복이후에 미군정시대부터 급격하게 밀려들어온 서구의식은 선진문명이라는 미명하에 무조건적으로 우리 문화에 흡수되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우리라는 단체의식에서 라는 개인적으로의 변화이다. 여기에 자본이라는 괴물이 들어오게 되면서 표면적으로는 서로 관계를 맺어가며 알뜰살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 급격히 사회는 좌, , , 아래로 분열되어 옛날과 같은 끈끈한 연대감과 사랑은 사라졌다. ‘거꾸로 생각해봐....’라는 책은 이런 사회의 변화에 대한 걱정을 토로하고 있다. 승자독식, 그 야만의 사회를 벗어나기 위해, 착한커피와 공정무역이야기, 함께 먹는 밥, 동무, 꿈 등의 소제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본과 권력에 의해 개체화되어가고 있는 사회에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외모로, 성적으로, 부자동네 가난한 동네로 아이들끼리 가르고 상처 주는 학교에서 돌아와 친구나 언니 오빠들과 서로 이야기하면 마음이 편해지지?.....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서로 이겨 내며 울고 웃는 크고 작은 일들을 함께 해나갈 때는 공동체라는 것이 좋고 살아갈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거야. p.147“

 

  최근에 본 조너선 하이트의 행복의 가설이라는 책에서는 인간은 독립적인 개체 또는 무리 속의 일원으로 정확히 나누어서 볼 수 없다고 한다.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우리를 이해하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중립이 중요하다. 인간은 혼자인 동시에 무리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한 쪽으로 쏠린 배는 침몰하게 되어 있다. ‘우리라는 배에 탑승해 있는 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배의 공명정당한 규칙에 따라 그리고 내가 가진 올바른 생각의 기준에 따라 살아간다면 개인의 행복 뿐 만아니라 사회의 안정과 번영도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먼저, 올바른 기준과 가치가 세워진 사회와 개인이 전제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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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완역본 하서 완역본 시리즈 1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유성인 옮김 / (주)하서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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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은 자본주의의 도입과 산업사회의 발달로 더럽혀진 우리의 자아에 대한 반성과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라는 소리는 귀가 닳도록 많이 들었지만, 그 방대한 양과 문학이라 하면 떠오르는 근접할 수 없는 아우라 때문에 막상 읽기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 와중에 읽게 된 책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 이다. 이 작가의 작품은 카르마조프의 형제들 이후로 두 번째 읽는 작품이다. 카르마조프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단순히 어려운 주제를 논하기 보다는 소설처럼 흥미를 돋울 수 있는 사건 속에서 무언인가 의미를 부여하는 구도로 소설이 진행된다. ‘죄와벌’ 의 경우도 주인공이 전당포 노인을 죽이고, 점점 압축해오는 예심판사의 의심, 주인공의 심리묘사, 범죄진행과정 등은 추리소설과도 맞먹을 수 있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재미는 주인공의 독백과도 같은 말들을 통해 범죄 후의 범죄자의 심리, 범죄 후의 불안감, 형사들이 범인을 잘 못 짚을 때의 오만감, 예심판사의 의심이 그를 향할 때의 두려움 등을 너무나 자세히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내용이 정리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첫째, 죄와 벌이라는 제목처럼 일단 죄를 저지르고 난 후에는 인간인 이상 그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에게 벌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 또한 살인을 계획할 때부터 불안감을 나타내다가, 살인 후에는 병까지 앓게 된다. 주위에서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듯한 갑작스러운 감정변화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은 성악설을 주장해 오던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의심하게 되는 대목이다.

 

 둘째.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는 기독교적인 냄새가 많이 난다. 기독교신자는 아니라서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성서에 따르면 인간은 타고난 죄, 즉 원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우리 인간을 대표하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주인공의 살인죄는 예수를 죽는 것을 방치한 죄를 나타내며,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신의 죄를 고해성사하는 고백하는 대상은 ‘소냐’ 라는 황색감찰을 받은 창녀이다. 소냐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몸을 파는 너무나 순수한 인물일 뿐 만 아니라 수형소의 죄수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는 존재이다. 소냐의 희생정신과 소설 마지막 수형소 장면에서 죄인들의 마음을 바로 순화시켜 그들의 관심을 바로 얻게 되는 장면 등에서 소냐는 예수의 모습을 나타내는 듯하다. 주인공의 고백에 대해 소냐는 바로 신고하기 보다는 자수를 독려하고 수형소까지 따라가게 된다. 또한 이 소설에서  소냐를 만나기 전까지는 무신론이었던 주인공은  수형소 생활을 하면서 소냐의 희생과 사랑에 점점 정신적인 정화를 이루는 모습이 묘사되면서 이 소설은 끝을 맺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 인간의 원죄는 주의 사랑을 통해서만 정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소냐의 어머니는 자신이 지위 높은 대위의 딸이라고 수시로 강조하며,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것을 알린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그 사회적 지위라는 것이 과연 인간성을 대표할 수 있는지 의미를 제기한다. 소냐의 아버지 장례식때 주위의 사람들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사회적 지위가 있는 루진은 소냐에게 돈을 훔쳤다는 혐의를 들며 그녀의 잘못을 인정한다면, 없던 일로 하겠다고 한다. 자신이 얼마나 인간적이고, 자비심 넘치는 인물인지를 나타내는 동시에 소냐라는 창녀가 그녀의 신분처럼 얼마나 더럽고 악녀인지를 나타내려고 한다. 하지만, 진실은 루진이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 소냐를 이용한 자작극임이 들러나면서 사회적 지위가 인간성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이 쓰여질 당시 러시아의 시대상, 다시 말해 유럽의 새로운 이념과 러시아의 중세적인 이념의 대립과 그로 인한 신분의 이동 등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사회 문제를 나타내고 있지 않아 짐작해 본다.

 

 문학이라는 장르가 역시 시대를 초월하는 이유는 거기서 다루는 문제들이 단순히 한 시대를 반영하기 보다는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안고 가야할 문제들을 담고 있기 아니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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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
이덕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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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자를 위한 역사'만 존재하는 세상에서 그 승리자로 인해 패배자로 낙인찍히고 역사의 흐름속에서 지워질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이다. 시대를 앞지른 사고를 가진 자, 올바른 전통을 유지하고 지키려는 자,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는 있으나 힘이 없는 자들의 인생이야기이다. 시간은 흘러 시대는 변했지만 그 본질은 언제나 제자리 걸음인 현대를 사는 우리이기에 더 슬픈 이야기이다. 동시에 그들과 같은 담대함과 용기가 없어서 부끄러운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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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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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사회는 넘쳐나는 정보홍수로 익사직전까지 가 있다. 분당 새로운 소식들이 바로 바로 입력되다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진짜 정보는 얼마나 될까? 어떤 정보가 내가 필요한 정보이며 그 정보가 과연 정확한 진실을 담고 있는지 우리는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인터넷 신문지상에 1면으로 나오는 제목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제목을 달고 사람들의 클릭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덕분에 우리는 더 선정적이고 더 가십적인 내용을 찾아 헤맨다. 굳이 찾아서 보지 않는 이상 양질의 정보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어느 연예인이 누구와 사귀고 헤어지는 것은 핫 이슈이지만 11월 제 1차 민중궐기운동 중 다친 한 농민의 상태는 관심 밖의 일이다. 현대에서 나오는 새로운 제네시스의 외관은 검색어에 올라오지만 국정교과서라는 단어는 검색어에서 보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정말 올바른 정보를 섭취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정보 편식증에 걸린 것은 아닐까? 사방을 보지 못하고 오직 앞만 보도록 끌려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분노하라의 저자 스테판 에셀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나름으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 광고 메시지나 언론이 전하는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유로운 사고를 해야만 자유롭게, 양심에 입각해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63” 자유롭다는 것은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넓고 깊음을 의미한다. 곧 세상을 자기중심에서 우리, 내가 사는 나라에서 우리가 사는 지구로 생각의 확장을 할 수 있게 된다. 그 와중에 세상의 부조리에 마주하게 되고 분노하게 된다. 분노는 저항을 불러오고 그 저항은 다시 변화를 이끌어 낸다. 변화는 다시 재창조로 옮겨와 너와 내가 균형을 이루는 사회를 만들어간다. 그래서 저자는 강조한다. 분노하라고....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 p39.”

 

레지스탕스(저항)가 폭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분노가 물리적인 힘을 과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레지스탕스와 분노는 내가 살아있음을 그리고 자유롭게 사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비폭력이라는 방식으로.... 나는 호소합니다. 우리의 정신을 완전히 개혁하자고. 폭력은 거부해야 합니다. 우선 효과가 없기 때문에 그래야 합니다......폭력은 폭력의 악순환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미래로, 희망으로 향한 문을 닫아버리게 합니다..... 비폭력이란 손 놓고 팔짱 끼고, 속수무책으로 따귀 때는 자에게 뺨이나 내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 그 다음에 타인들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p.65”

93세의 노학자의 분노하라라는 외침은 외면적인 젊음만을 추구하고 내면적인 젊음은 죽어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먼저 우리 자신에게 분노하라고 외친다. 비폭력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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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김용만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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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개토대왕이 아닌 광개토태왕이다.

조선과는 달리 고구려는 소중화를 표방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의 중국대륙의 후연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위상을 갖춘 나라였다. 그 단적인 예가 고구려만의 독특한 연호를 썼다는 것이다.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천하의 질서는 고구려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국명을 명에게 요청한 조선의 시작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또한 지은이는 대왕이 아닌 태왕이라고 불러야 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태왕이란 단순한 왕이 아니라 왕 가운데 왕이며, 제국을 다스리는 최고 지배자다. 왕이 단일한 체제를 갖춘 나라의 지배자라면, 태왕은 다양한 체제를 아우른 광범위한 제국의 지배자다. 태왕은 선택받은 자, 인간 사회의 최고 지배자를 뜻한다. 황제, , 선우, 가한 등과 다를 바 없는 한국사에 등장하는 최고 지배자의 호칭이다. p.39” 광개토태왕은 같은 문화권인 한반도 뿐 만아니라 거란, 숙신, 왜 그리고 후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권을 공략하고 편입시켰기 때문에 태왕이라는 호칭이 가장 잘 어울린다.

 

2. 광개토태왕의 정복활동

거란정벌: 391년 태자 담덕이 고구려의 왕이 되면서 391년에 거란 공략을 시작으로 395년을 기점으로 마무리된다. 거란정벌은 2차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소수림왕 8년에 거란에 의해 8개 부락이 함락되고 고구려 백성이 끌려가게 되지만, 백제와 후연과의 거듭된 전쟁으로 손을 쓸 수 없었다. 1차 거란정벌은 거란족이 약탈한 고구려 백성을 되찾기 위한 정벌이다. 395년에 거행한 2차 거란정벌은 소, , , 소금 등의 획득을 통한 경제적 이득과 후연 정벌을 염두에 두고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p.141-153)

 

백제공략: 광개토태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은 백제의 근초고왕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광개토태왕이 백제공략을 통해 그 원수를 갚게 된다. 396년 영락6년에 그는 대대적인 백제 공격에 나서서 승리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백제 왕실을 보존하는 것이 전력을 다해 백제를 통합하는 것보다 이익이 된다고 판단한다. 광개토태왕은 백제를 굴복시킨 후, 백제에서 잡아온 포로가 고구려인으로 정착해 살 수 있도록 했다. 그러는 한편 힘을 모아 후연정벌을 준비했다. 그 때문에 백제 전선에 투입한 대군을 서둘러 철수한 것이다. 백제를 지배하고 통일하겠다는 의지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당시 국력과 백제의 저항, 차후 전략적 목표 때문에 백제를 멸망시키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p.188”

 

숙신정벌: 영락8년 숙신지역을 공격한다. 숙신은 고구려에 내지와 같은 곳이기 때문에 소규모 군대로 반란 세력을 제거하는 정도의 군사행동을 하는데 그쳤다. (p.196-200)

 

신라 구원과 남해안 대원정: 영락9(399) 왜의 공격을 당한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한다. 백제는 왜의 군대를 끌어들여 신라를 멸망시키거나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고구려의 힘을 약화 시킨다. 그리고 왜, 가야 연합을 구축해 고구려에 반격하려는 것이다. 이에 고구려는 5만 대군을 동원하게 된다. 그런데 4002월 후연의 3만 군대가 고구려에 쳐들어왔다. 고구려는 군대를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고구려는 신라와 가야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고구려는 신라의 임금을 교체하기도 했지만, 신라를 흡수하진 않았다. 신라는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는 신민이었지만 국가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았고, 도리어 고구려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렇게 고구려의 영향으로 당시 가장 중요한 경쟁자였던 가야 연맹보다 앞서 성장할 수 있었다. 신라입장에서 고구려의 신민으로 지낸 약 100년간은 역사적 퇴보가 아닌 발전을 위한 시기였다. p.218” 또한 고구려의 남해안 대원정에서 패한 가야는 철제 갑옷과 기병양성등과 같은 변화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p.201-231)

 

왜 격퇴: 앞에서 언급한 영락9-10년간의 전쟁이외에 영락14(404)의 전쟁이 있다. 404년은 고구려가 후연을 공격해 거듭 승전보를 울리던 때이다. 이 틈을 이용한 왜의 공격으로 고구려는 후연을 굴복시킬 기회를 잃게 된다. 이에 분노한 광개토태왕은 왜군을 참살했다는 기록이 광개토태왕릉비문에 등장한다. (p.232-249)

 

후연정벌: 전연을 건국한 모용황은 고국원왕의 아버지였던 미천왕의 시체와 어머니 주태후 그리고 왕비를 사로잡았다.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는 완전히 단절되지 않는다고 믿었던 고구려에게는 엄청난 수치였다. 당연히 전연에 이어 건국된 후연 또한 고구려 즉, 광개토태왕에게는 복수의 대상이었다. 400년 후연의 기습공격으로 신성과 남소성을 비롯한 700리의 땅을 빼앗기고 5,000여호의 백성이 붙잡혀 간다. 4061월 전투를 끝으로 고구려와 후연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다. 4077월 후연에서 모반이 일어나 모용희가 죽임을 당하고 고구려 왕족의 후예인 고운이 북연을 건국한다. 4083월 광개토태왕은 북연에 사신을 보내 고운의 즉위를 축하며 종족의 예를 베풀었다. 이에 북연의 고운은 시어사 이발을 보내 답례했다. 고구려가 종주국, 북연이 제후국으로 두 나라의 관계가 정립되었다고 여겨진다. 409년 고운이 신하에 의해 시해 당하고 풍발이 임금이 된다. 하지만 신라의 경우와는 달리 고구려의 개입은 없었다. 409년에 고구려는 서쪽의 북연이 아니라 동쪽에 위치한 동부여를 공략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당시 후연을 완전히 정벌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고운과 풍발이 외교적으로 고구려에 머리를 굽히자 서부 변경 지역이 안정된 것에 만족하고 서진정책을 마무리한다. (p.250-268)

 

마지막 정벌지 동부여: 4세기 중반 고국천왕때 고구려가 모용선비와 백제에 거듭 패하면서 동부여에 대한 통제력도 약해졌다. 동부여가 더 이상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지 않자 영락 20(410) 광개토태왕이 마침내 정벌에 나선다. (p.269-278)

 

3. 광개토태왕의 국가경영

고구려 제국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외부의 위협을 물리쳐 제국 내 평화와 안정을 가져왔다. 광개토태왕의 정복활동이 일단락 된 후, 고구려는 5-6세기에 걸쳐 오랜 기간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고구려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전쟁에만 몰입한 것은 아니다. 광개토태왕은 정복 활동 외에 내치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법과 제도정비 (율령반포의 이점은 p. 118-120) 종교정책 (불교수용에 관련된 내용은 p.133-136, 320-326) 국토 재편과 평양 천도 준비(p.331-334) 백성을 위한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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