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비평 23호 - 2003.가을
생각의나무 편집부 엮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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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읽은 <당대비평> 10호보다 훨씬 흥미로운 글이 많았고, 상대적으로 읽기 쉬웠다.


''존속살해죄'는 패륜아들의 범죄인가?'는 상당히 재미있었다. 존속살해범 중 정신질환을 앓고있는 비율이 매우 높고, 피해자가 가족구성원을 상습적으로 학대한 경우도 다수인 점 등 '패륜'이라는 도덕적, 윤리적 기준으로 비난하기 힘들다는 주장을 펼치는데 꽤 공감이 갔다.


'근대‧식민 주체에 아로새겨진 (무)능력의 이중전략'도 흥미로웠다. 무능력 담론, 무능력한 자는 도태되어야 한다는 담론의 기원을 일제강점기의 사회진화론에서부터 찾고 있는 점이 재미있었다. 무능력 담론이 우생담론으로까지 이어지는데 일본인도 아닌 조선의 거물급 인사들이 "후생의 육체와 정신을 우생학적으로 개량하여 사회의 행복을 증진케 함"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우생협회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했다.


'북한 핵과 '조미대결'의 역사'는 북한 특유의 정신주의를 보여주고 있어 흥미로웠고, 귀여니 소설과 김유리의 <옥탑방 고양이>를 비교한 비평도 재미있었다. 다만, <제국>의 저자인 마이클 하트와 한 대담, '유럽의 혁신, 팍스 아메리카나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란 주제로 한 동향비평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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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 - 난징의 강간, 그 진실의 기록
아이리스 장 지음, 윤지환 옮김 / 미다스북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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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읽은 책은 아이리스 장이 쓴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


제목만 들었을 때는 뻔할 것 같지만, “영어로 쓰여진 난징대학살에 대한 훌륭한 첫 번째 보고서라는 평가를 받는 책으로 출간 당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일본의 우익 세력들은 이 책이 나오자 아이리스 장에게 협박전화와 메일 등을 보냈고, 우익세력들의 반발로 일본에서는 이 책이 출판되지 못한 상태에서 이 책에 대한 비판서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특이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이리스 장은 2004년 숨진 채로 발견됐는데, 일본 우익세력들의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우울증을 앓다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배경을 대략 알고 있었기에 한 번쯤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난징대학살(아이리스 장은 이 책에서 난징의 강간이란 표현을 사용한다)에 대해 들은 적은 있지만, 이토록 끔찍한 일인 줄은 몰랐다. 히틀러는 몇 년간에 걸쳐 유대인 6백만 명을 살해했지만, 일본군은 난징에서 6주간 수십만 명을 학살했다. 중국의 한 도시인 난징의 사상자 수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럽 전역의 사상자 수를 능가한다.


그 끔찍한 대학살 가운데서도 고통 받는 중국인들을 구하려 애쓴 외국인들이 있었는데, 특히 욘 라베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아이리스 장은 욘 라베에 대해 난징 시민들 사이에서 그는 영웅이었고, ‘난징의 살아 있는 부처였으며, 수십만 명의 중국인을 구한 국제안전지대의 전설적인 지도자라고 소개하는데, 욘 라베는 난징의 나치 지부 대표기도 했다. 욘 라베의 손녀 우르술라 라인하르트는 욘 라베가 나치를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으로 생각했다고 말하는데, 난징대학살이 일어난 1937년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기 전이기도 하고, 나치가 사회주의를 모방한 면이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싶긴 하지만, 역설적이긴 하다.


재미있게도 욘 라베가 나치 소속이라는 사실이 중국인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됐던 걸로 보인다. 난징 YMCA 간사였던 조지 피치는 라베의 나치 완장을 들어대거나 나치 훈장을 가리키면서 이게 뭔지 아느냐고 물으면 언제든지 효력을 발휘했다고 기록했다.


난징대학살에 대한 일본 내 논란을 다룬 마지막장도 흥미로웠다. 이시하라 신타로를 비롯해 난징대학살을 부정하거나 학살 규모를 축소하려 했던 수많은 일본 우익인사, 호라 토미오-혼다 가츠이치가 이끄는 학살파와 스즈키 아키라, 다나카 마사키가 이끄는 허구파사이의 논쟁, 난징대학살을 참회하고, 천황의 전쟁 책임을 언급한 사람들이 경험한 협박과 테러 등 몰랐던 내용을 많이 알게 됐다.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일본의 군국주의 등 난징대학살의 배경에 대한 설명이 다소 부족하고, 관점이 새롭지는 않다. 그럼에도 분명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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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사람의 십 년
펑지차이 지음, 박현숙 옮김 / 후마니타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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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책과 기사에서 문화대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정작 그게 뭔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일으켰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런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을 쓴 펑지차이는 자신이 문화대혁명 피해자로 문화대혁명을 경험한 수백 명을 인터뷰해 그 중 29편을 묶어 이 책을 썼다. 한국어판에는 17편이 실렸다. 


여기 묶인 이야기는 한편 한편이 한권의 소설 이상으로 파란만장하고, 문화대혁명이 사람들의 영혼에 얼마나 큰 상처를 입혔는지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닫게 한다. 문화대혁명 피해자들 이야기를 하다보면 내용이 많이 겹칠 만도 한데, 나름대로 안 겹치도록 신경썼다는 느낌이 든다.


다만, 이 책을 봐도 여전히, 아니, 보면 더욱 '왜 이런 끔찍한 일을 왜 저질렀을까?'하는 의문이 커진다. 뒤에 연보가 실려있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사건의 인과관계와 문화대혁명에서 인물들이 맡은 역할을 알기 어렵다. 물론 이 책 자체가 이론서는 아니지만, 문화대혁명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과 평가를 짧게라도 실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또 하나 아쉬운 건, 문화대혁명에 대한 관점 자체는 새롭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새로운 관점을 위해 사실을 희생할 필요는 없지만, 그냥 알던 이야기를 다시 듣는 느낌이 없잖아 있다.

역사학자는 비극의 역사적 사실에 주목하는 반면, 문학가는 비극을 겪은 사람들의 영혼에 관심을 갖는다.-9쪽

파시스트 폭력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시체를 남겼다면, 문혁이 남긴 것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겹겹의 상처를 끌어안고 있는 무수한 영혼들이다.-10쪽

숭배는 자신을 다 퍼서 다른 사람에게 주는 감정입니다. 그가 그것을 마음대로 버리거나 읽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당신은 빈껍데기만 남게 되고 그것으로 끝일 거예요. 인생은 한 번뿐이니까요.-31쪽

그렇게 나는 다시 그를 만나기로 결정했고, 결혼까지 했습니다. 결혼식은 1967년 12월 1일에 올렸어요. 우리의 신혼 첫날밤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어요. 우리 두 사람은 밤새도록 서로 껴안은 채 통곡을 했더랍니다.-46쪽

그 당시까지 나는 손톱만큼도 고민하지 않았어요. 문혁 초기에 우리는 나이 많은 교사 한 명에 대해 비판 투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원래 교장이었는데 반우파 투쟁 당시 우파로 분류되어 학교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그녀에게 문제를 자백하라고 강요하면서, 짓궂은 친구 몇몇이 마늘을 한 주먹씩 계속 먹게 했답니다. 교사가 도저히 못 먹겠다고 하자 이번에는 구두약을 섞어서 같이 먹으라 했고, 흙탕물을 적신 포도 잎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어요. 그때 우리는 사람을 박해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주 영웅적이고 정의로우며 혁명적이라고 여겼습니다. 당시 학생들의 의식이 그랬어요.-76쪽

내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긴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우붕에서 두들겨 맞는 시간은 대부분 깊은 밤이었어요. 횃불을 든 홍위병들이 갑자기 문을 열고 쳐들어와서는 때리려는 사람 머리에 포대 자루를 씌우고 두들겨 패곤 했어요. 아니면 등 뒤에서 뺨을 때렸는데, 그렇게 하면 누가 때리는지 볼 수 없는 거죠. 이렇게 맞다 보면 두 귀가 멍해지고 눈에서 불꽃이 번쩍 일어납니다. 그럴 때마다 생각했어요.
`뒤에서 때리는 것은 우리가 볼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거지. 너희는 파시스트보다 못한 놈들이야. 파시스트들은 앞에서 때리거든. 너희는 얼굴을 숨기고 때리지. 겉으로는 당당한 듯해도 사실은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고 있어서 마음에 걸리는 거지. 구호는 하늘을 찌르지만 사람을 때릴 때는 천하의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98~99쪽

인간성에 소멸된 시대에, 인간성을 표현하는 가장 고차원적인 방식은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122쪽

나는 어땠냐고요? 그 거대한 폭풍 속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양심에 가책이 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다치게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평온합니다. 과거에 좋은 일을 조금 했고, 조국과 인민에게 떳떳하며, 지금도 내 원칙을 끝까지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맡은 직분을 다하고 있고요. 비록 문혁 때 받은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마음 밑바닥에 적당히 묻어 둘 수 있습니다. 국가가 내게 어떤 분부를 내리든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국가가 부르기만 한다면 말이죠.-140쪽

하지만 역사는 늘 유명한 사람들을 편애하지요. 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민중과 울분을 참고 있는 수많은 대중을 만나고 싶었습니다.-371쪽

그때부터 나는 몰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와 운명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사형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명과 지명을 모두 외국 이름으로 바꾸고, 시대 배경도 20세기로 바꿨으며 토마스 만, 알렉산데르 쿠프린, 앙드레 지드, 존 스타인벡 같은 외국 작가의 이름을 써 넣었다. 발각되면, 예전에 외국 소설을 베껴 쓴 것이라고 둘러댈 참이었다. 그리고 숨기기 편하게 작은 종잇조각들에 나눠서 썼다. 다 쓰고 난 다음에는 바로 땅에 파묻거나, 벽돌 밑 혹은 벽 틈이나 화분 안, 솜이불 사이에 숨겼다. 종이를 한 장 한 장 강력 풀로 붙인 다음, 겉에 마오 주석의 어록이나 문혁 포스터 등에 붙여 벽에 걸어 놓았다. 나는 온갖 궁리를 짜내어 그 대역무도하고 `반동적이기 그지없는` 글들을 숨겼다. 하지만 물건을 숨기는 사람 입장에서는, 숨기는 방법과 장소가 교묘하고 은밀할수록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을까를 더 걱정하게 된다.-3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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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를 상실한 노동자 비정규직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08
장귀연 지음 / 책세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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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서의 덕목은 쉬우면서도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하려면 쉽게 써야 하고,


앞으로 이 문제에 계속 관심 갖고, 공부하도록 하려면 재미있게 써야 한다.


이 책은 그 두 가지 덕목을 모두 가지고 있다.


특히 IMF 외환위기 당시 은행 부문과 공공 부문에서 진행된 구조조정,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조합는 생생한 증언이 많아 


(이런 이야기에 쓰기엔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은 쉽고, 재미있다는 입문서의 기본적인 미덕에 


자기 관점이라는 한 가지 미덕을 더 갖추고 있다.


저자는 현재 노동권 개념은 내부 노동 시장이 형성될 때 수립된 것인데


지금은 내부 노동 시장이 해체되는 상황이라 


기존의 노동권 자체를 새롭게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게 가능한지는 따져 볼 필요가 있겠지만, 흥미로운 관점이다.


2006년에 나온 책이라 세부적인 면에서 업데이트가 필요하긴 하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입문서로 꽤 훌륭한 책인 것 같다.

이처럼 기술 발전으로 인해 내부 노동 시장의 이점이 축소됨에 따라 비정규직이 증가한다는 설명은 현상적으로는 타당하다. 그러나 이런 설명 방식은 너무 협소한 설명이기도 하다.…(중략)…사실 기술 발전과 탈숙련화는 꾸준히 지속돼온 것이며, 실제로 내부 노동 시장이 형성되던 시기에도 그 이전 시대에 비하면 기계와 기술의 표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에는 현재와는 반대로 내부 노동 시장이 형성되고 강화되었다. 그리고 대기업의 슬림화가 나타나고 있다지만 실질적으로 대기업의 지배력은 더 커졌으며 사실상 기업 운영에 반드시 필요한 업무를 분사나 용역 등의 형식을 빌려 간접 고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매일매일 해야 하는 핵심 업무에도 비정규직 사용이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내부 노동 시장이 붕괴한 것은 근본적으로 기업의 전략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술 발전이 이를 쉽게 실행할 수 있도록 했겠지만, 전략 전환의 직접적인 원인은 세계적 경쟁 압력이 강화되고 케인스주의가 사라진 경제 환경의 변화인 것이다.-<권리를 상실한 노동자 비정규직> 66~67쪽

노동의 성격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이 특히 비정규직 형태에 걸맞다고 볼 수는 없다. 현재는 비정규직 고용이 일반화된 분야에서도 초창기에는 정규직으로 고용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예를 들어 학습지 교사나 운송업과 같은 분야는 지금은 특수 고용 형태가 일반적이지만 1990년 초반까지는 정규직으로 고용했다. 반대로 더 오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제조업 부문의 노동자 역시 내부 노동 시장이 형성되기 전에는 지금의 비정규직과 유사한 방식으로 고용되던 시대가 있었다. 이를 보면 서비스 부문에서 비정규직 고용이 만연한 것은 서비스 노동의 본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다른 요인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서비스 부문이 팽창한 시기와 비정규직 고용이 확산하는 시기가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권리를 상실한 노동자 비정규직> 68쪽

이 구조 조정 중에 은행의 노동자들은 어떠한 상황에 처했는가? 은행의 퇴출과 합병으로 수만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게다가 1998년 IMF의 조건을 부로가 몇 달 내에 맞춰야 했기 때문에 은행들은 허둥지둥 대규모 인원 감축을 시행했다. 그러다 보니 우습게도 정말로 필요한 일손조차 모자라는 사태가 발생했다. 실컷 해고를 시켜놓고 얼마 안 가 은행들은 다시 새롭게 채용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고용 형태를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 즉 계약직으로 채용했던 것이다.-<권리를 상실한 노동자 비정규직> 81~82쪽

따라서 1998년 공공 부문 구조 조정을 다급히 시작하면서, 기획예산처와 행정자치부는 각 공공 기관마다 인원 감축을 할당했다. 당시 정부가 내놓은 계획은 2001년 말까지 정부 부처, 지자체, 공기업 및 정부 출연 기관 등 공공 부문에서 약 14만 명을 감축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1997년 말 인원의 20%에 해당했다. 그리고 기획예산처의 <공공 개혁 백서>에 따르면 이 계획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즉 공공 부문의 노동자 중에서 14만 명이 일자리를 잃은 것이다.-권리를 상실한 노동자 비정규직> 92쪽

기획예산처는 계획된 구조 조정이 이루어진 후에도 경영 평가를 통해서 예산을 배정함으로써 산하 기관을 통제하고 있다. 여기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 예산이 깎이기 때문에 실제 공공 부문의 기관들은 직접 할당이 아니더라도 정규직 채용이나 비정규직의 노동 조건 개선을 생각하기가 어렵다. 실제로 E공사는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했다가 기획예산처 평가에서 매우 낮은 평가를 받은 적이 있다.-<권리를 상실한 노동자 비정규직> 94쪽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잇`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었다. 언제 끝이 날까, 비정규직 노동자도 이길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겨야 하는데……한 사람 두 사람 떨어져 나갔다. 미안함은 그지없었지만 생계가 있고 가족이 있었다. 517일이 지나자 남은 사람은 200여 명이었다. 그들은 노동조합을 해산하고 펑펑 울었다. 계약직 노동자들은 간접 고용으로 떨어졌다.
그 나날들이 후회된다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좋았다는 사람도 있다. 결과만으로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만들고 집단교섭과 집단행동을 해도 노동 조건을 개선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준 셈이었다. 그러나 나비효과란 말도 있듯이, 세상일이란 그렇게 직접적인 결과대로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조합의 투쟁을 전후하여, 또 그 기간 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권리를 상실한 노동자 비정규직> 132~133쪽

그러나 기술적·사회적 발전과 기업의 이익 때문에 희생되는 노동자를 자유롭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노동권의 개념이 다시 확립되어야 한다. 노동을 하는 사람은 그 대가로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근본적인 권리 말이다. 반대로 지금과 같은 비정규직화는 노동자가 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불안함에 시달리도록 몰아넣는 방식이다. 정규직 임금 노동자를 전형적인 노동자로 간주해서 수립된 기존의 노동권 개념이 좁은 것으로 드러난 이상, 이제는 노동권을 더욱 확장하여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권리를 상실한 노동자 비정규직> 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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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말한다 - 당비생각 02
우에노 치즈코.조한혜정 지음, 사사키 노리코.김찬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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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고른 건 우에노 치즈코 때문이었다. 우에노 치즈코가 쓴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를 읽기 전에 미리 읽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읽었다. 미안하지만, 공동저자인 조한혜정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남성-여성 관계에 대한 내용보다도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에노 치즈코의 첫 편지는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본 히로시마: ‘전쟁범죄전쟁이라는 범죄사이에서라는 강연에서 던진 "정의로운 전쟁이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아래 '밑줄긋기'를 보면 알 수 있듯 책 내용 중 내셔널리즘 비판이 상당히 높다.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학자들이 예리하게 사회의 단면을 포착해내는 대목이 많아 읽는 재미는 있었지만, 이 책만 읽고 우에노 치즈코와 조한혜정의 근대와 탈근대를 넘나드는 사유를 따라가기는 쉽지 않다. 역시 아직은 공부가 필요하다.

생각해보면 페미니즘이라는 것, "내가 여성이라는 것은 내가 정한다. 다른 누구에게 결정 받고 싶지 않다"고 하는 약자의 자기정의권의 요구가 아니었을까요? "추녀는 여자도 아니다"에서 시작되어 "나긋나긋하지 않으면 여자가 아니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여자답지 않다", "논리적인 여자는 여자가 아니다" 심지어 "남자에게 선택되지 않은 당신은 여자가 아니다"까지. 요약하면 `여성다움`의 정의는 남성의 수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뻔뻔하게도 이 정도로 남성들 자신에게 유리한 `여성다움`을 불어 넣고 있었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남자에게 선택되건 안 되건, 나는 나"라고 페미니스트는 주장한 것이고 이제 "타인에게 존재를 증명 받지 않아도, 나는 나"로 나아가기까지 한 걸음 남은 것이지요.-<경계에서 말한다> 32~33쪽

나는 인생을 걸고, 날아 온 돌에 대해서 당했다고 해서 되돌려 주지 않으면서, 약자가 되던져줄 수 있는 말을 찾고 있습니다. 나는 현재의 정치판에서 모든 강자의 기득권을 의심하고 이의를 신청하여, 지배받고 차별받는 편에 서서 `약자의 정치`를 만들고 싶습니다.-<경계에서 말한다> 35쪽

그 강연에서 나는 "정의로운 전쟁은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졌습니다. 승리한 전쟁이 정의이고 패배한 전쟁이 악인가, 국제법에 의거한 합법적인 전쟁은 있는가, 그 가운데도 무엇이 전쟁범죄이고 무엇이 전쟁범죄가 아닌가, 전쟁 범죄를 수반하지 않는 `룰에 근거한`, `페어플레이의`, `신사적인` 전쟁은 있는가, `여성에게 관대한` 전쟁은 있는가, `강간을 하지 않는 군대`는 있는가라고 써내려 가는데, 뭔가 좋지 않은 농담을 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군요.-<경계에서 말한다> 49~50쪽

그때 나는 영국 캠브리지에서 나의 첫 번째 저서 <한국의 여성과 남성>이라는 책을 탈고하면서 안식년을 마무리 짓고 있었습니다. 내 책의 제목을 정하면서 나는 미국의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 선생이 자기 책에 `여성과 남성(Male and Female)`이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그 앞에 `미국의`라는 단어를 붙여야 할지 말지 한번이라도 망설였을까 궁금해 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중심부`에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겠지요.-<경계에서 말한다> 69~70쪽

일본 여성해방의 주역 다나카는 "여성해방운동은 10월 10일 신좌익의 자궁에서 산달이 다 차서 태어난, 부모를 닮지 않는 못된 아이"라고 썼습니다. 학생운동의 좌절은 그 안에 있던 남성과 여성에게 상이한 체험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여성 활동가는 일본 사회에 대한 실망뿐만 아니라, 남성 사회에 대한 실망도 통렬하게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들의 곁에 있는 남자 동료들이야말로 성차별의 억압자였던 것입니다. 나는 나중에 바리케이트 뒤에 있는 성의 해방구에서 성적으로 자유분방한(원문은 `활발한`으로 되어 있음) 여학생을 가리키는 운동가들 사이의 은어 `공중변소`가 전쟁 중에 `위안부`를 부르는 군대용어였음을 알고 쇼크를 받기도했지요.-<경계에서 말한다> 87~88쪽

피해와 가해의 관계는 뒤얽혀 있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가부장제의 피해자로서 딸에게는 가해자가 되었습니다. 일본의 여성은 여성을 아내, 어머니와 창부로 나누는 가부장제의 분단 지배(devide and rule)에 길들여져 `위안부`에 대한 차별자가 되었습니다. "나를 창부 취급하지 마라"고 말하는 동안은, 일본 여성은 `조선인 위안부`뿐만 아니라 `일본인 위안부`나 점령군의 거리 매매춘도 문제로 삼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한국인 `위안부`의 얼머니들의 용기 어린 증언에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받으면서도, 내셔널리즘과 일치할 때에만 여성의 성 피해가 문제시되는 구도를 이상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내셔널리즘은 가해와 피해를,적과 동지를, 우리와 그들을, 분명히 나누기 일쑤지요.-<경계에서 말한다> 97쪽

1990년대 들어서서 대중소비사회의 모습이 역력해지자 `압구정동`이라는 새로운 소비공간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지요. 그 공간의 주인공들에게 `오렌지 족`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그들에게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졸부의 자식들이 공동체 의식도 없이 사치나 하고 위화감을 조성하는 소비문화를 만들어간다는 비난이었지요. 당시 운동거리를 찾고 있던 학내 운동권은 새로운 운동 대상을 잡은 듯, 소비적 `신세대`를 비난하고 모든 종류의 유흥적인 대중문화 현상에 알레르기 반응을 드러냈습니다. 조직화된 `운동권`이 보인 새로운 세태에 대한 거부의 언어는 극우파의 언어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소비시장이 `선정적 대중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에 대해 극우파와 운동권은 합세해서 `때려잡을` 태세였습니다.-<경계에서 말한다> 110~111쪽

오늘 아침 신문에서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 징용자 300여명이 한국 법원에 국적 포기서를 제출키로 했다는 뉴스를 읽었습니다. 정부의 무관심과 소극적 자세에 항의하는 시위행동이라구요. `일제 강점하 강제 동원 피해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 추진위원회` 위원장 최봉태 변호사는 이 행위는 "국민이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그에 따르는 불이익도 감수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상징적 의미를 넘어 노령화와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는 피해자들이 할 수 있는 생의 마지막 저항권이다"라고도 말했습니다. 한국에서 이렇게 `국가`를 거리를 두고 사유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니! 참으로 `혁명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네요.-<경계에서 말한다> 132쪽

출산저하의 경향에 대해서는 나는 실은 조금도 비관하고 있지 않습니다. "Who Cares?(그것이 도대체 어떻단 말인가)"라는 기분입니다.…(중략)…출산저하를 개탄하는 것은 그로 인한 국가 경제의 축소나 세수의 감소, 보험의 파탄, 장래의 노동력 부족 등을 우려하는 정계와 재계의 사람들뿐이고, 그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인구와 경제력으로 환원된 일본의 현재 국력을 유지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경계에서 말한다> 192~193쪽

나는 이 `후기 근대적` 학교의 교장 노릇을 하면서 교육의 근본은 `위험과 불안의 경험에 기반하는 자아성찰적 기획`이어야 함을 보다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근대는 `정상성`이라는 단어로 현실의 모순과 불행을 체계적으로 가리고 지워 온 시대였지요. 일정한 선 안에 머무는 한 불행을 보지 않아도 되고 죽음을 보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학교에 입학만 하면 안전하고, 가정 울타리 안에 있는 한 안전하고, 국민으로 충성하기로 하는 한 안전하게 살 수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근대는 `낙오`에 대한 공포심으로 유지되고 있고, 사실상 급격히 깨지고 있습니다. 근대가 깨지는 와중에 그간 눌리고 지워온 것들이 망령처럼 살아나 주변을 떠돌며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구요.-<경계에서 말한다> 227쪽

당신은 `양육`을 중심으로 커뮤니티를 그리고 있고, 나는 `보살핌(care)`이라고 하는 유대를 중심으로 커뮤니티를 상상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탄생과 죽음을 자신의 의사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처음과 마지막에는 어떻게든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의존상태를 경험합니다. 타인에게 의지하는 것이 굴욕이 아니라 권리이고, 타인을 돌보는 것이 보이지 않는 헌신이 아니라 보상받는 노동이라는 것.-<경계에서 말한다> 243쪽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입니다. `양육` 유대, `보살핌` 유대는 혈연이 아니어도 좋고 가족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좋다. 친밀한 관계는 가족이건 아니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친밀한 관계와 의존을 분리시키면 좋다.-<경계에서 말한다>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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