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서 말한다 - 당비생각 02
우에노 치즈코.조한혜정 지음, 사사키 노리코.김찬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고른 건 우에노 치즈코 때문이었다. 우에노 치즈코가 쓴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를 읽기 전에 미리 읽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읽었다. 미안하지만, 공동저자인 조한혜정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남성-여성 관계에 대한 내용보다도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에노 치즈코의 첫 편지는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본 히로시마: ‘전쟁범죄전쟁이라는 범죄사이에서라는 강연에서 던진 "정의로운 전쟁이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아래 '밑줄긋기'를 보면 알 수 있듯 책 내용 중 내셔널리즘 비판이 상당히 높다.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학자들이 예리하게 사회의 단면을 포착해내는 대목이 많아 읽는 재미는 있었지만, 이 책만 읽고 우에노 치즈코와 조한혜정의 근대와 탈근대를 넘나드는 사유를 따라가기는 쉽지 않다. 역시 아직은 공부가 필요하다.

생각해보면 페미니즘이라는 것, "내가 여성이라는 것은 내가 정한다. 다른 누구에게 결정 받고 싶지 않다"고 하는 약자의 자기정의권의 요구가 아니었을까요? "추녀는 여자도 아니다"에서 시작되어 "나긋나긋하지 않으면 여자가 아니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여자답지 않다", "논리적인 여자는 여자가 아니다" 심지어 "남자에게 선택되지 않은 당신은 여자가 아니다"까지. 요약하면 `여성다움`의 정의는 남성의 수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뻔뻔하게도 이 정도로 남성들 자신에게 유리한 `여성다움`을 불어 넣고 있었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남자에게 선택되건 안 되건, 나는 나"라고 페미니스트는 주장한 것이고 이제 "타인에게 존재를 증명 받지 않아도, 나는 나"로 나아가기까지 한 걸음 남은 것이지요.-<경계에서 말한다> 32~33쪽

나는 인생을 걸고, 날아 온 돌에 대해서 당했다고 해서 되돌려 주지 않으면서, 약자가 되던져줄 수 있는 말을 찾고 있습니다. 나는 현재의 정치판에서 모든 강자의 기득권을 의심하고 이의를 신청하여, 지배받고 차별받는 편에 서서 `약자의 정치`를 만들고 싶습니다.-<경계에서 말한다> 35쪽

그 강연에서 나는 "정의로운 전쟁은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졌습니다. 승리한 전쟁이 정의이고 패배한 전쟁이 악인가, 국제법에 의거한 합법적인 전쟁은 있는가, 그 가운데도 무엇이 전쟁범죄이고 무엇이 전쟁범죄가 아닌가, 전쟁 범죄를 수반하지 않는 `룰에 근거한`, `페어플레이의`, `신사적인` 전쟁은 있는가, `여성에게 관대한` 전쟁은 있는가, `강간을 하지 않는 군대`는 있는가라고 써내려 가는데, 뭔가 좋지 않은 농담을 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군요.-<경계에서 말한다> 49~50쪽

그때 나는 영국 캠브리지에서 나의 첫 번째 저서 <한국의 여성과 남성>이라는 책을 탈고하면서 안식년을 마무리 짓고 있었습니다. 내 책의 제목을 정하면서 나는 미국의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 선생이 자기 책에 `여성과 남성(Male and Female)`이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그 앞에 `미국의`라는 단어를 붙여야 할지 말지 한번이라도 망설였을까 궁금해 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중심부`에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겠지요.-<경계에서 말한다> 69~70쪽

일본 여성해방의 주역 다나카는 "여성해방운동은 10월 10일 신좌익의 자궁에서 산달이 다 차서 태어난, 부모를 닮지 않는 못된 아이"라고 썼습니다. 학생운동의 좌절은 그 안에 있던 남성과 여성에게 상이한 체험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여성 활동가는 일본 사회에 대한 실망뿐만 아니라, 남성 사회에 대한 실망도 통렬하게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들의 곁에 있는 남자 동료들이야말로 성차별의 억압자였던 것입니다. 나는 나중에 바리케이트 뒤에 있는 성의 해방구에서 성적으로 자유분방한(원문은 `활발한`으로 되어 있음) 여학생을 가리키는 운동가들 사이의 은어 `공중변소`가 전쟁 중에 `위안부`를 부르는 군대용어였음을 알고 쇼크를 받기도했지요.-<경계에서 말한다> 87~88쪽

피해와 가해의 관계는 뒤얽혀 있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가부장제의 피해자로서 딸에게는 가해자가 되었습니다. 일본의 여성은 여성을 아내, 어머니와 창부로 나누는 가부장제의 분단 지배(devide and rule)에 길들여져 `위안부`에 대한 차별자가 되었습니다. "나를 창부 취급하지 마라"고 말하는 동안은, 일본 여성은 `조선인 위안부`뿐만 아니라 `일본인 위안부`나 점령군의 거리 매매춘도 문제로 삼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한국인 `위안부`의 얼머니들의 용기 어린 증언에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받으면서도, 내셔널리즘과 일치할 때에만 여성의 성 피해가 문제시되는 구도를 이상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내셔널리즘은 가해와 피해를,적과 동지를, 우리와 그들을, 분명히 나누기 일쑤지요.-<경계에서 말한다> 97쪽

1990년대 들어서서 대중소비사회의 모습이 역력해지자 `압구정동`이라는 새로운 소비공간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지요. 그 공간의 주인공들에게 `오렌지 족`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그들에게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졸부의 자식들이 공동체 의식도 없이 사치나 하고 위화감을 조성하는 소비문화를 만들어간다는 비난이었지요. 당시 운동거리를 찾고 있던 학내 운동권은 새로운 운동 대상을 잡은 듯, 소비적 `신세대`를 비난하고 모든 종류의 유흥적인 대중문화 현상에 알레르기 반응을 드러냈습니다. 조직화된 `운동권`이 보인 새로운 세태에 대한 거부의 언어는 극우파의 언어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소비시장이 `선정적 대중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에 대해 극우파와 운동권은 합세해서 `때려잡을` 태세였습니다.-<경계에서 말한다> 110~111쪽

오늘 아침 신문에서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 징용자 300여명이 한국 법원에 국적 포기서를 제출키로 했다는 뉴스를 읽었습니다. 정부의 무관심과 소극적 자세에 항의하는 시위행동이라구요. `일제 강점하 강제 동원 피해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 추진위원회` 위원장 최봉태 변호사는 이 행위는 "국민이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그에 따르는 불이익도 감수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상징적 의미를 넘어 노령화와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는 피해자들이 할 수 있는 생의 마지막 저항권이다"라고도 말했습니다. 한국에서 이렇게 `국가`를 거리를 두고 사유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니! 참으로 `혁명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네요.-<경계에서 말한다> 132쪽

출산저하의 경향에 대해서는 나는 실은 조금도 비관하고 있지 않습니다. "Who Cares?(그것이 도대체 어떻단 말인가)"라는 기분입니다.…(중략)…출산저하를 개탄하는 것은 그로 인한 국가 경제의 축소나 세수의 감소, 보험의 파탄, 장래의 노동력 부족 등을 우려하는 정계와 재계의 사람들뿐이고, 그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인구와 경제력으로 환원된 일본의 현재 국력을 유지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경계에서 말한다> 192~193쪽

나는 이 `후기 근대적` 학교의 교장 노릇을 하면서 교육의 근본은 `위험과 불안의 경험에 기반하는 자아성찰적 기획`이어야 함을 보다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근대는 `정상성`이라는 단어로 현실의 모순과 불행을 체계적으로 가리고 지워 온 시대였지요. 일정한 선 안에 머무는 한 불행을 보지 않아도 되고 죽음을 보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학교에 입학만 하면 안전하고, 가정 울타리 안에 있는 한 안전하고, 국민으로 충성하기로 하는 한 안전하게 살 수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근대는 `낙오`에 대한 공포심으로 유지되고 있고, 사실상 급격히 깨지고 있습니다. 근대가 깨지는 와중에 그간 눌리고 지워온 것들이 망령처럼 살아나 주변을 떠돌며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구요.-<경계에서 말한다> 227쪽

당신은 `양육`을 중심으로 커뮤니티를 그리고 있고, 나는 `보살핌(care)`이라고 하는 유대를 중심으로 커뮤니티를 상상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탄생과 죽음을 자신의 의사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처음과 마지막에는 어떻게든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의존상태를 경험합니다. 타인에게 의지하는 것이 굴욕이 아니라 권리이고, 타인을 돌보는 것이 보이지 않는 헌신이 아니라 보상받는 노동이라는 것.-<경계에서 말한다> 243쪽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입니다. `양육` 유대, `보살핌` 유대는 혈연이 아니어도 좋고 가족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좋다. 친밀한 관계는 가족이건 아니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친밀한 관계와 의존을 분리시키면 좋다.-<경계에서 말한다>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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