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나무와 열한 가지 이야기 - 손주들에게 들려주는 삶의 지혜 우화 그림책 Fables for Grandchildren
이영 지음 / 꿈과비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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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가 쓴 우화집
 
한 달쯤 전 아침에 일어난 뒤 습관대로 손 전화를 열자 몇 개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어느 택배 기사의 메시지로 늦은 밤에 택배 물건을 문 앞에 두고 간다는 것이었다. 이즈음에는 배달 물량이 많은 관계로 늦은 밤까지, 심지어는 다음날 이른 아침까지도 배달하는 모양이다.
 
그 택배는 다름아닌, '손주들에게 들려주는 삶의 지혜 우화'(Fables for Grandchildren) <넷째 나무와 열한 가지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글 이영 / 그림 우나경'으로, 저자 이영(Young Lee, MBA)은 꼭 40년 전 교실에서 만났던 제자였다.
 
그는 미국 시키고 일리노이 대학에서 어카운팅 디렉터(Director of Accounting and Administration)로 봉직하고 있는, 여섯 자녀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는 미국에서 살면서도 연말이면 크리스마스카드를, 때때로 긴 손 편지를 이따금 보내주는 제자였다.

 

이 책은 어린이를 위한 우화다. 글 반, 그림 반으로 모두 열한 가지의 우화를 담고 있었다. 이런 우화는 한꺼번에 읽기보다는 여러 날을 두고 하나하나 되삭임질 하면서 읽는 게 좋다. 게다가 이 여름 나는 새 작품을 집필하고 있었다. 그 작품의 초고를 며칠 전에 탈고한 뒤부터 틈틈이 책을 편 뒤 오늘 아침에야 이 우화집을 다 읽었다.
 
나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랐다. 그때는 6.25전쟁 직후로 책이 무척 귀했다. 심지어 교과서마저 없는 아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시절이다 보니 대부분 시골 어린이들은 사실 우화나 동화 같은 책은 읽지 못하고 자랐다.

나는 어른이 된 다음 뒤늦게 이솝우화나 안데르센의 동화를 읽었다. 나는 그때마다 이런 책을 어린 시절에 읽었더라면 내 인생이 훨씬 달라졌을 거라는 그런 아쉬움이 엄청 컸었다.
 
사실 좋은 우화나 동화는 아무나 쓸 수가 없다. 최소한 쉰은 넘긴 작가, 인생의 산전수전 및 공중전까지 다 치른 이만이 쓸 수 있을 테다. 내가 아는 이영 박사는 한국에서 어렵게 대학교를 마친 다음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30여 년 시카고에서 대학생 선교활동을 하면서 틈틈이 어린이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설교자로 하나님을 섬겨왔다.
 
나는 그의 우화집을 읽으면서 여기에 실린 이 우화들은 저자의 그동안 삶이 농축된 이야기들이라는 사실을 금세 알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 우화들은 더 강한 울림을 주었다.

이 책의 특징은 한글과 영문으로 이야기를 쓴 뒤 거기에 그림을 곁들여 국내 어린이뿐 아니라, 세계 각지 동포들의 자녀들에게도 들려주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아마도 언젠가 이 책은 아주 귀한 하나님의 복음과 같은 우화로 자리매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이 우화를 읽는 내내 제자가 스승보다 더 낫다는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가 한때 그를 가르쳤다는 게 이렇게 뿌듯할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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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 - 한국인 유일의 단독 방북 취재
진천규 지음 / 타커스(끌레마)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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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도 (작가, 전 오산중 교사)

 

한 제자의 출간 소식

 

그는 이즈음도 일흔이 넘은 옛 훈장에게 여태 이런저런 소식을 전화나 문자로 보내주고 있다.

 

"비자 발급받아 단동을 출발하여 평양에 갑니다."

"3차 방북 취재를 마치고 중국 심양을 거쳐 어제 밤에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평양을 출발하여 지금 막 심양에 도착 했습니다. 저녁에 인천공항 도착예정입니다."

 

나는 진천규 제자가 소식을 전해올 때마다 짤막한 답신을 보냈다.

 

"수고 많네. 건강! 건투!"

 

그런데 지난 주 수요일인 18일 이 뜨거운 삼복중에 <평양의 시간은 서울과 함께 흐른다>라는 옥동자를 탄생했다는 기별을 받았다. 나는 즉시 "잘 알았네. 즉시 주문하여 사보도록 할게"라는 답신을 보내고 그 자리에서 인터넷 서점에 주문하여 지난 주말 따끈한 그의 첫 작품집을 받았다.

 

그의 땀이 듬뿍 밴 책을 펴자 내가 작품집을 낸 이상으로 반갑고, 느껍고, 그가 대견해 보였다.

       

"교육자는 그 제자들이 말한다"

 

흔히들 말한다.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하고,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그렇다면 교육자는 무엇으로 말할까? 아마도 그 답은 "교육자는 그 제자들이 말한다"일 것이다. 정말 나는 그가 자랑스럽다. 지난해 가을부터 전쟁기운이 가득했던 일촉즉발의 긴장 속에서 그가 신의주 평양 등을 둘러보고 "북녘은 평온하다"는 소식을 남녘으로 전할 때 우리 모두는 안도할 수 있었다.

 

나는 그를 46년 전인 197231일 서울 오산중학교 운동장에서 처음 만났다. 해마다 오산(五山)학교는 국경일인 삼일절 날 개학식 입학식을 치렀는데 이는 오산 후학들이 학교를 세우신 남강 이승훈 선생을 기리고자 하는 갸륵한 정성이었다.

 

나는 그때 신임교사로 중1 신입생을 담임 맡았다. 가장 신출내기라고 1-12반에 배정되었다. 그날 나는 운동장에 모인 70명 신입생 모두를 하나하나 껴안아 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맛보았다. 그때 진천규 기자도 내 반 학생이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뒤 <한겨레신문>을 보면 사진 밑에 진천규 기자라는 이름이 보였다. 혹시 그가 아닐까 하는 기대로 전화를 하자, 바로 내 제자 진천규였다. 우리는 한 밥집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그가 사진기자가 된 것은 나 때문이라고 하여 깜작 놀랐다.

 

나는 반 학생들의 소풍 때나 그밖에 행사 때는 카메라로 그들의 모습을 앵글에 담곤 했다. 그게 반 학생들에게는 멋지게 비친 나머지, 그는 부모에게 졸라 카메라를 입수하여 취미 생활하던 게 평생 직업이 되었다고 말했다.

 

2004131일 나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권중희 선생을 모시고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갔다. 그때 한 독자가 권 선생 항공표를 구해 준 바, 로스앤젤레스를 경유케 되었다. 그런데 그가 그 사실을 알고 출국 전 내 집으로 전화가 왔다. LA 공항에 나오겠다는. 사실 권 선생과 나는 토종 한국인으로 영어 한 마디조차 할 줄도 모른다.

 

우리 두 토박이 늙은이가 LA 공항에 도착해 짐을 찾아 밖으로 나가는데 누군가 "선생님!"하고 불렀다. 꺽다리인 그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는 나를 취재하고, 나는 그를 취재하는 사제의 열띤 취재장이 되었다. 그의 덕분으로 미국 입국 때도, 돌아올 때도 LA 동포들이 조촐한 환영회와 환송회를 해줘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평양 시민도 그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 책에는 이번 취재기간 동안 내가 보고, 느끼고, 경험한 평양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냈다. 나는 그들을 구경하러 가지 않았다. 구경꾼이 되기도 싫고, 관찰자가 되기는 더욱 싫었다. 무슨, 어떠한 자격으로 그들을 '동물원'의 울타리에 갇힌 동물원 구경하듯이 하겠는가?

 

한 핏줄을 나눈 동포이기 이전에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싶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가족과 오순도순 시간을 보내고, 평일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휴일에는 공원에서 놀이를 즐기며,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는 그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책 머리말을 읽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 넌 내 제자다. 나는 평생 내 동족을 헐뜯거나 이상한 말로 비난한 적이 없었다.' 그런 생각과 함께 나는 46년 전 그 시절로 돌아가 다섯메 그 교정에서 그를 다시 껴안아 주고 싶다.

  

우리는 원래 하나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둘로 나눠져 있지만 언젠가, 아니 곧 우리는 하나로 합쳐질 거다. 마치 시냇물이 바위를 만나 두 줄기로 나눠져 흐르다가 다시 한 줄기로 합쳐져 바다로 흘러가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반드시 하나가 될 것이다.

 

"무엇을 읽고 있을까? 출근길을 재촉하는 평양 시민들 사이로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학교로 향하는 두 소녀가 보였다. 정말 오랜만에 휴대폰이 아니라 책을 보며 길을 걷는 모습을 보니 옛 기억이 새롭다. 나도 중·고등학교 무렵에는 시험기간이면 하나라도 더 외우려고 등굣길에도 책을 보곤 했는데, 저 아이들도 오늘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 걸까? 평양에서는 이처럼 학생들이 책을 보며 걷는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 120

 

하루에 일만 그릇의 평양냉면을 만들면서도 역사상 단 한 번도 외부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은 옥류관 주방을 진 기자는 20186월 제4차 방문 때 취재하여 일부나마 공개하고 있다.

 

"주방을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인민 위생 때문이다. 그 무엇보다 위생이 우선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주방의 통로와 홀로 음식을 나르는 통로가 분리되어 있고, 유리창과 난간이 설치되어 있어 주방의 통로에 접근하더라도 밖에서 주방의 일하는 모습을 볼 수는 있지만 안으로 직접 들어갈 수는 없다. 둘째, 육수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 181

 

"지금 우리도 하나가 될 준비를 쌓아나가고 있다. 수많은 염원이 모여 큰 물결이되고, 그 물결이 힘 있게 흘러 한반도 구석구석을 적시고, 다시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완전한 하나가될 수 있도록 준비해나가고 있다." - 292

 

이 책은 46배판 형으로 지금 북한의 생생한 장면을 100점 이상 컬러사진으로 보여주고 있다. JTBC 손석희 사장이 추천하는 글을 썼다. 아마도 그분도 나와 같은 평화통일이 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으리라.

      

"이 책의 제목은 당연히 중의적이다. 30분 차이 났던 시차가 비로소 같아졌다는 것과 함께 남과 북의 정서적, 아니 역사적 시간은 결국 함께 흘러가야 한다는 것. 진천규가 만난 북의 시간과 공간들은 어떤 것인가? 오랜 시간 동안 들여다볼 수 없었던 땅 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그 변화들은 혹시 일시적이거나 제한된 것은 아닌가

 

끊임없이 의구심을 갖고 읽게 되는 것은 내가 아직도 냉전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두껍지 않은 책이면서도 던져주는 고민은 참으로 두껍다. 그러나 결국 의구심을 걷어내기로 한 것은 그가 단지 호기심이 아니라 애정으로 그 땅 위의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316쪽의 책장을 모두 읽고 덮자 문득 내년 여름에는 평양 옥류관에 가서 냉면을 먹은 뒤 백두산을 오르고 싶다. 나는 2005년 여름 민족작가대회로 백두산 장군봉을 올라갔다. 그때 엄청 추웠다. 동행 김원일 남정현 선생은 추위와 바람 때문에 목도리를 두르거나 파카를 입었다. 그날은 가장 무더운 때인 2005723일 새벽 해 뜰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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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태성의 최후

 
탕! 탕! 탕!

 

1963년 12월 14일 오전, 인천의 한 군부대에서 몇 발의 캘빈 총성이 울렸다. 총소리와 함께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한 남자가 확 고꾸라지듯이 무릎을 꿇는다.

 

몇 발의 총성이 퍼부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총소리는 일생을 외세의 압제와 침탈에 저항해 투쟁했던 한 남자의 최후이자 1950년 한국전쟁에 이은 6, 70년대 극단의 증오와 불신으로 점철된 남북관계를 여는 서막이었다. … 그 남자의 이름은 황태성(黃泰成1906~1963)이다.  -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프롤로그' 17쪽

 

나는 이 책을 어제(10월 28일) 출판기념회에서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온 뒤 숨을 죽이다시피 오늘 오전까지 읽었다. 마치 어린 시절 선친이나 집안어른들로부터 몰래 들었던 그때의 해방공간 이야기처럼….

 

사상논쟁

 
'황태성'이라는 인물이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전 당시 윤보선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벌인 이른바, '사상논쟁' 때문이었다. 당시 윤 후보 측 찬조 연사였던 윤제술씨는 1963년 9월 22일 여수유세에서 다음과 같은 열변을 토했다.

 

"이곳은 여순반란사건이란 핏자국이 묻은 곳이다. 그 사건을 만들어낸 장본인들은 죽었느냐 살았느냐, 살았다면 대한민국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여러분이 모른다면 저 종고산은 알 것이다." - 위의 책 339쪽

 

이 발언으로 대통령 선거 정책대결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윤보선 - 박정희 두 호보 간의 전력 폭로와 그에 대한 고발 으름장으로 얼룩졌다. 그해 9월 25일, 윤 후보 측은 서울 종로 교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박정희 씨에게 묻는다'라는 유인물을 대량으로 뿌렸다.

 

- 세칭 북괴간첩 황태성 사건의 전모를 국민 앞에 밝혀라.
- 황태성은 대구 10·1 폭동 당시 박정희의 실형과 같이 활약했다는데, 그에 대한 진상을 밝혀라.
- 황을 박정희 형수가 수차례에 걸쳐 면회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

 

이 유인물에서 제기된 의혹들은 사실에 부합하는 내용도 있었고, 그렇지 않는 내용도 있었다.   - 위의 책 341쪽  

 

이런 공방전이 연일 신문지면을 덮었는데 당시에는 텔레비전이 없었던 때라 이런 보도는 신문이 거의 도맡았다. 

 

누가 황태성을 죽였나?


그해 10월 15일은 제5대 대통령 선거일이었다. 개표 결과 박정희가 470만 2,642표를 얻었고, 윤보선은 454만 6,614 표를 득표했다. 윤보선은 총력을 다해 황태성 사건을 이용해 박정희에게 일대 사상공세를 펼쳤지만, 그 결과는 초박빙 15만 표 차 패배. 박정희가 휘파람을 불며 대통령 직을 거머쥐었던 것이다.

 

그 사상논쟁으로 야당은 군정을 실질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잃음과 동시에, 결과적으로 민족의 자주적 평화통일 문제를 정쟁의 대상으로 만들어 북의 밀사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데 일조했다는 역사적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 위의 책 351~2쪽  

 

박정희를 곤경에 빠뜨렸던 황태성 사건은 박정희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진행형으로 살아 움직였다. 상황을 더욱더 복잡하게 만든 것은 여기에 미국도 개입하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박정희로서는 어떻게든 황태성 문제를 매듭짓고 가야했다.  죽이든 살리든 황태성을 비밀리에 다시 북으로 돌려보내는 패는 이미 사라져버렸다. - 위의 책 352쪽

 

대통령 선거 후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에게 황태성 사형을 즉각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곧 제 6대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박정희의 공화당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과반수의 의석을 확보했다. 그해 연말 김형욱은 다시 박정희를 찾아가 황태성 사형 집행승인서를 내밀었다.

 

"아까운 사람인데 꼭 사형시켜야 하나?"
"각하, 우리가 미국과 야당에 몰리지 않으려면 사형을 집행해야 합니다."

- 위의 책 352쪽

 

어색한 만남

 

이날(10월 28일) 밤, 서울 종로구 인사동 밥집 '정원'에서는 '푸른역사출판사' 발간, 김학민·이창훈이 지은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출판기념회가 궂은비가 질척질척 내리는 가운데 열렸다. 유인태, 유승희 국회의원과 임재경, 김종철, 문국주 등 재야인사와 현기영 소설가, 홍일선 시인, 이승철 시인, 윤일균 시인 등, 100여 분이 참석한 이날의 출판기념회는 대단히 차분하고 진지했다.

 

특히 이 사건의 피해자인 황태성 조카 권상능씨와  미국에서 이날을 위해 귀국한  손녀 황유경(65)씨가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비명에 가신 황태성 할아버지를 현양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돕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오우열 시인이 진행한 '황천 강을 건너 극락으로 보내는 진혼 굿 한마당'에 그는 눈시울을 적시며 해원의 광목천을 움켜잡았다.  

 

이 책에는 황태성의 손녀 황유경 씨와 박정희 대통령과의 어색한 만남 장면도 나온다.

 

"고2 때 가을이었을 겁니다. 그때 제가 '꽃씨회'라는 청년봉사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요즘의 '사랑의 열매' 같은 것을 사람들에게 달아주고 성금을 받아 그 돈으로 불우이웃돕기를 하는 단체였어요. … 회원 10여 명이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에게 인사하고, 그 중 제가 대통령 앞으로 가 열매를 달아주면서 돌연 '제가 황태성씨 손녀입니다'라고 말해 버렸습니다. 박 대통령은 순간 얼굴이 굳어지고, 그러면서 허둥지둥 행사는 끝이 났지요. …."
- 위의 책 364~5쪽 요약

 

진혼굿


이 책의 공동저자의 한 사람인 김학민씨는 이 날 인사말에서 "오늘은 바로 52년 만에 우리 곁으로 돌아온 황태성 선생의 넋을 위로 하는 자리입니다. 일제강점기 두 차례에 걸쳐 투옥된 항일애국지사이자 평화통일의 메신저로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그분을 새롭게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고인의 높은 뜻을 엄숙히 기렸다.

 

국악인 박종순씨의 '고혼'이라는 제목의 애달픈 진혼 시조창과 시인 오우열의 천도 진혼굿 한마당이 관심을 끄는 가운데 이날 출판기념회는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그날 밤 행사를 모두 마치고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새 흐린 날씨는 맑게 개어 텅 빈 가을 하늘에는 보름을 갓 넘긴 달이 온 누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달님을 향해 지상의 평화와 이 겨레 소망인 조국의 평화통일을 두 손 모아 빌고, 또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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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녹두 1 - 희토류로 통하다
정운현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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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참으로 아까운 언론인이 쓴 소설... "훌륭합니다"
 
 

시대가 만든 작가

 


지난 3월 하순 늦은 밤, 정운현 <오마이뉴스> 전 편집국장(내가 오래도록 부르는 직함은 그냥 '국장'이다)이 전화를 걸어왔다.

 

"박 선생님, 요즘 제가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네? 소설을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지금까지 쓴 걸 메일로 보낼 테니 함 읽어주시고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네, 그러지요."

 

곧 800여 매의 초고가 메일함에 도착했다. 사실 나는 그 무렵 집필중이던 <미군정기> 마지막 부분을 쓰던 중이었다. 하던 일을 밀치고 초고를 읽기 시작했다.

 

첫 장면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솔직히 나는 어느 독립군 이야기나 친일파 인물의 인생역정을 쓴 줄 알았는데, 생소한 희토류가 등장하고 무대가 한국, 중국, 북한, 일본 등으로 이야기 전개가 스피드하고, 최첨단 소재라 매우 흥미로웠다.

 

소설 초고를 읽어가면서 내가 그에게 가르쳐 줄 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에게 배워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문득 고 박경리 선생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분은 생전 한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행복한 사람이었다면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지금도 그 말이 머릿속에 각인돼 있다. 그렇다. 세속적으로 행복한 사람은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가 없을 것이다. 행복한 사람이 쓰지 않고 못 배길 그 무슨 한스러운 일이 있겠는가. 정운현 작가는 이 시대, 특히 이명박 전 대통령이 그를 작가로 만들었다는 씁쓸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가 아니면 언론인 정운현이 어찌 백수 처지로 한강대교까지 갔다가 처자식이 눈앞에 밟혀 다행히 뛰어내리지 않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을까.

 

나는 정 국장의 초고를 다 읽은 뒤 메일을 보냈다.

 

"솔직히 제가 손보아 드릴 게 없습니다. 정말 흥미롭고, 이야기 전개가 스피드하며, 기자 출신의 작가답게 문체도 독특하고, 이야기도 아주 재미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상으로 독자의 사랑을 받겠습니다. 책이 나오면 가장 먼저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보내십시오. 당신 덕분에 이 소설을 썼다는 군말과 함께."

 

그러자 곧 답이 왔다.

 

"선생님의 격려 말씀은 천군만마의 원군으로 힘이 되었습니다."

   

그 뒤 지난 6월 23일 책이 나오자마자 원주 내 집으로 보내주셨다. 나는 곧장 서평을 쓸까 하다가 나보다 필력이 나은 분이 쓰는 게 좋을 듯해, 다른 매체에서 크게 다룰 줄 알고 미뤘다. 정 국장은 언론계에서 수십 년 밥을 먹었는데도 중앙 일간신문에서는 짤막한 신간소개도 없다. 

 

그가 받은 모멸감은 얼마나 크겠는가. 언론인 정운현은 권력자에게 눈밖에 났고, 동료 후배 언론인에게도 소외되고 있다. 아주 고약한 세태다. 하긴 두보 시대도 손바닥을 뒤집는 여반장(如反掌) 세상의 인심이라고 하였다. 대한민국에서 손볼 곳은 언론, 검찰, 교육계라는 말이 틀리지 않은 듯하다.

 

그를 먼저 책으로 만나다

 

솔직히 이 책에 관한 정보는 인터넷서점이나 정운현의 블로그에 잘 나와 있다. 그래서 나는 작가 정운현과 인연 등, 내가 아는 정 국장과 그의 가치, 그리고 이 작품의 의의 등을 두서없이 쓰고자 한다.

 

나는 40대까지 등단치 못했다. 그래서 서구나 이웃 일본처럼 작품집을 통해 등단하여 승부를 걸고자 1988년 그해 봄부터 작품을 200자 원고지에 써서 1200여 매의 원고뭉치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 나섰다. 학교에서 가까운 서대문 아현동의 한 출판사를 두드리자 보름 후에 오라고 했다.

 

그 약속 날짜에 출판사로 찾아가자 편집장이 원고보따리를 돌려주며 자기네 출판사와는 맞지 않는다고 위로의 말을 했다. 나는 그 보따리를 들고 일어서는데 출판사 대표가 미안했는지 임종국이 쓴 <일제침략과 친일파>라는 책을 건넸다.

 

지금도 그 책은 서가에서 가장 잘 보이는 데 꽂혀 있다. 그 뒤 한 서점에서 신간을 살피던 중 정운현 지음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라는 책이 눈에 띄어 선뜻 구입하였다. 나는 이 두 책을 다 읽고 심한 충격에 빠졌다.

 

내가 다녔던 대학의 전 교주(재단 이사장), 당시 근무하던 학교의 전 총장, 내가 직접 배우며 존경했던 교수, 시인, 소설가, 언론사 사주, 심지어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도 친일에서 자유롭지 못해 억장이 무너졌다. 정운현 그는 당시 <중앙일보> 기자였다. 이런 글을 쓰고, 그 자리에서 버틸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1999년 나는 중국대륙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답사하다가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서 내 고향 출신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을 만나고 너무 기뻤다. 내 고향에 이런 순결한 분이 계시다니…. 너무 감동한 나머지 그 이듬해 나 혼자 그분이 희생된 멀고 먼 헤이룽장성 경성현 대라진 풍림촌을 찾아 외로이 서 있는 '허형식희생지비'에 들꽃을 바치고 돌아왔다.

 

그는 박정희 전문가다
  
그때 나는 허형식 장군을 국내학술지에 처음 게재한 성균관대 장세윤(현 동북아재단 연구위원) 교수에게 전화로 그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장 교수는 기왕이면 국내신문에 최초로 허형식 장군을 보도한 대한매일 정운현 기자와 같이 한 자리에서 만나자고 하여 우리 세 사람은 성균관대학 600주년기념관 장세윤 교수연구실에서 처음 만났다.

 

그제나 이제나 정운현의 인상은 까칠했다. 그는 직업의식 탓인지 나를 상당히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내가 구미 출신임을  알고는 자연히 박정희 대통령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는 <중앙일보> 시절 <실록 박정희>를 취재 연재했었다며 내 어렸을 때 고향 어른 상모동 김재학(전 박정희생가보존회장), 원평동 장월상(전 구미면장)씨를 비롯해 고향 선배 등 구미 시가지와 상모동 마을을 샅샅이 뒤진 이야기를 했다.

 

그날 우리는 왜 문경의 박정희 교사가 만주군관학교에 갔을까 하는 문제를 심도 있게 토론하였다. 그는 박정희가 큰 칼 차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나의 주장은 초혼에 실패해서 계속 교단에 서기도 찜찜할 뿐 아니라, 본처가 보기 싫어 도피 차 만주에 갔을 거라고 소설가적 관점에서 주장했다. 

 

그제야 그는 나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피차 박정희 연구 전문가로 더욱 친밀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와 나는 예나 지금이나 그 흔한 승용차도 없이 걸어다니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다. 다른 이를 통해 그는 그제까지 셋집을 산다고 하여, 그는 나보다 더 답답한 사람이라 여겼다. 그 후 내가 중국대륙항일답사기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은 나라>라는 책을 펴내자 그는 <대한매일>에 큰 박스기사로 다뤄주었다.

 

그는 나라의 보배다

 

나는 허형식 장군 이야기를 <영웅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써서 2002년 독립기념관지 7월호에 실었다. 그때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가 이 글을 "일본군 장교 박정희는 기념관 세우고 항일군 총참모장 허형식은 생가 헐려"라는 제목으로 <오마이뉴스>에 실었다.

 

나는 그 기사를 통해 생후 처음으로 인터넷신문을 알았다. 그때 나는 컴맹으로 자판을 두드릴 줄도 몰랐다. 그 후 나는 용정 명동촌 윤동주 시인의 생가와 경북 안동 이육사 시인의 생가를 견준 사진과 원고를 보냈다. 그랬더니 <오마이뉴스> 측에서 자판을 두드려 실어주면서 그 참에 나에게 시민기자로 등록할 것을 권했다. 그래서 2002년 7월에 나는 기자가 되었다.

 

그 후 나는 이런저런 일로 학교를 조기퇴직하고 강원산골로 내려왔다. 그는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떠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으로, 한국언론재단 연구 이사로 잘 나가는 듯하더니 어느 날 그도 갑자기 백수가 되었다. 그 이후 그는 목구멍이 포도청으로 이런저런 일을 하였으나 송충이가 갈잎을 먹은 것처럼 적응치 못하고 마침내 서울을 떠나 경기도 일산 끝자락에서 머물고 있다. 

  

이즈음 세월호 참사 이후 대통령은 나라를 크게 개조하려고 총리와 각료를 새로 지명했으나 총리 후보자는 두 차례 낙마했고, 장관 후보자마저 국민들에게 "어디서 저런 인물을 데려 왔느냐"는 비난을 받았다.

 

이즈음 사회 정의를 위해 큰 언론사 데스크를 지키거나 논설위원으로 정론직필을 휘두를 그가 사람과 때를 대단히 잘(?) 만나 이즈음 한가롭게 일산 강둑에서 자전거로 소일하거나 쑥을 뜯으며 지내고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이 나라에는 깨끗한 사람이 없다고 너스레를 떤다. "멧돼지 눈에는 멧돼지만 보인다"는 무학대사의 촌철살인 말이 떠오른다.

 

그는 나라의 보배다. 친일문제와 민족정기 문제에 그만큼 천착한 이도 드물다. 우리는 이대로 적당히 지내면 세월호 같은 참사를 다시 겪을 수 있다. 올바르지 못한 지도자도 계속 봐야 한다. 대한제국이 그렇게 망했다.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오늘도 우리는 동족끼리 총구를 맞대고 있지 않는가.

 

다시 그의 신작 소설 <작전명 녹두>로 화제를 돌린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대학시절 고대소설 강독시간에 읽은 <임진록>이 떠올랐다. 임진왜란에서 참담히 패배하고 기아, 역병에 시달린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대한해협을 건너간 사명대사가 온갖 도술로 일본을 복수하고 돌아올 때 얼마나 통쾌했던가. 나는 그 소설을 읽으며 오랜 체증이 내려간 듯 후련했다.

 

누가 이 나라를 바로 잡을까 
   
정운현은 소설 <작전명 녹두>를 통해 단순히 일본을 응징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100여 년 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뤼순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한 그 내용을 재현시키고 있다. 이 얼마나 우리에게, 일본인과 중국인에게 소중한 이야기인가.

 

후생가외(後生可畏)라. 나라와 겨레를 위할 아까운 인재가 한강 하류 둑길에서 쑥이나 뜯고 있으니 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겠는가. 우리는 지금 탁류에 쓰레기 더미처럼 휩쓸러 가거나 아니면 세월호처럼 바다 밑바닥으로 침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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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 - 들풀교회 달팽이 목사가 들려주는 들꽃들의 따듯한 이야기
김민수 지음, 김지원 외 그림 / 너의오월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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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이웃 양평군 개군면 산수유전원마을에 사는 고종아우의 초대를 받고 원주에서 열차를 타고 갔다. 그는 줄곧 서울에서 살다가 이태 전 그곳으로 내려와 손수 예쁜 나무집을 지어 살고 있다. 그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면서 2층까지 방을 들였다고 하여, 나는 속으로 걱정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 가 보니 서울에서 살던 30대 후반 부부가 아이의 교육을 위해 이곳으로 내려와 아우네 집 2층서 산다고 했다.

 

며칠 전, 그들 부부의 딸이 그곳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신입생이 15명으로, 입학식 날 신입생들은 모두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주는 장학금까지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마을에만 대도시에서 아이들 교육을 위해 내려온 이들이 세 가구나 되어 마을에 생기가 돈다며, 이런 현상은 점차 늘어가는 추세라고 했다. 나는 듣던 중 가장 바람직한 소식이었다.

 

사실 그동안 우리나라 농촌은 아이들 교육을 핑계로 이농현상은 썰물처럼 심해 시골학교 가운데 학생 부족으로 폐교당한 학교가 부지기수였다. 내가 살았던 횡성군 안흥중고등학교에도 한때는 중고 각 300명이 넘었다는데, 이즈음은 중고 전체가 50여 명 정도로 폐교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동안 농어촌에서는 너도나도 도시로, 도시의 아이들은 다투어 미국이나 영국 등 선진국으로 떠났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젊은 부모들 가운데 초 중등학교는 오히려 시골학교에서 교육시키는 게 바람직하다고, 도시에서 시골로 내려오는 이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몇 해 전 평창군 방림면 산골에서 내가 만난 한 젊은 부부도 인생을 좀 더 진지하게, 아이들을 좀 더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기르고자 그곳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이제 내 나이 일흔으로 지난 생애를 뒤돌아보면, 농사꾼 할아버지 할머니 품안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내며 이후 초등학교 중학교를 시골에서 다녔다는 게 축복으로 여겨진다. 사실 이제까지 글줄이나 쓰며 사는 그 원동력은 그 시절의 삶 덕분이다.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은 생전에 나에게 "사람이 사람답게 자라나려면 반드시 겪어야 하는 삶이 있는데, 그것은 '일하기''가난''자연' - 세 가지다"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아동문학가로, 교육자로 금쪽같은 말씀이시다.

 

어젯밤 늦게 김민수 목사님이 정성을 다해 글로 쓰고 사진으로 찍어 펴낸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라는 책을 손에 들고 밤새우다시피 알뜰히 읽었다. 나는10여 년 전부터 김 목사님의 열성팬으로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오른 글과 사진을 빠짐없이 보고 있다. 그분의 글과 사진을 대하면 나는 늘 마치 이른 새벽에 강 언덕을 산책하는 기분이었다.

 

사람도 꽃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 잡초처럼 천덕꾸러기 취급받는 사람, 이름없는 무명씨.

 

나는 그들이 그냥 들판의 풀꽃처럼

자기를 피워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자기를 피워내는 꽃,

남과 비교하지 않고 피어나는 꽃,

그래서 당당한 꽃으로 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잘 가꿔진 화단에서 만나는 꽃보다

수없이 많은 풀꽃들이 피어있는 들이 저는 좋습니다.

 

자연을 떠난 사람. 흙을 떠난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 김민수 지음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 에필로그에서

 

이 책에는 할미꽃, 제비꽃, 바람꽃, 동백, 노루귀, 괭이밥, 토끼풀, 강아지풀, 나팔꽃, 찔레꽃, 붓꽃, 수선화, 조팝나무 등 모두 서른 개의 들꽃들 이야기와 사진들이 거미줄에 이슬처럼 매달려 있다. 이들은 내가 유소년시절 고향의 산과 들에서 날마다 만났던 들꽃들로 나는 그들과 더불어 살아왔다.

 

내가 그 꽃들의 이야기를 이 책에서 일부러 끄집어내어 군말을 붙이는 것은 그야말로 군더더기이기에 그저 나도 "들꽃, 나는 죽어 다시 태어난다면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라는 저자의 말을 변용하며 나의 독후감을 마무리한다.

 

그의 책을 읽는 내도록 나는 유소년시절로 돌아갔기에 무척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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