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 녹두 1 - 희토류로 통하다
정운현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4년 6월
평점 :
품절


참으로 아까운 언론인이 쓴 소설... "훌륭합니다"
 
 

시대가 만든 작가

 


지난 3월 하순 늦은 밤, 정운현 <오마이뉴스> 전 편집국장(내가 오래도록 부르는 직함은 그냥 '국장'이다)이 전화를 걸어왔다.

 

"박 선생님, 요즘 제가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네? 소설을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지금까지 쓴 걸 메일로 보낼 테니 함 읽어주시고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네, 그러지요."

 

곧 800여 매의 초고가 메일함에 도착했다. 사실 나는 그 무렵 집필중이던 <미군정기> 마지막 부분을 쓰던 중이었다. 하던 일을 밀치고 초고를 읽기 시작했다.

 

첫 장면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솔직히 나는 어느 독립군 이야기나 친일파 인물의 인생역정을 쓴 줄 알았는데, 생소한 희토류가 등장하고 무대가 한국, 중국, 북한, 일본 등으로 이야기 전개가 스피드하고, 최첨단 소재라 매우 흥미로웠다.

 

소설 초고를 읽어가면서 내가 그에게 가르쳐 줄 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에게 배워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문득 고 박경리 선생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분은 생전 한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행복한 사람이었다면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지금도 그 말이 머릿속에 각인돼 있다. 그렇다. 세속적으로 행복한 사람은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가 없을 것이다. 행복한 사람이 쓰지 않고 못 배길 그 무슨 한스러운 일이 있겠는가. 정운현 작가는 이 시대, 특히 이명박 전 대통령이 그를 작가로 만들었다는 씁쓸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가 아니면 언론인 정운현이 어찌 백수 처지로 한강대교까지 갔다가 처자식이 눈앞에 밟혀 다행히 뛰어내리지 않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을까.

 

나는 정 국장의 초고를 다 읽은 뒤 메일을 보냈다.

 

"솔직히 제가 손보아 드릴 게 없습니다. 정말 흥미롭고, 이야기 전개가 스피드하며, 기자 출신의 작가답게 문체도 독특하고, 이야기도 아주 재미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상으로 독자의 사랑을 받겠습니다. 책이 나오면 가장 먼저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보내십시오. 당신 덕분에 이 소설을 썼다는 군말과 함께."

 

그러자 곧 답이 왔다.

 

"선생님의 격려 말씀은 천군만마의 원군으로 힘이 되었습니다."

   

그 뒤 지난 6월 23일 책이 나오자마자 원주 내 집으로 보내주셨다. 나는 곧장 서평을 쓸까 하다가 나보다 필력이 나은 분이 쓰는 게 좋을 듯해, 다른 매체에서 크게 다룰 줄 알고 미뤘다. 정 국장은 언론계에서 수십 년 밥을 먹었는데도 중앙 일간신문에서는 짤막한 신간소개도 없다. 

 

그가 받은 모멸감은 얼마나 크겠는가. 언론인 정운현은 권력자에게 눈밖에 났고, 동료 후배 언론인에게도 소외되고 있다. 아주 고약한 세태다. 하긴 두보 시대도 손바닥을 뒤집는 여반장(如反掌) 세상의 인심이라고 하였다. 대한민국에서 손볼 곳은 언론, 검찰, 교육계라는 말이 틀리지 않은 듯하다.

 

그를 먼저 책으로 만나다

 

솔직히 이 책에 관한 정보는 인터넷서점이나 정운현의 블로그에 잘 나와 있다. 그래서 나는 작가 정운현과 인연 등, 내가 아는 정 국장과 그의 가치, 그리고 이 작품의 의의 등을 두서없이 쓰고자 한다.

 

나는 40대까지 등단치 못했다. 그래서 서구나 이웃 일본처럼 작품집을 통해 등단하여 승부를 걸고자 1988년 그해 봄부터 작품을 200자 원고지에 써서 1200여 매의 원고뭉치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 나섰다. 학교에서 가까운 서대문 아현동의 한 출판사를 두드리자 보름 후에 오라고 했다.

 

그 약속 날짜에 출판사로 찾아가자 편집장이 원고보따리를 돌려주며 자기네 출판사와는 맞지 않는다고 위로의 말을 했다. 나는 그 보따리를 들고 일어서는데 출판사 대표가 미안했는지 임종국이 쓴 <일제침략과 친일파>라는 책을 건넸다.

 

지금도 그 책은 서가에서 가장 잘 보이는 데 꽂혀 있다. 그 뒤 한 서점에서 신간을 살피던 중 정운현 지음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라는 책이 눈에 띄어 선뜻 구입하였다. 나는 이 두 책을 다 읽고 심한 충격에 빠졌다.

 

내가 다녔던 대학의 전 교주(재단 이사장), 당시 근무하던 학교의 전 총장, 내가 직접 배우며 존경했던 교수, 시인, 소설가, 언론사 사주, 심지어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도 친일에서 자유롭지 못해 억장이 무너졌다. 정운현 그는 당시 <중앙일보> 기자였다. 이런 글을 쓰고, 그 자리에서 버틸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1999년 나는 중국대륙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답사하다가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서 내 고향 출신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을 만나고 너무 기뻤다. 내 고향에 이런 순결한 분이 계시다니…. 너무 감동한 나머지 그 이듬해 나 혼자 그분이 희생된 멀고 먼 헤이룽장성 경성현 대라진 풍림촌을 찾아 외로이 서 있는 '허형식희생지비'에 들꽃을 바치고 돌아왔다.

 

그는 박정희 전문가다
  
그때 나는 허형식 장군을 국내학술지에 처음 게재한 성균관대 장세윤(현 동북아재단 연구위원) 교수에게 전화로 그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장 교수는 기왕이면 국내신문에 최초로 허형식 장군을 보도한 대한매일 정운현 기자와 같이 한 자리에서 만나자고 하여 우리 세 사람은 성균관대학 600주년기념관 장세윤 교수연구실에서 처음 만났다.

 

그제나 이제나 정운현의 인상은 까칠했다. 그는 직업의식 탓인지 나를 상당히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내가 구미 출신임을  알고는 자연히 박정희 대통령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는 <중앙일보> 시절 <실록 박정희>를 취재 연재했었다며 내 어렸을 때 고향 어른 상모동 김재학(전 박정희생가보존회장), 원평동 장월상(전 구미면장)씨를 비롯해 고향 선배 등 구미 시가지와 상모동 마을을 샅샅이 뒤진 이야기를 했다.

 

그날 우리는 왜 문경의 박정희 교사가 만주군관학교에 갔을까 하는 문제를 심도 있게 토론하였다. 그는 박정희가 큰 칼 차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나의 주장은 초혼에 실패해서 계속 교단에 서기도 찜찜할 뿐 아니라, 본처가 보기 싫어 도피 차 만주에 갔을 거라고 소설가적 관점에서 주장했다. 

 

그제야 그는 나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피차 박정희 연구 전문가로 더욱 친밀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와 나는 예나 지금이나 그 흔한 승용차도 없이 걸어다니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다. 다른 이를 통해 그는 그제까지 셋집을 산다고 하여, 그는 나보다 더 답답한 사람이라 여겼다. 그 후 내가 중국대륙항일답사기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은 나라>라는 책을 펴내자 그는 <대한매일>에 큰 박스기사로 다뤄주었다.

 

그는 나라의 보배다

 

나는 허형식 장군 이야기를 <영웅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써서 2002년 독립기념관지 7월호에 실었다. 그때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가 이 글을 "일본군 장교 박정희는 기념관 세우고 항일군 총참모장 허형식은 생가 헐려"라는 제목으로 <오마이뉴스>에 실었다.

 

나는 그 기사를 통해 생후 처음으로 인터넷신문을 알았다. 그때 나는 컴맹으로 자판을 두드릴 줄도 몰랐다. 그 후 나는 용정 명동촌 윤동주 시인의 생가와 경북 안동 이육사 시인의 생가를 견준 사진과 원고를 보냈다. 그랬더니 <오마이뉴스> 측에서 자판을 두드려 실어주면서 그 참에 나에게 시민기자로 등록할 것을 권했다. 그래서 2002년 7월에 나는 기자가 되었다.

 

그 후 나는 이런저런 일로 학교를 조기퇴직하고 강원산골로 내려왔다. 그는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떠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으로, 한국언론재단 연구 이사로 잘 나가는 듯하더니 어느 날 그도 갑자기 백수가 되었다. 그 이후 그는 목구멍이 포도청으로 이런저런 일을 하였으나 송충이가 갈잎을 먹은 것처럼 적응치 못하고 마침내 서울을 떠나 경기도 일산 끝자락에서 머물고 있다. 

  

이즈음 세월호 참사 이후 대통령은 나라를 크게 개조하려고 총리와 각료를 새로 지명했으나 총리 후보자는 두 차례 낙마했고, 장관 후보자마저 국민들에게 "어디서 저런 인물을 데려 왔느냐"는 비난을 받았다.

 

이즈음 사회 정의를 위해 큰 언론사 데스크를 지키거나 논설위원으로 정론직필을 휘두를 그가 사람과 때를 대단히 잘(?) 만나 이즈음 한가롭게 일산 강둑에서 자전거로 소일하거나 쑥을 뜯으며 지내고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이 나라에는 깨끗한 사람이 없다고 너스레를 떤다. "멧돼지 눈에는 멧돼지만 보인다"는 무학대사의 촌철살인 말이 떠오른다.

 

그는 나라의 보배다. 친일문제와 민족정기 문제에 그만큼 천착한 이도 드물다. 우리는 이대로 적당히 지내면 세월호 같은 참사를 다시 겪을 수 있다. 올바르지 못한 지도자도 계속 봐야 한다. 대한제국이 그렇게 망했다.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오늘도 우리는 동족끼리 총구를 맞대고 있지 않는가.

 

다시 그의 신작 소설 <작전명 녹두>로 화제를 돌린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대학시절 고대소설 강독시간에 읽은 <임진록>이 떠올랐다. 임진왜란에서 참담히 패배하고 기아, 역병에 시달린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대한해협을 건너간 사명대사가 온갖 도술로 일본을 복수하고 돌아올 때 얼마나 통쾌했던가. 나는 그 소설을 읽으며 오랜 체증이 내려간 듯 후련했다.

 

누가 이 나라를 바로 잡을까 
   
정운현은 소설 <작전명 녹두>를 통해 단순히 일본을 응징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100여 년 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뤼순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한 그 내용을 재현시키고 있다. 이 얼마나 우리에게, 일본인과 중국인에게 소중한 이야기인가.

 

후생가외(後生可畏)라. 나라와 겨레를 위할 아까운 인재가 한강 하류 둑길에서 쑥이나 뜯고 있으니 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겠는가. 우리는 지금 탁류에 쓰레기 더미처럼 휩쓸러 가거나 아니면 세월호처럼 바다 밑바닥으로 침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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