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유친'

  
나는 김원일의 <아들의 아버지>을 읽는 동안 내내 나의 아버지를 머릿속에 그렸다. 이 책속에는 나의 아버지도 있었고, 내 모습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김원일만큼 내 아버지를 그리지 못했다. 솔직히 나는 그분만큼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그릴 용기도 없고, 기억력도, 필력도 부족하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때로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눈물을 글썽였고, 내 아버지의 시대상을 제대로 모른 채 살아온 무지가 부끄러웠으며, 또한 아버지에 대한 불효에 가슴 아팠다.

 

아버지와 아들, 이는 아득한 옛날부터 모든 생명체들이 종족을 보전하는 근본 관계로 이어져 왔다.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 어머니와 딸도 마찬가지다. 흔히들 아버지와 아들은 '부자유친'이라 하여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의 으뜸으로 삼고 있다.

 

부모와 자식 사이는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맺는 인간관계이고,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친한 관계이다. 더구나 이 관계는 천륜인 만큼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거나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륜 중에서도 그 첫째로 꼽는다. 이 덕목은 윤리 의식이 희박해진 현대 사회에서 더욱 강화해야 할 행동 규범이라 하겠다.

 

김원일 선생에게 '아버지'는 평생 화두요, 창작의 샘물이었다. 그동안 그는 여러 작품에서 아버지의 단면을 그려왔지만, 고희를 넘긴 이제야 정면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 전면을 가감없이 그렸다. 몇 해 전, 나와 대담 때 김원일 선생이 주신 아버지의 약력 유인물이다.


 

김종표(金鍾杓 · 1914~76) 일제강점기 때 마산상업고등학교 졸업. 한국전쟁 전 남조선노동당 경상남도 부위원장. 1950년 한국전쟁 직후 인민군 서울 점령 때, 성동구역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서울시당 재정경리부 부부장 역임. 연합군 인천 상륙 때 구로지역 방위선 전투지휘 후방부 부책임자로 있다가 인민군이 서울 철수할 때 단신 월북. 이후 의용군으로 유격대를 조직하여 남하. 1954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남북회의에 북한 측 대표 일원으로 참가. 연락부 대남사업 책임지도원. 1968년 무렵 해운총국 간부를 지냄. 1976년 강원도 금강산 부근 요양소에서 신병으로 사망.

 

이 간단한 이력에서도 아버지의 삶이 매우 고난의 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난기에는 사회변혁을 꿈꾸거나 행동의 주체자인 당사자보다 그 부인이나 자식이 겪는 고통은 오히려 더 가시밭 길이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코뮤니스트라는 사실만으로도 재판도 없이, 심지어는 골짜기로 데려가 그대로 처형했던 야만의, 증오의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 세상에 남은 가족들은 숨소리도 죽이며 연명해 왔다.

 

후데이센징

 

진영주재소 순사와 사복형사가 대문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신발을 신은 채 불문곡직 안방과 건넌방에 나누어 들더니 다락·장롱·선반을 뒤졌다. 셋 중 하나는 부엌에서 집안 뒤란을 돌며 군도를 뽑아 여기저기를 쑤셔댔다. 어머니가 순사에게 무슨 일로 이러느냐고 물었다.

 

"당신 서방이 후데이센징[불령선인]인 줄 몰랐던 말인가? 여편네도 주재소로 가야겠어!"

조선인 순사가 윽박질렀다.…어머니를 주재소로 연행하자 취조를 당당한 일본인 형사와 조선인 순사가 합세해 매질부터 시작했다. 심문은 그다음이었다. 아버지가 진영 본가에 언제, 무슨 일로 왔다갔으며, 무슨 말을 하고 갔느냐고 족쳤다. 어머니가 글을 쓸 줄 모른다고 하자 사실대로 대라고 윽박질렀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부산에 살고 있었기에 어머니는 서방이 설을 맞아 차례를 지내러 당일치기로 왔다 간 뒤로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설에 왔을 때도 별다른 말이 없었고, 바깥에서 하는 일을 말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순사는 어머니가 거짓말로 둘러댄다며, 아버지가 바깥에서 하는 일을 자백하라고, 다시 매질을 시작했다.
- <아들의 아버지> 124~125쪽

 

그해(1950년) 여름 여덟 살 소년이었던 내게 인공 치하의 서울생활 석 달도 많은 부분 희미해졌으나 유독 잊히지 않는 몇 가지 기억은 남아 있다. 첫 번째가 지독한 허기였다. 그해 여름 내내 어질머리를 앓을 정도로 허핍하게 지낸 기억은 뒷날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인공 치하 서울시당 재정부 부부장 집이라면 배부르게 먹지야 못해도 삼시 세 끼 먹는 부족함이 없어야 했는데 사정이 그렇지가 않았다. 아버지의 무관심 탓이었다. 정말 아버지는 가족이 안중에 없었을까? 아버지가 당 사업에 너무 바빴다는 것은 한갓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만이 아니라 아버지는 평생 처자식을 버려두었다. 어머니가 당신께 저주를 퍼부은 말로 가족을 돌보지 않은, '사상과 계집질에 미치광이'란 것으로, 청년기에는 나 역시 그 말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 <아들의 아버지> 124~125쪽

 

복잡한 여자 문제가 흠결이었지만 아버지는 단연 진영 청년들의 우상이었다.

 

"김 선상이 보기에는 예의 바른 얌전한 샌님인데 치마만 걸쳤다 하모 부뚜막부텀 먼첨 올라가니,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를 일이야. 허기사 영웅호걸은 다들 계집을 밝히는 법이긴 해."

아버지를 두고 장터어른들의 평이 그랬다. 이름이 알려진 혁명가나 정치가를 비롯해 지식인치고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드문 법인데, 그렇게 보자면 아버지 역시 그 범주에 들었다. 그들은 평생 한 여자와 살아야 한다는 계율을 무시한 채 다른 여자와 관계 맺음 또한 자기가 하는 일에 필요조건이란 듯 남의 눈치 같은 건 개의치 않았다.
- <아들의 아버지> 178쪽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그런 무심하고 무정한 아버지이지만 아들로서 혈육으로 그리는 원초적인 정이야 어찌 남과 다르겠는가. 9·28 수복 직전 김원일이 아버지와 마지막 헤어지는 장면이다.

 

그날 오후, 고물상 마당에서 첫째 아우에게 구슬치기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지프 한 대가 열린 마당으로 급커브를 돌며 들이닥쳤다. 지프가 일으킨 흙먼지가 가라앉아 차에서 내리는 군복 입은 전사가 바로 아버지였다. 운전병은 위장망을 걸친 젊은 전사였다. 군복을 입은 아버지를 보기가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견장이 달리지 않은 군복에 완장을 찼고, 옆구리에서는 권총이 덜렁댔다. 아버지에 대한 기다림에 지쳐 원망이 하늘에 닿을 듯 하던 어머니의 애타는 마음처럼 나 역시 아버지를 오매불망 기다린 탓인지 당신의 얼굴을 보자 너무 반가워 눈물부터 쏟아졌다. 군인의 모습으로 변한 당당한 아버지였다.

"아, 아부지!"

내가 부르짖으며 아버지를 불렀다. 눈물이 앞을 가려 군모 밑에 드러난 아버지의 수염 거뭇한 깜조록한 모습이 어려 보였다.

"넌, 남자잖아. 아버지를 보고 울다니. 남자는 함부로 눈물을 흘리면 안 돼."

아버지가 내 알머리를 한번 쓱 쓰다듬고는 빙긋이 웃었다.
- <아들의 아버지> 338쪽

 

그렇게 북으로 매정하게 떠난 아버지를 소년 원일은 평생 화두로 심아 기억 속에 희미한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며, 때로는 휴전선 너머 북으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여덟 살 때 아버지와 헤어진 그는 문제적 장편소설 <노을>에서 이 세상의 변혁에 앞장서는 행동가 아버지를 상상했고, 대작 <불의 제전>에서는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이념적 지식인 아버지를 찾았으며, 화제작 <마당 깊은 집>과 아름다은 단편 <미망>에서는 그 아버지가 사라진 후 가족이 겪는 설움을 아프게 회상한다."
- <아들의 아버지> 뒤표지 김병익 (문학평론가)

 

이 시대의 한 영웅

 

나는 김원일 선생을 이런저런 연유로 만나 많이 배우고 있다. 2005년에는 남북작가대회에 동행도 했고, 2007년에는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이라는 포토에세이집을 함께 펴내기도 했다.

 

나는 선생을 만날 때 두 번 당신의 모습을 담았는데 카메라 앵글에 잡힌 그 얼굴과 눈매에서는 어딘가 모를 깊은 우수와 비원, 그리고 오뇌가 보였다. 마치 김동리의 <등신불>처럼. 이즈음 내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어떤 약속>을 연재하면서 한국전쟁 문학의 대목에게 한 수 배우고자 서울로 가 선생을 찾아뵙고 몇 가지 여쭸다. 선생은 내 작품에는 대사가 많고 묘사와 지문이 부족하다는 처방을 내리며, 다시 책으로 펴낼 때는 그 점을 유념하며 퇴고하라고 아주 약방문까지 써주었다. 그때 김원일 선생은 곧 나올 신간 <아들의 아버지>에 대해 말했다.

 

"나는 이 작품을 시작할 때 세 가지 형식을 활용하고자 했다. 첫째, 해방과 전쟁 사이의 시대적 공간을 역사적 사실에 의거해 르포식으로 기술하고, 둘째 아버지의 생애와 내 유년을 사실대로 쓰고, 셋째 아버지를 형상화한 부분은 내가 너무 어린 나이이기에 추측과 허구로 썼다."

 

내가 선생에게 앞으로 구상하고 있는 다음 작품을 여쭙자, 낙동강 다부동 전투를 배경으로 바로 내 고향 구미 옆인 약목의 어느 분이 겪은 그때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고 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어떤 약속>과 같은 배경이라 선생이 그려낼 그 이야기가 잔뜩 기대가 된다.

 

김원일, 그는 지난 세월 문둥병 환자보다 더 무섭다는 코뮤니스트의 아들로, 고난의 삶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다. 서초동 한 밥집에서 점심을 나누고, 차 한 잔을 마신 뒤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6척 장신의 그 뒷모습이 나에게는 이 시대 한 영웅처럼 보였다. 그는 그 어려운 시기에 절망의 낭떠러지에서 소나무 그루터기를 부여잡은 뒤 그 절벽에서 산삼을 캐낸 사람이다. 그가 몸소 체험하고 쓴 한국전쟁 문학은 두고두고 그 시대의 귀한 증언록이 될 것이다.

 

나는 지난 주말부터 382쪽에 이르는 장편소설 <아들의 아버지>에 깊이 빠져 정독했다. 오늘 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이 소설은 한 가족사라기보다 바로 우리나라 역사요, 그분의 아버지는 바로 분단된 우리나라임을 느꼈다. 지난날 외세에 무릎을 꿇지 않고, 그들에 맞서 저항한 우리 아버지들 가운데는 그렇게 힘들게 사신 분이 많았다.

 

나는 단풍이 곱게 물든 이 계절에 아버지가 영원히 잠드신 월정사 수목원에 찾아가 깊이 고개를 숙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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