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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엽 브레이커 스토리코스모스 소설선 1
고요한 외 지음 / 스토리코스모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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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다. 문학의 죽음이라는 유령이.” 생각해보면 문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를 이야기하지 않은 시대는 거의 없었던 듯하다. 대중은 즉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고 엘리트는 고색창연하고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옛것만을 예술이라 생각하며 스스로 깨어있는 자라고 생각하는 자는 대중에게 가르침을 줘야 가치 있는 문학이라고 외친다. 그 주관에서 벗어난 문학은 늘 죽은 문학일 뿐이다. 문학이 살아 있던 시대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어떤 것일까? 뒤떨어진 문학은 죽고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문학이 태어나는 것 아닐까? 그러니 문학의 죽음이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말은 현재 어떤 문학 형식 하나가 도태되는 중이라는 말에 가깝다.

대중과 유리되어 자신들끼리 칭찬하고 감동하고 문화적 다양성이라고 외치는 일단의 유행이 광풍처럼 불었다. 대중은 이런 문단과 유리되어 자신이 원하는 글을 찾아 읽는 것뿐이다. 이런 현상을 가장 잘 풍자하는 단편이 이 소설집의 표제작인 전두엽 브레이커.

이 작품의 첫 문장을 보자. “아주 오래전에 소설은 죽었다.” 이렇게 시작한다. 신춘문예 낭인인 주인공은 웹소설로 한 달에 억 단위를 버는 작가를 사부로 모신다. 그 사부의 웹 판타지 연재 글은 대충 나는 존나 쎄다는 내용이다. 허성환이 풍자한 판타지는 현재의 히트 작품이 아니다. 오래전 양판소 판타지를 풍자한 <투명드래곤>이라는 소설을 소환해서 스토리에 맞게 구성한 것이다. <투명 드래곤>1화는 아래와 같다.

 

<"크아아아아"

 

드래곤중에서도 최강의 투명드래곤이 울부짓었다

투명드래곤은 졸라짱쎄서 드래곤중에서 최강이엇다

신이나 마족도 이겼따 다덤벼도 이겼따 투명드래곤은

새상에서 하나였다 어쨌든 걔가 울부짓었다

 

"으악 제기랄 도망가자"

 

발록들이 도망갔다 투명드래곤이 짱이었따

그래서 발록들은 도망간 것이다

 

꼐속

투명드래곤 제1화 전문(全文).>

 

허성환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자기 필력의 37%밖에 쓰지 않았다고 한다. 56% 이상 실력을 발휘하면 너무 쎄서 기성 작가들이 설 자리가 사라지기 때문이란다. 작품과 작가의 말까지 모두 기성 문학을 풍자하는 작품이다.

출판사가 이 작품을 표제작으로 삼은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식상한 문단에 식상한 소설이 판치는 것은 어쩌면 세상이 미쳤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미친 소설가가 새로운 소설을 써서 문학을 부활시키겠다는 의지로 자신의 실력을 37% 발휘하여 대춘 쓴 소설이 이 작품이다. 참고로 양판소 판타지를 풍자한 <투명 드래곤> 이후 괜찮은 웹소설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 중 몇몇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OTT로 해외로 뻗어나갔다. 이 풍자 소설이 한국 문학 자체를 그렇게 만들기를 고대해 본다.

 

고요한 작가의 <사람과 사람 사이>는 코로나와 국가 권력을 풍자한 희극이다. 말하자면 카푸카의 <심판>과 조지 오웰의 <1984>를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분위기와 섞은 후에 코로나 시기의 우리나라에 대입하여 희극으로 그린다면 딱 이런 작품이 나올 것이다. 부부관계를 코로나라는 이유로 막는 국가. 그런데 그 국가가 한 명의 개인으로 주인공 앞에 등장한다. “시민님, 제가 바로 국가입니다.”라는 대화로.

국가라는 시스템은 결국 인간이고 코로나라는 자연재해 앞에서는 시민을 구속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재해보다 인간인 시스템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더 멀게 만든다. 웃픈 블랙코미디다.

 

권재훈의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는 이 단편집 중 가장 순문학 단편에 가깝다. 갑자기 내린 폭우, 그리고 갑작스럽게 이별을 고하는 여자와 그러자 차와 여자를 버리고 떠나 버리는 남자, 그러나 말한 것과 말하여진 바는 사실 전혀 다른 것이었다. 소쉬르식으로 말하자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는 다르기 마련이고 그로 인해 소통은 우회되고 운명은 갈라진다. 하지만 둘 사이를 단절시킨 요인 중 하나인 폭우가 다시 그들을 재회시키고 빗소리는 조금 전과 같은 소리로 울리지만, 이번에는 전혀 다르게 들린다.

같은 시공간 속에 펼쳐진 두 대의 차와 두 커플, 그들은 같은 상황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 그들의 운명이 일 순 중첩되었다가 이내 멀어져간다따당따당 차를 두드리는 여운만을 남기고. 잘 짜인 구조를 가진 단편의 샘플을 보여 달라고 한다면 이 작품을 내밀고 싶다.

 

한때 문학이 세상을 바꿀 힘이 있다고 믿거나-예컨대 에밀 졸라-혹은 적어도 세상을 기록하는 기록자로서의 위상은 가져야 한다고-예컨대 발자크-주장하는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 문학에 그런 위상을 부여하겠다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면 시대착오적 캐릭터가 될 터이다. 그런데 김솔의 <걷는 여자, 걷는 남자>를 보면 적어도 작가는 기록자의 기록자는 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기세다. 이 책의 모든 단편 중 가장 관념적인 동시에 가장 사실적인-수많은 역사적 사상적 편린을 그대로 차용했다는 관점에서-작품이다. 얼마나 관념적인가 하면 여기 등장하는 캐릭터 그 누구도 개인으로서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다. 한 민족이나 한 국가를 대표하는 이데아로 존재할 뿐이다. 동시에 문장 대부분이 다른 작가, 혹은 다른 사상가의 사상을 빌려 표현된다. 예컨대 멕시코 남자가 국경을 떠나는 이유로 카프카가 변신의 문장을 소환한다. 심지어 이 작품의 제목마저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의 이족보행을 참고했다고 한다. 덕분에 어떤 독자에게는 난해할 듯하다. 그러나 조금만 찾아보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기존의 이야기를 이렇게 엮을 수도 있구나, 하는 찬탄이 터져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전혀 다른 맥락으로 인용을 활용하거나 전개 역시 예상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장르도 아니고 순문학도 아니고 기사도 아니며 설명문은 더욱 아니다. 김솔은 잘 벼린 칼로 기존 문학을 분해해서 다시 자기 작품으로 조립하는 패치 디자이너 같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운, 중독성 가득한 브랜드를 창시한 디자이너다.

 

<스토리 코스모스>가 추구하는 문학이 장르의 통섭이라면 김은우의 <당신의 선택이 간섭을 일으킬 때>가 어쩌면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닐까? 중반까지 여느 단편처럼 무리 없이 전개되다가 중반 이후 롤러코스터처럼 판타지와 SF의 세계로 미끄러지는 작품이니까. 게다가 작가는 상대성이론과 에셔의 그림을 참고했다고 한다. 어쩌면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 역시 김은우 작가의 애장서가 아니었을까? 이 작품은 에셔의 그림처럼 앞뒤로 이어지지만 모순된 결론을 향한다. 작가는 우리 인식의 불완전성과 동시에 우리 각자가 매일 내리는 판단이 우주에 일으키는 파문을 그리고 싶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매우 성공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도수영의 <R300>은 장르로서 SF 단편이다. 나우는 끊임없이 시스템의 보고서를 올린다. 그러나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고 답변하지 않는다. 메신저 KT27에 따르면 시스템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우는 자신의 일상을 멈추지 않고 어쩌다 만난 KT27과의 만남이 자기 삶의 역사에 기록될 모든 것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모두가 고립되고 기계와 생명공학이 탄생까지 좌우하는 시대가 된다면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접촉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단편은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하지만 라스트 신은 영화 <쇼생크 탈출>의 마지막 장면처럼 감성적이다.

 

박유경의 <여분의 사랑>을 읽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이 병들고 불편한 세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분사랑이니까. 이야기의 구조는 간단하다. 다희가 오랜 기간 연애한 우주와 헤어지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구조다. 스토리의 가장 기본이 무엇일까? “there and back”이다. , 떠났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물론 돌아올 때 주인공은 변화한다. 다희도 마찬가지다. 이미 상처만 주는 사랑,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는 깨달음, 그리고 그럼에도 사랑할 대상을 찾아서 돌아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그러니까 사랑이다. 그런데 왜 여분의 사랑일까? 갑작스럽게 둘 사이에 끼어든 펜션의 이상하고 불길한 주인이 말해준다. “요즘 같은 때엔 사람보다 (개가) 낫지. 병들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까.” 가장 병든 사람은 그 펜션 주인이다. 그러나 다희는 불길하고 악의에 찬 주인과 맞서지 못한다. 다만 다친 강아지를 구해서 돌아올 뿐이다. 어쩌면 그것이 다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일지도 모른다. 박유경이 하고자 하는 말은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그것이라도 하자. 그래서 피폐하고 병든 세상일지라도 조금의 여분을 남겨 두자. 사랑할 여분을.

 

이상욱의 <스탠다드 맨>SF 중에서도 일종의 사이버펑크 물이다. 그런데 이상욱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사이버펑크 스토리를 고안했다. 사람의 정신계를 육체적 기관처럼 분리 통합한다면 그 정신계를 타인과 그대로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지우가 스탠다드 맨이라 불리는 것은 그의 정신을 불특정 다수의 후예와 공유했고 그의 정신적 능력이 그대로 이식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정이다. 아마도 이상욱이 이토록 대담한 설정을 도입한 것은 이 작품을 사이버펑크라 생각하지 않고 인문학적 SF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박지우가 연구한 집합적 기억은 칼 융의 집단 무의식과 유사하다. 기억이나 정신 활동을 물질적 단계까지 환원시킨 것이 차이랄까. 작가의 말을 봐도 세대별 가치관의 기원과 차이가 발상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발상을 장르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가는 것을 작법의 중심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래서 일견 대담하고 일견 장르의 규칙과 지식을 벗어난 이 작품이 탄생했음이 틀림없다. 누구나 이러한 자유를 꿈꾸지만, 그것을 작품으로 만드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단편이 소설집에 자리 잡는 것이 마땅해 보인다.

 

정무늬의 <그래도 되는 사이>는 트렌디하다. 캐릭터가 유튜브 크리에이터라는 점, 그리고 소재가 성소수자라는 면, 심지어 작가가 웹소설과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겸임하고 있다는 요소까지 감안하면 이 작품은 작품 내외적으로 모두 트렌디하다. 서사도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오가며 균형을 잡고 갈등도 유머러스하면서 감성적이다. 그래서 모든 세대가 각자의 관점에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언젠가 정무늬작가의 떡볶이 론을 읽은 적이 있다. 잘 쓸 수 있고 수준 높게 쓸 수도 있지만 독자가 원하는 것을 쓸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작가의 지론이었다. 이 작품은 그 지론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기존 문단과의 거리감도 없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격이다. 전업 작가를 꿈꾼다면 이 단편을 꼭 읽어 봤으면 좋겠다.

 

팔색조라는 말이 있다. 이 소설집이 그렇다. 한 권의 소설에 담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장르가 다 담겨 있다. 그러면서 한편 한편이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담론을 담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문학과 소설의 정체성이 완전히 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소설집은 그 변화를 촉진하는 매개체가 되길 바라고 있는 것 같다. 독자로서 그 변화를 환영한다. 그리고 더 많은 매개체가 쏟아져 나오기를 희망해 본다.

네 맞습니다. 시민님. 깜빡 조는 바람에 제 정체가 탄로 났군요. 제가 바로 국가입니다. - 고요한, <사람과 사람 사이> 중에서 - P28

어쩌면 그 순간 빨려 들어간 다른 시공간, 다른 우주가 바로 이 소설이었는지도 모른다. - 권재훈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 작가의 말 중에서 - P64

여자는 걷는다. 걷는 동안 존재는 불확실해지므로 공포와 회한으로부터 안전하다. - 김솔, <걷는 여자> 중에서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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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그저 밤 아니면 낮이고
구효서 지음 / 스토리코스모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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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정도, 대단히 많이 팔린 로맨스 소설의 광고가 기억난다. 작가는 태연한 표정으로 세상은 사랑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고 자신은 사랑을 믿는 사람을 위해 소설을 썼다고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로맨스 판타지다. 달콤하다가 쌉싸름하다가 눈물 쭉 빼다가 마지막에 웃는 그런 이야기들. 말하자면 할러퀸 로맨스를 길게 늘여서 한국적 클리셰로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뻔뻔하게 세상은 사랑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로맨스 소설은 로맨스가 끝나고 남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로맨스가 끝났을 때, 환상과 설탕 범벅으로 가득한 관계가 끝났을 때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삶 그 자체일 뿐. 그래서 삶을 담지 않은 로맨스를 우리는 판타지라고 부른다. 일부는 여성들을 위한 포르노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때때로 사랑과 만남을 주제로 한 소설이 삶을 직시하거나 삶을 관통하는 울림을 주기도 한다. 구효서작가의 소설집 <세상은 그저 낮 아니면 밤이고>가 그렇다.

 

환상이 잦아들고 남은 우리의 삶은 비루하고 피폐하고 때로는 애잔하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삶이라는 것이 그러지 않을 때가 있었나? 가장 화려하고 빛났다고 여기는 시절도 톺아보면 남루한 그림자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마련이다. 그걸 가린 채 보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그때는 좋았지, 하고 자위하는 것을 추억이라고 부른다. 보고 싶지 않았던 부분을 확대하고 관계의 엇갈림을 확대해서 내밀 때 불편하다. 그러나 그 불편을 받아들이면 조용한 울림이 시작된다.

 

구효서작가는 6편의 소설에서 단 한 편도 에두르지 않는다. <세상은 그저 밤 아니면 낮이고>의 주인공은 첫사랑의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대체물로 위안을 삼으며 과거를 되씹는다. 그리고 현재 만나는 대체물의 여성에게 지겹다는 말을 내뱉는다. 그러나 과거로 떠난 여행에서 돌아와 결국 집어든 것은 눈을 아리게 할 정도로 선명하게 살아있는 백합, 그녀가 화병에 꽂아 두었던 꽃이다. 아마도 시들었음이 분명한 그 꽃이 순간 눈이 아리도록 하얗게 빛났던 것은 그가 아직도 삶을 되찾을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다음 날 시든 꽃과 다시 울리는 전화통을 보며 그는 지겹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지겨움의 종류는 떠나기전과 다를 거 같다. 그 다름을 포착해서 펼치는 작가의 내공은 대가의 그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작품은 <그녀의 야윈 뺨>이다. 오랜 첫사랑이 끝나고 곤궁한 연극배우로서의 내 삶 앞에 문득 야윈 뺨을 한 첫사랑이 찾아온다. 피천득은 <인연>이라는 수필에서 아사코와의 아름다운 만남이 재회에서 무너졌을 때 자신의 환상이 깨어짐을 슬퍼한다. 그러나 작가의 시선 거기에서 그친다면 글쟁이는 될 수 있어도 작가라고 할 수 없다. 첫사랑이 깨어지는 것은 미숙한 우리가 자신의 환상을 상대방에게 투사하고 자신의 환상을 사랑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우기기 때문이다. 환상과 현실의 균열이 서서히 벌어질 때 사랑은 깨어지고 대부분은 자신의 환상을 간직하기를 택한다. 그러나 작가는 망설임 없이 현실로 들어서고 주인공은 그녀의 야윈 뺨만을 기억하게 된다. 거품이 사라지고 앙상하게 남은 나와 그녀의 삶. 그것이 우리가 안고 가야 하는 실존이다. 직시하는 힘, 그것이 이야기의 힘 아닐까?

 

이야기 전편이 만남과 사랑의 어긋남을 그리고 있는데 그 어긋남이 가장 크게 나타나는 작품은 <철갑나무가 있는 광장>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을 뛰어넘는 로맨스를 배경으로 어긋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아이러니. 어쩌면 이 작품집의 주제를 가장 잘 담은 단편일지도 모르겠다. 배경으로 잡은 환상과 전면으로 튀어나온 현실이 너무나 선명하기에.

 

<아침 깜짝 물결무늬 풍뎅이>이는 중년의 남자와 어린 대학생간의 풋사랑이 이어질 듯 말 듯 줄타는 긴장이 이어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러나 마지막은 어긋난 첫사랑, 그리고 제대로 기억에 남지 않은 과거가 반전의 결과로 이어진다. 한때는 그토록 가슴 아팠던 이별도 나중에는 부둣가의 낡은 밧줄처럼 중간 중간 끊겨 있는 결락으로 남을 뿐이다. 그래도 그렇지,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하고 자조해도 소용없다. 삶의 양태가 그런 것이니까.

 

<깡통 따개가 없는 마을>은 자전적 소설이라 작가의 잔향이 가득한 작품이다. 전업작가 선언을 한 주인공은 팔리는 작품을 쓰겠다며 집을 떠나 암자에서 소일이나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알게되는 두 가지, 이 마을에는 깡통 따개가 없고, 불목 하니는 탈출 묘기 전문가였다. 그런데 그 불목하니는 묘하게 주인공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다가 마지막에 집에 갈 때는 버스를 따라 달리며 작별인사를 한다. 전업 작가지만 연수입이 끽해야 800인 작가, 그리고 놀라운 탈출 재주가 있지만 주지스님에게 혼나기만 하는 불목 하니, 모처럼 구해 왔지만 쓸모 없는 깡통 따개 이 세 소재가 서로 이어지며 작가의 자조적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어떡하지?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깡통따개가 된 것 같은 내게 마지막 말이 깊이 자리를 잡는다.

 

<나무 남자의 아내>는 이 작품집 전체를 통해 가장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소재를 다룬다. 고타마 싯달타가 좋아했다는 전단향, 그리고 수백년 동안 물에 가라 앉혀 만들었다는 침단, 또 마을 숙업소의 주인인 말총 머리의 그녀가 등장하는데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간다. 주인공은 침향을 찾아 이곳에 왔지만 물질적인 침향은 찾지 못한다. 하지만 침향을 찾았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다.

이 작품은 아나톨 프랑스의 <타이스>의 주제를 현대로 옮겨와 문학적으로 윤색한 작품처럼 느껴진다. 성과 속을 나누는 것이 사실은 속스러운 것 아닌가? 삶은 스스로 충실하다면 누구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인데. 아나톨 프랑스가 직설적으로 던진 주제를 작가는 전단향처럼 은은하게, 침향처럼 깊게 스며드는 향기로 풀어낸다. 아마도 이런 깊이를 품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집의 발문에서 박상우작가는 울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진짜 소설이라고 말한다. 이 소설집 6편은 모두 깊은 울림을 가져온다. 그 울림의 정체는 비루하고 피폐하더라도 우리가 껴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삶, 지겹다고 되뇌이더라도 아침이 되면 다시 시작되는 삶 그것을 에두르지 않고 직시하는 작가의 시선이 우리 가슴에 꽂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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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어 : 삶의 의미
박상우 지음 / 스토리코스모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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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코미디 중에서 <맨 인 블랙>이 있어요. 1탄이 1997년 개봉했으니 25년 전에 개봉한 영화네요. 영화 자체는 그럭저럭 볼만한 SF액션 코미디였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었어요. 거대한 외계인이 구슬 크기에 불과한 우리 우주로 구슬치기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립니다.


 

우리 관점에서는 무한한 크기의 우주가 저 외계인 관점에서는 구슬인 거죠. 이 비슷한 이야기를 칼 세이건이 한 적이 있어요. <코스모스>에서 나온 이야기로 생각하는데 입자를 나누고 나누면 쿼크(Quark)가 나타나는데, 이 쿼크 단위 아래에는 뭐가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칼 세이건은 엉뚱한 상상이지만 가장 작은 입자 속으로 들어가면 다시 무한한 하나의 우주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는 이야기로 한 장을 끝냈던 것 같아요. 무한한 우주 속에 무한히 작은 입자인 쿼크, 그리고 그 쿼크 속에 또 하나의 무한한 우주, 거대한 순환고리 같죠? 이 상상을 머리로 그려 보는데 왠지 몸에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납니다. 오톨도톨.

 

이번에 박상우작가의 신작 에세이 <검색어 : 삶의 의미> 읽는데 <맨 인 블랙>의 저 장면과 칼 세이건의 상상이 떠오르면서 다시 소름이 돋는 겁니다. 가벼운 필치로 썼지만 거대한 우주적 상상력이 담겨 있는 에세이로 읽혔거든요. 무한한 평행우주 속에 각자의 내가 따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 각자는 무엇일까? 우리는 지구라는 무대에서 각자의 인생이라는 역할극을 수행하는 것은 아닐까? 그 역할의 의미는 이번 생에서 보다 큰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몹시도 무거운 질문을 깃털처럼 가볍게 우리 마음 속으로 날아들게 하는 구절들로 가득했거든요. 이 거대한 우주에서 먼지보다 작은 우리의 삶, 그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찾아야 하는 의미 같아요. 박상우작가의 이 에세이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 삶에서 각자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 알려주는 가이드같습니다(이렇게 이야기하니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가 떠오르네요).

 

이 에세이는 또 끊임없는 독서, 탐구, 그리고 창작을 권합니다. 줄여서 그것을 공부라고 한다면 그 공부는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속물 교양을 쌓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삶의 작가입니다. 미완의 삶을 완성하기 위한 고뇌는 결국 의미 탐구로 나아갈 수밖에 없고 그 의미탐구의 일환이 독서와 창작이라는 말이죠.

 

누구에게나 인생은 미완의 작품이고 인간은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고뇌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위 한마디에 삶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작가님의 이 말에서 삶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삶을 사랑한다면 삶에 대한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스스로 의미를 찾기 위한 공부라면 아무리 해도 지치지 않을 겁니다. 자신의 삶을 파고들수록 더 사랑하게 될 테니까요.

 

칼 세이건의 어록 중에는 이런 것이 있어요.

작은 생명체로서 우리는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우주의 광대함을 견딜 수 있다.”

칼 세이건이 말하는 사랑은 남녀의 로맨스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사랑을 베이스로 해서 보편적인 인류애로 나아가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과학자와 문학가가 같은 지점에서 조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광대한 우주,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의미, 그것은 사랑이라는 거죠.

 

모처럼 좋은 에세이를 읽었습니다. 요즘은 경박단소한 글들이 주로 수필이라고 팔리는 거 같아요. 그러나 한 번쯤 다른 관점에서 우리와 우주를 돌아보게 만드는 글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거 같아 일독을 권합니다.

구글에 삶의 의미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면 600만개가 넘는 검색자료가 뜬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어떤 책을 읽다가 알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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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 - 제18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고요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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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 2022년의 백귀야행

 


 

벛꽃이 만발한 밤거리와 죽음


장례식이 끝나면 재호는 마리를 뒷자리에 태우고 서대문과 종로의 밤을 질주합니다. 밤은 찬란하고 장례식장에서 피기 시작한 벚꽃은 소설 내내 흐드러진 채 흩날리죠. 이상한 조합이죠? 장례식과 죽음, 그리고 벚꽃과 맥도날드. 그러나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바로 그러할지도 몰라요. 누군가가 죽은 날, 누군가는 환하게 빛나는 불빛을 24시간 뿌려대는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잖아요. 죽음조차 상조회사의 수요이듯 24시간 불야성으로 반짝거리는 맥도날드는 2022년 서울의 자본주의 숙성도를 드러내는 상징이 될만하지 않나요?

 

장례식 아르바이트를 하는 재호와 마리는 왜 맥도날드 밤새 오토바이를 타고 맥도날드 순례를 떠나는 것일까요? 오랜 기간 입사 원서를 내고 탈락을 거듭한 그들에게 맥도날드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길래?

죽음과 내내 마주하는 등장인물들 누구도 심각한 표정으로 슬퍼하지 않아요. 우울하다고 이야기할 때도 뭔가 촌극같은 느낌이 들죠. 심지어 아죽사(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 회원들은 유니폼으로 빨간색 양복을 입고 장례식에 참석합니다. 히로시가 만들어준 빨간 양복은 고베에서는 루팡 3세를 의미한다고 하거든요. 이렇게 이 소설은 죽음과 벚꽃, 장례식과 빨간양복, 그리고 고베의 지진과 루팡 3세를 연결합니다. 이 낯선 조합이 작가가 말하고 싶은 우리 시대의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루팡 3, 그리고 헤이세이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이야기를 조금 더 확장해 볼게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떠오르는 작품이 하나 있었어요. 루팡3세를 제작한 지브리의 94년도 작품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이하 폼포코)입니다. 자본주의가 한창 자리를 잡아가던 60년대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루팡3세는 모든 면에서 기존의 모럴과 법을 무시하는 피카레스크였죠. 그러나 30여년이 흐른 폼포코에서 주인공 너구리들은 고도자본주의 시대의 인간에게 철저하게 패배하는 것으로 그려지죠. 이건 거의 잔혹동화 같아요(지브리의 진혹동화!)


너구리가 목숨을 걸고 펼친 마지막 항전, 백귀야행

 

인간에게 빼앗긴 터전을 되찾기 위한 마지막 대작전을 펼치는데 그것이 바로 백귀야행이었어요. 번역으로는 요괴대작전이라고 나오는데, 인간들에게 천지자연의 무서움을 보여주기 위해 너구리들이 온 힘을 다해 요술과 변신술을 부려 온갖 일본 신화와 동화속의 요괴들을 불러내어 밤거리를 배회하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것이죠. 그러면 인간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자연을 파괴하는 신도시 개발을 포기하지 않을까 생각한 거죠. 자본주의를 너무 우습게 본 겁니다. 너구리가 목숨까지 버려가며 만든 이 어마어마한 이벤트를 한 놀이공원에서 자신들의 광고였다고 선전하니까요. 결국 너구리들은 인간으로 변신한 채 본성을 버리고 자본주의에 순응하든가 아니면 인간이 버린 쓰레기를 먹는 처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맞아요. 이게 바로 고도자본주의죠. 순응하거나 전락하거나.

재호와 마리가 서대문에서 맥도날드를 먹으며 야행할 때, 그리고 그들 주변의 등장인물이 술에 취해 떠들고 부대낄 때, 떠오른 것은 너구리들의 백귀여행이었어요. 현실적인 시공간을 디테일하게 그렸지만 판타지의 이공간이 느껴진 것은 그래서일까요? 자본주의에 순응하지 못한 군상들이 펼치고 있는 하릴 없는 저항의 몸짓. 그러나 이미 그들은 알고 있죠. 이 모든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작품에 자주 나오는 해머링 맨 (출처 : 게티 이미지)

 

그래서 재호와 은혁이 정규직이 되길 염원하던 광화문의 해머링맨이 의미하는 것은 노동의 숭고함이랍니다. 노동이 가장 가치 없는 이 시대에 소원을 비는 대상이 해머링맨이라니요. 그래요, 어차피 순응해야 하는 살아갈 수 있다면 재호와 마리가 잘릴 위험이라도 느끼지 않는 것이 소원이 될 수 있는 거죠. 덕분일까요? 마침내 소원을 이루어서 상조회사에 합격합니다. 첫 장면에서 아르바이트하러 향하던 장례식장, 재호는 마리를 태우고 마지막 씬에서 또 스쿠터를 그쪽으로 돌립니다. 44년동안 맥도날드에서 일한 어느 할머니처럼 일하고 장례식장에서 일하고 싶다면서. 그 삶은 어떤 것일까요? 재호와 마리에게 삶은 죽음과 멀지 않아요. 그래서 누구도 심각한 표정을 짓지 않는 이 소설이 잔혹동화처럼 보입니다. 맞아요.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어요. 소원을 빈다는 것이 해머링맨 앞에서 평생 일이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하는 시대. 그래도 응원하고 싶네요. 재호와 마리의 삶을. 부디 상조회사에서 44년간 일하면서 장례식 인생을 만들 수 있기를, 그래서 벚꽃이 흐드러진 그곳에서 무사히 늙어 갈 수 있기를.

교보문고에 갈 일이 있으면 해머링 맨 앞에서 재호와 마리의 소원이 이뤄지기를 빌어 볼까 합니다.

임종체험 센터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오렌지를 들고 잘예식장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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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 - 제18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고요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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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낯선 이야기와 배경, 그래서 좋네요.
죽음과 20내 남녀의 밤의 질주, 그리고 맥도날드 순례라..... 뭔가 단어만으로 할 이야기가 줄줄 쏟아져 나오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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