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엽 브레이커 스토리코스모스 소설선 1
고요한 외 지음 / 스토리코스모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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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다. 문학의 죽음이라는 유령이.” 생각해보면 문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를 이야기하지 않은 시대는 거의 없었던 듯하다. 대중은 즉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고 엘리트는 고색창연하고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옛것만을 예술이라 생각하며 스스로 깨어있는 자라고 생각하는 자는 대중에게 가르침을 줘야 가치 있는 문학이라고 외친다. 그 주관에서 벗어난 문학은 늘 죽은 문학일 뿐이다. 문학이 살아 있던 시대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어떤 것일까? 뒤떨어진 문학은 죽고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문학이 태어나는 것 아닐까? 그러니 문학의 죽음이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말은 현재 어떤 문학 형식 하나가 도태되는 중이라는 말에 가깝다.

대중과 유리되어 자신들끼리 칭찬하고 감동하고 문화적 다양성이라고 외치는 일단의 유행이 광풍처럼 불었다. 대중은 이런 문단과 유리되어 자신이 원하는 글을 찾아 읽는 것뿐이다. 이런 현상을 가장 잘 풍자하는 단편이 이 소설집의 표제작인 전두엽 브레이커.

이 작품의 첫 문장을 보자. “아주 오래전에 소설은 죽었다.” 이렇게 시작한다. 신춘문예 낭인인 주인공은 웹소설로 한 달에 억 단위를 버는 작가를 사부로 모신다. 그 사부의 웹 판타지 연재 글은 대충 나는 존나 쎄다는 내용이다. 허성환이 풍자한 판타지는 현재의 히트 작품이 아니다. 오래전 양판소 판타지를 풍자한 <투명드래곤>이라는 소설을 소환해서 스토리에 맞게 구성한 것이다. <투명 드래곤>1화는 아래와 같다.

 

<"크아아아아"

 

드래곤중에서도 최강의 투명드래곤이 울부짓었다

투명드래곤은 졸라짱쎄서 드래곤중에서 최강이엇다

신이나 마족도 이겼따 다덤벼도 이겼따 투명드래곤은

새상에서 하나였다 어쨌든 걔가 울부짓었다

 

"으악 제기랄 도망가자"

 

발록들이 도망갔다 투명드래곤이 짱이었따

그래서 발록들은 도망간 것이다

 

꼐속

투명드래곤 제1화 전문(全文).>

 

허성환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자기 필력의 37%밖에 쓰지 않았다고 한다. 56% 이상 실력을 발휘하면 너무 쎄서 기성 작가들이 설 자리가 사라지기 때문이란다. 작품과 작가의 말까지 모두 기성 문학을 풍자하는 작품이다.

출판사가 이 작품을 표제작으로 삼은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식상한 문단에 식상한 소설이 판치는 것은 어쩌면 세상이 미쳤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미친 소설가가 새로운 소설을 써서 문학을 부활시키겠다는 의지로 자신의 실력을 37% 발휘하여 대춘 쓴 소설이 이 작품이다. 참고로 양판소 판타지를 풍자한 <투명 드래곤> 이후 괜찮은 웹소설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 중 몇몇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OTT로 해외로 뻗어나갔다. 이 풍자 소설이 한국 문학 자체를 그렇게 만들기를 고대해 본다.

 

고요한 작가의 <사람과 사람 사이>는 코로나와 국가 권력을 풍자한 희극이다. 말하자면 카푸카의 <심판>과 조지 오웰의 <1984>를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분위기와 섞은 후에 코로나 시기의 우리나라에 대입하여 희극으로 그린다면 딱 이런 작품이 나올 것이다. 부부관계를 코로나라는 이유로 막는 국가. 그런데 그 국가가 한 명의 개인으로 주인공 앞에 등장한다. “시민님, 제가 바로 국가입니다.”라는 대화로.

국가라는 시스템은 결국 인간이고 코로나라는 자연재해 앞에서는 시민을 구속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재해보다 인간인 시스템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더 멀게 만든다. 웃픈 블랙코미디다.

 

권재훈의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는 이 단편집 중 가장 순문학 단편에 가깝다. 갑자기 내린 폭우, 그리고 갑작스럽게 이별을 고하는 여자와 그러자 차와 여자를 버리고 떠나 버리는 남자, 그러나 말한 것과 말하여진 바는 사실 전혀 다른 것이었다. 소쉬르식으로 말하자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는 다르기 마련이고 그로 인해 소통은 우회되고 운명은 갈라진다. 하지만 둘 사이를 단절시킨 요인 중 하나인 폭우가 다시 그들을 재회시키고 빗소리는 조금 전과 같은 소리로 울리지만, 이번에는 전혀 다르게 들린다.

같은 시공간 속에 펼쳐진 두 대의 차와 두 커플, 그들은 같은 상황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 그들의 운명이 일 순 중첩되었다가 이내 멀어져간다따당따당 차를 두드리는 여운만을 남기고. 잘 짜인 구조를 가진 단편의 샘플을 보여 달라고 한다면 이 작품을 내밀고 싶다.

 

한때 문학이 세상을 바꿀 힘이 있다고 믿거나-예컨대 에밀 졸라-혹은 적어도 세상을 기록하는 기록자로서의 위상은 가져야 한다고-예컨대 발자크-주장하는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 문학에 그런 위상을 부여하겠다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면 시대착오적 캐릭터가 될 터이다. 그런데 김솔의 <걷는 여자, 걷는 남자>를 보면 적어도 작가는 기록자의 기록자는 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기세다. 이 책의 모든 단편 중 가장 관념적인 동시에 가장 사실적인-수많은 역사적 사상적 편린을 그대로 차용했다는 관점에서-작품이다. 얼마나 관념적인가 하면 여기 등장하는 캐릭터 그 누구도 개인으로서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다. 한 민족이나 한 국가를 대표하는 이데아로 존재할 뿐이다. 동시에 문장 대부분이 다른 작가, 혹은 다른 사상가의 사상을 빌려 표현된다. 예컨대 멕시코 남자가 국경을 떠나는 이유로 카프카가 변신의 문장을 소환한다. 심지어 이 작품의 제목마저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의 이족보행을 참고했다고 한다. 덕분에 어떤 독자에게는 난해할 듯하다. 그러나 조금만 찾아보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기존의 이야기를 이렇게 엮을 수도 있구나, 하는 찬탄이 터져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전혀 다른 맥락으로 인용을 활용하거나 전개 역시 예상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장르도 아니고 순문학도 아니고 기사도 아니며 설명문은 더욱 아니다. 김솔은 잘 벼린 칼로 기존 문학을 분해해서 다시 자기 작품으로 조립하는 패치 디자이너 같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운, 중독성 가득한 브랜드를 창시한 디자이너다.

 

<스토리 코스모스>가 추구하는 문학이 장르의 통섭이라면 김은우의 <당신의 선택이 간섭을 일으킬 때>가 어쩌면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닐까? 중반까지 여느 단편처럼 무리 없이 전개되다가 중반 이후 롤러코스터처럼 판타지와 SF의 세계로 미끄러지는 작품이니까. 게다가 작가는 상대성이론과 에셔의 그림을 참고했다고 한다. 어쩌면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 역시 김은우 작가의 애장서가 아니었을까? 이 작품은 에셔의 그림처럼 앞뒤로 이어지지만 모순된 결론을 향한다. 작가는 우리 인식의 불완전성과 동시에 우리 각자가 매일 내리는 판단이 우주에 일으키는 파문을 그리고 싶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매우 성공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도수영의 <R300>은 장르로서 SF 단편이다. 나우는 끊임없이 시스템의 보고서를 올린다. 그러나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고 답변하지 않는다. 메신저 KT27에 따르면 시스템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우는 자신의 일상을 멈추지 않고 어쩌다 만난 KT27과의 만남이 자기 삶의 역사에 기록될 모든 것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모두가 고립되고 기계와 생명공학이 탄생까지 좌우하는 시대가 된다면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접촉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단편은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하지만 라스트 신은 영화 <쇼생크 탈출>의 마지막 장면처럼 감성적이다.

 

박유경의 <여분의 사랑>을 읽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이 병들고 불편한 세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분사랑이니까. 이야기의 구조는 간단하다. 다희가 오랜 기간 연애한 우주와 헤어지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구조다. 스토리의 가장 기본이 무엇일까? “there and back”이다. , 떠났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물론 돌아올 때 주인공은 변화한다. 다희도 마찬가지다. 이미 상처만 주는 사랑,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는 깨달음, 그리고 그럼에도 사랑할 대상을 찾아서 돌아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그러니까 사랑이다. 그런데 왜 여분의 사랑일까? 갑작스럽게 둘 사이에 끼어든 펜션의 이상하고 불길한 주인이 말해준다. “요즘 같은 때엔 사람보다 (개가) 낫지. 병들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까.” 가장 병든 사람은 그 펜션 주인이다. 그러나 다희는 불길하고 악의에 찬 주인과 맞서지 못한다. 다만 다친 강아지를 구해서 돌아올 뿐이다. 어쩌면 그것이 다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일지도 모른다. 박유경이 하고자 하는 말은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그것이라도 하자. 그래서 피폐하고 병든 세상일지라도 조금의 여분을 남겨 두자. 사랑할 여분을.

 

이상욱의 <스탠다드 맨>SF 중에서도 일종의 사이버펑크 물이다. 그런데 이상욱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사이버펑크 스토리를 고안했다. 사람의 정신계를 육체적 기관처럼 분리 통합한다면 그 정신계를 타인과 그대로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지우가 스탠다드 맨이라 불리는 것은 그의 정신을 불특정 다수의 후예와 공유했고 그의 정신적 능력이 그대로 이식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정이다. 아마도 이상욱이 이토록 대담한 설정을 도입한 것은 이 작품을 사이버펑크라 생각하지 않고 인문학적 SF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박지우가 연구한 집합적 기억은 칼 융의 집단 무의식과 유사하다. 기억이나 정신 활동을 물질적 단계까지 환원시킨 것이 차이랄까. 작가의 말을 봐도 세대별 가치관의 기원과 차이가 발상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발상을 장르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가는 것을 작법의 중심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래서 일견 대담하고 일견 장르의 규칙과 지식을 벗어난 이 작품이 탄생했음이 틀림없다. 누구나 이러한 자유를 꿈꾸지만, 그것을 작품으로 만드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단편이 소설집에 자리 잡는 것이 마땅해 보인다.

 

정무늬의 <그래도 되는 사이>는 트렌디하다. 캐릭터가 유튜브 크리에이터라는 점, 그리고 소재가 성소수자라는 면, 심지어 작가가 웹소설과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겸임하고 있다는 요소까지 감안하면 이 작품은 작품 내외적으로 모두 트렌디하다. 서사도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오가며 균형을 잡고 갈등도 유머러스하면서 감성적이다. 그래서 모든 세대가 각자의 관점에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언젠가 정무늬작가의 떡볶이 론을 읽은 적이 있다. 잘 쓸 수 있고 수준 높게 쓸 수도 있지만 독자가 원하는 것을 쓸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작가의 지론이었다. 이 작품은 그 지론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기존 문단과의 거리감도 없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격이다. 전업 작가를 꿈꾼다면 이 단편을 꼭 읽어 봤으면 좋겠다.

 

팔색조라는 말이 있다. 이 소설집이 그렇다. 한 권의 소설에 담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장르가 다 담겨 있다. 그러면서 한편 한편이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담론을 담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문학과 소설의 정체성이 완전히 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소설집은 그 변화를 촉진하는 매개체가 되길 바라고 있는 것 같다. 독자로서 그 변화를 환영한다. 그리고 더 많은 매개체가 쏟아져 나오기를 희망해 본다.

네 맞습니다. 시민님. 깜빡 조는 바람에 제 정체가 탄로 났군요. 제가 바로 국가입니다. - 고요한, <사람과 사람 사이> 중에서 - P28

어쩌면 그 순간 빨려 들어간 다른 시공간, 다른 우주가 바로 이 소설이었는지도 모른다. - 권재훈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 작가의 말 중에서 - P64

여자는 걷는다. 걷는 동안 존재는 불확실해지므로 공포와 회한으로부터 안전하다. - 김솔, <걷는 여자> 중에서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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